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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월산초등학교총동창회 원문보기 글쓴이: 23회 이상율
府 北 面
★ 부북면의 지세와 연혁
밀양(密陽)의 주산(主山)인 화악산(華嶽山)이 면( 面)의 북쪽에 위치(位置)하여동( 東)으로 지맥(支脈)을 뻗어 동봉(東峯)이 솟아 있고 그남( 南)으로 대산(大山)(위양(位良) 뒷산)과 도대산(棹臺山)(퇴로(退老) 뒷산)이 겹으로 둘려 있으며 다시 동으로 뻗은 산줄기는 상동면(上東面)과 경계(境界)를 이루며, 긴 분수령(分水嶺)이 되어 말티고개에서 남동(南東)으로 꾸부러져 그 중간에 산형(山形)이 잘 갖추어진 옥교산(玉轎山)을 솟게 하고,다시 그 줄기가 뻗어 추화산(推火山)에까지 연( 連)해 있다. 그리고 한편 화악서봉(華嶽西峯)의 줄기가 남서(南西)쪽으로 뻗어 긴 등성이를 이루면서 형제봉(兄弟峯)(대항(大項) 뒷산)고암산(高巖山),우령산(牛齡山)(일명(一名) 기산(箕山))을 거쳐 종남산(終南山)에 이르고 있는데, 이 등성이의 분수령을 경계하여 청도(淸道), 무안(武安), 초동(初同), 상남면(上南面) 등과 접하고 있다.동( 東),북( 北),서( 西)로 높고 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다만 남( 南)으로만 넓직하게 원야(原野)가 트여진, 한 눈으로도 둘러 볼 수있는 짜임새 있는 지형(地形)이라고 할 수 있다.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의 치소(治所)인 읍성(邑城)의 북쪽에 있었던 곳이어서 면( 面)의 명칭(名稱)이 된 것이다. 그리고 밀주구지(密州舊誌)에 의하면 본면(本面)의 한 부락인 운전리(雲田里)가 밀산(密山)의 구지(舊址)라고 전해 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밀산(密山)이라는 군명(郡名)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나오지만 뚜렷이 어느 시대의 정식 명칭인지는 알 수 없다.다만 이런 점 (點) 등(等)으로 미루어 옛부터 부내(府內)와 밀접한 관계(關係)에 있었던 곳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 화악산(華嶽山)
밀양(密陽)의 진산(鎭山)이다. 현풍(玄風) 비슬산(琵瑟山)에서 주맥(主脈)이 남으로 달려, 청도(淸道), 밀양(密陽)의 경계상(境界上)에 이르러 웅대(雄大)한 태산(泰山)의 자세(姿勢)로 나타났다. 산중에는 천암만학(千岩萬壑) 연하굴택(煙霞窟宅)이 장려(壯麗)한 경관(景觀)을 이루고 있다. 주봉(主峯)(문월대(聞月臺))의 높이는 999m 정도 높이가 주봉과 거의 비슷한 또 한 봉우리(선장봉:仙掌峯)가 동서로 나란히 솟아 있고 그 등성이가 황소의 등을 방불하게 하며, 두 봉우리의 중간쯤에서 남쪽으로 또한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이를 속칭(俗稱) '작은 화악산(華嶽山)'(720m)이라고 한다. '화악(華嶽)'이란 이름은 이 세 개의 봉우리의 형상이 중국의 오악(五嶽)의 하나인 서악(西嶽), 즉 화악(華嶽)의 삼봉(三峯)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일명 '둔덕산(屯德山)'이라고도 하는데 산의 생김새가 기발(奇拔) 초절한 것이 아니고 풍원장중(豊原莊重)하여 아주 덕성(德性)스럽게 보이기 때문에 덕기(德氣)가 둔취(屯聚)되어 있다는 뜻에서 둔덕산(屯德山)이라고 했다는 설명이 있다.
1. 사포리
종남산(終南山) 주능(主稜)인 월현산(月峴山) 왕자봉(王子峯)(삼태봉(三台峯))에서 뻗어 내려진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거기에서 파생되어 마암(馬岩), 동암(東岩), 신당(新唐), 전포(前浦) 등 4개 부락으로 되어 있다. 마을 앞에 우도(牛島), 마암연(馬岩淵), 병천(屛川) 등이 있어 산을 등으로 하는 포지(浦地)에 속하였으며, 옛부터 전해 오기를 군내(郡內)에서 포지(浦地)로서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히고 있다.즉, 일 안태(一安台), 이 청룡(二靑龍), 삼 사포(三沙浦)가 그것이다. 신라시대에 향부곡(鄕部曲)이 설치되면서 신포향(薪浦鄕)으로 불려졌는데, 신(薪)은 '섶' 신자로 읽힌다. 이 섶이 삽으로 전음(傳音)되어 어느 사이에 삽포, 또는 삽개로 변했다고 한다. 그래서 굳이 '가래 삽자(鈒字)' 를 인용하여 이명(里名)으로 한 까닭은 이곳 지세와 지형이 흡사 가래 모양이라고 하여 붙여졌는데, 즉 남천강의 강 굽이는 가래의 끌쇠에 비할 수 있고 삼문동(三門洞)의 땅 모양은 가래의 원(元)삽 같으며, 가곡동(駕谷洞)은 가래의 자루로 비할 수 있으며, 용평(龍平) 앞섬과 사포 앞섬은 가래의 양쪽 고리에 비유해 볼 수 있다고 한다. 지금은 시가지도 확장되고 남천강(南川江)의 치수공사(治水工事)로 제방(堤防)이 축조(築造)되어 옛 모습을 회상하기 어려워졌다.
동중(洞中)에 둔옹정(遁翁亭), 모렴정(慕濂亭), 고취정(孤翠亭) 등의 정각(亭閣)과 안씨의장비(安氏義庄碑)는 수백년을 세거(世居)한 광주(廣州) 안씨(安氏)의 생활의 자취이다. 마을 서북쪽 들 가운데 칠성암(七星岩)이라고 불려지는 바위돌들이 산재(散在)해 있는데 왜 칠성(七星)이라고 하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그 바위들은 선사시대의 유적인 지석묘군(支石墓群)(고인돌)으로 밝혀졌다. 지금은 많이 없어지고 몇 개만을 볼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선사시대부터의 취락지(聚落地)였음을 추측(推測)케 한다.
○ 방아동고개(방하령(方下嶺). 일명(一名) 영현(鈴峴))
사포(沙浦)에서 초동면(初同面) 방하동(方下洞)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로(要路)로 명실공히 산중대로(山中大路)였으나 지금은 교통 수단의 발달로 통행하는 사람이 없어, 겨우 옛날 길이었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데 일명 영현(鈴峴)이라고도 한다.
○ 종남산(終南山)
밀양부(密陽府)의 안산(案山)으로 남쪽에 있어 남산(南山)이 되었고, '종'자는 옛날 큰 해일(海溢)이 있어 온 땅이 물에 덮혔는데 남산(南山) 꼭대기가 종지만큼만 남았다는 민담(民譚)이 있어 그 종지의 '종'자를 따서 종남(終南)산이라는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당(唐)나라 수도(首都)의 남산(南山)이 종남(終南)이었기 때문에 우리 서울의 남산(南山)도 종남(終南)이라 하였고, 이것을 모방하여 이 밀양부(密陽府)의 남산(南山)도 종남산(終南山)이라고 했던 것 같다.
○ 나부티고개(복앵현-伏鸚峴))
신당동(新塘洞)에서 상남면(上南面) 예림리(禮林里)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왜 이런 이름이 지어졌는지 알 수 없다.
○ 마암부락(馬岩部落)
마을 옆에서 강쪽으로 내밀은 산 줄기의 끝에 있는 바위가 말 같은 모양이라고 하여 말바위,즉 마암(馬岩)으로 이름했다고 한다.
○ 우도마암(牛島馬岩)섬
응천강(凝川江)에 있는 삼각주로 된 섬인데 옛날 우시장(牛市場)이 있었다고 전해 오고 있으며, 이로 인해 지어진 지명이라고 한다. 매년의 침수지(侵水地)로 토질(土質)이 비옥(肥沃)하여 밤, 배나무, 채소류의 재배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암소(馬岩沼)(마암연(馬岩淵))
부북면(府北面)과 상남면(上南面)의 경계 지점에 강중(江中)으로 돌출하여 말이 물 먹는 형국(形局)으로 생겼는데 응천강(凝川江) 물 줄기가 이 바위에 부딪혀 깊이 파여진 곳으로 용왕(龍王)에게 치성(致誠)하는 무속(巫俗)의 현장이기도 하다. 옛날부터 조대(釣臺)로 사용되어,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을 비롯한 역대 선비들의 시가 많이 남아 있고, 지금도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 병천(屛川)
우도(牛島)와 사포(沙浦) 마을 사이로 흐르는 응천강(凝川江) 지류(支流)인데, 왜 병천(屛川)이라고 하는지 알 길이 없다.
○ 병구지(兵區地)
상남면(上南面) 예림리(禮林里)와 전사포리(前沙浦里) 사이에 병구지(兵區地)라고 불리어지는 곳이 있다. 이 병구지는 고려(高麗) 원종조(元宗朝)에 금주(金州 : 김해-金海)방어사(防禦使) 김(金)훤이 진도(珍島)의 삼별초(三別抄)에 호응(呼應)하여 반란(反亂)을 일으킨 군인(郡人) 조천(趙阡), 방보(方甫), 계년(桂年), 박평(朴平), 박공(朴公), 박경순(朴慶純), 박경기(朴慶祺) 등을 토벌(討伐)하기 위하여 병영(兵營)을 설치했던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몽고(蒙古) 침략(侵略) 세력에 야합(野合)한 고려 지배층에 반대하여 일어선 삼별초군(三別抄軍)을 밀양인(密陽人)들이 지지(支持) 호응(呼應)하여 과감히 나섰던 것은 우리 밀양인(密陽人)들의 기개(氣槪)를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 삼별초(三別抄)에 동조(同調)한 탓으로 인해 일시적(一時的)이나마 우리 밀양(密陽)은 군호(郡號)를 삭제(削除)당한 채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강등(降等)되기도 했지만 민족사적(民族史的)인 관점(觀點)에서 보아 민족의 주체성(主體性)을 고취(鼓吹)시킴에 일역(一役)을 담당했다고 할 것이다.
○ 동암(東岩) 부락(部落)
원래 사포 마을 앞의 저습지(低濕地)로서 세월따라 막히고 쌓여 전답(田畓)이 되고 자연히 집이 지어지고 그럭저럭 늘어나 지금은 어엿한 일동(一洞)을 이루게 된 것이라 한다. 동쪽 마암산(馬岩山)의 큰 바위가 마을 앞으로 향하여 있다고 해서 동암(東岩)이라는 동명(洞名)이 되었다고 하나, 언제부터 생긴 이름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마을에는 남쪽 산 기슭에 요업(窯業), 견직(絹織) 등 14개의 공장이 집단적으로 들어와 사포공장단지(沙浦工場團地)를 이루고 있다.
○ 신당부락(新塘部落)
사포리(沙浦里) 근방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으로 신당이라는 동명(洞名)이 되었다고 한다. 약 삼백년전에 대구에서 온 도씨(都氏)가 전거(奠居)하면서부터 취락(聚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 제석동(帝釋洞) 폭포(瀑布)
신당 안쪽 계곡 깊숙한 곳에 제석동 폭포가 있어 근처 사람들의 물맞이하는 곳이 되고 있다.제석동이란 이름은 아마 옛날 절이 있었던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 봉화령(烽火嶺)
신당(新塘) 뒷산인데 봉현(烽峴)으로 가는 고개이므로 봉화령(烽火嶺)이라고 한다. 일명(一名) 조화현(助火峴)이라고도 한다.
○ 전포부락(前浦部落)
전사포리(前沙浦里)의 본땀인데 취락(聚落) 형성(形成)의 시원(始原)은 분명치 않으나 이조(李朝) 초엽(初葉)에 안씨(安氏) 일족(一族)이 전거(奠居)한 뒤로부터 동세(洞勢)가 번성(繁盛)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비석껄
전사포리 동구(洞口) 노변(路邊)에 있는 비석 때문에 생긴 이름인데, 이조(李朝) 말기(末期)에 빈한(貧寒)한 동민(洞民)을 도와준 광주안씨(廣州安氏) 일문(一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동민의 뜻으로 세워진 안씨의장비(安氏義庄碑)이다. 즉 병들어 신고하는 사람, 또는 가난해서 혼인 못하는 사람, 상(喪)을 당해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사람, 굶주리는 사람 등을 구휼(救恤)한 사례(事例)들이다.
○ 후사포리(後沙浦里)
현포(玄圃), 내곡(內谷), 중포(中浦) 등 삼 개 땀으로 되어 있다.
고려조(高麗朝)에 밀양(密陽) 박씨(朴氏)가 입주하였고, 그로부터 취락(聚落)이 형성되었으리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당시에는 지금의 전후사포(前後沙浦)와 송악부락(松岳部落)까지를 통털어 삽개(삽포-鈒浦)라 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 뒷산을 기산(箕山)이라고 하며, 송계(松溪)라고 전(傳)해지는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고려(高麗) 말엽(末葉)에 이 마을에 전거(奠居)한 송은(松隱) 박익(朴翊), 도은(桃隱) 박문빈(朴文彬) 양(兩) 선생(先生)이 국운(國運)의 쇠잔(衰殘)함을 보고 낙향환고(落鄕還故)하여 세상을 피한다는 뜻에서 마을 뒷산 이름을 기산(箕山 : 중국의 요 임금 때 소부(巢父)와 허유(許由)가 은거(隱居)하던 산)으로 짓고, 또 한편 고려조의 서울 송도(松都)를 잊지 못하여 이곳에 우물을 파고 송도(松都)의 송자(松字)를 따서 송계(松溪)라고 이름했다고 한다.
○ 후포(後浦)
일명(一名) 현포(玄圃)라고도 하는데, 옛날 현인(賢人), 선인(仙人)들이 살던 곳이란 뜻에서 현포(玄圃)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 억석암암(抑石岩庵)
마을 뒷산 방울재(영현(鈴峴))동북간에 큼직한 바위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는데, 그 형상(形象)이 흡사히 범과 같다고 하여 '범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범바위가 밀양부를 굽어 보는 듯하고 동헌(東軒)을 엿보는 듯한 형국(形局)이라 不吉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이 범바위의 기(氣)를 꺾기 위하여 그 앞에 절을 짓고 입불(立佛)을 안치(安置)하였다고 한다. 이조(李朝) 초에 이 절을 억석암(抑石庵)이라고 이름하여 오다가 이조(李朝) 말엽(末葉)에 와서는 이 바위, 즉 범바위(복호암(伏虎岩))도 부서지고 사찰(寺刹)도 도훼(倒毁)되어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그 옛날에는 이 절 부근에 억석동(抑石洞)과 산수정(山水亭)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가 없어진지 오래되고 기록만 남아 있다.
○ 남산(南山) 붕우재(봉화대(烽火臺))
종남산(終南山) 둘째 봉우리 정상(頂上)에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전에는 김해(金海) 자암산(子巖山) 봉화대(烽火臺)에 응(應)하였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 불편하였으므로 이조(李朝) 후기(後期)부터는 하남(下南) 백산리(栢山里) 후산(後山)에 백산봉화대(栢山烽火臺)를 신설하여 응(應)하였으며, 북으로 추화산(推火山)(용평리(龍平里) 뒷산)봉화대(烽火臺)에 통보(通報)하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봉화대(烽火臺)의 통보 방법의 일단(一端)을 적어 본다. 즉 야간(夜間)에는 횃불을 비추고, 주간(晝間)에는 연기를 피워 긴급(緊急)한 상황을 연락(連絡)하는데 평상시(平常時)에는 한 번(일거(一炬)), 적이 나타나면 두 번(이거(二炬)), 적이 국경 가까이 오면 세 번(삼거(三炬)), 국경에 침입하면 네 번(사거(四炬)), 적과 접전이 되면 다섯 번(오거(五炬))을 올리되 봉화(烽火)의 신호(信號)가 불가능(不可能)하면 봉군(烽軍)이 직접 달려가서 연락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 예림서원(禮林書院)
원래 밀양시(密陽市) 활성리(活城里) 이구(二區)(구서원(舊書院)) 자씨산하(慈氏山下)에 있었는데, 당시는 덕성서원(德城書院)이라는 이름이었으며, 그후 상남면(上南面) 운례(運禮) 부락(部落)으로 이건(移建)하여 예림서원(禮林書院)으로 개칭(改稱)하였다. 예림(禮林)의 '예(禮)'는 운례(運禮)에서 따온 것이다. 뒤에 화재(火災)로 소실(燒失)되고, 지금 이 곳에 옮겨 온 것이다. 도(道) 지정(指定)문화재(文化財) 제79호로 지정되었으니 영남유학(嶺南儒學)의 종장(宗匠)으로 숭앙(崇仰)받는 점필재 김종직(金宗直)과 우졸제(迂拙齊) 박한주(朴漢柱),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 삼선생(三先生)의 유덕(遺德)이 길이 뻗치고 있음이라 하겠다.
