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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성산 용주사 원문보기 글쓴이: 현림
마음은 모든 법의 근원이요 선악의 근본이니,
같은 곳에서 나왔으되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화(禍)와 복(福)으로 나뉘어 흐른다.
물질[色]을 보고 마음이 미혹하여
스스로 무상(無常)함을 관찰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아름답고 좋다 생각하며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알지 못하네.
~<法鏡經>~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이라 열흘 붉은 꽃이 없듯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유한한 존재입니다.
만들어지고 태어났다가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합니다.
만물은 또한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인연 따라 모양도 변합니다.
흘러가는 물을 봅시다.
물은 온도가 높으면 수증기로 변하고, 낮으면 굳은 얼음이 됩니다.
인연 따라 모양(相)이 변하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합니다.
인연 따라 생하고 인연 따라 멸(滅)하는 것을 유위법이라고 말합니다.
무상하고 실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우주 만물이 성주괴공(成住壞空) 하는 원리입니다.
중생의 삶도 이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일체 만물은 이렇게 시간상으로 보면 무상(無常)하고,
공간적으로 보면 무아(無我)인데.
중생들은 미혹(迷惑)하여 허망한 생각(妄情)을 지어
무상(無常)한 것을 영원하다고 여기고, 무아(無我)인 것을
<나>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여기에 더 나아가
즐거움이 아닌데 즐겁다는 생각을 내고
깨끗하지 않은데 깨끗하다는 생각을 내고
공(空)한 법까지도 나라는 생각을 내고
남자다, 여자다, 크다, 작다는 등 뒤바뀐 생각을 냅니다.
이 전도망상(顚倒妄想)이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이 원하는 것이 성취되지 않을 때
마음 아파하고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번뇌입니다.
부처님이 평생을, 법륜(法輪)을 굴리신 것도
모두 이 번뇌를 벗어나는 길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해탈이요 열반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성제(四聖諦)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하고 5 비구들을 찾아가 설한
최초의 법문이 사성제입니다.
사성제(四聖諦)란 성인이 보는 4가지 참 진리(正眞)라는 의미입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제(四諦)를 말합니다.
사성제(四聖諦)에서는 고제(苦諦)로 8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이를 팔고(八苦)라 부릅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 원증회고(怨憎會苦), 애별이고(愛別離苦),
구부득고(求不得苦), 그리고 오음성고(五陰盛苦)입니다.
이렇게 보면 인생 자체 苦가 됩니다.
인생 자체가 苦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런 뜻에서 일체가 모두가 苦임으로
일체개고(一切皆苦)요, 삼계고해(三界苦海)라고 말합니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도 “인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결핍되면 채우기 위해 번민하고 충족되지 않으면 허무에 빠진다.
인간은 욕망과 허무에 맴도는 존재다.”라고 했습니다.
팔고(八苦)는 중생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고통이라
글을 알면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모호하게 느껴지는 두 가지 고통만 살펴봅시다.
하나는 生苦입니다. 생고는 중생이 세상에 육신을 받는 데는
태어나는 괴로움도 있지만, 태어난 후에 그 생명을 유지하려면
여러 가지 생활에 대한 괴로움과 마음의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괴로움이 되기에 생고(生苦)라 합니다.
태어나고 생활하는 것이 괴로움이기에 生苦라 합니다.
니체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고통을 받는 것이다.”라고.
둘은 오음성고(五陰盛苦)입니다.
오음성고란 우리 몸은 색온(色蘊),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 이라는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온(蘊)이란 적취(積聚)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귀가 있기 때문에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분 좋은 소리를 들으면 듣는 귀가 사랑스럽지만,
싫은 소리를 들으면 듣는 귀까지 미워집니다.
「미운 사람이 내는 소리는 시끄럽고
사랑하는 사람이 내는 소리는 즐겁다.
소리가 시끄럽고 즐거운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것이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그냥 사람이고 소리일 뿐이다.
그냥 사람이고 소리일 때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이는 조계종 10대 종정을 지내신 혜암스님의 남긴 시입니다.
오음성고(五陰盛苦)란 몸이 있기 때문에 받는 고통이니
오온성고(五蘊盛苦)라 한 것입니다.
오취온성고(五取蘊盛苦)의 준말입니다.
오온(五蘊)에 애착을 느끼고 집착하면 할수록 고통(苦)이
성해지기 때문에 오음성고라 한 것입니다.
