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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 양꼬치
박찬순
이런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나는 푸르스름한 양념장에 재어둔 양고기 조각을 꼬치에 꿰면서 이게 혹시 꿈은 아닐까 하고 오른 손 엄지와 검지로 왼손 등을 힘껏 꼬집어보았다. 통증이 콕 하고 느껴지는 것이 분명 꿈은 아니었다. 일이 잘 풀리려고 그러는지 주인은 지방에 볼 일을 보러 떠났고, 오늘은 가게가 쉬는 날이었다.
황갈색으로 구워진 향긋한 양꼬치를 입에 넣고 씹는 순간 그 신비한 양념 맛에 탄성을 지를 분희의 한국 친구들 얼굴이 떠올랐다. 길 건너 스무 집 쯤 떨어진 대륙(大陸) 다방에서 일하는 분희가 언제쯤 친구들을 데리고 오려나 하고 나는 가게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마주 오는 차 두 대가 겨우 길을 비켜갈 정도로 좁은 구로공단 가리봉 오거리 시장통엔 延吉羊肉店, 今丹飯店, 延邊狗肉館 등 한자로 쓰인 허름한 간판이 즐비하고, 어디선가 가끔씩 진한 향료냄새가 훅 풍기는가 하면 한쪽 구석엔 온갖 잡동사니가 널브러져 있는 고물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따금씩 머리를 박박 깎거나 스포츠형으로 바싹 치고 짙은 눈썹에 몸집이 건장해 보이는 사내들 몇이 중국말을 주고받으면서 지나가기도 했다. 여름철엔 그런 사내들 팔뚝에 뱀이나 호박 모양의 문신이 새겨진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것이 뱀파와 호박파를 뜻한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교포들은 이들 얘기가 나올 때면 입을 비죽거리면서 체불임금 해결사는 무슨, 지들이나 날강도질 말라디, 하고 빈정거렸다. 처음 일하러 왔을 때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출신의 주인은 혹시라도 식당에 그런 남자 손님이 들어왔다 하면 비위를 거스르지 말고 해달라는 대로 다 들어주라고 당부했다. 조금이라도 기분을 언짢게 했다가는, 하더니 손을 펴서 자기 목을 치는 흉내를 냈다. 나는 그 말이 시장에서 쫓겨난다는 뜻이겠거니 하고 알아들었다.
말이 시장이지 교포 한명이 어느 집 쪽방에 들어왔다 하면 금세 소문이 날만큼 좁은 곳이 이 바닥이었다. 내가 처음 왔을 때도 팔뚝에 뱀 문신을 새긴 사내가 어떻게 알아냈는지 대뜸, 라오닝 반점 이층 쪽방에 들었디? 하고 말을 걸어와 깜짝 놀랐다.
시장 안에는 개고기집과 돼지고기집도 있었지만 양고기 전문점이 가장 많았고, 내가 일하는 닝안반점(寧安飯店)은 양꼬치구이로 유명해서 한국 손님들도 자주 찾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좌석이 스무 석 정도 될까 말까한 홀이 있고 출입문 위에는 실타래에 둘둘 말린 명태가 걸려있었다.
아마도 개업식 날 고사 지낼 때 쓴 명태를 걸어둔 모양이었다. 명태가 노랗게 절은 걸 보면 개업한 지도 꽤 오래된 듯했다. 오른쪽 안으로 쑥 들어가 있는 주방은 벽면의 타일사이에 검은 때가 눌러 박히고 주방용기며 그릇들이 모두 땟국이 졸졸 흘렀다. 퀴퀴하고 좁아터진 주방에선 나와 또 다른 중국교포 아주머니 한분이 몸을 서로 부딪쳐가며 일하고 있었다.
오늘은 내가 이곳에서 삼년동안 일하면서 틈틈이 개발한 양고기 비밀양념을 분희 친구들에게 맛보이는 날이었다. 한국 친구들이 양꼬치를 맛있게 먹어준다면 내가 꿈꾸는 진짜 발해풍의 정원은 언젠가 이루어질 것이었다.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로 대대로 내려오면서 온 가족이 가슴에 품고 살아가던 순한 고향 마을의 모습, 아마 한국인들도 이미 잊어버린 정원인지도 몰랐다.
그 정원을 만들려면 먼저 값싼 양고기를 많이 팔아 돈을 벌어야 해.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양념장에 재어 노린내를 없애야 하는데. 먼저 떠난 어머니를 찾아 한국으로 나오기 전부터도 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이제 아버지의 소원 한 자락을 이루려하고 있었다. 그 비밀양념의 레시피는 내 머릿속에만 들어있었다. 아니 분희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닝안의 부추밭 옆에서 함께 자란 그녀와 나는 어릴 때부터 부추꽃 반지를 만들어 나눠 끼며 짝꿍이 되기로 약속한 사이였다.
