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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소현세자에 대하여 알아보자
성은 이(李), 이름은 왕이며, 시호는 소현(昭顯)이다.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仁祖, 재위 1623~1649)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한준겸(韓浚謙)의 딸인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이다. 1627년(인조5) 강석기(姜碩期)의 딸인 민회빈(愍懷嬪) 강씨와 혼인하여 경선군(慶善君) 이석철(李石鐵, 1636〜1648), 경완군(慶完君) 이석린(李石磷, 1640〜1648), 경안군(慶安君) 이석견(李石堅, 1644〜1665), 경숙군주(慶淑郡主, 1637〜1655), 경녕군주(慶寧郡主, 1642〜1682), 경순군주(慶順郡主, 1643〜1654) 등 3남 3녀를 두었다.
1646년 인조는 세자빈 강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조선 역사상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죽이는 최초의 참극이 일어난 것이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 말도 있지만, 심양에서의 귀국 이후 두 사람의 갈등 관계는 끝이 보이지를 않았고 결국 며느리를 죽음으로 몰고갔다.
1627년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에게 시집을 와서 한때는 인조의 사랑을 흠뻑 받았던 세자빈이 결국은 시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한 까닭은 무엇일까?
소현세자의 부인 세자빈 강씨는 흔히 '강빈'(姜嬪, 1611~1646)’이라 칭해진다. 강석기(姜碩期, 1580~1643)의 딸로 1627년 12월 소현세자와 가례를 거행하고 세자빈이 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세자빈이 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원래 세자빈으로 간택된 여인은 윤의립(尹毅立, 1568~1643)의 딸이었다. 그러나 윤의립의 서족(庶族) 조카 윤인발이 1624년 이괄의 난에 가담하여 처형당한 것을 이유로 김자점 등 대신들이 강하게 반대하면서, 간택은 없던 일이 되었다. 결국 세자빈을 재간택하게 되었고, 9월 29일 서인계 명문가인 강석기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서인 세력은 ‘무실국혼(無失國婚: 국혼을 잃지 말자)’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왕실 혼사를 무엇보다 중시하였는데, 소현세자의 혼례식이 첫 케이스가 된 것이었다. 조선 후기 왕비를 배출한 가문이 대부분 서인인 것도 인조반정 이후의 이러한 정치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오늘날 혼례식에 해당하는 친영(親迎) 의식은 1627년 12월 4일 행해졌다. 소현세자가 별궁인 태평관(太平館)에 가서 세자빈 수업을 받고 있던 강빈을 경덕궁(후의 경희궁) 숭정전으로 모셔온 것이다. 소현세자와 강빈의 혼례식은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로 정리되었는데, 의궤의 말미에는 혼례식의 모습을 담은 반차도가 8면에 걸쳐 실려 있다.
1627년 12월 17세의 나이로 한 살 연하의 세자에게 시집을 온 강빈. 그러나 그녀의 세자빈 시절은 결코 화려하지만은 않았다. 1627년 1월의 정묘호란으로 조선은 후금의 침입과 그 여파에 시달렸다. 비록 형제의 관계를 맺고 물러갔지만 후금의 위협은 늘 조선을 괴롭혔다. 급기야 1636년 12월 15일, 후금에서 청나라로 국호를 바꾼 청 태종은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대대적으로 침입해왔다. 병자호란의 시작이었다.
병자호란이 발발한 직후 강빈은 원손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을 가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1637년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되게 된다.
강화도로 가는 피난길이 끊어져 남한산성에 피난을 온 인조는 50일 가량을 버티었지만, 결국에는 최명길 등 주화파(主和派)의 건의를 받아들여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항복의 조건으로 삼전도에는 ‘대청황제공덕비(일명 삼전도비)’가 세워졌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인질로 청나라에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화려한 왕실 생활이 보장되었을 것 같았던 강빈의 운명도 격동의 역사와 더불어 먼 이국땅에서 인질 생활을 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1637년 삼전도 굴욕으로 상징되는 항복의 조건으로 소현세자는 강빈과 함께 인질의 신분이 되어 심양으로 향했다.
