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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28일 주일 새벽기도회 ♣
성경:출애굽기28:15-30(구124P)
제목:판결흉패
설교:박종길(동원교회 담임목사)
“할렐루야! 5월네번째 주일입니다. 오늘도 주일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시고 치유와 감동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녁에는 가정예배드리시기를 바랍니다.오후에는 베델성ㅅ거 대학 졸업예배가 있습니다. 베델성서 연구원 원장님이 오셔서 설교하십니다. 문화센터 접수를 더 연장하였습니다.성도님들께서 접수를 안하셔서 연장을 하였습니다. 한 강좌 이상씩 접수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오늘 읽을 성경:신명기1장 /시편81-82편 /이사야29장 /요삼1장
***{제목}:***“판결 흉패 ”
오늘 본문 말씀은 대 제사장의 의복 가운데 에봇 앞에 다는 자그마한 주머니 같은 판결흉패의 제작 방법입니다. 에봇은 대제사장이 입는 앞치마나 조끼 같은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에봇에는 작은 주머니 같은 것을 하나 달게 됩니다. 그 주머니의 이름은 “판결흉패”입니다. 이 판결흉패는 가로 세로가 한 뼘씩 되는 네모반듯한 주머니인데, 이중으로 만들어서 그 안에 무엇을 넣을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주머니는 금사슬로 네 귀를 에봇에 단단히 매어서 떨어지지 않도록 붙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주머니가 보통 주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주머니 앞에는 가장 귀한 보석들이 세 개씩 네 줄, 즉 열두 개의 보석이 붙어 있습니다.
첫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고, 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셋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넷째 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입니다.
오늘 본문 21, 29절을 보면
21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 보석마다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새기고”.
29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여 여호와 앞에 영원한 기념을 삼을 것이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석에 이름을 새겼다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백성들을 기억하고 12지파 하나하나의 이름을 인을 새기듯이 새겨서 달아 놓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우리의 형편을 잘 알고 계시며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나의 생각을 아시고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고 나의 모든 행위를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석에 이름을 새기라고 한 것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로 그의 백성을 귀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귀하게 보십니다. 벧전2:9에 기록하기를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는 다듬어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보석이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돌을 통해 얻어져서 사람의 손으로 잘라지고 깎아지고 다듬어지는 과정을 지내야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손길에 의해서 다듬어지고 훈련되어져 아름다운 신앙의 사람이 되어져 갑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이름을 보석위에 새겨 다듬어지고 새로워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셋째로 다양성을 볼 수 있습니다.
12개의 보석은 서로 다릅니다. 이름이 다릅니다. 색깔이 다릅니다. 다른 지역에서 제각기 있다가 제사장의 가슴에 함께 모였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보면 사람의 장점을 살려 주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단점만 들춰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은사가 모두 다릅니다.
다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지만 모두 모여 함께 흉패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한 지체가 되었습니다. 서로서로의 짐을 지고 사랑할 때 서로에게 힘이 되고 놀라운 능력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 판결흉패(가슴받이)에 넣는 물건이 있습니다. 이 주머니 같은 것에는 ‘우림과 둠밈’이라는 것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주는 성경의 기록이 없습니다.
히브리어로 ‘우림’과 ‘둠밈’은 복수형으로 ‘빛’과 ‘완전’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빛들’과 ‘완전들’이라는 뜻으로, 하나의 물건인데 이처럼 두 가지로 불렀는지, 아니면 두 개의 물건이었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는 물건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대제사장이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을 때 하나님께 질문하면 하나님께서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그 뜻을 알려 주셨습니다.
민수기27장 21절을 보면
“그는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 법으로 여호와 앞에 물을 것이요, 그와 온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은 엘르아살의 말을 좇아 나가며 들어 올 것이니라 ”.
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어디를 가야할지 말아야 할지를 알 수 없을 때 하나님께 질문하면 하나님께 이 ‘우림’과 ‘둠밈’의 표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1.하나님의 뜻.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근본적이고 불변하시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고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뚜껑을 열면 서로 다른 수많은 보석들이 빛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제각기 조금씩 다른 빛을 내면서도 모두 아름다운 보석 같은 신앙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우리들의 모든 인간적인 결함을 제거하셔서 온전케 하시고야 맙니다. 흠도 티도 없이 만드십니다. 결국에는 눈부실 정도로 완전히 빛나는 아름다운 인격으로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향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십니까? 끊임없이 부딪치게 하십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통해 보기 싫은 자기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게 하셔서 결국 온전한 인격이 되게 하십니다.
아무리 자기는 다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고 만족하고 있어도 결국 끊임없이 부딪치는 어려움들을 통하여 그 사람 안에 깊이 감춰진 인간적인 결함들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그것을 내어 놓고 치료받게 하십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어떤 고난이나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돌리지 말고 오히려 자기 자신이 완전해지는 기회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결코 완전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 부족한 부분들이 너무나도 오랫동안 함께 있었기 때문에 본인은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이미 자신의 몸이나 인격의 한 부분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이 제거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십니까? 여러 가지 어려움을 주십니다. 한 가지 어려움이 아니라 갖가지 어려움을 주십니다. 그것은 모두 나의 모난 부분들을 쪼아서 보석처럼 만들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떤 역경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가? 라고 하면서 투덜거립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랄수록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려움이 닥치는 이유는 단지 죄 때문만은 아닙니다. 기질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직 포기하지 못한 악한 습관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던 기질들이 어려움이 오면 한번에 하나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부분이 아주 견고해 집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때 온전히 기쁘게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번에는 또 다른 부분에서 주님이 나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모난 부분이 깎여 나가는 승리입니다.