○ 은행나무껄
이 마을 동구(洞口)에 두 그루의 은행나무 고목(古木)이 있는데, 고려말(高麗末)의 박영균(朴永均)(은산(銀山)), 박세균(朴世均)(행산(杏山)) 형제가 손수 심은 것이라고 전해 온다. 현재 은산파(銀山派), 행산파(杏山派)의 자손(子孫)들이 대대(代代)로 소중(所重)하게 지켜오고 있다.
뒤에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일이다. 모헌(慕軒) 박양춘(朴陽春)은 친상(親喪)을 당하여 묘소(墓所) 옆에 움집을 짓고,시묘(侍墓)를 극진(極盡)히 하고 있으면서 피란(避亂)도 가지 않았다. 이를 본 왜장(倭將)이 감복(感服)하여 묘소(墓所) 입구(入口) 길목에 표목(標木)을 세우고 '이 곳은 효자(孝子)가 있는 곳이니 침입을 금지한다.'라는 군령(軍令)을 써 놓고 지나갔다고 한다. 지금 이곳의 기양재사(箕陽齋舍)는 모헌(慕軒)이 난중(亂中)에 거처(居處)하던 곳에 세워진 건물이라고 한다.
○ 중포부락(中浦部落)
전사포(前沙浦)와 후사포(後沙浦)의 중간(中間)에 있는 까닭에 중포(中浦)라고 한다. 약 4백 년 전에 평산(平山) 신씨(申氏) 일족(一族)이 입주(入住)하고부터 취락(聚落)이 형성(形成)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 있는 우뚝한 비석(碑石)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전에 이 마을에 살았던 신계성(申季誠) 선생(先生)의 학행(學行)을 숭앙(崇仰)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파괴된 것을 중건(重建)하였고, 다시 소실(燒失)되었던 것을 1765년에 중건(重建)한 것이다. 이 밖에 경정당(景貞堂),사우정(四友亭) 등 신씨(申氏) 일문(一門)의 정자(亭子)들이 상망(相望)하고 있다.
○ 내곡부락(內谷部落)
현포(玄圃)와 송악(松岳) 사이의 안 쪽에 위치(位置)하고 있으므로 안골(내곡(內谷))이라고 한다. 고려말(高麗末), 이조(李朝) 초에 밀성(密城) 박씨(朴氏)가 입주(入住)하고부터 취락(聚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국담(菊潭) 박수춘(朴壽春) 선생(先生)의 유덕(遺德)을 추모(追慕)하기 위한 별묘(別廟)와 국담재(菊潭齋)가 있고, 이 마을 앞에 화짓대(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면 어사화(御賜花)를 받았으며, 이것을 자랑삼아 자기 마을의 동구(洞口)에 꽂았다고 한다.)를 세웠던 곳이 있으니 이는 병사직(兵使職)을 지낸 이 마을 출신의 유적(遺跡)으로 여겨진다.
전후사포리(前後沙浦里)에 산재(散在)해 있는 지석묘군(支石墓群)은 이미 학계(學界)에 보고되어 있지만 이런 것들로 미루어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볼 수 있으며 아직도 이곳에 전해지는 지명(地名)들,즉 팔밭골, 물방앗골, 꽃밭등, 절골, 강당등, 긴등, 청룡등, 안엽동, 명마골(명마곡(鳴馬谷)), 평밭골, 서당골, 바루봉 등 수많은 이름을 지닌 지점(地點)이 있으나 그 지명의 연유(緣由)나 긴 세월 속에 얽혀진 이야기들은 찾아 볼 길이 없다.
2. 제대리(堤大里)
화악산(華嶽山)에서 종남산(終南山)까지 높고 긴 능선이 이어지면서 고암산(高岩山), 우령산(牛齡山) 등의 산봉이 솟아 있는데 두 산맥이 접하고 있는 지점에 동남향으로 마을과 들이 잘 어우러저 있다. 제대리는 제대(堤大) 부락, 한골(대동:大洞) 부락, 송악(松岳) 부락 등 3동(三洞)으로 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박씨, 이조시대에 김씨, 장씨(蔣氏), 민씨 등이 존거(奠居)하기 시작하고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일명 '못골'이라고도 한다. 옛날 진사(進士) 장건 등이 흥망제(興防堤)라는 큰 제방을 축조하여 관개 및 일상 생활의 용수로써 동민을 크게 도와 주었는데 그로 인해 못골, 또는 제대(堤大)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부내(府內)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뿐 아니라 일찍부터 동헌(洞憲 : 동리의 규약)을 제정하여 풍습을 바로 잡기도 한 마을이었다.
○ 제대(堤大) 본땀
일명 지동(池洞), 또는 제동(堤洞)이라고도 했는데 고암산록(高岩山麓)에 위치하고 있다. 임란(壬亂) 전에 장씨(蔣氏)가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하나 난을 겪으면서 폐동(廢洞)이 되다시피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중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참전할 무렵 그의 휘하(麾下)에 입대하여 왜군(倭軍)에 항쟁(抗爭)하다가 전남 보성(全南 寶城)에서 전사(戰死)한 최씨 일가(一家)가 남부녀대(男負女戴)로 이곳 제대(堤大)에 정착(定着)하게 되었으며, 삼대(三代)로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은거하였다고 한다.
○ 제대중(堤大中)땀
이조(李朝) 세종조(世宗朝)에 장씨(蔣氏) 일가(一家)가 전거(奠居)한 후로 동세(洞勢)가 융성(隆盛)해졌으며 문무(文武) 관원(官員)들이 누대(累代)로 배출(輩出)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으면서 번화했던 동세(洞勢)는 간 곳 없고, 피란(避亂) 갔던 장씨(蔣氏) 후손(後孫)들은 일부는 청도군 각남(角南)으로, 일부는 부북면(府北面) 대항리(大項里)로, 또 일부는 삼랑진읍(三浪津邑) 숭진리(崇眞里)로 산거(散居)하고, 지금은 두서너 집이 남아 고토(故土)를 지키고 있다.
○ 분저(粉箸)곡
제대(堤大) 본땀과 중땀 사이로 고암산(高岩山) 계곡을 올라가면 분저골(분저곡:粉箸谷)이다. 왜 분저골이라고 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골의 막바지 주변을 노로실이라고 하는데, 옛날 사람이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골짜기만 남아 있다. 이곳 역시 왜 노로실인지는 알 길이 없다.
○ 한골 부락(대동:大洞)
이 마을은 고려(高麗) 때에 박씨(朴氏) 일족(一族)이 전거(奠居)함으로써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동구(洞口)에 비각(碑閣)과 비석(碑石)이 고색창연(古色蒼然)하게 서있고, 서쪽 산 중(中)허리에 잘 다듬어진 묘소(墓所)를 볼 수 있으니 이는 곧 유종(儒宗)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先生)의 신도(神道)이며, 그리고 선생의 부자(父子)분의 묘소(墓所)이다. 선생의 유적(遺迹)이 이곳에 있는 까닭은 선생의 출생지(出生地)이기 때문이다. 여기 선생의 일대기(一代記)를 간략(簡略)하게 소개(紹介)해 둔다.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선생(先生)은 장인(丈人) 박홍신(朴弘信)의 도움으로 처가(妻家)인 이곳 한골에 전거(奠居)하게 되었다.1413년(세종(世宗) 13년)에 강호(江湖)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선생(先生)은 6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그의 총명으로 23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29세 대과(大科)에 급제(及第)하였으며, 42세 시에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거유(巨儒)들이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 모여들었으니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一)두 정여창(鄭汝昌) 등이 대표적이 문생(門生)이다.
59세에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승진(昇進)되었으며 문집(文集)과 국고문헌(國故文獻) 등 많은 저술(著述)을 남기고, 62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의 아들 숭년(崇年)은 겨우 7세였으므로 그의 부인이 주상(主喪)이 되어, 상남면(上南面) 무량원(無量院)에 안장(安葬)하였다.
선생의 사후(死後) 6년이 지난 1498년에 간신(奸臣) 이극돈(李克墩), 유자광(柳子光) 등이 선생(先生)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대역모(大逆謀)로 몰아부쳐 선생의 묘소(墓所)를 파서 부관참시(剖棺斬屍 :죽은 자의 시신(屍身)을 토막내는 형벌(刑罰))하고 선생의 문도(門徒)들을 주륙(誅戮), 혹은 유배(流配)시켰다. 선생의 사후 15년이 지난 후에 무오(戊午), 갑자(甲子) 등 두 번의 사화에서 희생(犧牲)되었던 사류(士類)들이 거의 복작(復爵), 또는 추증(追贈)되었다. 따라서 선생의 유해(遺骸)도 수습(收拾)되어 한골 후산(後山)에 이전(移轉), 안장(安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후로 196년 후에(1689년) 영의정(領議政)으로 증직(贈職)되었으며, 다시 215년 후에는 문충공(文忠公)으로 사시(賜諡)되었음은 물론, 선생의 학문과 도덕을 숭모(崇慕)하여 예림서원(禮林書院)을 비롯한 6개 서원(書院)의 사우(祠宇)에 봉향(奉享)되고 있다. 그리고 이곳 한골 동구(洞口)에 있는 신도비(神道碑)는 1494년(성종(成宗)25년)에 조매계(曺梅溪)가 대제학(大堤學) 홍귀달(洪貴達)에게 청하여 비명(碑銘)을 새겨 마을 앞에 세웠는데, 연산군(燕山君) 무오사화(戊午史禍)에 절파(折破)되어 없어졌던 것을 그 후 중종조(中宗朝) 정묘년(丁卯年)에 구비문(舊碑文)대로 다시 세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 중에 파손(破損)되었던 것을 1635년에 다시 각자개수(刻字改竪)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추원재(追遠齋)는 강호(江湖)의 전거지(奠居地)로 선생의 생가(生家)를 기념(紀念)하기 위한 건물이다. 강호(江湖) 선생의 외손(外孫)인 민씨(閔氏)가 이곳에 살았는데 누대(累代)로 문한(文翰)과 사환(仕宦)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 후손(後孫)들이 상남면(上南面) 동산리(東山里), 하남면(下南面) 파서리(巴西里), 상동면(上東面) 매화리(梅花里)에 살고 있고, 이 마을에는 겨우 몇 호가 명맥(命脈)을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 날고개(일현(日峴), 또는 나현(羅峴))
오래 전부터 날고개로 불려졌는데, 날치, 또는 앞고개라고도 한다. 제대리(堤大里)에서 무안면(武安面) 마흘리(馬屹里)로 가는 길의 경계선이다.
옛날 현풍(玄豊), 창녕(昌寧), 영산(靈山) 등의 군현(郡縣)이 밀양(密陽)의 관할(管轄)에 있을 때, 사또나 이원(吏員)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이 었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관인(官人)들이 길을 가면서도 신분(身分)이 낮은 백성들 앞에 군림(君臨)했을 것이다.그래서 이 고개는 나으리들이 많이 다니는 고개라고 해서 나으리 고개라는 속명(俗名)이 생겼다고 한다. 날고개라는 이름은 나으리라는 말이 줄어서 어느새 날고개로 변해졌다고 한다.
○ 도적골
마흘리(馬屹里)로 오가는 행인(行人)을 상대로 하는 도적(盜賊)떼들이 자주 출몰(出沒)하였다고 하여 도적골이 되었으나 지금은 도적도 행인도 없이 잡목만 무성하다.
○ 삼박골
점필재(畢齋) 선생(先生) 묘소(墓所)가 있는 곳인데, 왜 삼박골이라는 이름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선바위등
한골 뒷산의 등성이로, 이곳에 세 개의 바위가 있는데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바위는 사람들이 흔들면 흔들리기는 하지만 넘어지지 않고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선다고 하여 이 등성이를 선바위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곳에도 지석묘군(支石墓群)이 있었는데(신도비(神道碑) 북방 100m 지점) 경지정리 때 묻혀지고 3기(基)만 남아 있다.
○ 풍류동(風流洞)
한골 안산(案山) 너머 흥방제(興防堤)의 못 서쪽에 위치한 것으로,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풍류(風流)라고 말하는 것은 박준(朴浚)이라는 음악가(音樂家)가 이곳에 살았기 때문이다. 박준(朴浚)은 16세기 중엽(中葉)의 밀양(密陽) 사람으로 고려(高麗) 이래(以來)의 우리 나라 아악(雅樂), 속악(俗樂) 등 국악(國樂) 전반(全般)에 관하여 달통(達通)하고 악장가사(樂章歌詞)라는 책을 엮어낸 것으로 되어 있다. 이퇴계(李退溪) 선생(先生)의 어부사(漁父詞) 발문(跋文)에 잘 소개되어 있다. 한편 그는 글씨도 잘 쓰는 사람으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의 부모(父母) 묘소(墓所)(칠원(漆原))에 명문(銘文)을 쓰기도 했다.
○ 송악부락(松岳部落)
원래 후사포리(後沙浦里)에 속했으나 왜정시(倭政時)에 제대리(堤大里)로 편입(編入)된 것이다. 기산(箕山), 풍정산(風亭山), 독산(獨山),풍정산(豊亭山) 등에 둘러 싸여 있으면서, 동으로 넓은 들이 있다.동명(洞名)에 송자(松字)가 있는 것은 고려(高麗)의 서울 송도(松都)의 송자(松字)를 따온 것이라 한다. 서울 송도(松都)의 송자(松字)를 따온 것에 대해서는 전술(前述)한 현포(玄圃) 부락에 상세히 기록하였으므로 생략한다.
3. 감천리(甘川里)
화악산(華嶽山)에서 흘러내리는 부북천이 적항(赤項)들(야(野))을 지나 응천강(凝川江)으로 향(向)하는 그 하류(下流)를 감천(甘川)이라 하고 이 감천의 천변(川邊)에 위치한 마을을 감천리라고 한다. 이웃 마을 제대리(堤大里)에서 점필재(畢齋) 선생이 탄생할 당시에 사흘 동안 이 냇물의 물맛이 감미로왔다고 하여 감천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우리 말로는 감내라고 부른다. 윗감내(감호(甘湖)), 아랫감내(신흥(新興))의 두 부락으로 나뉘어져 있다.따로 용척(用尺)(용제(龍啼))부락이 고암산(高岩山) 줄기인 자라등 기슭에 약간 높게 자리하고 있다.
○ 장승배기
감천리의 당산(堂山)의 하나. 마을 사방에 당산(堂山)이 있는데, 동북쪽에 뒤왕산, 서남쪽에 짐대거리,서북쪽에 박씨 할매, 그리고 동남쪽에 있는 것이 장승배기이다. 아마 옛날 장승이 서 있었던 자리였다고 생각된다. 뒤왕산, 짐대거리, 박씨 할매 모두 특이한 이름이나 그 어원은 알 수 없다.지금도 서북, 동남 양쪽의 당집은 그대로 남아 있다.
○ 감내 게(해(蟹))줄 당기기
지방 민속문화자료(民俗文化資料)의 하나이다. 감내에는 옛부터 게(해(蟹))가 많이 잡혔는데, 위 아랫 감내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게를 잡느라고 경쟁과 충돌이 일어나자 마을 부로(父老)들이 조정하기 위하여 게줄당기기라는 경기를 통해 승부(勝負)를 가르고, 그것으로 게 잡는 구역을 정해 주었다는 것이다.지금은 게를 잡는 일이 없어졌지만 정월 대보름을 전후(前後)하여 마을 사람들이 윗감내, 아랫감내의 편을 갈라 게줄당기기 시합으로 즐거운 놀이를 하고 있다.
○ 용척부락(用尺部落)
이조(李朝) 초기(初期)에 박거명(朴居明)이 전거(奠居)하였다고 하나, 부락의 시원(始原)은 알 수 없다. 용척을 용제(龍啼)라고도 하는데 한 전설이 있다. 옛날 송정(松汀) 마을 우물 근처에 한 뛰어난 장사(壯士)가 있었는데,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그가 우물을 수축(修築)하기 위해 우물 속에 들어간 뒤에 위에서 흙과 돌을 내리 덮쳐 생매장(生埋葬)을 시켰다. 그랬더니 난데 없이 용마(龍馬) 한 마리가 나타나 슬프게 울면서 용척(用尺) 뒷산으로 해서 상천(上天)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용제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것이다.
4. 오례리(五禮里)
신라시대(新羅時代)의 오정부곡(烏丁部曲)으로, 뒤에 오례리(烏禮里)가 되었다. 화악산(華嶽山) 지맥(支脈)인 고암산(高岩山) 능선(稜線)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려 시루봉(증산(甑山))줄기에 둘러 싸인 곳이다.
