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 현감 오한 박공 행장(縣監五恨朴公行狀)
선생의 휘는 성건(成乾), 자는 양종(陽宗)이며 오한(五恨)은 호이다. 함양 박씨(咸陽朴氏)는 고려 예부 상서(禮部尙書) 선(善)으로부터 시작되어 대대로 현달하였다. 고조 지빈(之彬)은 조청대부(朝淸大夫) 위위(尉衛)를 지내고 치사(致仕)하였고, 증조 계원(季元)은 관례를 하기 전에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내고 판서에 추증되었다. 조부 사경(思敬)은 무과에 급제하여 군사(郡事)를 지냈고, 부친 언(彥)은 만호를 지내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타고난 성품이 깨끗하고 남달리 걸출하였다. 집이 영암(靈巖)의 구림(鳩林)에 있었는데, 구림은 호남 바닷가의 승경으로 물과 대나무, 언덕과 정원의 흥취가 있었다. 선생은 그곳에 살면서 즐거워하여 한죽정(閒竹亭)을 짓고 날마다 그곳에서 시를 읊조리며 마치 생애를 마칠 것처럼 하였다.
만년에 성균관에 올라가 마침내 성화(成化) 임진년(壬辰年, 1472, 성종 3) 문과에 급제하였다. 금성 교수(錦城敎授), 춘추관 기사관, 소격서 영, 장수 현감(長水縣監)이 처음부터 끝까지의 관력이다. 집에 있을 적에는 행실이 지극히 돈독하여 항상 법도를 따랐으며 고을 사람들이 모범으로 삼았다.
후진을 양성하는 것을 더욱 좋아하여 교수가 되자 문풍이 빛나 크게 변하였다. 일찍이〈금성곡(錦城曲)〉6장을 지어 노래로 불렀는데, 금성 사람들이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장수에 있을 적에는 한결같이 유학으로 다스리니 사방이 잘 다스려졌다.
그러나 선생의 평소 뜻은 초야에 있었기에 시속을 따라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복건 차림으로 남쪽으로 돌아와 단촐하게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었으며 좌우에 도서를 두고 방에서 한가로이 지냈다. 부귀영달은 뜬구름처럼 보고 배회하며 스스로 즐기다가 나이 일흔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태어난 것은 영락(永樂) 연간이며, 죽은 것은 성화 말년으로, 그 해와 달은 자세하지 않다.
지은 시문은 병화(兵火)에 잃어버리고 절구 세 수만 전한다. 그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동쪽으로 한죽정에 눕고 서쪽으로 배를 띄우며 / 東臥竹亭西泛舟
남쪽 개울에서 발 씻고 북쪽 정원에서 노니네 / 南溪濯足北園遊
평생 호탕하여 뜻이 얽매이지 않아 / 平生浩蕩不羇志
동서남북 마음대로 가고 머무네 / 南北東西任去留
재사당(再思堂) 이원(李黿) 공이 선생의 아들 고광공(孤狂公: 박권(朴權))을 위해 정자의 기문을 지어주었는데, 선생의 이 시(詩)를 대단히 칭찬하며 호탕하여 속세를 떠난 기상이 있으니 기수(沂水)에서 목욕한 사람과 같다고 하였다. 여기서 그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다.
고광공의 휘는 권(權)이며 강직하고 단정하여 한 시대의 존경을 받았다. 연산군 때 정언으로 상소하여 극력 간언하다가 길주(吉州)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남쪽으로 옮겼다. 중종이 반정하자 사면받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미처 등용되지 못하고 죽었다. 사간원 대사간에 추증되었으며《갑자명현록(甲子名賢錄)》에 보인다. 군자는 “오한의 맑은 지조는 참으로 미치기 어려우나 고광을 아들로 두기는 더욱 어렵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2백여 년이 지난 신유년(辛酉年, 1741, 영조 17), 고을 사람들이 월출산(月出山) 서쪽에 사당을 세워 선생 부자를 제사 지냈다. 3년 뒤, 선생의 손자 생원 규정(奎精)이 지극한 행실이 있다는 이유로 또 배향하였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공이 선생 3대의 행록(行錄)을 지은 적이 있는데, 후손 순우(淳愚)가 그중에 한두 가지 빠진 것이 있다는 이유로 내게 행장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호남에는 예로부터 기이하고 호걸스러운 선비가 많다고 일컬어졌다. 박씨 집안 한 곳은 선생을 얻어 이미 존중을 받는데, 아들과 손자는 또 어찌 그리 현명한가. 비록 그 언행과 풍도는 먼 옛날 일이라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선배들의 기록은 모두 상고하여 믿을 만하다.
높은 풍도와 곧은 절개는 후세 사람을 감동시키기 충분하니, 향선생(鄕先生)으로서 죽어서 마을에서 제사 지낼 만한 사람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리라. 마침내 이상과 같이 서술하고, 입언군자(立言君子)의 채택을 기다린다. 후손의 성대함은 여기 다 기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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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현감 …… 행장 :
이 글은 박성건(朴成乾, 1414~1487)의 행장이다. 박성건의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양종(陽宗), 호는 오한(五恨)이다. 1453년
(단종 1) 진사시에 합격하고 1472년(성종 3) 문과에 급제하였다.
[주02] 재사당(再思堂) …… 지어주었는데 :
이원(李黿)의《재사당일집(再思堂逸集)》 권1에〈간죽정기(間竹亭記)〉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주03] 기수(沂水)에서 목욕한 사람 :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을 말한다. 공자가 원하는 바를 묻자 증점은 “늦봄에 봄옷이 완성되면 관자(冠者) 5, 6인, 동자(童子) 6, 7
인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습니다.” 하였다.《論語 先進》
[주04] 농암(農巖) …… 있는데 :
김창협의《농암집(農巖集)》별집 권1에〈박씨삼세행록(朴氏三世行錄)〉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주05] 향선생(鄕先生)으로서 …… 사람 :
당(唐)나라 양거원(楊巨源)이 일흔이 되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한유는 “옛날에 이른바 향선생으로서 죽어서 마을
에서 제사 지낼 만한 사람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五百家注昌黎文集 卷21 送楊巨源少尹序》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