분희는 가리봉 시장통에 있는 조그마한 지하 다방에서 일했다. 요즘 서울의 커피숍에선 거의 다 사라졌다는데 대륙다방엔 아직도 칸막이가 있었고 그것도 유난히 높았다. 손님도 거의 없어 파리 날리는 다방은 벽에 곰팡이가 피고 천장 밑으론 녹슨 수도관이 지나가고 있는 데다 하도 눅눅해서 잠시라도 앉았다가는 뼛속까지 축축하게 젖어들 것 같았다.
조명도 촉수 낮은 백열등을 달아놓아 더욱 후덥지근하게 느껴졌고 늙은이도 주름살 없이 팽팽해 보일 정도로 어둠침침했다. 한 가지 마음에 드는 것은 음악이었다. 흘러간 노래이긴 하지만 한국의 유행가를 틀어주고 있어서 가게가 쉬는 날이면 나는 음악을 들으러 가끔 들르곤 했다. 손님이 없을 때면 내가 좋아하는 중국 동포 가수 추이지엔(崔健)의 록음악을 신청해서 들었다.
그 중에서도 내 18번은 천안문 광장 시위 때 군중들 사이에 불려지면서 더욱 유명해진 ‘일무소유(一無所有)’였다. 그의 록은 거문고, 피리, 날라리 같은 동양악기에다 색소폰, 전자 오르간 등 서양악기를 혼합해 쓰고 있어서 음색이 독특하고 흐벅졌다.
가사도 마음에 들었다. 발아래 땅이 움직이고, 주위에 저 물은 흐르고 있는데/ 넌 줄곧 비웃었지, 내가 가진 것이 없다고./ 나는 악기의 음색까지 구별할 정도는 못되었지만 그의 음악은 동서양의 악기가 합해져서 더 풍부해진 것 같았고, 거침없이 외치는 힘찬 목소리는 마음속 깊은 곳까지 후련하게 뚫어주는 듯했다.
그때 분희가 있던 자리에서는 스포츠머리에 다부지게 생긴 중년 사내가 고개를 삐죽이 내밀고 웬 불청객이냐는 듯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기도 했다. 뭔가 일을 꾸미느라 패거리로 몰려드는 단골이 있지 않은 한 도저히 유지될 것 같지 않은 다방이었다.
혹시 보호한답시고 다가와서는 도리어 교포들을 뜯어먹고 사는 호박파나 뱀파는 아닐까 의심이 들었지만 나는 분희를 믿고 싶었다. 월급도 꼬박꼬박 나오고 가끔 팁 같은 것도 있으니까 이만한 데도 업서야. 경기도 안산의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하다가 온 분희는 지금 일자리에 비교적 만족한다는 듯이 말했다.
한국에 와서 괜찮다고 느낄만한 일자리를 갖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던 터여서 우리는 월급만 괜찮다면 자잘한 불만에 대해선 서로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도 어딘가에서 그런 후한 대우에 아들까지 잊고 아무 소식을 안 보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를 생각하는 마음만 변하지 않는다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어머니도 분희도 그까짓 돈 몇 푼에 나를 버리고 넘어갈 사람들이 아님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분희는 내가 하는 일에 언제나 자상하게 관심을 보이면서 나를 추켜세우곤 했다. 내가 여러 가지 향료를 바꿔가면서 양고기 양념을 실험할 때마다 양념장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고는, 이번엔 샹차이 즙이 들어갔네, 이번엔 월계수 잎을 넣었구만, 하며 족집게처럼 향료를 집어냈고, 둘이 누우면 팔도 못 뻗는 어두컴컴한 쪽방에서 몸을 섞을 때도 가끔 내 젖꼭지를 만지작거리면서 우리 파야, 이번엔 또 뭘 갖고서 양고기 노린내 없애는 공작 했누, 하고 꼬치꼬치 캐묻곤 했다.
지난 일요일에 마지막으로 양념장을 실험하고 나서 양꼬치를 시식할 때는 고기를 씹으면서, 이제 드디어 우리 파야 덕분에시리 한국 사람들 진짜 양고기 째지게 좋아……. 하다가 사래가 걸리자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고는 아예 노트에다 양념과 향료를 받아 적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으로 들어간 푸른색 향료만은 비밀이라며 순순히 밝히지 않았다. 분희가 파야, 우리 파야, 우리끼리도 비밀이 있누, 하고 내 가슴을 파고들었지만 나는 입을 꼭 다물었다. 내 이름은 임파지만 분희가 항상 ‘우리 파야’라고 부르면 나는 소동파라도 된 듯 기분이 우쭐해졌다.
평생 유배생활에 시달렸던 소동파, 소식(蘇軾)을 생각하면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시대 때 목수 일자리를 찾아 만주로 왔던 할아버지 덕분에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시(寧安市)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오랜 타향살이의 서러움을 달래려는 듯 소식의 ‘내 본시 집 없거늘 또 어디로 간단 말이냐(我本無家更安往)’라는 구절을 자주 읊곤 했다.