임진란 후에 호군(護軍) 이선지(李先智)가 모부인(母夫人) 장씨(蔣氏)를 따라 외향(外鄕)인 부북지동(府北池洞)(현(現) 제대리(堤大里))에 이거(移居)하여 살았으나 1611년(광해(光海) 3년)에 이곳 오례리(烏禮里)로 전거(奠居)하였다. 그의 충효(忠孝)와 예의(禮儀) 범절(凡節)이 출중(出衆)하여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으므로 그 뒤 오례(烏禮)를 오례(五禮)로 개칭(改稱)하였다고 전해 온다. 오례(五禮)는 모든 예(禮)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월례(月禮)라고도 한다는데 그 까닭은 미상이다.
오례리에 속하는 자연 부락은 고암산 기슭에 새각단이라고 불리는 3,4戶가 사는 땀이 있고, 북쪽 삼시랑산을 중심으로 띄엄띄엄 5, 6호가 산재해 있을 뿐이다.
○ 자라산(오산-鼇山)
운전리(雲田里)에서 오례(五禮)로 들어가는 입구(入口)에 있는 산인데, 산의 형상(形象)이 자라가 엎드려 있는 모양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왜정시(倭政時) 수리(水利) 시설(施設) 시공(施工) 중(中)에 산을 끊어 지금은 자라의 몸둥이만 남아 있고 자라목은 잘려져 있다.
○ 삼시랑산(三豺狼山)
마을 동북쪽의 뒷산인데, 산형(山形)이 세 마리의 승냥이와 늑대가 버티고 서 있는 형국(形局)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아망골(阿望谷)
삼시랑산 뒷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옛날 밀양 지방에 암행(暗行)을 하기 위하여 어사(御使)가 그 휘하(麾下)들을 은밀(隱密)히 지휘(指揮)하던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약수(藥水)터
불당골 남쪽에 있는데, 오랜 옛날부터 효험(效驗)을 보는 물이 나는 샘으로, 한 때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기도 했다는데 지금은 오는 사람은 거의 없고, 바위 틈에서 물은 여전히 흘러 나오고 있다.
○ 듬바위(가암산-加岩山)
시루봉 서쪽 산 아랫쪽 골짜기에 있는 바위이다. 왜 듬바위라는 이름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듬바위 아래 호랑이 굴이 있어 왜정 초기까지 호랑이가 이 굴에 출몰(出沒)하였다고 한다.
○ 조롱산(조룡산- 照龍山)
마을 서편 산인데 산 형상이 조롱박 같이 생겼다고 지어진 이름이다. 옛날 성지(聖智)가 구산(求山)을 하다가 이곳이 명산(名山)이라 하여 묘(墓)터를 잡았다고 전해 오고 있다.
○ 성지골(성지곡-聖智谷)
딱밭골 서편에 있는 골짜기인데, 옛날 성지(聖智)가 묘(墓) 터를 보러 다녀갔다고 하여 성지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성지가 한 번만 지나가도 새로 지명(地名)이 생길 정도로 그의 위세(威勢)가 대단하였던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 덩글 바위
오례리 서편 산 위에 있는 바위이다. 마을에서 내다보면 바위가 유난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의 눈에 덩그렇게 툭 튀어나 보였기에 덩그런 바위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장군소(장군정-將軍井)
오례리 마을 서쪽에 있는 샘 이름인데, 물을 마시면 힘이 세어졌다고 한다.그래서 오례 사람들은 너도 나도 이 물을 마셨는데, 그때는 온 고을에서도 오례리 사람들의 완력(腕力)을 당해내지 못했다고 한다. 더러는 힘을 믿고 저질러지는 부당한 장난도 있고 해서 은근히 걱정하는 말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마침 어느날 노승(老僧)이 나타나 이 소(沼)의 수맥(水脈)을 잘랐다고 한다. 그로부터는 장군소의 물도 효험이 없어졌다고 전해 온다. 지금도 장군소의 흔적은 남아 있다.
○ 고동바위
의담재(依膽齋) 앞 논에 박혀 있는데 고동(패류(貝類))과 관계가 깊은 학류(鶴類)의 새들이 날아든다고 전해지고 있다.
○ 윗숲
마을 앞 서쪽에 있는 숲이다. 옛날 풍수설(風水說)에 오례리(五禮里)는 건조(乾燥)하고 화기(火氣)가 서린다도 하여 항상 염려하였는데, 이 기운(氣運)을 막을 수 있는 주술(呪術)로 마을 아래와 위에 숲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숲이 조성되고 난 뒤로는 동쪽으로 화기(火氣)를 막을 수 있었다고 하며, 이 들 아래 위 숲이 동네 앞을 가리었다고 한다. 지금은 윗숲은 새마을 사업으로 없어져 버렸으며, 아래 숲도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수령(樹齡) 약 오백년 되는 느티나무 한 그루는 죽고, 지금 신당(神堂)으로 쓰고 있는 한 그루만 남아 오랜 옛날부터 숲이 있었던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 오례제(五禮堤)
옛날 제방이 있었는데 이조 시대에 폐지되었다고 한다.
○ 사직단지(社稷壇址)
원래 남산(南山) 밑에 었었는데 1580년 경 부사(府使) 하진보(河晉寶)가 오례 마을 남쪽으로 옮긴 것이다. 사직단(社稷壇)은 중앙(中央)(서울)과 각 고을에서 토지신(土地神)과 곡신(穀神)을 제사(祭祀) 지내는 곳이다. 단(壇)은 2층으로 축조(築造)하고 그 위에 오색(五色)의 흙으로 덮은 것이다. 성황사(城隍祠)와 함께 매년 관부(官府)에서 제사(祭祀)를 지냈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5. 덕곡리(德谷里)
화악산(華嶽山)에서 종남산(終南山)까지 이어지는 긴 산맥의 중앙부에 고암산(高岩山)이 있고, 그 산의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북 평야를 한 눈에 굽어 볼 수 있다. 몇 개의 자연 부락 즉 본땀,못안 부락,새터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는 지금 저수지 남쪽의 산 자락에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그 곳의 산 기슭,또는 경작지에서 토기 조각들(단도마연토기(丹塗磨硏土器))이 출토되고 이 부근에서 칠성 바위라고 불려지는 지석묘(支石墓)들이 주민들의 무속신앙(巫俗信仰)의 대상으로 되어 오는 것 또한 여러 군데 있기도 하여 이를 증명하고 있다.그런데 이 마을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진 것은 언제, 어느 시대부터인지 확실치 않다.이조 중엽에 밀성(密城) 손씨(孫氏) 일족(一族)이 전거(奠居)하기 시작했는데, 촌전(村前)의 농토가 비옥(肥沃)하고 수원(水源)이 넉넉하여 생활이 풍요(豊饒)로와졌으며, 인심(人心)이 순후(淳厚)하여 후덕(厚德)한 마을이 되었다. 이로 인해 덕실(덕곡(德谷))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마을 이름에 의거하여 손씨(孫氏)들의 상덕재(尙德齋), 덕곡재(德谷齋)라는 재실(齋室)이 있고, 한편에 김씨(金氏)의 운곡재(雲谷齋)가 있다.상덕재(尙德齋)는 손경검(孫敬儉) 이하(以下) 육세조(六世祖)를 받드는 제숙소(齊宿所)이고, 덕곡재(德谷齋)는 현감(縣監) 손태좌(孫台佐)를, 그리고 운곡재(雲谷齋)는 김담양(金潭陽) 삼형제(三兄弟)를 추모(追慕)하여 세운 것이다.
○ 꼬꾸랑산(고암산(高岩山), 일명(一名) 고강산)
고암산(高岩山)의 정상의 바위가 멀리서 바라보면 꼬꾸랑하게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산 모양을 보고 꼬꾸랑산, 꼬꾸랑산하고 부른 것이 어느새 산 이름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 산정 아래에 큰 외돌 바위가 있는데 굿바위라고 하며 인근 무속(巫俗)들의 기원처(祈願處)로 되어 왔다고 한다.
○ 약물샘
꼬꾸랑산 굿바위 밑의 칠분 능선(稜線)쯤에 일시(一時)에 수십 명이 들어가 비를 피(避)할 수 있는 동굴이 있는데, 그 곳에 대한불갈(大旱不渴)의 샘이 있고 물 맛이 좋아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이것이 약물샘이다.
○ 칭이골(기곡(箕谷))
고암산(高岩山) 남쪽 산 봉우리가 칭이(키)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운정고개(雲汀峴)
옛날 밀양읍에서 무안으로 가는 교통로로서 堤大里의 날고개와 같이 교통량이 많았던 고개였는데, 지금은 고개의 흔적조차 찾아 보기 힘들 정도로 잡초가 무성할 뿐이다.
○ 음산골(일명 듬지골)
운정(雲汀) 고개의 북쪽 산골인데 골이 깊어 초봄까지 눈이 녹지 않는다. 으석하여 음산한 기운에 숨이 막힐 정도라고 한다.
이 밖에 오례(五禮)로 넘어가는 오례 고개, 마을 안산(案山)인 삼시랑산, 마을 앞의 독뫼들에도 얽혀진 사연들이 있을 듯하나 알 길이 없다.
○ 새터 부락
덕곡(德谷) 본땀에서 동북쪽으로 떨어져 있는 새로 생긴 마을이 새터 부락이다. 창녕(昌寧) 길곡면(吉谷面)에 우거(居)하던 손씨(孫氏) 일족(一族)이 고향에 돌아와 이 마을에 전거(奠居)하면서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 못안 부락
덕곡 본땀에서 운정(雲汀) 고개로 가는 길목에 옛날의 못 둑 같은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새 저수지로 변하여 제방이 없어졌다. 그 제방의 안쪽으로 있는 마을을 옛부터 못안 마을이라고 했다.
○ 안마 부락
지금의 덕곡 본땀을 지칭한다.
○ 마흘리(馬屹里) 고개
옛날 마흘리(馬屹里)로 넘어가는 고개였다.
6.청운리(靑雲里)
화악산(華嶽山)에서 이어지는 고암산(高岩山) 능선(稜線) 동쪽에서 약간 떨어진 들마을이다. 부북 평야 전부를 조망할 수 있는 탁 트인 마을이다. 본땀(도촌(道村))과 상촌(上村), 중촌(中村), 적항(赤項) 등 사개부락(四個部落)으로 나뉘어져 있다.이 마을 부근에 지석묘군(支石墓群)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이 일대(一帶)에 대규모(大規模)의 취락이 형성되었던 것을 추측케 한다. 현재의 이 마을에는 이조(李朝) 초부터의 취락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원래 이 마을은 적항리였고 덕곡 일부와 대항리의 일부까지 포함된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동명(洞名)이 청운리(靑雲里)로 바뀌어졌다. 밀주지(密州誌)에 의하면 청운정(靑雲亭)이라는 정자(亭子)가 있어 동민(洞民)들의 유음소(遊飮所)가 되어 있었다고 했는데, 지금 그 정자는 없어졌고 이 정자의 이름이 동명(洞名)으로 된 것으로 보인다.
○ 도촌(道村) 부락
청운리 본땀인 도촌은 이중(里中)을 흐르는 냇물을 경계로 상촌과 중촌으로 나누어져 있다.도촌이라는 이름이 무슨 연유로 생겼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 마을에 지방 문화재 자료 제113호로 등록된 고가(古家)가 있다. 이 집은 1840년대에 본면(本面) 전사포(前沙浦)서 이사해 온 의관(議官) 안붕원(安鵬遠)의 아들 안종문(安鍾文)이 1870년에 창건(創建)한 집이다.
○ 빗돌배기
도촌 부락에서 가산리로 가는 길 가 동(洞) 경계(境界) 지점에 오래된 석비(石碑)가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졌다. 언제, 누가 세운 빗돌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이 곳 사람들은 옛날 대항리에서 살았다는 영상(領相) 남곤(南袞)과 우찬성(右贊成) 현석규(玄碩圭) 등 세도가(勢道家)들의 위세(威勢)로 이 지점에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졌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 상촌(上村)
청운리 도촌과 개울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허씨(許氏)와 김씨(金氏) 등이 세거(世居)한 마을이다. 본땀인 도촌보다 윗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상촌이라고 한다.
○ 허산(許山)
상촌 뒷산인데 그 모양새가 마치 소가 누워 있는 것 같아 와우산(臥牛山)이라고도 한다. 허산(許山)이라는 이름은 허씨(許氏)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옛날 이 마을에 살던 허씨는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인 명당터에 발복(發福)하여 부귀(富貴) 겸전(兼全)하여 잘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집의 많은 노복(奴僕) 중의 한 놈이 매우 영리하고 힘이 또한 장사(壯士)여서 심부름을 시키면 눈 깜짝할 사이에 먼 길을 다녀올 뿐만 아니라 일의 처리를 하는 솜씨도 시키는 주인보다 더 훌륭하였다. 처음에는 그의 유능함이 기특하기도 하고 가산(家産)의 관리에도 큰 도움이 되었으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주인되는 허씨들은 이 놈에게 불안(不安)을 느끼기 시작하였다.어느날 아주 사소한 일로 꼬투리를 잡고 다른 하인들을 시켜 몽둥이질을 했는데 아무리 후려쳐도 몸이 상하지 않고 벌떡벌떡 일어나더라는 것이다. 더 가혹한 형벌을 가하고 웃옷을 벗겼더니 이게 왠 일일까. 그 놈의 겨드랑이 밑에 번쩍거리는 날개가 달려 있었다고 한다.이를 본 사람들은 깜짝 놀랐을 뿐 아니라, 겁에 질려 비실비실 도망치는 자(者)까지 있었다. 주인인 허씨(許氏) 일가(一家)는 자기들의 처사(處事)에 대해 반성(反省)을 하면서 수습책(收拾策)을 의논했는데 결국 이 놈의 앙갚음을 당(當)하기 전에 없애기로 작정하고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 놈의 아들은 화(禍)가 자기에게도 미칠 것을 짐작하고 급히 도망을 갔는데, 그 뒤 장성(長成)하여 어엿한 지사(地師)(풍수지리(風水地理)를 아는 사람)가 되었다.
어느날 신분을 감추고 허씨 집을 찾아갔다. '이 댁 선산(先山)이 있는 곳이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인데 말이 물을 다 마셨으면 떠나는 법(法)이니 댁(宅)의 운세(運勢)도 이 곳을 떠나야 합니다.'라고 그럴 듯하게 말을 하였더니 주인이 '지사님,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고 물었다. 지사는 '옳지,되었구나.'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그야 어렵지 않습니다. 이 마을 일족이 모두 떠날 수는 없는 일이니, 방편(方便)으로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묘지(墓地)에서 다른 곳으로 이장(移葬)하면 된다.'고 하였다. 허씨들은 생활의 근거지를 옮기는 것보다야 길지(吉地)를 택하여 자자손손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묘터를 구해 이장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이장(移葬)하기로 결정하였다. 살부(殺父)의 원한(怨恨)을 품은 이 지사(地師)는 22년내에 일족(一族)이 망할 수 있는 곳을 잡아 '천하의 명당입니다. '자손만대로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거짓말을 하여 이장(移葬)케 하고 자기는 어디론지 사라졌다. 그 후 이곳 허씨 일족은 지사의 소망대로 곧 망했다고 한다.
○ 중촌(中村)
청운리(靑雲里)의 중심부(中心部)에 있는데 언제부터 취락(聚落)이 이루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 상촌 부락이 생겼을 무렵에 생긴 것이라고 한다.
이 부락에는 이종(李種)의 절의(節義)를 담은 이제재(夷齊齋)와 박세웅(朴世雄)의 강학(講學)하던 갈곡재(葛谷齋)가 있고, 그 밖에 김씨(金氏)의 경모재(景慕齋), 이씨(李氏)의 망원재(望遠齋) 등이 있다.
○ 적항(赤項)
옛날의 청운리(靑雲里)와 덕곡리(德谷里) 및 대항리(大項里) 일부(一部)까지가 포함된 대촌(大村)이었다. 16세기 후반 김담양(金潭陽) 삼형제(三兄弟) (일기(逸騏),일준(逸駿),일(逸)원)를 중심으로 김해(金海) 김씨(金氏) 일족(一族)이 전거(奠居)했던 곳이다. 지금 전(傳)해지고 있는 적항동안(赤項洞案)(동민(洞民) 상호간(相互間)의 친목(親睦)과 상호부조(相互扶助)와 간단한 동규(洞規) 등이 기록된 책)은 1609년 7월에 발기인(發起人) 35인으로 발족(發足),조직(組織)되었으며, 이 보다 약 8년 앞서(1601년 10월 17일) 발기인(發起人) 25인으로 발족한 북면동안(北面洞案)도 당시의 순수 민간 조직의 활동을 엿보게 해준다. 이들 양 동안(洞案)에 나타난 명칭(名稱)에 적항(赤項)으로 명시(明示)된 것으로 보아 적항이 북면 중에서도 으뜸가는 대촌(大村)으로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지금은 청운리(靑雲里)의 조그만 땀으로 전락(轉落)되어, 그 이름조차 잊혀져 가고 있다. 그러나 청운일원(靑雲一圓)에 아직도 적항(赤項)들,적항보(赤項洑) 등의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다.
○ 산성(山城)
마을 뒤산 제일 높은 봉 아래에 성(城) 터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곳 사람들의 말로는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유물이라고 추측들을 하고 있다.