그러나 심양에서의 8년 간의 생활은 세자와 세자빈의 의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청나라를 과거의 야만국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정치ㆍ문화의 강국임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국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간 것이다.
부왕 인조가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 의식을 행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던 소현세자로서는 초기에는 반청 감정을 강하게 표시하였지만, 점차 생각이 바뀌었다.
1637년 4월 10일 소현세자는 심양에 도착하여 조선 사신을 접대하는 객관(客館)인 동관에 머무르다가, 5월 7일 황제가 세자를 위해 새로 지은 관소인 신관(新館), 즉 심양관으로 옮겼고, 이곳에서 8년을 머물렀다.
심양관에는 세자와 봉림대군 부부를 비롯하여 배종신(陪從臣: 높은 사람을 모시기 위해 따라간 신하), 수행 원역(員役) 및 부속된 종인(從人)들까지 포함하여 500명이 넘는 상주 인원이 있었다. 세자는 이곳에서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을 모집하여 땅을 경작했고, 무역 활동을 하기도 했다. 강빈도 적극적으로 세자를 도왔다.
그러나 [인조실록]에는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과 같았으므로, 왕(인조)이 그 사실을 듣고 불만스러워 하였다’고 기록했듯이, 인조는 세자와 세자빈의 이러한 심양 생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 강하였다.
인조와 강빈의 갈등은 1643년 강빈의 부친 강석기의 사망으로 격화되었다.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들은 강빈은 상을 치르기 위해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인조는 며느리가 친정에 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인조의 가혹한 조처에 대해 영의정 심열, 좌의정 김자점, 우의정 이경여가 “세자빈이 이역(異域)에서 나그네로 붙어 있다가 뜻밖에 어버이의 상을 만났으니 슬픈 마음으로 궤연(几筵)에 임하고 또 모친을 살펴보는 것이 인정이나 예의로 보아 폐할 수 없는 일인데, 돌아갈 기일은 임박하고 어버이를 살펴보았다는 말은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세상에 어찌 8년 동안 서로 막혀 있다가 천 리 거리에서 귀국하여 지척에 계신 어버이를 만나보지 않고 그냥 되돌아가는 이치가 있겠습니까?”라며 인조에게 선처를 바랐다. 그러나 인조는 “민심이 안정되지 않은 것이 걱정되어 법 밖의 예의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면서 냉정하게 신하들의 요청마저 거절했다. 이 무렵 인조는 소현세자뿐만 아니라 며느리에게도 강한 불신과 적대감을 지니고 있었음이 확실해 보인다.
심양 생활을 통하여 세자와 세자빈은 무엇보다 청나라의 놀라운 발전에 큰 자극을 받았다. 중국 대륙을 통일한 후 신생대국으로 거침없이 뻗어가던 청나라의 군사적인 측면과 함께 문화대국으로 성장해가는 잠재력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청나라는 아담 샬(Adam Schall, 1591~1666)과 같은 선교사를 통하여 천주교뿐만 아니라 화포, 망원경과 같은 서양의 근대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소현세자는 아담 샬과의 만남을 통해 조선에도 이러한 서구의 과학 문명이 필요함을 절감하였으며, 서구 문명 수용에 개방적인 청나라 조정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그는 북경 남천주당에 머물고 있던 아담 샬과 자주 만나 새로운 서양 문명과 천주교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면서 조선은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가고 있었다. 소현세자가 귀국하면서 화포와 천리경 등을 가져온 것도 이러한 의식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에서였다.
1644년 명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중원을 완전히 장악한 청나라는 이제 소현세자의 귀국을 허락했다. 그러나 1645년 소현세자가 8년 만의 오랜 인질 생활을 끝내고 조선에 돌아왔을 때, 그의 귀국을 달갑게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소현세자에 대한 청나라의 호의적인 입장과 청나라의 세자에 대한 신뢰는 인조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에게는 결코 만족스럽지 않았다. 무엇보다 장성한 소현세자는 이제 인조의 아들이 아니라 차기 국왕 후보였고, 소현세자가 왕이 되면 인조와 서인 정권이 추진한 숭명반청(崇明反淸)의 이념이 퇴색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조
정의 관료들 대부분은 남한산성의 치욕을 안겨준 청나라를 현실의 군사대국, 문화대국 청으로 보지 않고 여전히 오랑캐로 인식하는 분위기였고, 따라서 청의 과학기술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세자는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인조는 무엇보다 청이 자신을 물러나게 하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경계하였다. 정통으로 왕위에 오르지 않고 쿠테타로 집권한 왕으로서 본능적으로 왕위 유지에 집착하면서 아들까지도 경쟁자로 보았던 것은 아닐까?