3년 전 처음 한국에 와서 가리봉동을 샅샅이 찾아 헤맨 뒤 마지막으로 시립보라매병원 무연고자 시신 안치소에 들어섰을 때도 내 머릿속에선 아버지가 읊어대던 그 시구가 떠올랐다. 당신이 입에 자주 담던 그 시구 때문이었을까. 아버지는 그곳에도 없었다. 원래 집이 없는 사람이라면 비록 관속이라고 해도 한 곳에 정착하고 있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을 꾹 참고 수십 구의 시신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아직 꿈을 다 이루지 못했으니 이런 곳에 와 있을 리가 없다고. 게다가 온화했던 성품으로 미루어 이상한 범죄사건에 연루되어 희생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갑작스런 심장마비나 뇌졸중으로 길에서 쓰러져 이런 곳에 왔을 수는 있다는 생각에 시신 안치실을 찾은 것뿐이었다.
아버지는 어디에서나 잘 적응하고 살아갈 코스모폴리탄이었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겉도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흔히들 경계인이라고 말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상대방의 아픔을 어루만져줄 수 있고, 양쪽을 이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어서 세상에서 할 일이 많다고 했다.
한국에 온 것도 어머니의 행방을 찾고 나서 중국 동포와 한국인들 사이에서 뭔가 할 일이 있을 것이라며 안정된 교사직을 버리고 나온 것이었다. 닝안의 집으로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아버지는 같은 교포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만 얘기했었다.
실컷 일하고도 임금이 체불되거나 떼어먹히는 경우가 많다는 걱정을 한 것으로 보아 혹시 그런 일을 도와주려고 애쓰고 있지 않나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러자 혹시 그 호박파나 뱀파들과 한 패거리가 되었거나 아니면 그들과는 다른 식으로 돕겠다고 무슨 운동 같은 걸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달랑 3개월짜리 C-3 관광비자로 들어와선 양꼬치구이 비밀양념을 개발한다고 깝죽대는 것도 그런 아버지의 생각을 물려받은 덕분이었다. 사실 나는 며칠 전 차이나 노래방의 장룡이 형처럼 언제라도 누가 신고만 하면 출입국사무소 직원에게 수갑이 채워져 당장 추방당하는 신세였다.
룡이 형은 브로커를 끼고 천만 원이나 들여 한국에 들어왔지만 본전을 챙기기는커녕 몇 달도 채 못 돼 중국으로 돌아가야만 되었다. 그 빚을 갚자면 형은 또다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국에 들어와야만 할 것이다. 중국에선 평생을 벌어도 그만한 돈을 갚을 길이 없었다. 눈물을 떨구며 끌려가면서도 가리봉 시장 통을 자꾸만 돌아보던 룡이 형의 모습에 나도 손등으로 계속 눈물을 훔쳤다.
나 역시 룡이 형처럼 언제든 붙잡히거나 불의의 사고로 죽어 경찰서 무연고 사망자 명단에라도 기록되기 전엔 이 나라 어느 명부에도 이름이 오를리 없는 불법체류자였다. 막막한 가슴을 안고 돌아 나올 때 직원의 지나치게 친절한 말소리가 뒤통수를 때렸다.
“다른 병원에도 없대요? 그럼 무연고 행려자로 분류돼 화장됐을 지도 모르죠.”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하지 않겠다는 듯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시신 안치소를 걸어 나왔다.
닝안시에서 조선어 교사를 하던 아버지는 어느 날 소학생이던 나를 징보호(鏡泊湖)로 데리고 갔다. 약 1만 년 전 화산 분출 때 생긴 중국 최대의 호수로 그 부근이 발해의 유적지인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가 있는 곳이라고 역사시간에 배워서 알고 있는 곳이었다.
‘발해성터에서 무엇을 해야 할꼬. 나라일 걱정에 하룻밤이 일년 같구나.’ 하고 읊었다는 어느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었다. 중국이 발해 역사를 훔쳐가 무슨 일을 꾸미려 한다고 했지만 나로선 도무지 모를 얘기였다. 그저 난생 처음 보는 드넓은 호수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질 뿐이었다.
호수 주변에는 올망졸망 산봉우리와 괴상하게 생긴 바위산이 솟아있고 그 사이로 폭포가 춤추듯 힘차게 쏟아지고 있어서 어린 마음에도 정말 세상에 이렇게 멋진 곳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경치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폭포촌(瀑布村)에 발해풍의 정원이라는 간판을 달고 세워진 조선족 민속촌이었다.