야곱은 정말 모난 부분을 많이 가지고 있던 족장이었습니다. 야곱의 행적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언제나 인간적인 것과 신앙적인 것이 함께 뒤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야곱과 씨름하셔서 그의 뼈를 꺾으셨을 때 그는 할 수 없이 하나님의 축복을 부탁했습니다. 이것은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 꾀와 인간적인방법으로 덜 깎인 부분으로 살아왔는데, 이제는 도저히 인간적인 방법은 통할 것 같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야만 살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 진 것이 그에게 이긴 것이 되었습니다.
그는 또 한 부분이 깎여서 빛나고 있습니다. 무슨 어려움이 오든지 그 어려움은 반드시 나에게 유익을 줄 것이며, 또 부족한 한 부분을 빛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전혀 원하시지 않는 방향으로 열심을 낼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물어 보지도 않고 자기 생각으로 열심을 낼 때 그것은 헛고생이 됩니다.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행동해야 합니다.
어려움이 왔을 때 자기 생각으로 날뛰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지금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물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갑자기 길이 막혀서 진행이 되지 않을 때 핸드폰으로 물어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이 길로 갔다가 저 길로 갔다가 하면 결국 시간과 노력만 손해보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 보는 기도는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이 갈림길에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당장 답을 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모든 경우에 바로 답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질문을 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답을 하실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 가장 적절한 시간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답을 해주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숙하였다고 해도 다 똑같아지지는 않습니다. 다 비슷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입니다. 거의 똑같은데도 각자가 가진 능력이나 은사가 다른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열두 개의 보석이 의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미숙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많은 차이도 이런 다양성에 포함시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좀 다른 차원의 문제이지만 우선 이런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 것만 고집하면 편협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필 요로하고 서로 배우게 되어 있습니다. 모두 다 질서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습니다.
판결 흉패에 달린 보석들은 모두 다 질서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습니다. 들쭉날쭉하지 않습니다. 모두 다 하나같이 배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타나는 색깔은 다 다릅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무지개처럼 다양합니다. 오직 하나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조화를 이루어 아릅답게 빛납니다. 하나님은 예술가이십니다.
하늘에 별을 보십시오. 같은 별이 어디 있습니까? 같은 색깔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다 제각기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2.우림과 둠밈.
우림과 둠밈의 판결 법은 가장 간단한 답을 구하는 형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예와 아니오. 정도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야 합니까? 하지 말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 때로 이런 질문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다’ 또는 ‘아니다’인지를 아주 분명하게 답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런 우림과 둠밈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방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은 믿음 안에 살게 되므로 얻게 되는 분별력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먼저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물론 많은 경우 성경은 구체적으로 명령하거나 금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두 가지에 길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는 악인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의인의 길입니다. “너는 지금 어느 편에 서 있느냐?” 물음을 우리에게 던지십니다.
어떤 사람은 악한 삶의 방식을 따라 갑니다. 오만 한 자처럼 행동합니다. 그의 결과는 머지않아 뻔합니다. 바람에 나는 겨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이 어느 노선을 따라서 걸어가고 있는지 스스로 분별하게 합니다. 그뿐 아니라 말씀이 해석되어질 때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 적용되어집니다.
적용되어진 말씀은 예언의 말씀입니다. 물론 여기서 예언이라는 것은 오늘 성도의 삶에 적용될 수 있는 교훈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기도 중에 방언으로 예언할 수도 있고 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도 있지만 가장 분명하고 정확한 예언의 말씀은 성경을 풀어서 해석하고 적용시키는 설교로서의 예언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주님이 우리의 삶을 이끄는 경우도 있습니다.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서 거기에 따라 행동했더니 그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나타난 경우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우림과 둠밈은 아니지만 자기 나름의 표적을 구했는데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방법으로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알리십니다. 단지 예 나 아니요 같은 단답형이 아니라 우리의 지각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깊은 뜻에 대하여 스스로 추론하도록 하시기도 합니다. 그런 지혜가 이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왔으면 그 말씀에 기초하여 스스로 상고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의 지각을 풍성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어려움이나 난관이 닥쳤을 때 그것을 나름대로 소화하여 하나님 앞에서 문장으로 표현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십시오. 때로는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따지기도 하고 변증하기도 해 보십시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을 설득해 보려고 애써 보기도 해 보십시오. 우림이나 둠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너무나 분명한 하나님의 풍성한 뜻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3.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 목표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붙어 있습니다. 우리의 보석은 앞으로 우리가 나타낼 모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역시 광야를 걸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뜻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모든 촉각이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훨씬 더 빨리 우리 안의 성화가 이루어지며 불필요한 낭비 없이 바로 하나님의 뜻 안에로 뛰어 들어가게 도리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간구할 때 판결흉패 안에 들어 있는 우림과 둠밈처럼 하나님의 결정을 알게 되고 분별하는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은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까?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고통 중에도 다른 사람이 주는 쓸개즙을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쓸개즙은 약간의 진통효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고통을 분명한 의식 가운데 감당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너무나도 복잡하고 적응하기 어려우니까 신앙에 몰두함으로 정신을 잃으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신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끝까지 정신을 차리고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할 때 하나님의 더욱 분명한 뜻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사셔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손길을 경험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묵상:출애굽기28:30절입니다.오늘도 주일 예배 성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동원교회 문화센터가 6월1일 개강을 합니다.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첫댓글 6월1일 개강 예배 성황리 치뤄지시길...근데 평일에 개강하시는 군요~ 그날 제가 친정부모님과 고향 "장흥"엘 내려가서 못가보겠내요~~기도할게요~^*^
네네 원장님1 고마워요! 언제든지 한번 오셔유! 중고등부는 개강이 안되네요! 그래도 인기과목은 개강합니다. 기도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