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소식>에 파상 셀파라는 가명으로, 수기 '그래도 나는 사장님을 믿는다'를 쓴 사람의 본명은 핀조 라마(28세)입니다. 뚱바의 원산지로 유명한 칸첸중가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올랑중꼴라 지방의 '룽퉁'이라는 마을이 그의 고향입니다.
<나팔꽃 통신>이 우리나라의 애주가들에게 <뚱바>를 제대로 소개하게 된 것은 그와의 특별한 만남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핀조라마를 그의 이모가 운영하는 <뚱바집>에서 만났는데, 핀조는 지금 그렇듯이 그때도 그 뚱바집에서 이모를 돕고 있었습니다.
최근 많은 우리나라 여행자들이 핀조 이모네 식당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카투만두의 여행자 거리 타멜에서 가장 맛있고 싼 음식(만두, 국수, 볶음밥 등)을 팔고 있을 뿐 아니라 <뚱바>만큼이나 훈훈하고 넉넉한 핀조 이모와 시원시원한 쾌남아 핀조의 품성이 빚어내는 분위기 때문일 것입니다.
핀조 이모네 뚱바집에는 우리 한국인 뿐 아니라 일본인들도 자주 들락거립니다. 아니, 우리 한국인들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일본 여행자들이 단골로 드나들던 집입니다. 그들 일본인들은 네팔인들 틈에 워낙 조용히 있다가 나가기 때문에 잘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조용히 있다>는 뜻은 다른 게 아니라 음식을 시켜 놓고 <빨리 달라>고 재촉하지 않으며, 먹으면서 <짜다, 맵다, 싱겁다> 소리를 안 하며, 돈을 내면서 <싸다, 비싸다> 떠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우리 한국인들은 좀 떠들썩 합니다. 그건 우리들의 품성이 워낙 그렇기 때문이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만 최소한의 예의마저 지키지 않는 분들이 간혹 있어서 식당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하고 <밥맛>을 떨어지게 하는 게 문제입니다.
큰소리로, 그것도 반말로(언제 봤다고?), 계속 <야, 핀조, 모모 빨리 안 줘>하고 소리 지르는 분, <야, 이거 왜 이렇게 짜. 바꿔 줘 빨리>하고 투덜대는 분, 심지어는 요리를 직접 하겠다고 주방에 들어가서 소란을 피우는 분들도 있습니다.
핀조 이모나 핀조는 그런 고약한 손님들에게도 눈쌀 한 번 찌푸리지 않고 기특하리만치 잘 대해 줍니다. 손님으로 온 네팔인들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개의치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한국인으로서 저는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한국인 손님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전의 핀조네 식당은 타멜 주변의 가게 종업원들이나 막노동자, 그리고 일본인 장기 여행자들이 단골 손님이었습니다. 그때는 참 조용하면서도 단란하고 정감이 흐르던 분위기였는데 우리 한국인 여행자들이 들이 닥치면서 분위기가 점점 산만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저는 핀조네 식당에 잘 안 갑니다. 대신 핀조네 <뚱바>를 한 가마니 씩 집에 사다 두고 마십니다. 제 성질이 워낙 고약해서 이따금씩 아주 무례한 여행자들을 보면 갑자기 설사가 나거나 구토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 식당에 가는 걸 자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핀조는 우리를 도와 <히말라야 소식>을 만든 편집실 <식구>이며 <히말라야 소식>에 <그래도 나는 사장님을 믿는다>는 수기를 쓴 장본인입니다. 수기의 내용은 우리나라에서 막노동을 하며 보낸 7년 동안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핀조의 수기를 정리하면서도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철저히 네팔인 핀조를 무시하고 착취하고 속인 사람들이 내 동포라는 말인가 하는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오늘부터 이 게시판에 핀조의 수기를 연재하려는 이유중의 하나는 그 부끄러움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핀조와 핀조의 친구가 끝내 받지 못한, 목구멍에서 피냄새가 나는 막노동의 댓가도 함께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뜻 있는 분들의 많은 조회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7년 동안 한국의 용역 회사에 취업해 중노동을 했으나 결국 빈 털털이로 돌아온 네팔 청년의 이야기. 키 168 cm의 작은 체구로 무거운 철제 가구를 짊어지고 날마다 고층 빌딩을 오르내리는 중노동 대가로 얻은 것은 골병뿐인가. 수기 곳곳에서 파상 셀파(가명/ 28세)는 7년 동안 정든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깊은 감사와 신뢰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히말라야 소식}은 이 수기처럼 우리 한국인의 왜곡된 모습을 비춰볼 <거울>의 소재를 계속 찾고 있다)