그곳에서는 조선족 춤과 씨름경기, 그네뛰기, 널뛰기 등을 보여주기도 하고 새납이며 장구와 꽹과리, 해금 등을 연주하면서 관광객을 맞고 있었다. 나는 새납이라고 불리는 관악기가 신기했다. 끝에 나팔이 달려있어서 음을 진폭해 주는 듯했다. 고음의 멜로디가 구슬프게 가슴을 파고들고 장구와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가운데 색동저고리에 빨간 치마, 노랑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은 두 소녀가 암팡지게 널을 뛰는 장면은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파란 하늘과 호수를 배경으로 두 소녀가 한번씩 공중으로 올라갔다가 뛰어내리면서 무릎을 굽혀 다시 널판을 힘차게 구르는 모습은 마치 알록달록한 꽃송이 두 개가 하늘로 번갈아가며 고무줄에 튕긴 듯 튀어 올랐다 반동으로 다시 내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널뛰기 하는 소녀들 모습에 넋을 잃고 있을 때 옆에서 구수한 냄새가 풍겨왔다. 양고기꼬치구이를 숯불에 굽는 냄새였다. 나는 아버지 손을 끌고 양꼬치구이대 앞으로 갔다. 고춧가루와 깨소금에다 즈란이라는 향료를 섞어 양고기를 찍어 먹었다. 즈란은 마치 작은 코스모스 씨앗처럼 생긴 향료였다.
“양고기는 서북쪽 신장 위구르족 음식인데 유목민들 덕분에 정반대편에 사는 우리한테까지 전파된 거지.”
나는 꼬치에 꿰어 구운 은행과 마늘을 까먹으면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아버지 표정은 사람들이 이리 저리로 옮겨 다니고 이방인들과 섞여서 산다는 건 좋은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어릴 때 내가 양고기를 놓고 깨작거리고 있을 때면 아버지는 세계 어디든 가서 그 나라 사람들과 어울려 살려면 무슨 음식이든 먹을 줄 알아야 한다고 타일렀다. 게다가 쇠고기나 돼지고기는 혹시라도 성인병을 일으킬 수 있지만 양고기는 맛이 쫀득하고 진하면서 비타민과 철분도 풍부하고 몸을 따뜻하게 보해 준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늘 상에 오르던 음식이다 보니 이젠 하루라도 빠지면 서운할 정도로 양고기를 즐기게 되었다. 양꼬치에는 육질이 연한 고기를 써야 하기 때문에 우리 가게에서는 생후 일년 미만의 뉴질랜드산 램을 썼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 동네 식당에서는 양털도 깎고 식용으로도 쓰는 머턴을 썼다.
머턴은 다 자란 양이어서 육질이 몹시 질겨 양념장에 오랫동안 숙성시켜도 도무지 연해지질 않는다고 어머니는 늘 투덜대곤 했다. 아버지는 그때 위구르족 이야기를 하면서 중국 지도가 머릿속에 또렷하게 새겨지도록 묘사해 주었다. 중국의 모습이 고양이 머리 모양을 닮아서 오른쪽 귀는 헤이룽장성, 왼쪽 귀는 신장성이라고 했다.
그리고 호랑이처럼 생긴 조선반도가 고양이 왼쪽 귀 밑을 떠받치고 있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조선반도를 호랑이라고 부르면서 중국 대륙을 고양이라고 부르는 게 그땐 아무렇지도 않게 들렸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비율로 따져볼 때 어쩐지 균형이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은 반드시 크기만으로 가치를 따질 수는 없는 법이다.
어떤 것은 크기가 달걀만 해도 엄청난 가치를 지닌 보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 본 민속촌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한국에 나오기 몇 달 전에 다시 한 번 찾아가 보았다. 그때는 한복차림을 한 최진실, 채시라, 김희선 등 한류(韓流) 스타들의 모습과 윤도현인가 하는 가수가 기타를 치며 열창하는 모습이 화려하게 장식돼 있어서 널뛰는 소녀들이나 그네 뛰는 처녀들의 모습도 무색해 보이고 새납이라는 악기도 초라해 보였다.
쇠꼬치에 네모난 양고기 조각들이 다섯 점씩 꿰어져서 쟁반에 수북이 쌓였다. 이번엔 양꼬치를 먹고 나서 식사용으로 쓸 국수와 만두를 만들 차례였다. 역시 나만이 그 비법을 알고 있는 파란 국수와 삼색 만두였다. 밀가루에 콩가루를 넉넉하게 섞어 서너 번 채에 쳐서 양푼에 담아놓고 하얀 항아리 속에 들어있는 파란 가루를 꺼냈다.
가루를 물에 타서 녹을 때까지 잘 저었다. 부추를 살짝 쪄서 바싹 말린 뒤 곱게 빻은 가루였다. 밀가루에 파란 물을 부어가며 반죽을 했다. 양고기 양념에도 실은 부추가루가 들어갔지만 분희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반죽을 홍두깨로 밀어 얇게 늘인 뒤 가늘게 채 썰어 소쿠리에 살포시 널어놓았다. 그 다음엔 당근과 맵지 않은 고추와 피망을 갈아 체에 걸러 붉은 물을 만들었다.
