이제 5박 6일의 마지막 일정이다. 이제까지 아무 사고 없이 여행이 진행된 것이 다행스럽고 아이들도 어제 산행을 하였지만 오늘 아침 크게 지친 것 같지 않아 일정에 맞춰 출발할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제법 굵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침밥을 먹고 찜질방 사장님의 배웅을 뒤로 익산으로 출발한다. 찜질방 사장님 부부는 우리들이 묵은 2박 3일 동안 성심성의껏 도와 주었다. 내소사 등반 할 때도 차량을 직접 운전하여 아이들이 편한히 산행을 할 수 있도록 하였고, 우리가 있는 동안 실내에는 손님도 받지 않고 아이들이 마음 놓고 쉬고 놀 수 있게 해 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다.

↑비가 와서 마지막 코스인 익산에 조금 늦게 도착하였다. 맨 처음 간 곳은 미륵사지9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물론 새로 건조된 탑이다. 고증에 의하여 비교적 정확하게 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낯선 느낌이다. 세월의 무게가 없어 흡사 플라스틱 모조품 같은 인상이다. 원래 동탑과 서탑 2기가 있었는데 동탑은 완전이 와해되었고 서탑은 지금 복원 중이다. 이 탑은 복원된 탑이 아니고 새로 조성한 탑으로 동탑 자리에 세웠다. 탑 뒤 구름 사이로 보이는 산이 용화산이다.

↑잠시 비가 오는 가운데 미륵사지에 대한 설명을 한다. 아래는 삼국유사 무왕조의 기록을 요약한 것이다.
무왕이 왕비인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에 있는 사자사로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 큰 못가에 이르자 물속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다. 이에 선화공주는 왕에게 이곳에 절을 세우자고 간청을 하고, 무왕은 지명법사의 법력을 빌어 하룻밤 만에 산을 헐어 못을 메우고 그 위에 절을 짓는다. 미륵삼존이 현신한 것을 기려서 금당과 탑과 회랑을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하였으며, 이때 선화공주의 아버지인 신라 진평왕은 기술자를 보내 절을 짓는 것을 도왔다.

↑탑을 배경으로 정민이가 포즈를 취했다. 저 탑처럼 굳건하게 자라야지.

↑석탑 1층의 기둥을 둘러보는 아이들.

↑기둥 사이로 20명이 다 들어가니 크기는 크다.
↑동탑에서 본 서탑 복원 현장. 좀 답답한 느낌이 든다. 경주 불국사 석가탑 해체 복원 작업은 투명 막을 설치하여 안을 다 볼 수 있게 하였는데 여기는 꽉 막혀 있어서 복원 사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들어가 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국보 11호인 미륵사지9층석탑 서탑 복원 현장이다. 아직 초석 2개만 놓여있고 사업에 진전이 없다. 서탑은 2001년 해체하여 2007년에 완공한 계획으로 작업을 시작하였으나 다시 수정되어 2016년 까지 복원 작업을 마무리짓기로 하였다. 그러나 2016년까지 완공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서탑 복원 현장에서 본 동탑 당간지주. 저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미륵사는 조선시대까지 존속을 하다가 폐사가 되었다. 주위에 사찰의 부재들이 정리되어 있다.

↑미륵사지유물전시관에 전시된 미륵사지9층석탑(서탑)의 현재 모습과 복원 후의 모습. 이 미륵사지석탑은 현존하는 석탑 중 가장 오래 된 탑이다. 지금 남아 있는 서탑도 해체 직전까지 가서 일본인들이 훼손된 부분을 시멘트로 발라 놓았다. 현재 진행 중인 복원 사업은 시멘트를 제거하고 남아 있는 6층을 보강하여 원래의 형태에 근접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새로 석재를 깎아서 올려 놓아야 할 판이다. 얼마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할 지 의문이다.