이 몸이 살아 있기에 내 몸이라 하고,
몸을 가꾸며, 치장함, 몸을 사랑하며,
몸을 생각하여 몸을 돌보며, 내 몸을 보호하겠다고 여기게 되므로
이것이 번뇌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성제의 과제(苦諦)에서 말하는 고(苦)입니다.
이것은 12 연기를 기준으로 모든 범부들을 상대한
현실적인 고를 안으로 시간적으로 관(觀)한 것입니다.
밖(色)으로 관하면 3가지로 번뇌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 세 가지는 욕루(欲漏), 유루(有漏). 무명루(無明漏)입니다.
이는 <열반경>에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욕루(欲漏)는 욕계의 견사(見思) 2혹(惑)을 말합니다.
견혹(見惑)은 갖가지 망견(妄見) 즉 사견(邪見)으로 도리를 헤아리고
분별(計度)하여 일어나는 아견(我見), 변견(邊見) 등의 망견이요,
사혹(思惑)은 탐진치(貪瞋痴)의 미정(迷情: 미혹한 마음)
즉 세간의 事物을 사려(思慮)하여 일어나는 망혹(妄惑)을 말합니다.
유루(有漏)의 누(漏)는 번뇌의 이명으로,
번뇌의 사물을 함유하였으므로 유루라 합니다.
일체 세간의 事體는 모두 유루법이 되고,
번뇌의 출세간의 事體를 여의는 것은 무루법(無漏法)이라 합니다.
그래서 유루의 果는 육도(六道)에 떨어지는 苦가 되고,
유루의 因은 세속적인 선악이 되어 고(苦)의 집(集)이라고 말합니다.
무명루(無明漏)는 무명이 중생을 누락(漏落)케 하여
중생이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므로 루(漏)라 하는 것입니다.
누락이란 번뇌에 빠지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무명으로 인하여 사물을 인식함에 불연속적이고
순간적인 존재들에 대하여 실체성, 동질성
그리고 상주성을 느끼게 됩니다.
무명으로 인하여 생각이 뒤바뀌고
마음이 뒤바뀌고 소견(所見)이 뒤바뀌게 됩니다.
무명(無明)이란 다름 아닌 명(明)이 전도(顚倒)된 망상입니다.
그래서 독일의 염세 철학자로 불리는 쇼펜하우어도
“오류는 理性을 속이고, 환상은 이해력을 속인다.”라고 했습니다.
이성(지식)에도 맹신하지 말고 감각(감성)에 현혹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번뇌란 욕망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밝은 관조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번뇌의 원인을 알고 벗어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고통이 있으면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 있습니다.
그것을 사성제에는 집제(集諦)라고 합니다.
이는 苦諦의 이유 근거 혹은 원인을 밝히는 것입니다.
苦의 원인은 바로 번뇌입니다.
번뇌의 애욕과 業으로 인한 것입니다.
집제(集諦)의 集이란 招集生起의 뜻으로
이것은 번뇌의 다른 이름입니다.
集의 근원은 모든 번뇌의 근원인 갈애(渴愛)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중생은 갈애(愛欲)에 속박되어 不自由,
不自主的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갈애의 근원은 무명입니다.
@세친은 《구사론》에서, 윤회의 근본 원인은 무명(無明)이지만,
무명을 일으켜 생사를 윤회하게 하는 실제적인 가장 큰 원인은
전도(顚倒)된 수(受)와 상(想)의 마음 작용,
즉 수취온(受取蘊)과 상취온(想取蘊)이라고 말합니다.
수온(受蘊)이란 고(苦), 락(樂), 사(捨:不苦不樂)를 감수하는 정신작용으로
육식(六識)과 육경(六境)이 접촉함에 의하여 생기는
육수(六受)의 무더기를 말하고.
상온(想蘊)이란 사람이 사물의 선악, 정사(正邪)를
상상(想像: 경험하지 못한 일을 마음속에 그리며 생각하는 것)하여
갖가지 감정과 생각(情想)이 모인 것을 말합니다.
중생의 생을 설한 12 연기를 보면 “무명으로 인하여 행이 있고….”
觸으로 연해 受가 있고 受에 연해 愛가 있고, 愛에 연해 取가 있고….
이렇게 노사까지 연결됩니다. 세친은 이를 근거로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을 순관(順觀)이라 하는데
이 순관인 12 연기에 무명을 제일 앞에 배치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무명으로부터 미혹한 세계와 인간이 있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苦諦는 번뇌의 결과인 미계(迷界)이고,
集諦는 迷界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集은 招集의 뜻으로 有漏業과 번뇌를 지칭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중생계의 고통 원인 즉 번뇌와 집착입니다.