붉은 만두피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부추가루를 섞어 파란 피도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파란 국수와 삼색 만두피가 마련되었다. 오늘 분희 친구들의 밥상은 오색찬란한 색깔로 물들 것이다. 물론 만두 속에는 부추즙에 재어뒀던 양고기를 다져넣을 것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힘주어 말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해 겉도는 것 같지만 실은 양쪽을 잘 아는 사람들이 바로 경계인이고, 그들이야말로 양쪽에서 바라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어쩌면 추이지엔도 조선족 부모에게서 태어나 중국에서 살면서 서양음악을 공부해 더 깊은 음색을 갖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릴 땐 아버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철이 들면서 한국 사람들이 양고기를 좋아하도록 만들 수 있다면 나도 세상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양꼬치만은 좋아하도록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러려면 먼저 양고기의 노린내를 없앨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어떻게 하면 양고기의 노린내를 없앨까 하는 고민은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마저 찾을 길이 묘연해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3년 전 몇 군데 간병사협회며 종합병원을 찾아다녀 봤지만 어머니는 아무데서도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에는 서울의료원이라고 쓰여 있었고, 이보다 더 안전하고 보수도 후한 일자리는 없다고 쓰여 있었다. 일년만 더 고생해서 내 대학등록금은 벌어 들어오겠다고 하던 어머니였다.
하지만 그 병원에 들어가 중국 동포 간병인들을 만나 물어보아도 조향이라는 이름의 간병인은 들어보지 못했노라고 했다. 한 교포 간병인은 아마도 다른 병원으로 옮겨가는 환자를 따라갔거나 가정집으로 들어간 모양인데 그러면 전혀 찾을 길이 없노라고 말해 주었다. 힘없이 돌아서서 몇 발짝 뛰었을 무렵 간병인은 나로선 알 수 없는 야릇한 말을 혼자 중얼거리면서 끌끌 혀를 찼다.
“허기사 누운 서방 하나 잘 만나믄야 별 볼일 없이 싸돌아다니는 열 서방보다 훨 낫디.”
그 당시에는 무슨 얘긴지 아리송했지만 여러 군데 병원을 찾아다니면서 교포 간병인들 말을 듣다보니 짐작이 갔다. 부자이면서 장기 치료를 요하는 환자를 만나는 경우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부인은 아예 떨어져 나가고 일정한 몫을 받고 중국 교포 간병사가 거의 부인 역할을 하면서 임종까지 책임지기도 한다는 얘기였다.
그렇다 해도 어머니는 왜 연락을 끊어버린 것일까? 그날 아침 티브이에서는 대림동 어느 여인숙 앞에서 가방에 든 채 발견된 시신은 지린성 출신 중국 교포인 것으로 밝혀졌다는 뉴스가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어머니가 결코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아무튼 중국교포들은 이 나라 명부에 기록이 없으니 주민으로서 보호를 못 받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나는 지하철 7호선을 타고 가산디지털단지 역에서 내려 가리봉동 쪽으로 향했다. 요즘 이곳은 지하철에다 시흥대로와 만나는 큰 길이 시원스럽게 뚫리고 버스도 많아 교통만은 시내 어느 곳 못지않았다. 가리봉동으로 들어가려면 전철에서 내려 육교를 건너야했다. 그 육교는 서울 시내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파란 육교였다.
육교 전체에 초록색 인조 카펫을 깔아놓아 계단을 오르내릴 때면 부드러운 감촉에 발길이 절로 가벼워졌다. 시내에 나갔다가 험한 일을 당한 날에도 나는 그 파란 육교만 밟으면 고향 모퉁이에라도 들어선 것처럼 마음이 훈훈해왔다. 그날도 나는 가리봉동 쪽으로 난 계단 꼭대기에 한참 앉아 있었다.
시월의 해가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면서 고층 빌딩 꼭대기에 걸려있었다. 몇 달을 찾아다닌 일이 헛수고로 드러나고 다시 또 해가 지는 모습을 보자 괜히 코끝이 찡해오면서 닝안의 부추밭 옆 고향집이 그리웠다. 하지만 이제는 내 고향이 닝안인지 서울인지 나도 헷갈렸다.
무엇보다도 가리봉 하고 말할 때 울리는 소리에는 시골 누나처럼 등을 기대고 싶은 따사로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 동네도 곧 개발되어 없어질 거라고 했다. 그러면 앞으로 들어오는 빈털터리 중국교포들은 어디에 둥지를 틀까 걱정되었다. 들어오는 길에 중국식품점에 들러 깐두부와 샹차이에 코우뻬이술도 샀다. 기운이 너무 없어 영양보충을 할 양으로 삭힌 오리알도 몇 개 달라고 했다. 쪽방을 열자 불이 켜져 있었다. 옆방 사람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작은 방을 또 나누어 쪽방을 만들었기 때문에 천정에 걸린 전등 하나가 두 방을 밝히게 되어있었다. 나는 흐릿한 불빛 아래 부엌이자 침실도 되고 분희가 오는 날엔 거실도 되는 쪽방에 앉아 작은 쟁반에다 술상을 차렸다. 얇은 깐두부 위에 잘게 썬 샹차이와 오리알을 올리고 돌돌 말아 입에 넣고 우적 우적 씹으면서 코우뻬이를 마셨다. 고량주를 컵에 담아 파는 것을 코우뻬이라고 했다.