↑2009년 서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사리를 모신 금동제 항아리가 발견되었다.(외호-왼쪽) 이 항아리 안에 다시 작은 금제 항아리가 있었고(내호-오른쪽) 그 속에 사리가 보관되어 있었다. 이 금동제 사리외호와 금제 사리내호는 백제 공예의 극치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뒤에서 촬영한 금동제 사리외호. 오랜 시간의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가 없어 얼룩이 남아 있지만 그것이 이 금동제 항아리의 아름다움에 흠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세월을 견뎌낸 흔적들이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금제 사리 봉안기. 석탑 안에 사리를 봉안하면서 그 내역을 기록한 글이다. 이 글에 의하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세워졌으며 무왕의 왕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무왕의 왕비는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라고 나온다. 이 사리봉안기로 말미암아 무왕과 왕비에 대한 거센 논쟁이 시작되었지만 아직 명확한 결론이 나지는 못했다.

↑연합뉴스에 보도된 발견 당시의 모습. 금제사리봉안기 앞에 사리를 담은 금동제 항아리가 있다. 저 항아리를 X-ray 로 투사한 결과 그 안에 다시 금제 항아리가 있고 그 금제 항아리 안에 부처의 진신사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1400년의 시간의 간격을 뛰어 넘어 우리 눈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백제의 유물. 이 사리호는 능산리 금동대향로와 함께 뛰어난 백제의 공예기술을 여지 없이 보여 준다.

↑미륵사 완성 상상도. 두개의 석탑 사이에 큰 목탑이 서 있다. 저 목탑이 황룡사9층목탑의 원형이 아닐까는 하는 학설이 대두된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 황룡사9층목탑은 백제의 장인인 아비지의 감독하에 세웠졌다고 한다.

↑미륵사 금당 앞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9층목탑 미니어처. 화려하면서도 장엄하다. 미니어처는 실물과 같은 비례로 만든 모형물을 말한다.

↑정민이는 무엇을 소원하고 있나?

↑정민이와 아빠가 소원지를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다.

↑"경주 풍물학교에서 왔다 감. 그리고 복원을 꼭 하기를. 화이팅." 정민이의 소원지 내용이다.

↑유물전시관 도서관에서


↑체험공방. 석탑 쌓기

↑기와 얹어 보기 체험 과정

↑전시관을 나서는데 여전히 가는 빗줄기가 내리고 있다.

↑비를 아랑곳하지 않는 진욱이


↑점심을 먹고 보석박물관에 들르다.

↑찬란한 보석들이 눈을 황홀하게 한다.

↑둥근 황수정

↑여러 가지 옥과 수정


↑보석 채석 과정. 값진 것을 일구어내는 데는 피와 땀이 필요하다.

↑보석 골라 내는 작업 과정을 보여 준다.

↑백제 미륵사지9층석탑을 보석 공예로 재현하다.

↑미륵사지9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외호와 내호를 재현하였다.

↑현란한 무늬의 사리 내호. 익산은 예로부터 보석 세공 기술이 발달하였다.

↑신라 서봉총의 금관을 멀리 이곳 익산에서 볼 수 있었다. 보물 339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옆에 전시된 나주 신촌리 금동관. 국보 295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제 금관의 양식인지 마한의 금관 양식인지 아직 논쟁 중에 있다. 확실한 것은 신라의 금관과는 모양이 다르다는 점이다.

↑장미수정으로 만든 왕궁리5층석탑 모형.

↑역시 장미수정으로 만든 미륵사지9층석탑. 전통은 항상 새로이 창조되어야 그 생명을 지닐 수 있다.

↑망새. 망새는 지붕 용마루 양쪽 끝을 장식하는 기와를 말한다. 치미라고도 하는데 이는 솔개 혹은 수리부엉이의 꼬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솔개의 꼬리보다는 봉황의 꼬리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 이는 상서로운 새인 봉황의 꼬리가 액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온다고 믿은 데서 유래한 것이로 보인다.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둘이 공예품 앞에서 마주 서서 사진을 찍는다.

↑지수가 끼어 들다. 아이들의 얼굴이 보석처럼 빛난다.