이밖에 반달 모양으로 보인다고 해서 반월산, 한천(旱天)에 비를 비는 고강산정(顧崗山頂)의 기우단(祈雨壇),굿바위,그 밑의 마르지 않는 샘, 산성 하(下)에 있는 각산골, 횡세곡(橫洗谷), 세(洗)칭곡(谷), 어봉곡(魚鳳谷), 지득곡(池得谷), 불안곡(拂鞍谷) 등 수많은 지명들이 있으나 그에 담긴 유래를 찾을 길이 없다.
7. 대항리(大項里)
화악산(華嶽山)의 한 줄기 지맥(支脈)이 서쪽으로 뻗어내려, 허항산(許項山), 형제봉(兄弟峯), 명방현(明坊峴) 등으로 이어지고,다시 동으로 구부러져 동구(洞口) 쪽을 감싸고 있으니 이것이 마을 안산(案山)이다. 이 안산을 일자봉(一字峯), 또는 파초봉(芭蕉峯)이라고 부르고 있다. 화악산(華嶽山) 분수령(分水嶺)에 흘러내리는 물이 또한 마을 서쪽으로 작은 시내를 이루어, 그 형상이 흡사 항아리 같기도 하고 배(주(舟))같이 보이기도 한다고 하여 옛사람들이 옥호동천행주형(玉壺洞天行舟形)이라고 찬미(讚美)했다고 한다.
대항리(大項里)는 평전(平田),봉천(鳳泉), 상항(上項), 중항(中項), 하항(下項), 화남(華南), 정동(井洞) 등 7개의 자연 부락으로 되어 있다.이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확실치 않고, 고려 시대에 백씨(白氏)가 살았다고는 하나 역시 분명치 않다. 다만 지금 세거(世居)하고 있는 하씨(河氏), 황씨(黃氏), 장씨(蔣氏) 등이 1450년경을 전후(前後)하여 전거(奠居)하기 시작한 내력(來歷)만 남아 있다. 마을 이름이 한목, 또는 수동(壽洞)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수동(壽洞)이라는 이름은 이곳이 산수(山水)가 맑고 좋아 수(壽)를 누릴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옛날부터 화악산하(華嶽山下)에 4개의 수동(壽洞)이 있는데 그 중 3개동은 경북 청도군에 있고 1개동만 여기에 있는 셈이다. 옛부터 이름 있는 마을이 되어 경향(京鄕) 여러 곳에서 명사(名士)들이 많이 와서 살았고 또 여기서 태어나기도 하였다.
○ 상항부락(上項部落)
대항리(大項里)의 윗 부분에 해당하므로 윗목, 즉 상항(上項)이라고 한 것이다. 1454년(단종(端宗) 3년 을해년(乙亥年))에 사직(司直) 하비(河備)가 이곳에 복거(卜居)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자손들이 대대(代代)로 살게 되었다.
○ 영모재(永慕齋)
진양(晉陽) 하씨(河氏)의 재사(齋舍)의 하나이다. 영모(永慕)라는 것은 영원히 부모를 사모(思慕)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특별한 사연(事緣)이 있다.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일이다. 향교(鄕校)에서 공부하고 있던 어린 소년 하재정(河再淨)이 난리와중(亂離渦中)에 황급(遑急)히 한목 집으로 달려 왔으나, 연로(年老)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피란(避亂)을 할 수가 없었다. 이때 부모님은 거동(擧動)이 어려운 상태인지라 처남(妻男)인 운정(雲汀)의 진주(晉州) 유씨(柳氏) 유여주(柳汝周)에게 아들의 장래를 맡겼다. 하재정(河再淨)의 외숙(外叔)인 유여주(柳汝周)는 어린 생질(甥姪)을 데리고 경북(慶北) 청송(靑松)으로 피란(避亂)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참화를 면(免)할 수 있었다.그러나 10여 년간의 피란 끝에 귀향(歸鄕)해 보니 촌락(村落)은 황폐(荒廢)해 있었고, 부모님의 생사(生死)조차 알 길이 없었다.그는 외숙(外叔)인 유여주(柳汝周)의 주선(周旋)으로 마을 뒤쪽 한골에 터를 잡아 초당(草堂)을 짓고, 이곳에 기거(起居)하면서 전화(戰禍) 중에 여읜 부모(父母)를 영원(永遠)히 사모(思慕)한다는 뜻을 남겼다. 뒤에 영모재(永慕齋)라는 재액(齋額)이 붙게 되고 후손(後孫)들의 합력(合力)에 의해 재사(齋舍)가 확장(擴張), 이건(移建)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밖에 이 부락에는 동강재(東岡齋), 추모재(追慕齋), 보본재(報本齋), 두곡정(杜谷亭), 만회재(晩悔齋), 오월정(梧月亭) 등이 있으나 일일이 그 명칭의 유래를 설명할 수가 없다.
○ 중항부락(中項部落)(중땀, 중마을)
상항(上項)과 하항(下項)의 중간에 있어서 중마을, 즉 중항으로 불려진 것이다. 장수(長水) 황씨(黃氏) 일족(一族)의 집성촌(集姓村)이다.
처음 입주(入住)한 황학(黃鶴)은 유명한 방촌(村) 황희(黃喜) 정승(政丞)의 증손(曾孫)으로, 이조(李朝) 성종(成宗) 때에 호군(護軍)이라는 관함(官銜)을 가진 분이다. 퇴직(退職)한 뒤 이곳으로 낙향(落鄕)했는데 어떠한 연고(緣故)가 있었는지는 미상이다.
○ 첨모당(瞻慕堂)
황씨(黃氏)의 재사(齋舍)이다. 첨모(瞻慕)는 조선(祖先)의 분묘(墳墓)와 유적(遺蹟)을 첨망(瞻望), 사모(思慕)한다는 뜻이다. 처음 황종구(黃鍾耉)가 그의 고조(高祖)의 묘하(墓下)에 집을 짓고 김곡장(金谷庄)이라고 했는데, 현손(玄孫) 황기원(黃起源)이 현위치(現位置)에 이건(移建)하고 첨모당(瞻慕堂)이라고 하였다. 그 외에도 몽양재(蒙養齋), 복유재(復攸齋), 귀원정(歸園亭) 등이 있다.
○ 하항부락(下項部落)
대항리(大項里)의 아래 부분에 속하므로 아랫목, 즉 하항(下項)이라고 한 것이다. 이 부락 또한 취락(聚落) 형성의 시원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장춘수(蔣椿壽)가 부북 지동(池洞)(현 부북면(府北面) 제대리(堤大里))에서 이 부락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 시(時)에 화악산(華嶽山)으로 피란(避亂)하였다가 난정후(亂定後) 돌아와 후손들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에도 내독재(來讀齋), 영사정(永思亭), 묵와재(默窩齋), 추감재(追感齋), 사이당(四而堂) 등이 있다.
○ 남곤(南袞)이 딱밭
이조(李朝) 중종(中宗) 때의 문신(文臣) 남곤(南袞)의 태생지(胎生地)이다. 남곤은 원래 의령(宜寧) 사람인데, 그의 부친이 하비(河備)의 사위로 처가(妻家)인 이 곳에 와 살았다. 그의 제이자(第二子)로 태어난 남곤은 외사촌(外四寸)인 하충(河沖)과 더불어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고, 성종(成宗) 25년에 급제(及第), 출사(出仕)하여 대사헌(大司憲), 대제학(大提學), 영의정(領議政)을 지내고 문경(文敬)이라는 시호(諡號)까지 받았다. 그런데 중종조(中宗朝)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주도(主導)하여 조광조(趙光祖) 등 유명한 신진(新進) 학자(學者)들을 죽인 사건으로 그의 사후(死後)에 간적(奸賊)으로 몰려 삭탈관직(削奪官職)되었다. 지금도 상항(上項) 457번지 부근 일대를 '남곤이 딱밭'이라고 불려진다.
○ 삼지당(三池塘)
남곤(南袞)과 같은 인물을 낳았다 하여 남곤 사후(死後), 이곳 지맥(地脈)을 끊기 위해 배(주(舟))의 형국(形局)인 대항에다가 세 곳에 못을 팠다고 한다. 이 곳이 곧 삼지당(三池塘)소라고 부르는 곳이다. 지금은 3개처의 지당(池塘) 중 두 곳은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다만 하항(下項) 동구(洞口) 산 밑에 이끼 낀 낡은 못이 하나 남아 있을 뿐이다.
○ 평밭
화악산(華嶽山) 동쪽 봉(峯) 아래 쪽에 자그마한 취락(聚落)이 있는데, 언제부터 사람이 거주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산 위에 약간 평평한 곳이라고 해서 평전(平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 벽수동(碧水洞)
상봉(上峯)의 분수령(分水嶺)에서 나오는 물과 평전(平田) 분지(盆地)에서 모여든 물이 합해져 흐르는 계곡(溪谷)에 자그마한 폭포(瀑布)가 있고 그 밑에 파여진 작은 못이 있어 인근 주민들이 하절(夏節)의 피서(避署)를 즐긴다. 이것이 벽수폭포(碧水瀑布)이다. 계곡(溪谷) 주위(周圍)에 푸른 수목(樹木)이 우거지고 맑은 물이 항상 있는 곳이라고 해서 벽수동(碧水洞)이라고 한다.
○ 봉천동(鳳泉洞)
화악산(華嶽山) 중복(中腹)에 옛날 봉천사(鳳泉寺)라는 신라(新羅) 고찰(古刹)이 있었고, 절 밑에 5, 6호의 민가(民家)가 살았다. 지금도 탑(塔),부도(浮屠) 등 석조물(石造物)의 단편(斷片)과 민가(民家)의 흔적이 남아 있다. 왜 봉천(鳳泉)이란 이름이 붙여졌는지 알 길이 없다. 절은 임진왜란 후까지도 있었는데 인근 산에 묘(墓)를 쓰고부터 폐사(廢寺)가 되었다는 말이 전해 오고 있다. 현재 문헌상으로 남은 것이 없고, 오직 손태좌(孫台佐)의 시(詩) 한 수(首)가 구밀주지(舊密州誌)에 남아 있을 뿐이다.
○ 망바위
평전(平田) 분지(盆地) 가운데 있는 허항산(許項山) 꼭대기에 큼직한 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이 바위가 큰 평밭과 작은 평밭을 굽어보며 망(도둑을 지키기 위해 척후병 역할을 한다는 뜻이 있음)을 본다고 하여 망바위라고 이름한 것이다.
○ 양수바지
평전(平田)에서 벽수동(碧水洞)을 거쳐 내려오는 물과 봉천(鳳泉)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수(合水)되는 지점의 이름이다. 이 지점에서 동쪽을 보면 산복(山腹)쯤에 옛날 은광(銀鑛)이 있어 채은(採銀)했다는 폐광(廢鑛)된 굴이 있다. 이 곳을 은(銀)구더기라고 한다.
○ 새밭등(嶝)
형제봉(兄弟峯)을 마주 보며,아주 가파른 암벽(岩壁)의 산인데 그 밑으로 두침천(杜沈川)이 흐르며, 철쭉꽃이 장관(壯觀)을 이루는 곳이다. 철쭉등이 아니고 새밭등이란 이름이 붙어 있음이 기이하다. 아마 어느 시절에는 새풀이 무성하였거나 새풀에 얽힌 사연이 있었으리라고 여겨진다.
○ 황등걸굴
형제봉 남쪽 팔분산복(八分山腹)에 넓지막한 들겅(산 비탈에 부서진 암석만 있고, 풀이나 나무가 없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십척사방(十尺四方)의 석굴(石窟)이 있다. 추운 겨울에도 언제나 온기(溫氣)가 감돌았다고 한다.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중땀에 살던 황씨(黃氏)가 피란을 하였다고 한다. 황씨(黃氏) 피란굴이라 하여 황등걸굴이라고 이름 지어졌는지도 모른다.
○ 배나무정(이정(梨亭))
새밭등 아래 약간 평평한 평지가 있다. 이곳을 배나무정이라고 한다. 여기 길 가에 옛날 큰 배나무가 서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길 가는 행인이나 마을 나무꾼들이 이 배나무 밑에서 쉬어 갔다고 한다.
○ 맷돌 바위(연마대-硏磨臺)
마을 뒤쪽 약간 높은 곳에 맷돌 모양의 큼직한 바위가 맷돌 바위다. 옛날 마을 서당(書堂)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간혹 이곳에 올라와 휴식을 즐기던 곳이다.
○ 굴머리 부락(部落)
언제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는지 분명치 않으나, 이조(李朝) 순조시(純祖時)라고 하는 말도 전해온다.동명(洞名) '굴머리'는 어떤 연유로 생겼는지 알 길이 없다. 마을 뒤쪽의 고개를 굴머리 고개라고 하는데,청도면민(淸道面民)의 교통로이다. 이 마을에 있는 추모재(追慕齋)는 순조조(純祖朝)에 전거(奠居)한 최광적(崔光迪)의 현손(玄孫)인 최상해(崔尙海)가 그 조상(祖上)의 유덕(遺德)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
○ 정동(井洞)(사랑곡-仕郞谷), 사랑곡-巳郞谷)
이 곳에 취락이 형성된 年代는 분명하지 않다. 그 옛날은 대항리(大項里) 적항(赤項)이었다고 하는데 동면(同面) 청운리(靑雲里)가 적항리(赤項里)였던 시절에 대항리(大項里) 일부가 적항(赤項)에 속했던 것을 설명하는 듯하다.
동명(洞名)의 연유(緣由)는 알 길이 없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밀성(密城) 박씨(朴氏) 일문(一門)이 전거(奠居)하고 있다. 이 곳에 사정재(思井齋)가 있으니 박세건(朴世健)의 유덕(遺德)을 추모(追慕)하기 위한 건물이다.
○ 기우소(祈雨所)
화악산(華嶽山) 정상(頂上) 서봉하(西峯下)에 있는 용시덤에 용샘이 있는데,한발(旱魃)이 심(甚)할 때 기우제(祈雨祭)를 지낸다.
○ 운주암(雲住庵)
화악산(華嶽山) 주봉(主峯) 문월대(聞月臺)의 아래 쪽에 있는 암자이다. 신라(新羅) 고찰(古刹)인 봉천사(鳳泉寺)에 속했던 암자(庵子)로 창건(創建) 연대(年代)는 알 수 없다. 본사(本寺)가 없어지고 청연암(靑蓮庵),백연암(白蓮庵) 등 부근 암자(庵子)들이 다 폐허(廢墟)가 된 뒤에도 이 운주암(雲住庵)이 그대로 존속되어 있는 것은 화악산에서 차지한 그 절묘(絶妙)한 위치(位置) 때문인 것 같다. 소금강(小金剛)이라고 할만한 아름다운 암벽(岩壁)을 배경(背景)으로 하고, 만장(萬丈)의 층애(層崖) 위에 자리잡아 남쪽으로 백리산천(百里山川)의 운물(雲物)이 일망무진(一望無盡)한 안계(眼界)를 열어준다. 한때 불도(佛道)에 정진(精進)하는 학승(學僧)이 있었던 것 같다. 화악산(華嶽山) 운주암(雲住庵) 간행(刊行)이라는 간기(刊記)가 있는 불서(佛書)가 서울의 장서가(臧書家)의 서가(書架)에 꽂혀 있는 것을 보아도 알 만하다.
운주암이란 이름에 대해서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암자의 위치가 높아 구름이 항상 머물러 있다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명산을 돌아다니는 승(僧)들이 구름처럼 와서 머물다가 또 구름처럼 떠나 버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8. 퇴로리(退老里)
화악산(華嶽山) 아래 산개야벽(山開野闢)한 곳에 자리 잡은 마을로서,부북면(府北面)의 북부(北部) 맨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오른쪽에 대항(大項), 왼쪽에 위양(位良)을 두고 중앙(中央)에 한 국면을 이룬 퇴로리(退老里)는 교동(校洞), 다원(茶院), 사포(沙浦) 등과 함께 밀양(密陽)의 명기(名基)의 하나로 손 꼽히고 있다. 마을 뒤에 돗대산이 솟아 있는데, 이 산 줄기가 서쪽으로 후조강(後彫岡)에 이어져서 용현(龍峴)까지 뻗어, 동쪽에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옥교산(玉轎山)이 둘려 있으며,남으로는 나지막한 용두산(龍頭山)이 완연미여(麗)한 자태(姿態)로 맑은 호수(湖水)를 감싸 안은 채 마을 앞 안산(案山)이 되어 있다. 마을에서 바라보면 안산(案山) 너머 백리 밖의 봉만(封巒)들이 개인 하늘에 촉촉(矗矗)하게 열립(列立)하여 더욱 미관(美觀)을 드러내고 있다.