오리알로 혀가 짭짤해졌을 때 아삭아삭한 샹차이가 씹히자 입안에 향기가 가득 퍼졌다. 문득 한국 사람들은 왜 샹차이를 싫어할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절에서는 스님들이 옛날부터 즐겨먹던 미나리 비슷한 야채인데 한국 관광객들은 중국 식당에만 들어서면 뿌야오(不要) 샹차이 하고 외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부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다. 한국 사람들도 부추는 싫어하지 않는다.
부추로 김치도 담고 만두 속도 만들고, 돼지고기와 섞어서 볶음도 하고 계란찜도 하고 데쳐서 나물로도 먹고 못하는 요리가 없다. 그 중에서도 나는 갈치조림을 할 때 넣어서 먹는 부추가 가장 맛이 있었다. 갈치맛과 고추, 마늘 양념이 배어든 부드럽고도 쫄깃한 부추만 골라 흰쌀밥에 걸쳐 먹으면 금세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양쪽 사람들의 입맛이 일치하는 야채가 있다면 그건 단연 부추였다.
어릴 때 닝안에서 살 때 내가 밤에 오줌을 싸거나 넘어져서 무릎에 멍이 들면 어머니가 부추즙을 내어 숟가락으로 떠먹였다.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먹지 않겠다고 앙탈을 부렸지만 몇 번 부추즙을 갖고 어머니와 소동을 부리고 나면 무릎의 멍이 감쪽같이 사라지곤 했다. 집 옆에 부추농장이 있어서 나는 늘 시큰둥하게 바라보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부추에는 장을 튼튼하게 하고 또 남자의 양기를 돋우어주는 성능이 들어있다고 했다.
절에서 스님 밥상에 자주 오르는 샹차이와는 달리 부추는 정력을 강하게 해주는 채소였다. 예부터 부추를 많이 먹는 사람은 일은 하지 않고 여자만 밝힌다고 해서 게으름뱅이 풀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게다가 부추는 별 모양으로 생긴 꽃이 무척 예뻤다. 닝안의 부추농장에서는 부추를 일년에 4월과 8월, 10월 이렇게 세 번 베어 시장에 내놓았다.
나는 방과 후면 숙제를 얼른 끝내고 밭에 가서 일을 거든 뒤 부추를 한 아름 얻어오곤 했다. 씨를 받기 위해 남겨둔 부추에선 긴 대궁이 올라오고 꽃차례가 우산 모양으로 벌어지면서 꽃가지마다 여섯 개의 작은 꽃잎이 별 모양으로 피어났다. 아버지가 소동파의 시를 자주 흥얼거렸다면 나는 단연 한국 시인 박남준의 ‘흰 부추꽃으로’라는 시를 좋아해서 외우고 다녔다.
고등학교 때 아이들이 한류, 한류 하면서 김희선이나 안재욱 얼굴을 닮고 싶어 하자 선생님은 배우뿐 아니라 좋은 시도 있다면서 소개해 주었다. 벌써 4-5년 전이어서 시구는 거의 다 잊어버렸지만 무슨 ‘옹이 박힌 나무’이야기가 있었고 그런 나무를 아궁이에 넣으면 더 활활 잘 타오른다고 했다. 상처 받은 나무라서 그렇다고 시인은 썼다.
그런 나무는 사람으로 치자면 세상 살면서 등뼈가 꺾인 사람들이고 그런 이들이 한번 뭔가를 하면 무섭게 타오를 수 있다는 뜻이라고 선생님은 풀이해 주었다. 내 뇌리에 박힌 것은 그 대목보다도 마지막 구절이었다.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흰 부추꽃 그 환한 환생’ 내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하는 대목에 가서 왠지 가슴이 먹먹해왔다. 그날 잠시 그 시를 생각하다가 얼핏 양고기를 부추즙에 재어 뒀다 구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물론 로즈마리나 월계수 잎, 타임, 키위, 배즙도 함께 쓰는 것이다. 양념의 배합을 이리 저리 궁리하던 나는 부모님을 찾느라 평생을 허비하기 보다는 그분들이 하고 싶어 하던 일을 대신 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후 다섯 시가 지나자 홀에다 식탁을 차릴 시간이 되었다. 약속시간은 일곱 시. 앞으로 두 시간밖엔 남지 않았다. 7-8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좌석에다 수저를 놓고 볶은 땅콩과 중국식 무절임인 짜샤이와 오이지무침을 차려놓았다. 양꼬치를 먹을 때 가장 중요한 양념인 즈란과 고춧가루, 깨소금을 하얀 접시에 함께 담아 테이블마다 얹어 놓았다.
먹기 직전에 섞어 먹기도 하고 입맛에 따라 양념을 골라서 찍어먹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참숯으로 불을 피운 양꼬치 구이 불판은 손님이 자리에 다 앉은 다음에 가져와야 한다. 식탁 준비는 끝났지만 아직 만찬장 분위기를 만들려면 멀었다. 나는 밤마다 쪽방에서 틈틈이 그려두었던 그림들을 꺼내와 식당 벽에다 붙였다.