1645년 4월 26일, 소현세자는 귀국 후 두 달 만에 창경궁 환경당에서 사망하였다. 실록의 기록에서 조차 독살 의혹이 제기된 의문의 죽음이었다. 독살이건 그렇지 않았던 간에 인조 측이 소현세자의 죽음을 호재로 활용한 측면은 분명하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쳐두고 서둘러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이제 최대의 정적이 된 며느리 강빈을 사사(賜死)시킨 것이 이러한 점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소현세자와 강빈이 귀국했을 때 인조와 조정의 대신들은 지나치게 냉담했고, 그 후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왕통도 그의 아들이 아닌, 동생인 봉림대군에게 넘어갔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인조와 소현세자 사이의 갈등의 골이 무척이나 깊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야사의 기록에는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물건을 가져와 인조에게 내놓자 인조가 벼루를 던져 세자가 죽었다’고 할 정도로 이들 부자는 정적에 가까운 관계였다.
소현세자는 청의 문물 수용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면 이러한 부분을 적극 실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세자와 함께 심양에 갔던 강빈은 그곳에서 많은 재물을 모으는 등 나름대로 새 시대에 눈뜬 세자빈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인조는 이러한 며느리를 못마땅해했다. 심지어 자신의 왕위를 노린다고까지 견제했다. 다음의 기록은 인조의 며느리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 [갑신년 봄에 청나라 사람이 소현세자와 빈을 보내주었는데, 그때 내간에서 혹 말하기를 “강빈이 은밀히 청나라 사람과 도모하여 장차 왕위를 교체하는 조처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를 듣고 매우 미워하였다. 그러나 외부 사람은 모르고 있었다.]
미리 홍금적의(紅錦翟衣: 붉은 비단으로 만든 왕후의 옷)를 만들어 놓고 내전(內殿)의 칭호를 외람되이 사용하였으며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시종들이 세자를 동전(東殿)으로 불렀고 강빈을 빈전(嬪殿)으로 불렀는데, 대개 저들이 보고 듣게 하기 위한 것이었지 세자와 빈이 스스로 부른 것은 아니었다.
진신(搢紳)들 사이에서도 간혹 이렇게 부르기도 하였다.] 지난해 가을에 매우 가까운 곳에 와서 분한 마음으로 인해 시끄럽게 성내는가 하면 사람을 보내 문안하는 예까지도 폐한 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다. 이런 짓도 하는데 어떤 짓인들 못하겠는가. 이것으로 미루어 헤아려본다면 흉한 물건을 파묻고 독을 넣은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예로부터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나 없었겠는가마는 그 흉악함이 이 역적처럼 극심한 자는 없었다. 군부(君父)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천지의 사이에서 하루도 목숨을 부지하게 할 수 없으니, 해당 부서로 하여금 율문을 상고해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라.[인조실록] 인조 24년(1646년) 2월 3일
1645년 8년 만에 귀국한 후 두 달 만에 남편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녀의 아들이 왕이 되지 못한 현실에 부닥치자 강빈은 격렬히 시아버지 인조에게 저항했다. 세자빈의 오라비들인 강문성과 강문명까지 곤장을 맞고 죽음을 당하자 강빈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인조의 침실로 달려가 하소연을 늘어놓으며 통곡하는가 하면, 맏며느리로서 국왕에게 올리는 조석 문안도 한때 중지해버렸다. 이제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정적이 되어버렸다. 분노한 인조는 강씨를 유폐시켰고, 궁중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갈등의 끝은 결국 왕세자빈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갈등의 골이 깊었던 상황이 계속되던 중인 1646년(인조 24) 1월 3일, 인조의 수라상에 오른 전복 구이에 독이 든 것이 발견되었다.