퇴로(退老)라는 마을 이름은 원래 우리 말로 무리채이다. 어떤 연유(緣由)에서 '무리채'라는 이름이 나왔는지 어원(語源)은 알 수 없지만 무리채의 원형(原型)은 '물리 채',혹은 '물리 치'라고 생각된다.따라서 그것을 한자(漢字)로 대치(代置)한 것이 퇴로(退老)라고 여겨진다. '물리'는 '퇴'에 해당되고,'치'는 '로'에 해당된다.'치'는 고려(高麗) 이래(以來) 몽고어의 '적(赤)'(치)에서 온 것으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사람을 존대(尊待)하는 말로 '로'字를 쓰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유물(遺物)(주로 토기(土器))이 여러 군데서 많은 양(量)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취락 형성이 아주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정한 성씨(姓氏)가 전거(奠居)한 것은, 올려잡아도 400년을 넘지 않은 것 같다. 고로(古老)들의 말에 의하면 처음 입주(入住)한 것이 재령(載寧) 이씨(李氏)이고, 경주(慶州) 최씨(崔氏)와 순창(淳昌) 설씨(薛氏)도 함께 살았다고 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은 후에 그럭저럭 산거(散居)해 버리고 얼마 뒤에 함평(咸平) 이씨(李氏)가 들어와 살면서 무과(武科)의 여러 수령(守令)과 우승지(右承旨) 등 사환(仕宦)이 있었으며 뒤에 여주(驪州) 이씨(李氏) 일가(一家)가 복거(卜居)하면서 학문(學問)과 문염(文艶)으로 문호(門戶)가 창성(昌盛)하여, 드디어 퇴로(退老)라는 이름이 영남일대(嶺南一帶)에 널리 알려졌다.
○ 화악의숙(華嶽義塾). 정진학교(正進學校)
화악산(華嶽山) 아래에 설립(設立)한 의(義)로운 학교라 하여 화악의숙(華嶽義塾)이라 하였고, 이세국민(二世國民)을 바른 길로 나아가게 한다는 취지에서 정진학교(正進學校)라고 한 것이다. 구한말(舊韓末)에 이 마을의 이익구(李翊九), 이능구(李能九), 이명구(李命九) 등 여주(驪州) 이씨(李氏) 삼형제(三兄弟)의 자질(子侄)들이 명륜(明倫), 정덕(正德), 이용후생(利用厚生)이란 창학강령(創學綱領)을 표방(標榜)하고, 실학사상(實學思想)에 입각(立脚)하여 고유전통(固有傳統)을 지키면서 신문명(新文明)을 도입(導入), 동민(洞民)은 물론, 원근(遠近)의 학도(學徒)들을 계몽(啓蒙), 교육(敎育)한 곳으로 우리 나라 개화기(開化期)의 선구자적(先驅者的) 역할(役割)을 한 역사적(歷史的)인 學塾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夜間 農民 學校를 設置하여 住民 敎導에 힘쓰다가 일본에게 국권(國權)을 분취당(奮取當)함에 폐교(廢校)의 쓰라림을 당했으나 삼(三).일(一) 독립운동(獨立運動) 후에 다시 화악의숙(華嶽義塾)을 부활(復活)하여 정진(正進)이란 이름으로 사재(私財)를 투입(投入), 학교(學校)를 경영(經營)하였다. 그 후 일정(日政)의 박해(迫害)로 휴폐교(休廢校)의 기구한 운명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교정(校庭)에 서 있는 창학기념비(創學記念碑)는 끈질기게 지켜온 민족혼의 상징으로 선구자의 공적을 기리고,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향(京鄕) 각지(各地)에서 활동하는 이 학교 출신 동문들이 뜻을 모아 그 후손들의 협조로 세운 것이다.
○ 명당(名堂)터
퇴로 본땀 중앙부에 있는 집터인데, 옛부터 명당터로 알려진 곳이라고 한다. 지금도 도지정문화재(道指定文化財)로 지정된 여주(驪州) 이씨(李氏) 소유(所有)의 고가(古家)(청덕당(淸德堂) . 쌍매당(雙梅堂))가 명당터를 지키고 있다.
○ 덕껄
퇴로 본땀을 중심으로 동쪽 각단과 서쪽 각단으로 나누어지는데, 덕껄은 동쪽 각단의 한 부분이다. 덕껄의 뜻은 미상이다.
○ 긴등(장등-長嶝)
퇴로(退老)와 위양(位良)의 경계가 되는 돗대산 동쪽 줄기의 길다란 능선(稜線)이 긴등이다. 그 능선(稜線)을 따라 올라가는 꼬불꼬불한 길이 산을 넘어 다시 평전(平田)(평밭)을 지나 화악산(華嶽山)에 오르게 된다. 이 등성이 길은 등산로(登山路)로서는 아주 일품(一品)이다. 등성이에 올라서면 남으로 안계(眼界)가 탁 트여 멀리 상남(上南) 평야(平野)와 영남루(嶺南樓)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 사문동(사문골-沙門洞)
돗대산 줄기가 좌우 양쪽으로 뻗어내려 마치 두 팔을 벌린 듯한데 조그만 개울을 사이에 두고 동은 관음곡, 서는 제안곡(齊安谷)이라고 한다. 그 사이에 평평한 곳이 있는데 옛날 절이 있었다고 전해 온다. 요즘도 묵은 땅을 일구면 기와 조각과 청자 파편이 나온다고 한다. 구한말에 용재(庸齋) 이명구(李命九)가 여기 터를 잡아 원정(園亭)을 조성(造成)하면서 사문(沙門)과 비슷한 음(音)을 취(取)하여 정명(亭名)을 '삼은(三隱)'이라고 하였다.
○ 나한등(羅漢嶝)
퇴로(退老)와 위양(位良)의 구장동(九壯洞) 사이에 경계(境界)를 이룬 평퍼짐한 구릉(丘陵)인데, 불교(佛敎)에 인연(因緣)한 이름이다. 한편 사장등(射場嶝)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옛날 이 마을에 함평(咸平) 이씨(李氏) 일족(一族)이 무예(武藝)를 숭상(崇尙)하여 활쏘기 훈련(訓練)을 하던 터였다고 한다.
○ 광대정(廣大亭)
덕껄과 나한등(羅漢嶝) 사이에 있는 논밭 일원(一圓)을 광대정이라고 한다. 옛날 양반들이 무슨 경축(慶祝) 행사(行事)가 있을 때 광대(廣大)(창우(倡優))들을 불러 연희(演戱)를 하게 했는데, 이곳 광대정(廣大亭)은 그러한 연유(緣由)에서 얻어진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아마 어느 한 때에 광대들의 연희의 장소가 되었던 모양이다. 무슨 정자(亭子)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 평갓(평산-平山)
나한등(羅漢嶝) 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맥(脈)이 이곳에서 나즈막한 구릉(丘陵)이 되어 있다. 이 곳을 평갓이라고 하는데 그 구릉의 끝이 마을 앞 호수에 쑥 내민 곳이다.
○ 솔끝
평갓의 구릉 끝이 호수에 쑥 내민 곳인데, 우거진 소나무가 많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나한등에서 평갓으로 솔끝까지 알맞은 굴곡의 오솔길이 무리없이 소요(逍遙)할 수 있는 산책로(散策路)이다. 푸른 소나무 그늘에 앉아 낚시하는 태공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 퇴로리사(退老里社) 당(堂)집
마을 어귀에 몇 백 살의 한 그루 고송(古松)이 길 위를 덮고 있는데, 아주 운치(韻致)스럽다.이에 어울리게 그 그늘 밑에 아담한 사당(祠堂)이 있으니, 퇴로동신(退路洞神)을 뫼신 곳이다. 마을마다 있는 당(堂)집이지만 이 마을 당(堂)집은 원시(原始) 무속적(巫俗的) 신앙(信仰)에서 한 걸음 나아가 유교화(儒敎化)한 것이 특색이다. 퇴로리사(退老里社) 이봉시(移奉時) 고사(告詞) 육장(六章)(성헌집(省軒集) 권일소재(卷一所在))이 그것이다.
그리고 돗대산 정상(頂上) 바로 아래 깎아지른 듯한 암벽(岩壁)이 있다. 인공(人工)으로 지맥(地脈)을 끊은 것이 분명할 뿐 아니라, 수십 길이 되는 암벽에는 빨간 생피(생혈(生血))를 뿌린 듯한 빛깔이 보인다. 전해오는 말로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명(明)나라 장수(將帥) 이여송(李如松)이 온갖 술사(術士)를 데리고 와서 조선(朝鮮)의 산천지리(山川地理)를 살폈는데 어느 곳이든지 산천(山川)의 정기(精氣)를 받아 큰 인재(人材)가 나올 만한 곳이면 현지(現地)에 가서 산맥(山脈)을 끊었다고 한다. 이곳도 그 때 한 짓이라 한다. 믿을 수 없는 말이기는 하나 그 형태로 보아 수백 군졸을 투입시켜 인위적으로 끊은 것이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 새청등(사천왕등(四天王嶝))
돗대산의 왼쪽 줄기가 마을 뒤로 내려와서 멈춰진 등성이의 이름이다. 불교(佛敎)에 관계되는 이름이지만 이유를 알 수 없다. 이 새청등의 동쪽 기슭에 보본당(報本堂), 천연정(天淵亭)이 있고, 천연정(天淵亭) 뒤에 도지정문화재(道指定文化財)(지방유형문화재(地方有形文化財) 제177호)인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先生)의 문집(文集) 판목(板木)을 위시(爲始)하여 자유헌(自濡軒) 이만백(李萬白),성헌(省軒) 이병희(李炳熹)의 문집(文集) 판목(板木)이 함께 보관(保管)된 장판각(藏板閣)이 있다.
○ 담뒤 골목
마을 본땀 중앙부에 기와 지붕이 연긍(連亘)해 있고, 높은 원장(垣墻)사이로 골목이 있는데 담뒤 골목은 담(장(墻))뒤에 있는 약간 으석한 골목이다. 그러나 지금은 인가(人家)의 대문(大門)이 바로 골목 입구를 향해 열려 있고 사람들의 출입이 잦아 옛날과 달라졌다.
○ 활자소(活字所) 자리
동쪽 각단에서 본땀으로 들어오는 길목 담모퉁이에 약간 높은 밭둑이 있는데, 그것을 활자소 자리라고 한다. 구한말(舊韓末)에 화악의숙(華嶽義塾)을 설립할 무렵 여기 활자소(活字所)를 세워 여러 가지 양서(良書)를 출판(出版)하였다. 활자소(活字所)는 여기에 두고 출판사(出版社)인 동문사(同文社)는 본땀 318번지에 있었다. 여기에서 간행(刊行)되어 간기(刊記)가 붙어 있는 책들이 지금도 여러 종(種)이 있다. 항재집(恒齋集), 정존헌집(靜存軒集), 독사차기(讀史箚記), 시문선요(詩文選要), 창선감의록(倡善感義錄) 등이 그것이다.
○ 잠실(蠶室) 터
잠실(蠶室)이 있었던 곳이다. 본땀 서측(西側)을 감싸 안은 이중(二重)의 개울 가운데 안 쪽 개울 바로 곁에 지난 날 잠종제조소(蠶種製造所)가 있었다. 일제(日帝) 때 우리 나라 사람이 경영하는 가장 큰 규모의 것이었다.이 마을에 뽕밭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은 터만 남아 일반 농작(農作)을 하고 있다.
○ 기업소(企業所) 자리
잠실 터와 대각선(對角線)을 이루는 동쪽 개울 건너 한 모퉁이에 기업소(企業所) 자리라고 불리어지는 곳이 있다. 지난날 육일염직소(六一染織所)라는 기업(企業)을 경영(經營)했던 장소이다.
○ 산넘고개
돗대말리의 서편(西便), 박등(朴嶝)과 서당(書堂)갓 사이에 잘룩하게 낮은 곳이다. 이 마을에서 벽수동(碧水洞)으로 가기 위해 산을 넘는 고개목이다. 벽수동 폭포는 산넘물탕이라 하여 이 마을 사람들에게 애용되고 있다.
○ 박등(朴嶝)
옛날 이 마을에 박씨(朴氏)가 몇 집 문호(門戶)를 이루고 살았는데, 그 후 청도면(淸道面)으로 이주(移住)하고, 그들의 선조(先祖)의 묘(墓)가 산넘고개로 올라가는 길 오른 편에 남아 있어 박등으로 불리어진다.
○ 서당(書堂)갓
산넘 고개로 올라가는 길 왼편의 높고 넓은 산판이 서당갓이다. 서당은 함평(咸平) 이씨(李氏) 재사(齋舍)를 가리키는 것으로 마을 사람들이 이 재사(齋舍)를 구서당(舊書堂)으로 불러오고 있고, 이에 딸린 산판을 서당갓이라고 말한다.
○ 어분(魚盆)골(어분동-魚盆洞)
마을 북서쪽에 두 개의 조그만 개울이 있고, 두 개울 사이에 골짜기와 전답(田畓)이 있어 어분골이라고 한다. 어분의 뜻은 알 수 없다.
동쪽 개울 가에 추모재(追慕齋)라는 오랜 재사(齋舍)가 있다. 함평(咸平) 이씨(李氏)들이 이 마을에 시거(始居)한 그의 조상(祖上) 李琥를(琥를) 추모(追慕)하여 지은 것이다.
○ 불당(佛堂)골(불당곡-佛堂谷)
옛날 무슨 불당(佛堂)이 있었다는 전설(傳說)이 있고, 이 계곡의 하류 지점에서 불교에 관계되는 돌로된 조각 파편(破片)과 불에 타고 남은 불경(佛經)의 목판(木板)조각들이 발견되기도 했으나, 지금은 보존되어 있지 않다.
○ 굼거렁(운계-雲溪)
불당골과 어분골의 작은 개울물이 합해져서 마을 본땀의 서쪽을 감돌아 마을 앞 사우정(四友亭) 쪽으로 향하는 거렁이다. 어원은 알 수 없다. 이 거렁은 본땀에서 서쪽 각단으로 건너가는 길목이다.
○ 제가골(제가곡-霽佳谷)
마을 서쪽 후조강(後彫岡)의 작은 계곡 개울물이 많지 않으나 비가 개인 뒤에 경치(景致)가 아름답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제가골 아래쪽 우편(右便)에 임학(林壑)이 아늑한 가운데 서고정사(西皐精舍)와 한서암(寒棲庵)이 있다.항재(恒齋) 이익구(李翊九)의 별업(別業)이다. 지금도 매년 봄에 밀양 인사들이 모여 계회(契會)를 하고 있는 곳이다.
○ 동산마당
제가골에서 서고정사(西皐精舍)의 뒤를 돌아나오면 후조강(後彫岡)의 산줄기가 뻗어내려 조그만 등성이를 이루었는데 그 등성이 위의 약간 평평한 곳이 동산마당이다. 옛날 석음재(惜陰齋)가 있던 자리이고,한 때 화악의숙(華嶽義塾)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집이 헐린 뒤에 학동(學童)들의 놀이터가 되어 동산마당이라고 불리어졌다.
○ 용터(용현-龍峴)
후조강의 산맥이 서남쪽으로 뻗어내려 호수(湖水)를 굽어보며 등성이가 되어 있는데 그 아래에 들(野)이 있다. 이 들을 용터라고 하는데 아마 호수를 감싸고 있는 용두산(龍頭山)과 마주 보기 때문일 것이다.그 등성이를 돌아 대항(大項)으로 가는 고개를 용터 고개라고 한다. 고개 밑에 정존헌(靜存軒) 이능구(李能九)의 유지(遺址)가 있고, 그 곳에 용현정사(龍峴精舍)가 있다.
○ 사우정(四友亭)
마을 뒷산에서 흘러내리는 동서 양쪽 개울물이 마을 앞에 와서 합수(合水)되는데, 그 지점 근처에 약간 높은 단(壇)모양으로 된 곳이 있고, 수백 년된 느티나무 네 그루가 있었는데 지금은 노후(老朽)해서 죽고, 다만 한 그루의 잔해(殘骸)만이 남아 있다. 이 마을에 살던 함평(咸平) 이씨(李氏) 사종형제(四從兄弟)(봉년(鳳年),송년(松年),익년(益年),학년(鶴年))가 각기 한 그루씩 나무를 심고, 매일 이 곳에 모여 소영(嘯詠)하며 우애(友愛)를 돈독(敦篤)히 하였다고 한다.그로부터 이곳을 사우정(四友亭)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우경평(耕坪)
정진학교(正進學校) 앞에서 호반(湖畔) 일대(一帶)에 뻗혀 있는 들녘을 우경평이라고 한다. 짝을 지어 경작(耕作)한다는 뜻이다. 논어(論語)에 은자(隱者)인 장저(長沮), 걸익(桀溺)이 우이경(而耕)이라는 고사(故事)가 있는데 거기서 따온 이름이다.용터의 들(야(野))과 접해 있다.
○ 치분골(초분동-草墳洞)
용터에서 대항리(大項里)로 가는 용터 고개 한 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 전염병으로 어린 아이가 죽으면 시체를 흙에 묻지 않고 초(草)분으로 포장(包裝)하여 골짜기에 버려 두어 그대로 썩어 없어지게 했는데 그것을 초분이라 하고 그 장소를 '애장터'라고 하였다. 이 초분골은 곧 옛날의 애장터이다.초분이 치분으로 와전(訛傳)된 것이다.
