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무도 슬프면 말이 길지 않고,
지나치게 애절하면 감정이 오히려 무뎌집니다.
소자가 지금까지 15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죽을 줄 몰라서가 아니라
선왕의 은혜를 입어 왕위를 이어받기 위해섭니다.
선친께 장헌(莊獻)이란 시호를 올리고,
경모궁(景慕宮)과 영우원(永祐園)이란 이름을 지었습니다.
예조판서에게 이와 같이 모든 의식을 정하도록 시키고,
의식에 쓸 제기와 악기는 종묘에 비해 한 단계 낮게 정하였습니다.
저 세상에 계신 영령께서 이 소자의 마음을 알고 계실는지요.
숭정 이후 세 번째 병신년에 피눈물로 삼가 서문을 씁니다."
정조가 1785년 친히 출간한 궁원의(宮園儀)의 서문이다.
궁원의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경모궁(景慕宮)과
영우원(永祐園)에 관한 의식 ·절차를 수록한 책이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이 해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모하는 사업을 벌였다.
사도세자의 사당은 1764년 봄 북부 순화방에 세워졌다가
여름에 동부 숭교방(현 서울대 의대 내)으로 옮겨 수은묘(垂恩廟)라고 했다.
정조는 비명에 간 아버지에게 장헌이란 시호를 올리고
사당도 다시 지어 경모궁, 묘소를 영우원이라 이름지어 격을 높여주었다.
경모궁은 1839년 소실되었다.
사도세자의 무덤은 경기도 양주의 배봉산 자락(현 서울시립대학 근처)에 있었다.
풍수에 뛰어난 실력을 가졌던 정조였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13년이 지난 1789년 7월 11일 금성위 박명원으로부터
기가 막한 상소가 올라왔다.
"첫째는 잔디가 말라죽는 것이고, 둘째는 청룡이 뚫린 것이고,
셋째는 뒤를 받치고 있는 곳에 물결이 심하게 부딪치는 것이고,
넷째는 뒷부분 석축이 천작(天作)이 아닌 것입니다.
이로써 볼 때 풍기(風氣)가 순하지 못하고, 토질이 온전하지 못하고,
지세가 좋지 않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뱀과 같은 것들이 무덤 주변에 똬리를 틀고 무리를 이루고 있으며
심지어 정자각 기와에까지 그 틈새마다 서려 있는데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정조는 이 상소를 접하고 즉각 아버지 사도세자의 영우원을 천장을 결정한다.
박명원은 정조에게 상소라는 형식으로 천장의 구실을 만들어준 것이다.
정조는 내심 미리 정해놓은 수원부 화산(花山)으로 옮기라 하며
사도세자의 천장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박명원은 영조의 딸인 화평옹주와 혼인하여 정조의 고모부가 되었다.
명나라의 사신으로 두번 다녀왔다.
이덕일은 <사도세자의 고백>에서 영우원을 천장하던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정조 13년(1789년) 10월 4일.
사도세자의 영구(靈柩:시신)가 양주 배봉산을 떠나 수원으로 향하였다.
당일 정조는 영우원에 나가 빈전에 곡을 했다.
눈물이 나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사도세자가 죽던 날 그 비참한 광경만 생각하면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던 영우원이 천하의 흉당임을 확인하는
정조의 심경을 <사도세자의 고백>은 실감있게 전달하고 있다.
영우원의 영구를 파내고 보니 광중(壙中)에 물이 거의 한자 남짖 고여 있었다.
이를 정조는 또다시 오열하였다. 지난 세월동안 아버지의 시신이
물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니 목이 메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정조는 홍살문 밖까지 걸어와 어가에 올랐다.
그 뒤에 사도세자의 시신을 담은 영여가 있었다.
드디어 사도세자가 자신의 아들인 정조와 함께 새로운 안식처로 떠나는 것이다.
열 번 죽어도 씻지 못할 워한을 품은 시신이 27년만에 임금이 된 아들과 함께
떠나는 길이었다. 뒤주에 갇히던 날 '아버님.살려주소서!'하고 빌었던
그 아버지가 "할바마마.아비를 살려 주소서!"하고 호소했던 그 아들과 함께
떠나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