취업 알선 부로커
1992년 1월 28일, 저는 한국에 가기 위해 카트만두의 트리부번 국제 공항을 떠납니다. 어머니, 이모, 동생들이 마중을 나와주셨습니다. 어머니와 이모는 제 목에 흰 카닥을 걸어주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여객기를 향해서 걸어가다가 뒤를 보니 어머니와 이모는 공항 2층 발코니에 마련된 환송장에서 여전히 눈물을 흘리시며 손을 흔들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약 3 시간 후, 저는 홍콩 공항에 내렸습니다. 트리뷰번 공항에서 만난 두 명의 다른 친구들, 그리고 우리를 한국에 데려가 직장을 알선해 주기로 한 부로커와 함께 내렸습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시내에 있는 호텔 중낀맨슨에 갔습니다. 주로 서남아시아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이용하는 깨끗하지 않은 호텔이었습니다.
저희의 브로커는 그 호텔에 방을 하나 예약해 놓았습니다. 그 좁은 방에서 대여섯 명이 12일 간 칼 잠을 잤습니다. 그때는 한국에 가는 사람이 많아서 12일 후까지 모든 비행기표가 이미 예약이 끝난 상태였습니다. 진짜로 그 때는 홍콩에 있는 모든 호텔에서 한국에 가는 비행기 시간만을 기다리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저희가 있던 호텔 중낀맨슨에서는 네팔에서 온 아주머니가 식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그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홍콩 시내를 구경했습니다. 거기서 먹고 자는 비용은 모두 브로커가 책임을 집니다. 그래서 저희는 큰 부담은 없었습니다. 그 식당 아주머니의 남편은 네팔에서 사온 물건을 길거리에서 파는 장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아저씨는 영어를 잘 못했습니다. 한국에 가려고 네팔에서 함께 온 우리들이 그 아저씨를 도와 드렸습니다. 우리들이 장사를 잘 하자 아저씨는 저희에게 그 일을 다 맡기고 다른 일을 보셨습니다.
우리는 장사를 잘 했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들은 물건 판 값을 아저씨에게 다 드리지 않고 몰래 조금 남겼습니다. 용돈으로 쓰자고 저한테도 나눠주었지만 저는 거절했습니다. 저는 아저씨가 우리를 믿고 일을 맡기셨는데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싫으면 그만 두라며 제 몫으로 뗀 돈도 그 친구들끼리 나눠 가지고 옷을 사 입었습니다. 이렇게 홍콩에서 12일을 보내자 드디어 한국으로 가는 시간이 됐습니다.
1992년 1월 9일, 우리 넷은 홍콩에서 아시아나 비행기를 탔습니다. 이 비행기의 승객들은 대부분 서남아시아 사람들이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몇 보이지 않았습니다. 비행기 안은 한마디로 새카만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스튜어디스의 눈치를 보며 공짜 위스키를 연거푸 시켜 마시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4 시간 후, 비행기 안에서 곧 김포공항에 착륙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습니다. 저희는 빠른 걸음으로 입국심사대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브로커가 저희에게 될 수 있으면 서양 사람 뒤에 줄을 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야 심사가 까다롭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었습니다. 전부 다 서남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서남아시아 사람들이 늘어선 줄에 섰습니다. 다리가 떨리고 가슴이 쿵쾅거렸습니다. 추운 겨울이었는데도 땀이 났습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비자'를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가 걱정스러울 뿐이었습니다.
