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발의 회상: 두만강에서 중앙아까지 ⑧
남대문 문지방과 구구단, 4 x 7 = 27 ?
앞에서 언급한 ‘일체가 상품’이란 논리처럼 사회주의권의 체제전환시기 시장과 상품 등 자본주의에 대한 나름대로의 주장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냉전의 장막을 상상하면 사회주의권에 대한 자본주의 권에서도 착오와 상상도 마찬가지이다. 우물 안 개구리, 코끼리 장님 이야기처럼 흔한 것이다. 서울을 가본 사람과 안 가본 사람의 남대문에 대한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세상 어느 곳에서나 존재한다. 억지와 우기기, 오만과 편견은 우리생화의 도처에 사라지지 않고 존재한다.
시골에서 서울 구경을 다녀와서 남대문에는 문턱이 없다고 했지만, 서울에 가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남대문의 문턱이 단단한 대추나무나 박달나무로 되어있다고 우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옥은 방마다 문에서 두 문설주 아래에 가로 댄 나무인 문지방(門地枋)이 있다. 문턱은 문짝의 밑이 닿는 문지방의 윗부분을 말하는데, 어떤 일이 시작되거나 이루어지려는 무렵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옛날 어느 시골의 영감이 서울에 와서 남대문을 구경하였고 남대문에 문턱이 없다는 것을 보았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남대문에 문턱이 없더라고 했는데 남대문 구경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반대하며 남대문에는 대추나무 문턱이 있다고 우겼다는 것이다. ‘집 안방 문에도 문턱이 있는데 그렇게 큰 남대문에 어떻게 문턱이 없겠냐?’며 논리적으로 주장하였다. 더구나 남대문에는 사람이 많이 드나들으므로 무른 나무 문턱은 쉽게 닳기 때문에 단단한 대추나무나 박달나무로 문지방을 만든다고 한술 더 떠서 주장하게 되었다. 논쟁의 결과는 서울에 가서 남대문을 본 사람이 지는 것은 당연하고 “내가 문턱이 있는데 잘못 보았는지도 모른다.”라고 소신이 흔들리기까지 하게 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서울의 남대문을 보고 온 사람이 ‘숭례문’이라고 써있다고 해도 곧이듣지 않고 ‘남대문’이라고 써있다는 것이 논리에 맞는다고 우기는 것이다. 아무리 숭례문이라고 써있다고 주장한들 주변에서 남대문으로 쓰였을 것이라는 논리에 밀려서 머쓱해지는 것이다. 머쓱해질 뿐만 아니라 자신이 보고 온 것조차 착오일 수 있다는 지경까지 이를 수 있다.
“남대문 문지방”이야기에서처럼 인간은 편견에 마구 휘둘린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은 확증적 편향이다. 확증 편향은 자신의 신념이나 기대와 일치하는 정보는 쉽게 수용하지만 신념과 어긋나는 정보는 그것이 아무리 객관적이고 올바른 정보라도 무시해 버리는 심리적 편향이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올바른 사고와 행동을 방해하는 요인인 마인드 버그(mind bug)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편견과 고정관념이 대표적인 마인드 버그다. 자신이 경험한 한 두 가지를 가지고 진리인 것처럼 확대해서 해석하는 것이다. 반대의견은 아예 사실이라 하더라도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틀렸다는 증거가 나타나도 인정하지 않고 핑계(避計)거리를 찾아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거나 정당화시킨다. 어쨌든 사람은 정도의 차이일 뿐 편견과 고정관념이 없는 사람이 없다.
나도 이런 경험을 한바 있다. 내가 압구정동에 살 때였다. 교수들의 회식이 있는 자리에서 압구정동을 한자로 어떻게 쓰느냐의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자신 있게 압구정동(狎鷗亭洞) 이라 하였다. 그러나 Ch 교수가 押鷗亭洞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자기가 사는 동네이름도 정확히 모른다고 쫑코까지 먹이는 것이었다. 바로 잡으려 해도 다른 교수들도 우기는 쪽에서 동조하면서 나를 놀리는 것이었다. 그들이 알면서도 그랬을는지 모르지만, 아무리 바르게 얘기 해봤자 본전도 못 찾을 지경이었다.
그 후 간혹 이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보면 역시 내가 옳다 해도 비난은 나에게로 오는 것이었다. 우스갯소리겠지만 재판이야기가 있다. 이야기 중에 구구단에서 "4 x 7 = 28" 을 자꾸 "4 x 7 = 27"로 우기는 자가 있었다. 격론이 심하여 재판까지 갔는데 판결은 "4 x 7 = 27"이 맞는다는 것이었다. 참, 어이가 없는 판결인데, 판결 후일담에서 판사 가라사대, “이 사람아, "4 x 7 = 28" 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 사람이 그걸 모르는 것 같아? 아직도 세상을 살줄 모르누만 . . . ” 허허 ~ ~ ~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이방언의 하여가(何如歌), 갈릴레오의 지동설 꼬리 내리기/혼잣말 . . . 사례가 많구나. 그래서 세상은 요지경 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