○ 퇴로(退老) 수리(水利) 못(용호-龍湖), 남호-南湖) , 남호-藍湖)
1931년에 조성(造成)된 저수지(貯水池)로 넓이 63정보(町步)이고, 둘레가 10리나 되는 큰 호수(湖水)이다. 가산리(佳山里) 뒤에 있다고 하여 가산지(佳山池)라고 이름한 적이 있지만, 그것이 부자연(不自然)하다고 하여 퇴로(退老) 마을 앞에 펼쳐진 이 호수(湖水)를 누구나 퇴로(退老) 수리(水利)못으로 부르고 있다. 금병(錦屛)같은 용두산(龍頭山)에 감싸인 거울 같은 이 호수(湖水)를 좀더 아화(雅化)시켜 부르기 위해 용호(龍湖)(용두산(龍頭山)과 관련시켜)라 하기도 하고, 마을 남쪽에 있으므로 남호(南湖)라 하기도 한다. 또 남호(南湖)와 음(音)이 같음을 취하여 남호(藍湖)라 하기도 한다.
○ 큰샘이껄
마을 앞 서편 약간 낮은 곳에 큰샘이라는 우물이 있다. 얼마나 오래된 샘인지는 모르지만 문자 그대로 대한불갈(大旱不渴)이다. 전동민(全洞民)의 8할이 식수(食水)로 사용하고 있다. 샘의 둘레를 큰샘이껄이라고 한다.
9. 위양리(位良里)
화악산(華嶽山) 줄기를 등에 업고, 동(東)으로 옥교산(玉轎山), 동남(東南)으로 차일봉(遮日峯), 남으로 병산(屛山)(병산(兵山)), 서(西)쪽으로 나지막한 구릉(丘陵)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마을이다.
본땀인 양양(陽良) 부락과 신기(新基), 참나무정, 구장동(九壯洞), 신구장동(新九壯洞), 내양(內良)(지싯골), 도방동(道方洞) 등의 작은 부락들로 한 이(里)를 이루고 있다. 본땀 앞에 양양제(陽良堤)(위양제(位良堤))가 있으며, 뒤쪽으로 말치 고개(마치령(馬峙嶺) 또는 마편령(馬鞭嶺)), 양지골, 상투바위, 제석등, 말구리, 보득골 등이 있다.
밀주구지(密州舊誌)에 동국여지승람을 인용(引用)하여 이 마을이 원래 양양부곡(陽良部曲)이었다고 밝혀 놓았다. 부곡(部曲)이란 대체로 신라 시대에 설치된 것이고, 또 부곡의 단위가 한 촌락(村落)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몇 개의 촌락을 포함한 지방 행정 말단의 독립된 한 단위를 뜻하는 것이니까 아마 옛날의 양양부곡(陽良部曲)은 지금의 위양리(位良里)에 한하는 것이 아니고, 위양리(位良里)의 주변 지역 일원을 가리켰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려말, 이조(李朝)초에 부곡이 해체되어 일반 촌락으로 분화(分化)되었을 때, 종래 부곡(部曲)의 중심지, 즉 부내(部內)에 해당하는 마을이 부곡의 명칭을 그대로 가지고 내려오는 관례(慣例)에 비추어 볼 때, 현 위양리(位良里)는 양양부곡(陽良部曲) 당시의 부내(部內)였음을 알 수 있다.
이조(李朝) 초엽(初葉) 이래(以來) 손씨(孫氏) 일족(一族)(손태좌(孫台佐), 손태우(孫台佑), 손한(孫翰) 등)이 세거(世居)하였고, 임진왜란(壬辰倭亂) 전에 직장(直長) 권(權)치가 그의 외가(外家) 곳인 도방동(道方洞)에 전거(奠居)하였는데 그의 종질(從侄) 권삼섭(權三燮)이 직장(直長)을 좇아 양양(陽良)에 처음 살게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시(時)에 진의(陳誼)가 내양(內良) 제석동(帝釋洞)에서 난을 피하고 이내 거주하였으며, 영조(英祖) 연간(年間)에 김박(金璞)이 도방동(道方洞)에 전거(奠居)한 기록을 볼 수 있다. 마을 이름이 위양(位良)으로 된 까닭은 알 수 없지만 양양부곡(陽良部曲)의 양양(陽良)에서 전화(轉化)되어 온 것임을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 양양부락(陽良部落)
위양리(位良里)의 본땀이다. 취락(聚落) 형성(形成)의 내력(來歷)은 분명치 않다. 원래 손씨(孫氏)의 세거지에 손충보(孫忠輔)의 여(女)서 권삼섭(權三燮)이 입주(入住)하여 지금 권씨(權氏) 자손(子孫)들이 자작일촌(自作一村)을 이루고 있다. 반면 손씨(孫氏)는 임진왜란(壬辰倭亂) 후에 영산길곡(靈山吉谷)으로 이사(移徙)했다고 한다.
○ 신기(新基)
양양제(陽良堤) 못둑 바로 뒤쪽인데 왜정시(倭政時)에 생긴 새 터이다.
○ 참나무정
이 부근에 참나무가 울창하여 나무 그늘에 사람들이 모여 놀면서 침나무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4, 5호가 살고있다.
○ 양양제(陽良堤)
옛날에 물을 담은 큰 못(호택(湖澤))의 둑을 제(堤)라고 하는데, 이 양양제(陽良堤)도 마찬가지다. 물론 둑을 쌓아 강수(江水)의 침입을 막는 수산제(守山堤)와 같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 고대의 저수지(貯水池)를 제(堤)라고 한다. 이 양양제(陽良堤)도 일종의 저수지이다. 그 시원(始原)은 알 수 없지만 양양부곡 시대까지 소급(遡及)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그 명칭도 부곡(部曲)에서 따 온 것으로 볼 것이다. 현재 주위 경관과 풍치가 좋다. 본도지방문화재자료(本道地方文化財資料) 167호로 등록(登錄)되어 있다.
못 한가운데 조그만 섬(도서(島嶼))들이 점철(點綴)되어 있고, 그 중 한 곳에 아담한 정자(亭子)가 있어 완재정(宛在亭)이라는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권씨(權氏)들이 그의 조상(祖上)인 학산(鶴山) 권삼섭(權三燮)을 위해 지은 것이다. 정명(亭名)은 시경(詩經)의 완재수중앙(宛在水中央)(완연히 물 한가운데에 있다)에서 취해 온 것이다.
○ 구장동(九壯洞)
장차(將次) 이곳에 구명(九名)의 장사(壯士)가 나와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 큰 일을 해 낼 것이라는 희망적(希望的)인 예언(豫言)이 전한다. 명(明)나라 장수(將帥) 이여송(李如松)이 지사(地師)로부터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지맥(地脈)을 절단(切斷)한 곳이라고 한다.
일설(一說)에는 구명(九名)의 장원급제(壯元及第)가 나오게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문과지상주의(文科至上主義)가 풍토화(風土化)된 이조(李朝) 말기(末期)에 만들어진 이야기로 여겨진다.
○ 신구장동(新九壯洞)
구장동(九壯洞)에서 퇴로리(退老里)로 넘어가는 등성이 부분에 새로(왜정시(倭政時))생긴 마을이다. 지금은 함평(咸平) 이씨(李氏) 3,4호가 살고 있다.
○ 내양부락(內良部落)
내양(內良)이란 위양(位良) 안쪽 동네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지싯골이라고 한다. 지싯골은 제석동(帝釋洞)의 와전(訛傳)된 명칭(名稱)인데 옛날 이 골짜기 서편에 제석사(帝釋寺)라는 암자(庵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以後) 여양(驪陽) 진씨(陳氏)가 사는 동네이다.
경모당(景慕堂)는 진씨(陳氏)의 상조(上祖) 진총후(陳寵厚), 진준(陳俊), 진(陳)화(모두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나오는 유명(有名) 인물(人物))를 경앙(景仰)하여 봉사(奉祀)하는 학강사(鶴岡祠)의 제숙소(齊宿所)이고, 모선재(慕先齋)는 진씨(陳氏)의 입향(入鄕) 선조(先祖) 진의(陳誼)를 추모(追慕)하는 재사(齋舍)이다.
○ 도방동(道方洞)
일명 도방동(到榜洞)이라고 한다. 위양리(位良里)로 들어오는 길목이라는 뜻이라고 하나 분명치 않다. 임진왜란 전에 권(權)치가 전거(奠居)하면서 동네 이름이 알려졌다고 한다. 영조조(英祖朝) 때에 김해(金海) 김씨(金氏) 일족(一族)이 입주(入住)하여 지금 그 자손들이 모여 살고 있다.
삼모재(三慕齋)는 김씨(金氏)의 명조(名祖)인 극일(克一), 일손(馹孫)(탁영(濯纓)), 대유(大有)(삼족당(三足堂))세 분을 추모(追慕)하여 지은 재사(齋舍)이다.
○ 말치 고개(마치령-馬峙嶺), 마편령-馬鞭嶺)
부북면에서 상동면 금산리 쪽으로 넘어가는, 도방동 뒤쪽에 있는 고개길이다. 그 옛날 이 길을 지나는 길손이 고개마루에 오르면 말을 쉬게 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 곳에는 숱한 애환(哀歡)이 얽힌 이야기가 숨어 있음직 하다. 여기에 있는 장군 발자국과 그 밑에 있는 똥 바위 등은 말을 타고 가던 장군의 이야기일 것이다. 이 길은 옛날 한양(漢陽) 서울로 내왕(來往)하던 대로(大路)였던 곳이다.
이 밖에도 양지바른 골이라고 양지골, 선비의 상투 모양으로 생겼다고 상투 바위, 큰 산은 아닌데도 북풍을 잘 막아준다고 해서 대산(大山)이란 이름을 붙여 불러온다고 한다. 말의 굴레같은 모양의 지형이라고 말구리라는 지명이 나온 것도 그럴사하다.
○ 보득껄
양양(陽良) 부락 동구에 있는데 외래객(外來客)이오면 길을 안내하였던 곳이었다. 왜 보득껄인지 알 수 없다.
○ 나팔등
퇴로리(退老里)와의 경계 지점에 있는데 옛날 벼슬아치들이 지나갈 때 나팔을 불던 곳이라 한다.
○ 북망등(北邙嶝)
양양(陽良) 부락의 서편(西便)에 있는 나지막한 산이다. 옛날 자기네 선산(先山)이 없는 사람이 죽으면 매장(埋葬)하는 곳인데 지금의 공동묘지(共同墓地) 같은 곳이다. 중국 낙양(洛陽)의 북망산(北邙山)에서 따온 이름이다.
○ 손골
지싯골 뒤에 있는 골짜기인데, 골이 좁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가산리(佳山里)
화악산(華嶽山) 지맥 하나가 서편으로 내리 뻗어 그 여세(餘勢)로 독산(獨山)을 솟게 하여 그 앞쪽 기슭에 마을을 이루게 한 곳이다. 넓은 들을 앞에 두고 마을 어귀에 우거진 숲을 가꾸어 아담한 취락을 만들었으니 문자 그대로 가산(佳山)이라 하겠다. 마을이 생긴 유래는 분명치 않고, 다만 1726년(영조(英祖) 2년)에 설(薛)행과 설찬(薛瓚)의 형제(兄弟)가 함안에서 퇴로로 이주해 왔는데,몇 해를 지나 어느날 그의 조모가 꿈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이다. 즉 돼지 일곱 마리가 선연히 나타나 재롱스럽게 놀다가 어디론가 가기에 꿈 속이라도 호기심이 나서 그 뒤를 따라가보니 옛 둔덕곡(屯德谷)에서 멈추어 있었다는 것이다. 꿈을 깬 후 해몽을 해 보니 길몽(吉夢)이라 돼지가 멈추어 섰던 곳으로 터를 잡아 이주(移住)하라는 뜻이 분명한 계시(啓示)임을 깨닫고 곧 그 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지금의 가산 뒤쪽의 독뫼 북편 기슭이었다고 한다.그 후 차차 남쪽으로 옮겨서 현 위치가 되었다고 한다.
○ 산성지(山城址)
마을 남쪽과 청운리(靑雲里) 서쪽 경계 지점에 표고(標高) 약 340m 되는 산마루에 있는 토성(土城)의 성지(城址)를 볼 수 있다. 이 성지에 대한 기록이나 전설은 아는 이 없으나 정상부 근처에서 가야(伽倻) 토기(土器) 같는 것의 파편(破片)이 출토(出土)되고 있다고 한다.
○ 효자각(孝子閣)과 가산재(佳山齋)
동구(洞口)에 있는 정문(旌門)은 설광욱(薛光旭)의 지극한 효행(孝行)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고, 동중(洞中)의 가산재(佳山齋)는 이곳으로 전거(奠居)한 설(薛)행 형제(兄弟)의 만년(晩年)의 장수소(藏修所)로 1779년에 창건(創建)된 것이다.
마을 뒤쪽의 독산은 북풍을 막아주고, 마을 앞의 숲은 마을의 후덕(厚德)한 인심(人心)의 상징이기도 하다
○ 가산(佳山)숲
한길에서 마을 동쪽으로 뻗어 있는 우거진 숲이다. 고목이 된 여러 수종(樹種)의 나무들이 120m 정도의 길이로 연긍(連亘)되어 울창한 경관(景觀)을 이루고 있다. 월산(月山) 마을과의 경계(境界)가 되기도 한다.
10. 월산리(月山里)
화악산(華嶽山)의 지맥이 병산(屛山)(병산(兵山))으로 뻗어 내려 용(龍)이 호수(湖水)를 끼고 돌아 비천(飛天)하는 형국(形局)이라고 일컬어지는 용두산(龍頭山) 윗면(面) 기슭에 마을이 이루어지고 있다. 마을은 여러 땀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정주(停舟) 마을(정주(停舟)땀), 새마을(새땀)등이 서로 연접(連接)해 있다. 취락이 형성된 기원(起源)은 분명치 않다. 이조(李朝) 중엽(中葉)에 함평(咸平) 이씨(李氏)의 이기(李琦)가 동면(同面) 오례리(五禮里)에서 창녕군(昌寧郡) 영산면(靈山面) 달촌(達村)으로 이거(移居)하였다가 다시 월산리(月山里)로 환고(還故)하였다는데 그로부터 촌양(村樣)이 이루어진 것 같다. 월산리(月山里)이라는 이명(里名)의 달(월(月))은 닭(계(鷄))에서 나왔다고 한다. 지금의 병산(屛山)(병산(兵山))은 옛날부터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形局)이라고 하여 닭산,또는 계산(鷄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로 인해 마을 이름도 산명(山名)을 따서 닭산, 또는 계산(鷄山)으로 부르다가 닭의 발음이 '달'로 되고, 그러다가 달산 또는 월촌(月村)으로 통칭(通稱)되면서 다시 월산(月山)으로 되었다고 한다.
○ 안마을
월산리(月山里)의 본땀이라고 할 수 있는데, 토곡(兎谷) 가까이에 있다. 이기(李琦)가 이 곳에 입주(入住)하면서부터 그 후손(後孫)들이 세거(世居)하고 있다. 성모재(省慕齋)라는 이씨(李氏)의 제숙소(齊宿所)가 있다.
○ 정주(停舟)마을(정주땀)
월산리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두운(李斗運)이 어느날 밤에 꿈을 꾸었더니 별안간 소금(염(鹽))을 가득 실은 배 한 척이 이 지점에 와서 멈추어 서고 닻을 내리더라는 것이다. '기이한 일이로다.'하고 꿈을 깼다. 날이 밝아 이리저리 해몽을 하였는데 이 꿈은 분명한 길몽이며 배가 멈춘 그 지점이 길지(吉地)이니 주거(住居)를 옮기라는 계시(啓示)임이 틀림 없다고 판단하고 곧 가역(家役)을 서둘러서 이주(移住)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배가 머문 곳이라고 하여 땀 이름으로 정주(停舟)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 새마을
월산리 서편에 새로 된 마을인데, 최씨(崔氏)와 김씨(金氏) 등 이문(二門)이 살고 있다. 이 땀의 시원년대(始原年代)는 분명치 않다.
○ 병산(屛山, 병산-兵山)
옛날에 닭산 또는 계산(鷄山)이라고 불려져서 월산리(月山里)의 이명(里名)과 관계되는 이름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밀양(密陽)의 고문헌(古文獻)에 병산(屛山)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산을 인근주민(隣近住民)들 사이에는 병산(兵山)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으니, 아마도 옛날에 위세당당(威勢堂堂)한 병사(兵使) 한 분이 이 산에 장사(葬事)하고 난 뒤부터 병사(兵使)가 묻힌 산이라고 해서 '병(屛)'자가 '병(兵)'字로 바뀌어져 전해진 것 같다,
○ 용두산(龍頭山)
병산(屛山)과맥( 脈)을 같이 한 마을 뒤산으로 비용(飛龍)의 머리 부분에 해당되어 용두(龍頭)라고 전해진다.이 용두(龍頭)의 이마와 가산리 뒤쪽의 독산 사이의 골을 가로 질러 막아 큰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곧 퇴로 앞 수리못으로, 용호(龍湖) 혹은 남호(藍湖)로 불려지는 호수(湖水)이다. 용두산(龍頭山) 머리 위에 있는 용호정(龍湖亭)은 함평(咸平) 이씨일문(李氏一門)이 입향선조(入鄕先祖)인 이선지(李先智)의 부모(父母)님을 추모(追慕)하여 세운 정자(亭子)이다.