15일 간의 한국 비자
비자가 안 나오면 저는 네팔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건 아주 큰 일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한국에 취업하기 위해 7만 루피나 되는 돈을 빚졌습니다. 7만 루피는 1천 5백 달러 정도인데 일반 직장인이 그 돈을 네팔에서 벌기 위해서는 2년 동안의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만 하는 돈이었습니다.
저는 부처님께 빌었습니다. 제발 비자 좀 나오게 해 주십시요.......그러는 사이에 제 인터뷰 차례가 왔습니다.
- Why did you come in korea ?
- For visiting.
- How much money do you have?
- Only 400$.
- How long you are going to stay ?
- Only one month.
- You are welcome.
생각보다 간단한 인터뷰 끝에 15 일 간의 비자를 받았습니다. 부로커가 말해 준대로 짤막한 대답을 한 게 잘 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함께 간 두 친구와 부로커도 무사히 15일 간의 비자를 받았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처럼 비자를 받았습니다.
공항을 빠져 나오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브로커가 하는 일은 정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7만 루피 만 받아먹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비자를 받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만으로 저는 만족했습니다.
이제는 저도 7만 루피 정도는 두어 달만에 벌 수가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기뻤습니다. 앞으로는 돈을 많이 벌어서 집으로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행복했습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탔습니다. 부로커가 택시 운전사에게 이태원 가자고 했습니다. 택시 기사는 100$을 요구했습니다. 한국에 많이 와봤던 부로커는 100$은 줄 수 없다고 하며 택시를 세우고 내렸습니다. 우리가 다른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까 그 택시가 후진해서 왔습니다. 결국 우리는 그 택시를 타고 30$ 에 이태원에 도착했습니다. 이태원은 우리 네팔 카투만두의 타멜 거리 같았습니다. 바글바글하는 외국인들 중에는 네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우리는 좀 안심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 여관으로 갔습니다. 그 여관에도 네팔 사람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우리는 여관 현관의 소파에서 2ㅡ3 시간 정도 휴식 한 후에 라주 타파라는 네팔인에게 넘겨졌습니다. 우리를 거기까지 데려간 부로커는 라주타파에게 저희를 취업시켜 주라고 부탁하면서 그에게 3백 달러를 주었습니다.
일인당 100$ 씩 소개비를 받은 라주 타파는 21세 정도로 보였고 키는 1백 65 cm 정도인데 네팔 포커라가 자기 고향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브로커를 통해 네팔에서부터 함께 온 두 친구도 라주 타파를 따라 의정부로 가는 전철을 탔습니다.
라주 타파 외에는 우리 모두 전철을 처음 타 보았습니다. 전철 안에는 앉을 자리는 물론 제대로 설자리도 없었습니다. 라주가 저희에게 말했습니다. 전철 안에서 절대로 아가씨들을 쳐다보지 말라고, 쳐다보면 큰일 난다고 했습니다. 저희는 바보처럼 두 시간이나 컴컴한 창 밖 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회교국에서는 아가씨를 쳐다보면 안 된다는 이야기는 들어 봤지만 이쪽 지역에서 그런 예기를 들어 본 적은 없었습니다. 참 이런 나라에 와서 내가 일 하면서 살아 갈 수 있는지 정말 걱정스러웠습니다.
여관방에서 물만 마시며 견딘 24시간
의정부 역 에 도착했습니다. 처음으로 전철을 타봤기 때문에 표를 어디에 넣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탈 때는 표를 검표기에 넣었다가 다시 나오기를 기다려 챙겨야 하는데 저희는 그걸 몰랐습니다. 우리는 의정부 역에서 돈을 다시 내고 나왔습니다.
전철역에서 한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빨리 걸어가는지 저희는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그 정도로 시간이 없고, 바쁘게 산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됐습니다.
역전에서 라주가 뚝배기 설렁탕을 사주었습니다. 그게 그렇게 뜨거운 것인지 모르고 국물을 한 수저 떠먹다가 입을 데어 껍질이 벗겨졌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천천이 후후 불며 먹었습니다. 무슨 맛인지는 몰랐지만 배는 찼습니다.