철학에서는 원인을 먼저 설명하고 나중에 결론을 내지만
부처님의 설법은 결론은 먼저 내고 나중에 그 원인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고제(苦諦)를 먼저 설한 다음에 집제(集諦)를 설한 것입니다.
이는 중생을 교화하는 데 있어서 원인을 먼저 제시하는
철학적인 이론보다 인간 생활에 직접 당하고 있는
현실적인 결과인 苦諦를 먼저 제시하여 복잡한 현실 생활에서
각성을 일깨워주고서 구도심을 일으키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어지는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도 마찬가지입니다.
<滅諦>는 깨달을 목표, 곧 불교의 理想境인 열반을 말합니다.
고제인 미계(迷界)의 眞相과 집제인 미계의 원인을 밝힌 후
중생들이 나아갈 바를 밝힌 것입니다.
멸제는 무명이 멸하여 없어진 것이니 12인기로 보면 逆觀이 됩니다.
그래서 멸제는 열반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일체 만물의 실체상을 파악하는 것이니
즉 實相論에 입각한 것입니다.
이 實相 자체에는 時空을 초월한 광대무변한
생명의 일체감을 느끼게 되므로
彼此가 하나로 합치되는 경계가 됩니다.
이것이 불교의 이상경인 解脫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해탈은 곧 적멸(寂滅)을 말합니다.
<道諦>는 苦를 멸해서
해탈경인 열반에 도달하는 길을 말한 것입니다.
열반이 과(果)라면 도제는 실천 수단의 방법임으로
깨달음(悟)의 因이 됩니다.
초기설법에서는 팔정도만 설파하였지만,
멸도 후에는 37조도품을 설하셨습니다.
사념처, 사정근, 사여의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
이는 모두 고를 멸하는 방법인 것이다.
그만큼 고(苦) 즉 번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37조도품은 어렵고, 수행 기간도 길뿐만 아니라
너무 복잡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열반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선남자야, 지혜 있는 이는 ‘무슨 인연으로 이 번뇌를 내며
무슨 행을 지어서 이 번뇌를 내며, 어느 때에 이 번뇌를 내며
누구와 함께 있으면 이 번뇌를 내며, 어디에 있으면 이 번뇌를 내며
무슨 일을 관찰하면 번뇌를 내며, 누구의 집과 와구와
음식과 의복과 탕약을 받았기에 번뇌를 내는가를
관찰해야 한다. 이렇게 관찰하면
번뇌를 내는 인연을 떠나게 된다.」 라고 말합니다.
이를 한마디로 한다면 “깨어 있어라”라는 의미입니다.
왜 도제(道諦)에 8정도를 말씀하신 것인가? 12연기로 보면
번뇌란 수(受:느낌)로 연하여 갈애(愛)가 있고,
愛로 연하여 取가 생함으로 번뇌가 됩니다.
受는 몸과 마음을 증장하는데,
이는 촉(觸)을 인연하여 생기는 것입니다.
촉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무명촉(無明觸)이며,
둘째는 명촉(明觸)이며,
셋째는 명도 무명도 아닌 촉[非明無明觸]입니다.
명촉은 곧 팔정도(八正道)를 말합니다.
그래서 도제(道諦)에서 팔정도를 든 것입니다.
다른 두 촉은 몸과 마음과 세 가지 受를 증장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두 가지 촉의 인연을 끊으라 한 것입니다.
촉이 끊어지면 세 가지 수(三受)가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수란 苦, 樂, 不苦不樂을 말합니다.
지혜 있는 이가 애(愛)를 관찰하는 데 또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잡식(雜食)이며, 둘째는 무식(無食)입니다.
잡식애(雜食愛)라고 하는 것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것은 유(有)로 인하는 것이며,무식애(無食愛)라고 하는 것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유(有)를 끊고 무루의 도를 탐하는 것입니다.
이는 12연기를 역관(逆觀)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도제(道諦)에서 팔정도를 든 것입니다.
이를 말하는 것은 중생이 색을 보아도 탐심을 내지 않고
수(受)를 관찰할 때도 탐심을 내지 않지만
만일 색에 대하여 뒤바뀐 생각을 내어
색이 곧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다 하며,
수(受)가 항상하여 변역(變易)함이 없다고 하면
이 뒤바뀐 생각으로 인하여
탐욕과 성내는 일과 어리석음을 내기 때문입니다.