○ 토곡(兎谷)과 토암(兎岩)
병산(屛山)과 용두산(龍頭山) 사이에 있는 나지막한 산에 흡사 토끼 모양으로 생긴 바위가 있다.이 곳 사람들이 토끼 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그 밑에 있는 골이 토곡(兎谷)이다. 퇴로 마을로 들어가는 관구(關口)이므로 톳골 고개라고도 한다.옛날 이 토곡에 몇 가구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전부 떠나고 계곡만 남아 있다.
이 곳 토끼 바위는 옛부터 영험(靈驗)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가정에 근심 걱정이 있거나 병이나면 이 바위의 밑에 가서 빌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바위 위에 고인 빗물을 바르면 눈병(안질(眼疾))과 입병이 없어진다고 전해지고 있다.
○ 고분군(古墳群)
이 마을의 동북방 구릉(丘陵) 위에 고분삼기(古墳三基)가 있는 것으로 전해 오고 있는데, 이는 마을 중심지인 정주 마을 뒤편 구릉, 즉 가산지(佳山池)의 동남 방면에 인접(隣接)한 구릉(丘陵)을 지칭(指稱)하는 듯하며, 이 일대가 거대한 고분군(古墳群) 유적지(遺跡地)이다. 이 곳은 가야고분(伽倻古墳)의 수혈식석실(竪穴式石室)이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으며 흩어져 있는 토기(土器)의 파편(破片)들로 보아 5세기경이 중심 연대(年代)인 것으로 되어 있다. 구릉(丘陵) 서편의 능선(稜線)에는 거의 고총고분(古塚古墳)인 대형(大形)의 수혈식(竪穴式) 석실분(石室墳)이 다수(多數) 도굴(盜掘)된 흔적이 있다. 이로 미루어 가야시대(伽倻時代) 때부터 취락(聚落)이 이미 형성(形成)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 당산껄
월산 마을 앞 들 가운데 당( 堂)집이 있는 곳이다. 옛부터 동신(洞神)을 제사 지내온 곳이다.
11.무연리(舞鳶里)
화악산(華嶽山)의 지맥이 동으로 뻗어 옥교산(玉轎山)에 연( 連)하고, 남( 南)으로 비봉산(飛鳳山), 북으로 차일봉(遮日峯)이 있어 삼면(三面)이 산으로 둘러싸인 서향(西向) 마을이다. 마을 아래쪽에 있는 연포동(鳶浦洞)이 이 마을의 일부이다.이 마을의 본땀은 옥교산(玉轎山) 서쪽 기슭에 자리 잡은 무정부락(舞亭部落)인데 부락의 시원(始原)은 분명치 않다. 동명(洞名)의 연유(緣由) 또한 알 수 없으나 춤출 무'(舞)'字와 정자 정'(亭)'字로 무정(舞亭)이 된 것이라든지, 소리개 연'(鳶)'字와 개포'(浦)' 字로 된 연포(鳶浦) 등 洞名에 무슨 사연이 있을 듯하지만 아는 이가 없다. 지금부터 약 250여 년 전에이( 李),김( 金),한( 韓)씨 등이 전거(奠居)하였으며 그 후 천( 千),정( 鄭),진( 陳), 박씨(朴氏) 등이 입주(入住)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무연리(舞鳶里)라는 이명(里名)은 무정(舞亭)과 연포(鳶浦)의 두 땀을 합해서 나온 것인데 왜정(倭政) 때에 된 이름이다.
○ 비봉산(飛鳳山)
마을 남쪽의 산인데,봉( 鳳)이 나는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지은 이름이고, 풍수설(風水說)에 의하면 포란봉(抱卵鳳)의 지형(地形)이니 반드시 명당(名堂)이 있다고 전해오고 있기도 하다.
○ 독메(독산-獨山)
비봉산하(飛鳳山下) 봉계동(鳳溪洞)과 가까운 곳에 동그란 모양으로 알(난(卵))과 같이 생긴 길고 조그만 산이 들판에 따로 우뚝 솟아 있어 독메라고 부른다.
이 독메 정상에 분묘(墳墓)가 있는데, 그 주인공에 얽힌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지금부터 약 100여 년 전의 일이라 한다. 가세(家勢)가 청빈(淸貧)한 선비가 노년(老年)에 이르러 부자(父子)가 한 방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八旬이 넘은 어른과 六旬이 넘은 아들이었다. 어려운 살림살이를 하면서 어느해 가을에 겨우 쇠솥 하나를 사다가 걸었는데 모처럼 장만한 쇠솥이라, 애지중지(愛之重之)하였다고 한다.그런데 어느날 밤이 깊어 새벽녘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父子가 일찍 잠이 깨어 날이 새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창 밖에서 뚜벅뚜벅 발자욱 소리가 나서 살그머니 일어나 문 틈으로 내다보니 등에 우장(도롱이)을 걸친 건장한 도둑놈이 때마침 기울어가는 그믐 달빛 아래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부자는 숨을 죽이고 도둑놈의 행동만 지켜보고 있었다. 도둑놈은 거침없이 창 밑에 걸려 있는 솥을 보고 아궁이에 도롱이를 걸친 채로 엉덩이를 내밀어 넣고는 그렇게 아끼던 솥을 등에 짊어지고 일어서서 나가려고 하였다.이 부자(父子)는 도둑놈이 급히 달아나다가 넘어져 다칠 것이 염려되었던 것이다. 응겁결에 큰 소리로 '이 사람아 다칠라. 조심하게.'라고 했다는 것이다.도둑놈은 들은 채 만 채 그길로 가버렸다. 두 노인(老人)은 하는 수 없이 전과 같이 질솥(질그릇으로 만든 솥)에 밥을 지어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럭저럭 일 년이 지났다. 어느날 새벽녘에 잠이 막 깨려는데 쿵하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나서 '그 누구요? '했더니 '작년에 왔던 도둑놈이 올시다.'하고는 사라졌다. 날이 밝아 나와보니 창 밑에 커다란 밀기(짚으로 짠,곡식 등을 넣어두는 용기(容器))하나가 동댕이 쳐져 있었다. 父子가 있는 힘을 다하여 겨우 방에 굴러 넣고는,이것은 틀림없이 도둑질해 온 것이라고 직감하였다. 그때부터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이 밀기의 주인을 어떻게 찾아 주느냐 하는 것이었다. 마침 이웃 마을의 친구 환갑 잔치에 초대되어 갔다.그 곳에는 인근의 많은 친구들이 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이야기하고 밀기 주인을 찾아 보았더니 그 중의 한 사람이 주인이었다. 다음날 밀기는 내용물과 함께 고스란히 주인에게로 돌아갔다.그러던 어느날 그 도둑놈이 이 父子를 찾아와서는 뜰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비는 것이었다.솥 도둑질하며 밀기 도둑질,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죄상을 낱낱이 고백하며 깊이 반성하였다는 것이다.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란 말과 같이 착한 선비의 후손들은 번창하게 발전하였으며,그 어진 넋들은 가는 이 오는 이의 존경을 받으면서 이 곳에 고이 잠들고 있다는 것이다.
○ 대방골
골이 넓고 평평하며 그 밑으로 넓은 들이 이어진다고 하여 대방골이라 한다. 이 골의 산등(山嶝)에는 월산, 춘화 등 양리(兩里)의 공동묘지(共同墓地)도 있다.
○ 사태곡
비봉산 아래 있는 황토 계곡으로, 산 사태로 생긴 골이라고 사태곡이라 한다.
○ 소시랑등
쇠스랑 모양으로 생긴 산등(山嶝)이 있고, 그 사이의 골이 깊어 옛날부터 水源이 좋아 작은 못이 있었는데 해방 후 확장하여 관개(灌漑)에 쓰이고 있다.
○ 옥교봉(玉轎峯)
옥교산의 한 봉우리이다. 해발고(海拔高) 539m로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나 화악산의 연맥(連脈)으로 길게 뻗어 밀양시(密陽市) 교동(校洞) 뒤산까지연( 連)해 있고, 그 정상의 부분에 남북으로 능선(稜線)따라 큰 바위가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데 두 바위 사이가 활장같이 옴팍하게 파인 것 같이 보이는 곳을 옥교봉이라고 한다.또는 부쇠가 낡아서 옴팍하게 파인 모양으로 보인다고 부싯돌 바위라고도 한다. 그런데 지형을 따라 꿰어 ������춘 말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마귀 할멈이 낙동강을 건너 화악산으로 가는데,상남평야(上南平野)를 거쳐 밀양성내(密陽城內)로 오는 길목이 작은 능선으로 가로 막혀 있어 큰 손으로 홱 그어 길을 탁 티웠다는 것이다. 그 곳이 지금의 가곡동 용두목과 예림리 뒤쪽의 마암산 사이라고 한다.마귀 할멈은 그 길로 올라오면서 치마에 담아온 흙 한 무더기를 떨어뜨린 것이 신촌 북쪽에 있는 茶山이란 독뫼가 되고, 한 걸음에 올라오다가 다시 치마의 흙을 떨어뜨린 것이 비봉산 아래쪽에 있는 독뫼가 되었다고 한다. 이쯤와서 마귀 할멈은 용변(用便)이 보고 싶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옥교산 정상 부근의 능선에 있는 두 바위에 한 다리씩을 딛고 용변을 보는데, 대편(大便)은 동( 東)으로 굴러 상동면(上東面) 구찔(안인리(安仁里))로 떨어져 구린내가 난다고 구찔이 되었고, 앞쪽으로 소변(小便)이 흘러내려 물바다가 되었다고 무정이 되었으며, 뒤를 닦으려고 앞산을 긁었는데 다섯 손가락의 자욱이 남아 다섯 골이 된 청운리(靑雲里) 서북쪽산의 오배골이라고 한다. 옥교봉 두 바위 사이가 활장같이 옴팍하게 파인 듯 보이는 것은 마귀 할멈의 오줌 자국으로 파였다는 것이다. 용변을 마친 마귀 할멈은 치마에 남은 흙을 다시 떨어뜨렸는데 그것이 무연리의 독뫼가 되고, 나머지는 훌훌 털어 버린 것이 청운후산(靑雲後山)의 산성(山城)이 되었다. 똥이 굴러간 구찔은 땅이 비옥하여 수목이 무성하였으며, 오줌을 맞은 무정 뒤산은 골이 지고 돌이 많았다고 한다.
○ 차일봉(遮日峯)
옥교산 지맥에 우뚝 솟은 산형(山形)이 흡사히 차일(遮日)을 쳐 놓은 것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부락의 뒤산으로 동절(冬節)에 북풍(北風)을 막아 주어 차일 본래의 역할을 다 하는 셈이다.
○ 절태골
옛날 이 골짜기에 절이 있어서 절터골이라고 했는데, 이제 변음(變音)이 되어 절태골이 된 것이다.
○ 무정 뒤 고개
위양(位良)의 말치고개와 더불어 옛날 상동면(上東面)과 서울로 가는 육로(陸路)이다.
○ 효자각(孝子閣)
효자각(孝子閣)은 연표 부락 앞에 있는데, 영모당(永慕堂) 이원보(李元輔)의 효행(孝行)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1794년에 창건된 것으로 그 후 두 차례의 중건(重建), 중수(重修)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청룡등(靑龍嶝)
무정(舞亭) 부락 남쪽으로 쑥 내밀은 옥교산 지맥인데 마을에서 좌청룡(左靑龍)에 해당된다고 지어진 이름이다.
○ 정자(亭子)나무껄
연포 부락 어귀에 정자 나무들이 서 있고, 한옆에 서너 자 높이의 송덕비(頌德碑)라고 새겨진 빗돌이 서 있다. 이는 위양못을 개수확장(改修擴張)하면서 무연리 앞 들의 관개용수(灌漑用水)로 이용되겠금 배려된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세워진 것이다.
○ 숲등
무정 부락 앞에 동서로 약 1500m 길이의 긴 숲이 있는데, 옛날 이 마을 사람들이 방풍림(防風林)으로 조성(造成)한 것이다. 풍치(風致)도 좋거니와 하절(夏節)에 농부들의 휴식처로도 이용되며, 맨 위에 있는 당산(堂山) 나무는 이 마을의 수호목(守護木)으로 매년 당제(堂祭)를 지내고 있다.
12. 춘화리(春化里)
옥교산(玉轎山)의 지맥이 뻗어내려 저대산(楮垈山)(속명 간지게산)과 비봉산(飛鳳山) 동남쪽 기슭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춘기(春沂), 화산(華山), 신기(新基)(새터), 봉계(鳳溪), 부쇠 등 5개 자연부락(自然部落)으로 구성되어 있는 마을이다. 밀주구지(密州舊誌)에 저대부곡(楮垈部曲)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이전(高麗以前)부터 취락이 형성되어 있은 듯하다. 부곡(部曲)이 해체(解體)된 뒤에 저대리(楮垈里)로 되어 있다가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그 후에 춘기(春奇)(춘기(春沂))화산(華山)(화산(化山))으로 분동(分洞)이 되었는데, 그 후 두 마을을 합하여 이명(里名)을 춘화리(春化里)로 한 것이다.
○ 춘기(春沂, 춘기-春奇) 부락
춘화리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취락 형성의 연대(年代)가 분명치 않고 동명(洞名) 역시 왜 춘기로 했는지 알 길이 없다.
○ 신기(新基)(새터 부락)
임진왜란시(壬辰倭亂時)에 피난(避難)으로 이 곳에 온 조씨일문(趙氏一門)이 정착(定着)한 곳이다. 지금도 그 후손(後孫)들이 살고 있다.
○ 화산부락(華山部落)
저대산(楮垈山) 기슭에 있는 부락으로 저대부곡(楮垈部曲), 저대리(楮垈里) 시대의 본땀이었으며 처음에 화산(化山)이라고 하였으나 그 후에 화산(華山)으로 바꾸어 쓰게 되었다고 한다. 춘기부락주변(春沂部落周邊)에 있는 삼기(三基)의 지석묘(支石墓)의 유적(遺蹟) 등( 等)으로 미루어 오랜 옛날부터 춘기(春沂) 마을과 더불어 취락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 봉계(鳳溪) 부락
비봉산(飛鳳山)의 먼 기슭에 있으며, 동명(洞名)은 비봉산의 봉자(鳳字)와 부락 앞에 흐르는 청운천(靑雲川)의 계류(溪流)를 동명(洞名)에 연관(聯關)지어 계자(溪字)를 따서 봉계동(鳳溪洞)이 된 것이다. 곽씨(郭氏), 강씨(姜氏), 하씨(河氏) 등이 선후(先後)하여 입주(入住)하고,양씨(梁氏),노씨(盧氏) 등이 협력(協力)하여 이룬 새 동네라고 할 수 있는데 왜정말기(倭政末期)에 된 마을이다.
○ 부쇠 부락
춘화리 북단(北端)인데 5, 6戶의 작은 부락으로 이곳의 바위돌 형상(形象)이 부쇠같이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부쇠 바위라고도 불려진다. 1930년대에 한학자(漢學者)인 강신철(姜信喆)이 창건(創建)한 단산서당(丹山書堂)이 있다.
○ 춘기제(春沂堤)
밀주구지(密州舊誌)에 제방(堤防) 둘레 106척, 깊이 6척이라고 기록된 제방(堤防)이 있었는데 왜정시(倭政時) 퇴로(退老) 수리(水利)못(가산지(佳山池))의 수로공사(水路工事)로 인하여 폐지(廢止)되었다.
○ 황지방들
춘기에서 봉계로 가는 도로 북편에 있는 들인데, 한건(旱乾)한 농지(農地)이다. 왜 황지방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까닭은 알 수 없으나 옛날부터 전하는 말에 황지방에는 메추리 두 마리가 오면 한 마리는 굶어 죽는다고 한다. 토박(土薄)하고 한건(旱乾)한 들임을 상징하는 것 같다.
○ 공암굴(孔岩窟)(일명 굴더미)
비봉산 중턱에 있는데 임진왜란 때에 많은 사람들이 숨어 지낸 곳이라고 한다. 기록에는 조령(趙齡)이란 분이 함안(咸安)에서 슬하(膝下)의 팔남(八男)을 데리고 와 이 굴에서 피화(避禍)하였다고 한다.
○ 딱지골
화산 동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옛날 딱나무의 군생지(群生地)로 딱(저목(楮木))이 많이 났다고 딱지골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거의 없다. 저대산(楮垈山)이라든지 또는 저대리(楮垈里)라는 이름이 이 골의 딱나무로 인해 생긴 이름인 듯하다.