알록달록한 한복을 입은 소녀들이 널뛰는 모습의 그림도 있었고, 공중에 날아올라 댕기를 날리며 그네를 힘차게 구르는 처녀 모습도 있었다.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그 옆에선 여인네들이 고추방아를 찧는 그림에다, 북과 꽹과리, 새납을 불어대며 풍물놀이를 하는 그림도 있었다. 징보호의 파란 물결과 세찬 폭포줄기와 발해 성터를 그린 그림도 물론 준비했다.
내가 닝안에서 보았던 발해풍의 정원인 조선족 민속촌을 내 나름대로 그린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유리창 위 벽면에다가는 검은 색 싸인펜으로 발해풍정원(渤海風庭園)이란 글자를 한자로 써 붙였다. 이제 풍악이 있어야만 된다.
나는 주인집 딸에게 간곡하게 부탁해 빌려온 카세트 녹음기에다 얼마 전에 쫓겨 간 장룡이 형한테 얻은 테이프를 넣었다. 추이지엔의 노래가 흘렀다. 발아래 땅이 움직이고, 주위에 저 물은 흐르고 있는데/ 넌 줄곧 비웃었지, 내가 가진 것이 없다고./ 분희의 한국 친구들이 들어오는 순간 이 노래를 들려줄 것이다.
오늘 한국 친구들이 돌아갈 때까지 추이지엔이라는 중국 동포 가수의 이름만 외우고 양꼬치 맛에 반해서 돌아가기만 한다면 나로선 더 바랄 게 없었다. 분위기를 띄울 벽 장식이 끝나고 나서 홀 가운데 서서 둘러보았다. 아버지 어머니를 찾아 한국에 온지 3년 반 만에 내가 이런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십일월은 해가 일찍 떨어져 날이 빨리 어두워졌다. 밖이 어두워지자 유리창에 언뜻 내 모습이 비쳤다. 흰색의 주방장 모자를 쓰고 앞치마를 두른 나는 서울 가리봉동의 양꼬치 요리사였다. 한참 바라보자 요리사의 모습은 차츰 처음 한국에 와서 일자리가 없어 무작정 서울 거리를 헤매던 때의 초췌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서울역 부근에 있는 노숙자 쉼터에는 네 평도 되지 않는 좁은 방안에 스무 명이 넘는 남자들이 빽빽이 들어차 서로 몸을 포개며 누워있었다. 돌아누울 수도 없을 만큼 비좁은 방이어서 몸이 닿지 않을 수가 없는데도 조금 스치기라도 하면 서로를 쳐다보는 눈빛이 금세 살인이라도 할 듯했다.
눈을 감고 죽은 듯이 웅크리고 있느라 자고 나면 밤새 몸이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이튿날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결심했지만 일자리를 얻을 때까지는 그래도 비바람을 가려줄만한 데는 그곳밖에 없었다. 역 광장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몇 잔 마시고 들어갔다가 늙수그레한 아저씨한테 멱살이 잡히고 발길로 걷어차이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술 냄새를 풍겼다는 게 죄목이었다. 며칠 뒤 쉼터로 짙은 눈썹에 땅딸한 스포츠머리 사내 두 명이 찾아와 일할 사람을 찾았다. 고마운 마음에 나도 그 사내들을 따라 안양의 무슨 빌딩 건설 현장으로 갔다. 6개월 동안 등이 휘어지도록 벽돌을 나르고 끼니는 현장에 있는 식당에서 콩나물국과 단무지에 보리밥으로 때웠다.
일당 6만원을 꼬박꼬박 적립했다가 공사가 끝나는 6개월 뒤에 준다기에 나는 월급으로 달라고 애원했다. 꾹 참았다가 6개월 치를 한꺼번에 받으면 목돈도 되고 좋지 뭐, 하고 현장 소장은 내 등을 두드리며 두툼한 입술을 혀로 몇 번이나 핥았다. 등에 진 벽돌 무게에 눌려 발길이 떼어지지 않을 때면 6 곱하기 30 곱하기 6을 머릿속으로 곰곰이 계산해 보곤 다시 힘을 냈었다. 공사가 끝날 무렵에 나타난 말쑥한 본사 직원은 다짜고짜로 비자를 꺼내 보라고 했다.
만료가 된 것을 뻔히 알면서 보자는 게 수상했지만 안주머니에 넣어둔 비자를 꺼내 보였다. 비자를 확인한 직원은 눈을 부라리면서 내게 당장 피신하라고 호령했다. 불법체류자 검거령이 내려져 건설사 현장마다 출입국 사무소 직원이 쫙 깔렸다. 우리 현장에도 30분 뒤면 들이닥칠 거다. 나는 겁이 나서 6개월 치 임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그 길로 가리봉동 쪽방으로 숨어들었다. 이튿날 밤 어두워진 뒤에야 나는 내 고향과 같은 이름의 가게를 찾아와 무조건 일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유리창엔 다시 주방장 모자를 쓴 요리사 모습이 나타났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그림으로 써 붙이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발해풍의 정원을 여기 꾸며놓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꿈꾸던 정원. 아무도 배고프지 않고 아무도 남의 나라라는 쭈뼛거림 없이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곳. 거기에다 한국 사람들 입맛에 꼭 맞는 가리봉 양꼬치도 개발했다.