의정부시 신곡동에 있는 어느 여관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밤이었습니다. 라주는 저희를 여관방에 두고 내일 아침에 오겠다며 나갔습니다. 그러나 라주는 아침이 되어도 오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그날 하루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저희는 한국말을 하나도 못했고, 여관 아주머니는 영어를 못했습니다. 저희는 여관방 화장실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며 24시간을 보냈습니다. 오후 5시가 돼서야 라주가 왔습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말할 수 없었습니다.
라주가 저희를 데리고 의정부에 있는 유00 사장님 댁으로 갔습니다. 그분들도 처음 외국 사람을 보셨는지 신기하게 이것저것을 물어 보며 저녁을 주셨습니다. 저희는 한국 음식을 잘 못 먹었습니다. 그래서 우유랑 빵을 먹었습니다.
유00 사장님 댁에는 사모님 그리고 아들 한 명과 딸 셋이 있었습니다. 그날 밤 우리는 여관에 돌아가서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여섯 시에 유00 사장님 댁으로 다시 갔습니다. 저희는 유 사장님 댁에서 아침을 먹고 사장님 트럭을 타고 작업장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유 사장님은 저희에게 당분간 한 달에 400 달러씩 주시기로 하셨으며 점차 조금씩 올려 주기로 했다고 라주 타바는 말했습니다. 저희는 유 사장님에게 그런 내용을 확인할 생각도 못하고 그저 그렇게만 믿고 일했습니다.
처음 광주 00강철 직매장으로 가던 그날은 눈이 오고 있었습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보였습니다. 눈을 쉽게 볼 수 없는 나라에서 태어나 살다가 갑자기 이런 나라에서 와서 살아야 하는 일이 정말 걱정이었습니다. 친구들도 걱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한시간 반 후에 경기도 광주 대쌍리에 있는 00강철 직매소 에 도착했습니다. 저희는 트럭에서 내려 사무실에 갔습니다. 사무실에는 김규환 과장님, 윤권호 씨, 미스 김이 있었습니다. 미스 김이 커피를 한잔씩 타 주셨습니다. 사무실 직원들에게 일일이 인사하고 현장 사무실에 갔습니다. 전혜진 씨, 경비 최판수 아저씨, 김제길 씨,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또 다른 두분에게 인사를 드렸습니다.
간단한 체력 테스트
현장 사무실 인사가 끝나고 유 사장님은 저희를 창고 안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가 바로 앞으로 우리가 일할 일터였습니다. 유 사장님은 창고에 있는 철제 파일 박스 2 단 짜리 하나를 들어 올려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파일 박스를 어렵게 들어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친구들은 들지를 못했습니다. 파일 박스를 들지 못했기에 합격하지 못한 두 친구는 다시 의정부로 돌아가고 저만 남게 되었습니다. 네팔에서 같이 온 친구들과 헤어질 일이 못내 서운했습니다. 유사장님은 곧 다른 네팔 사람을 구할테니 안심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음날 아침 친구들은 돌아가고 저는 첫 일을 시작했습니다. 첫날은 참 어려웠습니다. 거기에서 일하는 분들은 영어를 모르고 저는 한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손짓 발짓하면서 일을 하자니 정말 힘들었습니다. 직매소 마당에는 눈이 싸여 있고, 기온은 영하 10도나 되니 너무 춥고, 쓸쓸했습니다. 난생 처음 와보는 이 먼 나라 땅에서 어떻게 살아 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됐습니다.
그러나 다행이 저희와 함께 <상차> <하차> 일을 하는 노무자 중에는 영어를 조금 하는 분이 한 분 계셨습니다. 제 또래의 김재길 씨였습니다. 그분 덕분에 제가 한국어를 빨리 배울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일을 김재길 씨만 따라다니면서 했습니다. 김씨는 제게 일 하는 모든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시간 날 때마다 우리는 포장 박스를 깔고 공부를 했습니다. 김씨에게 고마웠던 생각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보내게 된 첫 번째 토요일에는 윤권호 씨가 저를 집에 데려가 주었습니다. 윤권호 씨 집은 대전입니다. 윤권호 씨는 자신의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시속 160 Km 속도로 달렸습니다. 겁이 났습니다. 그러나 정말 시원스럽게 달릴 수 있는 고속도로가 나라발전에 큰 힘이라는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네팔에서는 열 몇 시간 걸리는 거리를 한국에서는 불과 한시간 반만에 도착 할 수 있었습니다.