팔정도는 몸과 마음(意)과 입으로 짓는 바른길을 밝히는 것입니다.
몸과 입의 두 업은 업이라고도 하고 업의 과보라고도 하는데,
뜻은 업이라고만 하고 과보라고는 하지 않으나
업의 인이므로 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몸과 입의 두 업은 바깥 업이라 하고 뜻의 업은 안의 업이라 하며,
이 세 가지 업이 번뇌와 함께 행해지므로 두 가지 업을 짓는데
첫째는 나는 업이며, 둘째는 받는 업이라고 합니다.
정업(正業)은 뜻으로 짓는 업이요,
기업(期業)은 몸과 입으로 짓는 업입니다.
먼저 나는 것이므로 뜻의 업이라 하고,
뜻으로부터 생기므로 몸과 입의 업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뜻의 업을 정업이라고 합니다.
지혜 있는 이는 업을 관찰하고 나서 다음에 업의 인을 관찰하는데,
업의 인은 무명과 촉(觸)이 됩니다. 무명과 촉으로 인하여
중생은 유(有)를 구하고 유를 구하는 인연은 곧 애(愛)가 됩니다.
애의 인연으로 몸ㆍ입ㆍ뜻의 세 가지 업을 짓는 것입니다.
이것이 번뇌라는 것입니다.
중생의 괴로움과 즐거움은 실로 인연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은 능히 근심과 기쁨을 지어서
근심할 때는 기쁨이 없고 기쁠 때는 근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살이는 기쁨보다는 근심하고 번민하는 날이 더 많습니다.
기쁨도 있지만 인생살이가 고해(苦海)라 한 것은
마치 한 줌의 소금을 강물에 뿌린들 강물은 짜지 않듯
인생살이는 괴로운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또 즐거움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미혹하여 이것은 즐거운 것이라 여기고
저것은 괴로운 것이라고 여기며,
여기에 집착한 이는 즐거운 것이라 여기지만
상실한 이는 괴로운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어리석으면 즐거운 것이라고 여기지만
슬기로우면 괴로운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즐거운 것의 우환을 보면 괴로운 것이 되지만
즐거운 것의 허물을 보지 않으면 즐거운 것이 됩니다.
즐거운 것은 덧없다는 모양을 보지 않으면 즐거운 것이 되지만
즐거운 것은 덧없다는 모양을 보면 괴로운 것이 된다.
그런 것이 바로 번뇌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쁨도 괴로움도 고정된 것이 아니고,
실체도 모양도 없다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이가 만일 번뇌와 번뇌의 인과
번뇌의 과보와 번뇌의 경중을 알면
이 사람은 부지런히 도를 닦아서 쉬지도 않고
뉘우치지도 않으며, 선지식을 친근하고
지성으로 법을 듣게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번뇌를 멸하기 위한 까닭입니다.
이를 알지만 세속의 사람들은 번뇌를 극복하는 길에
나서기는 선뜻 내키지 않습니다.
망설이고 주저주저하게 됩니다. 미국의 수필가이면서 철학자인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년–1882년) 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착각의 하나는
현재는 결정을 내리기엔 가장 애매한 시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하루는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날이라는 것을 명심하라.”고.
어느 트롯트 가수가 부른 “아모르 파티(amor fati)”가
대중들에게 인기가 좋은 모양입니다.
“아모르 파티”란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의미입니다.
운명에 대한 사랑을 뜻합니다.
라틴어로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Amor)와
‘운명’을 뜻하는 파티(Fati)의 합성어입니다.
춤추고 노래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니체는 운명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필연적인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할 때 인간이 위대해지며,
인간 본래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고통과 상실을 포함해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동시에 운명에 체념하거나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고통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fati를 party로 인식하고 인생의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수행 방법이 어설프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선남자야, 어떤 이가 소경을 데리고
가시덤불 속에 갔다가 버리고 돌아온다면
소경은 그 뒤에 헤어나기가 어려울 것이며,
설사 헤어나더라도 몸이 모두 찢겼을 것이다.
세간의 범부들도 그와 같아서 세 가지 번뇌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다면 따라다닐 것이고
만일 보았으면 멀리 여읠 것이며,
허물을 알고 나서 과보를 받더라도 과보가 가벼울 것이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