↑익산 입점리 고분에서 발견된 금동신발이 화려한 빛깔과 모양으로 다시 태어났다.

↑보석으로 만든 일월오봉산도.(일월오봉도 혹은 일월오악도 일월곤륜도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보석 공예품은 익산 미륵사 중원 9층 목탑을 소재로 하였다. 목탑 자체로 화려한데 보석으로 제작하였으니 휘황찬란하기가 비길 데 없다.

↑여러 가지 보석 원석. 이 원석들을 가공하면 보석이 된다. 같은 원석이라도 어떻게 갈고 다듬는가에 따라 그 가치는 천차만별이 될 것이다. 흡사 사람과도 같다. 어떻게 자신을 갈고 닦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는 달라지는 법이다.

↑보석박물관을 둘러보고 그 옆에 있는 화석전시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화석전시관 입구에 있는 티라노사우루스 화석. 티라노사우루스라는 말은 폭군 도마뱀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가장 거대하고 사나운 육식공룡이다.

↑화석전시관 내부.

↑티라노사우루스 모형 앞에 아이들이 모여 선다. 영화 '쥬라기의 공원'이 나온 이후로 아이들이 공룡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갖고 있다.

↑야외전시관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티라노사우루스의 커다란 입 모형이 출입구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브라키오사우루스 모형을 바라보며 야외전시장을 한바퀴 돌아본다.

↑새장 속의 박새. 어릴 때 흔히 보던 새들도 개발이 되면서 이제는 환경 오염으로 잘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러다가 모든 새들이나 동물들을 조류원이나 동물원에서만 볼 수 있는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닌가하는 암울한 생각이 든다.


↑수세미터널. 수세미 냄새가 맑고 시원하여 머릿속 찌꺼기가 다 씻겨 나가는 듯하다.

↑익룡 어미와 새끼

↑진욱이의 장난기가 발동하였다.

↑브라키오사우루스 모형이 있는 곳으로 간다. 브라키오사우루스는 가장 큰 초식공룡 중의 하나다. 몸무게가 무려 80톤이나 나간다고 한다. 앞발이 유난히 길어서 브라키오사우루스란 이름이 붙었다. 브라키오사우루스는 '팔이 난 도마뱀'이란 뜻이다.

↑시간이 약간 늦었지만 이번 여행의 마무리는 반드시 왕궁리오층석탑에서 해야할 것 같아서 좀 무리한 일정을 진행한다.

↑오층석탑을 보면서 왕궁리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한다. 여기에는 왕궁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절터를 발굴하여 보니 절터 이전에 왕궁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백제 29대 임금인 무왕과 익산은 아주 관계가 깊다. 미륵사도 무왕이 건립하였고 이 왕궁리 궁궐도 무왕이 지었다.

↑시간이 촉박하지만 왕궁리 유적 전시관으로 들어선다. 여기서 아이들에게 꼭 보여 주기로 약속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다. 백제시대의 화장실. 궁궐터를 발굴하면서 그 당시에 이미 화장실이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폭스가 쓴 '풍속의 역사'에 의하면 루이 14세의 파리 베르사이유궁전에도 화장실이 없었다. 비가 오면 분뇨가 넘쳐서 귀족들이 굽이 높은 구두를 신은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서로 화장실에 앉아 보려고 난리를 친다.

↑진욱이가 손에 잡고 있는 저 막대기의 용도가 무었일까?

↑왕궁터에서 출토된 기와 암막새와 수막새. 수막새에는 연꽃무늬와 국화문이 아주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백제의 건축 기술이 아주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는 유물이다.

↑왕궁 상상도.
왕궁리 유적 전시관을 둘러보고 서둘러 차에 오른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호남고속도로를 경유하여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경주에 도착하였다. 88올림픽도로를 믿고 아이들을 태워 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경주에 도착하니 7시가 넘었다. 더구나 굵은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학부모님들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계셨다. 출발하던 때가 어제 같은데 5박 6일이 순식간에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