윤권호 씨의 아파트에는 부인과 아들 두 명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말이 잘 안 통해서 그냥 조용히 쉬고 월요일 새벽에 다시 자동차로 출근했습니다. 출근해서 보니 사장님이 다른 네팔 친구 한 명을 데리고 오셨습니다. 네팔 친구보고 정말 기뻤습니다. 이름은 쓰리람. 나이는 30세. 네팔에서 군인이었던 쓰리람은 이미 결혼을 해서 아들 딸 하나 씩 둔 어엿한 가장이었습니다.그는 네팔 카투만두 근교인 러리트풀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상차>와 <하차>는 저와 쓰리람 그리고 김제길 씨가 주로 했습니다. 우리가 <강 아버지>라고 불러 드린 강수용 아저씨는 나이가 많아서 주로 음식 만드는 일을 맡았습니다. 전해진 씨와 유00 사장님은 트럭을 운전했습니다.
처음에 저희는 00강철의 직원으로 채용된 것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우리는 유 사장님의 개인적인 용역회사의 직원이었습니다. 유 사장님은 00강철 직매소에서 파일 박스, 옷장, 사물함, 라커, 책상, 의자 등 철제 가구를 <상차> <하차> <운반>하는 용역을 맡은 하청업자였습니다.
유 사장님의 친구인 00강철 전 차장님이 00강철 회장님의 자가용 승용차(당시 벤츠 670)의 운전기사였는데 그 인연으로 하청을 받은 것으로 압니다. 회장님의 벤츠 670의 운전 기사 전차장님은 회장님을 모시고 자주 대쌍리 직매소에 오셨습니다. 전 차장님은 직매소에 오실 때마다 자동차 뒤 트렁크에서 음료수 선물 세트 등을 꺼내어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시곤 하셨습니다. 전차장님은 어느 날 회장님을 모시고 오실 때 벤츠 670이 아니라 링컨 컨티넨탈을 몰고 오셨습니다. 회장님께서 차를 바꾸신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연로하신 회장님께서는 그후 몸이 불편하시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전처럼 자주 오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칸첸중가 기슭에서 보낸 어린 시절
제 이름은 핀조 셀파(라마)입니다. 동부 네팔의 칸첸중가 히말 밑에 있는<룽퉁>이라는 동네에서 1971년에 3남 2 년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저희동네는 해발 1500m나 되는 고지대입니다. 종족은 셀파, 구릉, 라이, 림부 등입니다. 이들은 주로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합니다. 농산물은 주로 옥수수 ,감자, 보리, 콩, 기장 등입니다.그리고 중요한 작물은 <어러이지>라는 약초입니다. <어러이지>는 심기 시작 한지 그리 오래 돼지 않았습니다. 십 년 정도 됐을 것입니다. 이 농사를 지으면서 저희 동네 사람들은 조금씩 생활이 좋아졌습니다.
<어러이지>는 40kg에 6,000 루피(지금은 12,000 루피) 정도로 팔렸습니다. 한 번 심어 주고 그 다음에는 몇 년간 그냥 풀만 일 년에 두 번씩 깎아 주면 됩니다. 그래서 요즘은 이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불교 신자들인데 제 아버지는 우리 동네의 유일한 스님입니다. 동네에서 가장 존경받는 분입니다. 아버지는 십이 년 간 불교 공부를 하셨습니다. 그중 3년은 혼자 산중에서 불공을 드렸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 저는 그분의 아들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마을에서 잔치가 있으면 아버님 덕분에 저도 윗자리에 앉게 됩니다. 제 형제는 모두 셋인데 아버지 뒤를 이어 스님이 된 아들이 아직 없는 게 안타까운 일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스님의 아들 중에는 누군가가 꼭 대를 이어 승려가 되어야 하는 게 우리 고장의 전통입니다.