○ 범안골
마을 뒤쪽의 꽤 깊은 골인데 범굴이 있었다고 하며, 옛날에는 이 근방에 범이 자주 出沒하여 인축간(人畜間)에 호환(虎患)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 효자각(孝子閣)
밀주구지(密州舊誌)에 의하면 화산(華山) 부락에 효자(孝子) 양말손(梁末孫)의 정여(閭)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근대 유림(儒林)에서 이헌령(李憲令)과 자계철(子啓哲)의 양대(兩代) 효행(孝行)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자각(孝子閣)이 봉계부락(鳳溪部落) 앞에 서 있다.
○ 큰골
화산 부락 뒤쪽 동편에 있는 골짜기인데, 골이 깊어 수원(水源)이 넉넉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13. 용지리( 龍池里)
옥교산 줄기가 동으로 뻗어 상동면(上東面)과 경계하고 있는데, 그 산 줄기의 남쪽 기슭에 자리한 마을로서, 옛날 용가역(龍駕驛)이 있었던 역촌(驛村)이다. 용가지(龍駕池)의 동편으로 밀양시(密陽市)와의 경계 지점에 지동부락(池洞部落)이 있고, 서북으로 옥교산 동남 기슭에 용( 龍)심천( 川)을 끼고 용포부락(龍浦部落)이 形成되어 있다. 고려(高麗) 시대에 용가지(龍駕池)를 파서 관개(灌漑)를 하였다고 하는데, 그 때부터 못이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지동(池洞)이 되었다.그 후 용심천을 중심으로 새로 부락이 생겨 용포(龍浦)(일명 용개)라고 하였다. 연대(年代)은 확실하지 않으나 한 때 지금의 지동(池洞)을 구용가(舊龍駕)라고 하고, 용포(龍浦)를 신용가(新龍駕)라고 부르다가 왜정시(倭政時)에 합동(合洞)을 하면서 용지리(龍池里)로 한 데 묶었던 것이다. 용가(龍駕)라는 이름은 용가역(龍駕驛)에서 온 것이다.
○ 지동(池洞) 부락
고려중엽이후(高麗中葉以後)로 동명(洞名)이 붙여졌다고 하는데, 고증(考證)할 만한 자료를 찾지 못했으며,취락 형성의 시원(始原) 또한 알 길이 없다. 이 마을에 입주(入住)한 연대(年代)나 선후(先後)도 분명하지 않으나 최씨(崔氏), 장씨(張氏), 한씨(韓氏), 엄씨(嚴氏), 김씨(金氏), 박씨(朴氏) 등이 각각 집단적(集團的)으로 살았다고 한다.
○ 용가지(龍駕池)
지동부락(池洞部落) 서남쪽에 있는데, 원래 넓이는 일만오천여 평이나 되어 마을 앞 들의 관개(灌漑)에 활용되어온 것이다. 그 후 퇴로 앞 수리못(가산지)의 수리 구역에 편입되어 이 못의 필요성이 없어지자 공한지(空閒地)로 물이 없는 이름뿐인 못이 되어, 6.25 사변시에는 임시 육군 병원의 부지(敷地)가 되기도 하였고,지금은 공장 부지가 되어 수 많은 건물이 꽉 차 있다. 이곳은 풍수설(風水說)에 따르면 만석군 이상의 재부(財富)가 살 곳이라고 전해진 곳이기도 하였다.
○ 장자(長者)골
지동(池洞) 부락 서북쪽에 옛날 큰 부자(장자(長者))가 살았다고 전해지는데, 지금도 이곳에 우물과 맷돌 바위 등의 유물(遺物) 유지(遺址)가 남아 있다. 왜정시(倭政時)에만 해도 이 부락에 엄씨(嚴氏), 김씨(金氏)의 두 집은 천석(千石)군의 득명(得名)을 하였다.
○ 미륵불당(彌勒佛堂)
지동(池洞) 부락 동북쪽 약 300m 지점인 산 골짜기에 미륵(彌勒)이 있었는데, 약 70여 년 전에 없어졌다.지금은 유지(遺址)만 남아 있다.
○ 용가(龍駕, 용가-用家) 역(驛)
지동(池洞)에서 용포(龍浦) 쪽으로 옛길을 따라 오면 그 중간쯤 되는 위치에 옛날의역( 驛)이 있었다.역참(驛站)은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사회 각 분야에 걸쳐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었다. 예를 들면 관공서(官公署)의 공문전달(公文傳達), 관수물(官需物)의 수송(輸送), 출장관리(出張官吏)에게 마필(馬匹)을 제공하는 일, 숙박(宿泊) 편의(便宜)의 제공 등도 하였다.역참(驛站)에는 역장(驛長)과 역리(驛吏),역졸(驛卒)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 군내(郡內)에는 이와 유사(類似)한역( 驛)이 금동역(金洞驛),수안역(水安驛),무흘역(無訖驛), 양동역(良洞驛) 등이 있었고, 모두 옛날의 국도변(國道邊)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춘복현(春福峴)(범북 고개)
지동과 용포의 중간 지점 으슥한 골짜기에 춘복(春福)(범북)으로 넘어가는 잘룩한 고개인데, 범북 마을 에서도 제법 멀고 이쪽 용포, 지동에서도 제법 떨어져 있는 터라 그런지 옛날부터 화적떼들이 자주 나타나 행인(行人)들의 소지품(所持品)을 빼았곤 하였다. 그래서 이 고개를 넘으려면 여러 사람이 집단적으로 넘었다고 하여 이 고개를 일명 천인현(천인(千人)고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용포(龍浦) 부락
지동(池洞)에서 약 6,7마장 떨어져용( 龍)심천(川)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용심천에서용( 龍)이 등천(登天)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므로 동명(洞名)을 용포라고 부른다고 한다.
○용(龍)심천(川)
옥교산(玉轎山)의 한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자그마한 계류(溪流)가 되어 이 마을 가운데를 지나 운전리(雲田里)를 거쳐 부북천으로 합류되는 냇물이다.
옛날 아주 먼 옛날 2,3일간 끊임없이 폭우가 내려 쏟아지니 계천(溪川)이 범람(氾濫)하고 마을 ,들 할 것 없이 천지(天地)가 온통 물바다를 이루었다. 하늘에는 고운 무지개가 서고 우루루 쾅쾅하는 뇌성(雷聲)이 요란하더니 밤이 되면서 무지개도 사라지고 요란하던 천동(天動) 소리도 멈췄는데, 괴물 모양의 큰 물체가 마을 어귀의 계천, 움푹 파인 웅덩이에서 나타나더니 순간 큰 불덩이로 변하여 하늘로 솟아 올라 가더라는 것이다. 이를 목격한 동민들은 그 큰 괴물이 용( 龍)이 틀림 없을 것이라 단정하고 그 자리를 살펴 보았는데, 그 괴물(怪物)이 스쳐간 계천은 폭이 훨씬 넓어졌고, 움푹 파여진 웅덩이는 너댓 길이나 파여졌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 계천을 용심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 무라등골(舞樂嶝谷)
마을 북쪽 산 기슭에 있는데,그 등성이 아래는 깎아지른 듯한 가파른 곳이 있고, 그 밑은 넓직한 평지(平地)로 되어 있어 분지(盆地) 모양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하절(夏節)이 되면 온마을의 농우(農牛)를 이곳에 방목(放牧)하여 한여름을 지낸다. 즉 마을 농우(農牛)의 공동목장(共同牧場)인 것이다. 이 분지의 중앙부 좌편 쪽으로 넓고 큰 바위 하나가 있는데 이 바위 위에 말 발자욱 모양으로 파인 곳이 네 군데 있어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말자국 바위 또는 말쭉 바위라고 한다. 그 바위 위에 올라서서 내다보면 부북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올 만큼 조망이 좋다고 하며, 바위 위는 平床처럼 넓고 평평하여 앉아 놀기도 좋다고 하는데, 옛날 天上의 신선(神仙)들이 이곳에 모여 앉아 주연(酒宴)을 베풀기도 하고 가무(歌舞)도 즐겼으리라 믿고 이 바위 이름을 무라등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이 마을 사람들의 소풍처로 애용되고 있다.
○ 금강(金剛)골(금강곡-金剛谷)
무라등골 남쪽 끝에 있는 골짜기인데 골짜기 전체가 바위로 되어 있으며, 바위 빛이 누렇게 금빛이 난다고 하여 금강골이 된 것이라고 한다.
○ 대밭골(죽전곡-竹田谷)
무라등과 금강(金剛)골 사이에 있는데, 옛날 오래된 낡은 고찰이 있었다고 하나 소실(燒失)되고 절 옆에 심어졌던 대나무 뿌리가 번져 나와 자연적으로 대밭이 되어 남아 있다. 절은 없어지고 대나무만 남아있으니 절골이 아니고 대밭골이 된 것이다.
○ 샛발말리
지동(池洞)에서 용포(龍浦)로 가는 중간쯤에 등대배기 같은 약간 높은 곳이 남북으로 뻗어 있다.이곳을 샛밭말리라고 부르는데, 옛날 산등성이로 이어졌을 무렵 억새밭이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14. 운전리(雲田里)
밀양시(密陽市)의 접경 마을.옛날 밀양군의 구지(舊址)였다고 하나 확인할 수가 없다. 옥교산에서 내려오는 용심천이 대전부락(大田部落)과 신전부락(新田部落)의 경계를 이루고 부북천에 유입되고 있다. 산이 멀고 구릉도 들도 아닌 곳에 자리한 마을이다.
언제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주 오랜 옛날부터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원래 부아(府衙)에서 북쪽으로 십리허(十里許)에 밭이 많은 곳에 새로 자리 잡은 마을이라고 해서 구한말경(舊韓末頃)까지 신기리(新基里), 또는 북신기(北新基)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신전(新田)은 북신기(北新基)에 속한 흔적이 없는 것을 보면 북신기(北新基)는 지금의 대전부락(大田部落)을 지칭(指稱)한 것이다. 굴밭(운전리(雲田里))이라는 里名은 언제부터 붙여졌는지 분명치 않고,밀주지(密州誌)에 '언전용상우차고칭운전(諺傳龍上于此古稱雲田)'이라고 되어 있다. 용심천에서 용이 상천(上天)하였다는 전설이 있는데용( 龍)이 上天하려면 주위에 먹구름이 모여들게 마련이고, 또 이곳은 밭이 많은 곳이라 하여 운전(雲田)이라는 이명(里名)이 되었을 것이라고 촌로(村老)들은 말한다.
○ 대전부락(大田部落)(일명 큰굴밭)
원래 운전리(雲田里)의 본땀인데 북신기(北新基)라는 부락이었다. 지금의 대전(大田)이라는 이름은 본시 큰굴밭,또는 큰마라고 불렀는데, 왜정(倭政) 말기(末期)에 인적(人的) 물적(物的) 자원(資源)의 동원수단(動員手段)의 일환(一環)으로 자연 부락 단위(單位)의 연맹(聯盟)을 편성(編成)하였던 바 그때에 운전리(雲田里)의 큰굴밭을 큰 대자(大字)로 하여 대전(大田)이라고 한 것이다.다시 말해서 지금의 大田은 큰굴밭을 개명(改名)한 새 것이고 굴밭, 즉 새마라고 부르던 것을 신전(新田)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왜정(倭政)의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의 잔재(殘滓)라고 할 수 있다.
○ 신전부락(新田部落)(새굴밭)
언제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밀주지(密州誌)에 이씨(李氏)가 세거(世居)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다. 북신기(北新基)가 이미 한 부락을 이루고 있던 시절에 수( 數) 가호(家戶)가 살고 있는 북신기(北新基)에 딸린 작은 부락이었을 것이다. 옛날에는 대전(大田)과의 사이에 참나무등( 嶝)이라는등( 嶝)이 가로 놓여 있었는데 큰마(대전(大田))로 가는 소로(小路)가 있어 두 땀이 往來하였다. 그 작은 길은 지금도 남아 있다.그 길가에 두어 군데 묘지(墓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옥교산의 지맥이 춘화, 용포 사이로 내리뻗어 운전(雲田)의 두 땀으로 갈라 놓은 등성이었고 아주 한적한 곳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용(龍)샘
대전 부락에서 새굴밭으로 넘어오는 小路길 높은 언덕 밑에 자연적으로 찬 물이 나는 샘이 있다. 용샘이라고 하는데, 대한불갈(大旱不渴)이라 물맛이 좋을 뿐 아니라 용심천에서 용이 상천하였으니 용신(龍神)이 있다고 하여 인근 주민들이 무속신앙(巫俗信仰)에 의하여 치성을 드리는 습속도 있었다.
○ 참나무등(嶝)
옥교산의 지맥이 나지막하게 순한 嶝을 이루어 쭉 곧게 뻗어 내려왔다. 이 등( 嶝)을 따라 이쪽저쪽(동서(東西)쪽) 기슭에 묘지(墓地)가 산재(散在)하고 있다. 옛날에는 제법 숲이 우거졌으며 특히 참나무가 많이 자생(自生)하므로 이 등( 嶝)을 참나무등( 嶝)이라고 불렀다. 이 등( 嶝)의 끝 부분에 학교(學校),수리(水利) 조합(組合) 등의 기관(機關)들이 있으니, 옛날등( 嶝)이 있었는지조차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약 6,70년 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 가끔 호환(虎患)은 물론 늑대들에 의한 인축(人畜)의 피해(被害)가 끊이지 않았다고 하니 이등( 嶝)의 당시 상황을 능히 짐작하게 한다.
○ 효자각(孝子閣)
새굴밭 마을 서쪽에 아주 나지막한 독뫼가 있는데, 이 마을 사람들이 서당등(書堂嶝)이라고 부르는등( 嶝) 위에 김제일(金濟鎰)의 효행(孝行)을 기리기 위한 작은 비각(碑閣)이 있다. 춘화리 국도변(國道邊)에 있던 것을 도로의 확장공사(擴張工事) 때문에 이곳으로 이건(移建)한 것이다.
○ 솟쟁이 언덕밑
새굴밭에서 덕실로 가는 길로, 가도랑물이 부북천(府北川)에 유입(流入)되는 건너편 길 옆 언덕 밑을 지칭한 곳이다. 높고 오막한 언덕이 서북풍을 막을 수 있을 정도였다.
옛날 쇠솥이 귀하던 시절에 이 언덕 밑 노천(露天) 물에서 밑 구멍이 빠진 솥, 솥발이 부러진 솥을 수리하는 데가 있었다고 한다.불에 달은 무거운 쇠솥을 큰 굴밭, 용개, 덕실, 오례까지 올 수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을 솥쟁이 언덕 밑이라고 불러왔다.
○ 앞등(嶝)
신전(新田) 마을과 붙은 동쪽에 고총(古塚)이 남아 있는데 이 곳을 지칭한다. 이 고총(古塚)은 피씨묘(皮氏 墓)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 뒷등(嶝)
신전(新田) 마을 서쪽으로 붙은 묘지(墓地)가 있는 작은 등대배기를 지칭한다.
○ 서당등(書堂嶝)
신전 마을 뒷등( 嶝)에서 다시 서쪽 도로 건너 편 등대배기를 지칭하는데, 옛날 이곳에 서당(書堂)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 그 앞 도로변에 있는 낡은 기와집이 그때의 서당(書堂) 건물이다.
○이(李)무덤
신전(新田) 마을 북편 뒤쪽에 묘지(墓地)가 있는데, 위 이(李)무덤과 아래 이(李)무덤이 있다. 다 같이 이씨(李氏)의 무덤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 가도랑
신전 마을 서쪽에 옛날 화산 뒤 저대산(楮垈山) 골짜기에서 모인 물이 흘러내리는 계천(溪川)인데 마을 앞 들 가장자리에 있는 도랑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경지정리사업(耕地整理事業)으로 도랑이 없어지고 따로 도랑을 내어 부북천(府北川)에 연결시켰다.
○ 새들
신전 마을 앞들의 이름이다.
○ 숙골
신전 마을 서쪽 가도랑을 건너 부북천의 서쪽 천변(川邊)에 붙어 있는 곳을 지칭하는데,이 곳의 들을 숙골들이라고 한다.
○ 새바대들
운전리(雲田里) 양 땀 앞으로 부북천이 흐르는데, 그 부북천의 건너편의 넓은 들 위쪽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 들의 관개(灌漑)를 위한 보( 洑)를 새바대보라고 한다.
○ 중보들
새바대들 아래쪽 들인데 중보(中洑)물로 관개(灌漑)하고 한다.
○ 진언덕밑
신전 마을 서쪽 숙골들의 위쪽으로 부북천 동안(東岸)에 길다란 언덕이 있다. 언덕이 길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유목정(柳木亭)
새바대 봇도랑 둑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면 청운(靑雲) 사람들이 적항(赤項)들 가운데로 해서 굴밭 앞을 지나 밀양장(密陽場)으로 가는 길과 마주치는데, 그 길목에 외딴 술집이 있었다. 버드나무가 있다고 하여 사람들이 유목정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지금은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