부모님을 찾지 못해 가슴 한구석에 맺힌 응어리가 사라진 건 아니지만 나를 믿고 가게를 전적으로 맡겨주는 주인아저씨와 또 좋아하는 분희가 있어 가리봉동은 내가 등을 부빌 수 있는 따스한 언덕이었다. 내 양꼬치로 해서 가리봉, 내 누나 같은 가리봉은 이제 유명해질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닝안에서도 서울에서도 이미 없어지고 없는 발해풍의 정원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분희였다. 네 사람이 더 온다고? 알았어. 양꼬치 더 꿰어 놓을게. 빨리 와. 시간은 벌써 일곱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손님이 오기 전에 양꼬치를 더 준비해 두려고 재빨리 주방으로 들어갔다. 푸른색의 양념장에 재어둔 깍두기 모양의 양고기를 꼬치에 꿰기 시작했다. 양고기 특유의 노린내는 말끔히 사라지고 향내가 느껴졌다.
부추즙과 월계수 잎, 키위, 로즈마리, 타임 등 여러 가지 향료가 들어갔지만 마지막으로 내가 밝힐 수 없는 양념도 있었다. 그건 분희에게도 말하지 않은 가리봉표 양꼬치의 비밀양념이었다. 신장 위구르족의 것도 헤이룽장성의 것도 아니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인 나 임파가 서울에 와서 개발한 가리봉만의 양념이었다.
아직도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긴 해도 아버지의 말대로라면 나는 경계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한 가지는 해낸 셈이었다. 비밀을 가진 나는 부자라도 된 듯 마음이 뿌듯해졌다. 연하고 신선한 새끼양고기를 꼬치에 꿰고 있자니 아까 테이프로 들었던 노랫가락이 뇌리를 맴돌고 있었는지 입에서 흘러나왔다.
난 쉬지 않고 네게 물었지/언제 나와 함께 갈 거냐고/ 하지만 넌 비웃었지. 내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고/ 닝안을 떠난 뒤로 내 입에서 저절로 노래가 나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한 소절 부를 때마다 양꼬치 한 개가 꿰어졌다. 다시 꼬치를 집어 고기를 꿰려고 할 때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손에 쇠꼬치를 든 채로 분희 친구들을 맞이하러 홀로 나갔다. 뜻밖에도 분희 여자친구들은 보이지 않고 어깨가 떡 벌어진 웬 사내들 몇이 불쑥 들어왔다. 다방에서 분희와 같이 있었던 그 사내도 끼어 있었다. 분희는 사내들 뒤에 가려져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셋이서 날 에워쌌고 그 중 한 명이 내 몸에다 뭔가를 불쑥 꽂으며 말했다. 건방진 녀석, 누구 앞에 쇠꼬챙이를 들고 휘둘러? 나는 배를 쥐고 쓰러지면서 사내의 걷어 부친 팔에서 날름거리는 뱀의 혀를 보았다.
이제 내 몸은 그 칼의 감촉을 기억할 것이다. 뱃속 깊숙이 꽂히던 예리하고 차가운 쇠붙이의 느낌을. 내 이름을 이 나라 인명부 어디엔가 등록되게끔 해준 고마운 쇠붙이였다. 눈앞이 흐려왔고 안 돼! 하고 분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난 괜찮아, 하고 답해주고 싶었지만 말소리가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애당초 이런 날이 너무 빨리 왔다 싶었다. 내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일을 너무 앞당겨 이룬 게 잘못이었다.
나는 ‘흰 부추꽃으로’ 라는 시에 나오는 나무만큼 아직은 옹이가 덜 박힌 나무인지도 몰랐다. 한번쯤 활활 타오를 만큼 옹골차게 옹이가 생겼어야 하는 건데. 등뼈가 덜 꺾인 것일까. 하지만 내 몸이 흰 재가 되어 부추밭에 뿌려지면 흰 부추꽃이 피어나고 내 목숨도 환해질까. 어쨌든 분희만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면 난 아무래도 좋았다. 아니 그녀도 어머니도 결코 변치 않을 것이다. 분희의 울부짖는 소리 사이로 사내들이 내게 침을 뱉으며 쏘아대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굴러들어온 개뼉따귀가 남의 장사를 망치려 들어?”
“주제를 모르는 건 지 껍데기하고 똑같구나야.”
사내들의 빈정거림에 추이지엔의 노래가 오버랩 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몽롱한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발아래 땅이 움직이고, 주위에 저 물은 흐르고 있는데/넌 줄곧 비웃었지, 내가 가진 것이 없다고.”
(박찬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