강빈의 나인 5명과 수라간 나인 3인을 문초한 끝에 이것을 강빈이 사주했다는 진술이 나왔다. 결국 강빈은 3월 15일 시아버지에게 사약을 받고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제주도로 유배를 간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두 명도 이곳에서 풍토병에 걸려 사망하는 등 소현세자 일가는 그야말로 참혹한 화를 당했다.
[인조실록]은 강빈의 죽음을 기록하면서, 그녀의 강한 기질이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소현세자빈 강씨를 폐출하여 옛날의 집에서 사사(賜死)하고 교명 죽책(敎命竹冊), 인(印), 장복(章服) 등을 거두어 불태웠다.
의금부 도사 오이규가 덮개가 있는 검은 가마로 강씨를 싣고 선인문을 통해 나가니, 길 곁에서 바라보는 이들이 담장처럼 둘러섰고 남녀노소가 분주히 오가며 한탄하였다. 강씨는 성격이 거셌는데, 끝내 불순한 행실로 상의 뜻을 거슬러오다가 드디어 사사되기에 이르렀다. 그
러나 그 죄악이 아직 밝게 드러나지 않았는데 단지 추측만을 가지고서 법을 집행하였기 때문에 안팎의 민심이 수긍하지 않고 모두 조숙의(趙淑儀)에게 죄를 돌렸다.[인조실록], 인조 24년(1646년) 3월 15일
위의 기록에서도 보듯이 강빈의 죽음에는 ‘추측만을 가지고 법을 집행하였다’거나 인조의 후궁인 조숙의(귀인 조씨, ?~1652)에게 혐의가 있음을 시사하는 등 당시에도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었다.
강빈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으니 신원(伸寃)을 해야 한다는 점은 효종대에 이르러 정국의 이슈로 떠올랐다.
효종 즉위부터 강빈에 대한 신원 문제와 강빈 옥사의 의혹이 제기되자, 효종은 강빈의 옥사를 재론하는 자는 역률(逆律)로 다스리겠다는 특별 하교까지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쉽게 열어서는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힌 인물은 김홍욱(金弘郁, 1602~1654)이었다. 1654년(효종 7) 황해도관찰사로 있던 김홍옥은 강빈의 신원과 소현세자 셋째 아들의 석방을 요청하는 직언을 하여 조정에 파문을 일으켰다. 격분한 효종은 그를 곤장을 때려 죽게 했고, 이렇게 사건 자체는 일단락되었다. 김홍욱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7대조로 조선 후기 경주 김씨 가문이 절의(節義)의 집안으로 자리를 잡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후로도 강빈의 옥사를 둘러싼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고, 1718년(숙종 44) 강빈은 마침내 신원되기에 이르렀다. [숙종실록] 1718년 4월 17일에는 “왕이 명하여 2품 이상을 빈청(賓廳)에 불러 의논하게 하여 소현세자빈 강씨의 시호를 ‘민회(愍懷)’라고 정하였는데,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그가 지위를 잃고 죽은 것을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에서 취한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같은 해 윤 8월에 숙종은 민회빈 강씨의 총명함과 덕을 칭송하며 제문을 지어 원혼을 위로하였다. 또한 민회빈 강씨의 아버지 강석기도 관작(官爵)이 복위되었으며 그의 형제들도 함께 신원되었다. 강빈의 묘소는 현재 광명시에 소재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민회빈 묘로 불렸으나 1903년(고종 40) 영회원(永懷園)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심양에서 청의 신문물을 보며 북학(北學)의 기운을 조선에 심으려 했던 소현세자와 이어진 강빈의 죽음, 그리고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한 역사. 이것은 조선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기를 갖는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사상적으로 북벌과 북학의 갈림길에 선 시기였다.
그 갈림길에서 북학의 의지가 컸던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봉림대군이 즉위하면서 청을 물리쳐야 한다는 ‘북벌(北伐)’이 국시(國是)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소현세자와 강빈이 심양의 인질 생활 속에서 습득하고 추구했던 새로운 기술과 문명의 수용을 통한 부강한 조선 만들기의 꿈은 이들의 죽음과 함께 역사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