우리 동네에는 초등학교 하나, 병원 하나. 파출소 하나가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걸어서 한시간 반쯤 걸리는 <레렙>이라는 동네의 <서러스워띠> 고등학교(5년 과정)를 다녔습니다.
통학할 때 정말 고생 많이 했습니다. 아침 여덟 시에 출발하면 열 시에나 학교에 도착합니다. 네 시에 학교 마치고 집으로 가면 여섯 시가 됩니다. 여섯 시면 겨울에는 이미 컴컴한 시간입니다. 학교 가기가 하도 힘들어서 한 달에 일주일에서 보름 정도는 안 갔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 놀기 좋은 강이 있어서 거기서 그냥 하루 종일 물놀이 하다가 친구들이 학교 마치고 올 때 저희도 학교 갔다 온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런 날 어머니에게 배고프다고 먹을 것을 달라고 할 때는 마음이 찔렸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들이 학교에서 공부 열심히 하고 온 줄 알고 <아이구 내 아들이 배고팠어>하면서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그래도 나는 공부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할 때 저희 반에서 30 명이 <대학입학자격시험>을 봤는데 저 혼자서 합격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커다란 숫염소를 잡아 동네 잔치를 벌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제 목에 흰 카닥을 걸어 주고 발 세 개 달린 커다란 똥바(기장을 누룩으로 발효시킨 술) 술통을 가져와 마시며 춤추고 노래했습니다. 어머니도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셨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학력이 전부인 어머니께서 아들이 대학가게 된 것이 기쁘신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990 년에 저는 카트만두에 있는 전문대학 에 입학했습니다. 카트만두의 이모 댁에서 다녔습니다. 이모는 카트만두의 <체뜨라파티>에서 똥바를 만들어 식당에 파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모부는 홍콩, 방콕등지로 다니며 의류를 사다가 카트만두에 파는 장사를 하셨습니다.
아침 네 시부터 밤 열한 시 열두 시까지 이모와 저는 바쁘게 일했습니다. 하루에 100 kg이 넘는 기장으로 이모와 둘이서 똥바를 만들었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우선 깨끗한 물로 여러 번 씻은 후에 큰 솥에 넣고 찝니다. 찐 것을 식힌 후에 누룩을 빻아 뿌리고 버무린 후 꼭 싸서 놔두면 발효가 됩니다. 어려운 건 씻는 일입니다. 겨울에는 손발이 젖어서 얼마나 시리고 추운지 모릅니다.
아침 여섯 시에 등교하여 세 시간 수업을 하고 열시 쯤 집에 오면 바로 똥바 만드는 일을 시작해서 한밤중에야 마쳤습니다. 그런 일과를 2년 동안 매일 반복하고 있는데 같은 대학 친구들이 하나 둘 씩 외국으로 돈벌러 가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공부를 해도 결국은 돈을 벌어야 하는데 이 기회에 저도 외국에 가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부로커를 만나 고국을 떠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라고 불러 드린 사장님
한국에서 제가 취직한 용역 회사의 첫 사장님인 유 사장님은 저희더러 <사장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아버지라고 불러 드렸습니다.
<아버지> 유 사장님 밑에서 저희는 삼 년 넘게 일을 했습니다. 매주 토요일은 의정부의 사장님 댁에서 쉬었습니다. 카드놀이도 하고, 삼겹살도 구워먹고, 소주도 마시고 노래방에도 갔습니다. 사모님은 정말 잘 해 주셨습니다.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주시고 의복도 입으라고 내 주셨습니다. 일요일은 그렇게 보내고 월요일에 다시 사장님의 2.5 톤 화물 트럭을 타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00강철 직매소로 출근하는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처음 일년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날마다 외롭고, 추웠습니다. 특히 불법 체류 중인 외국인인 저로서는 강제 추방이 가장 겁나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쓰리람과 저는 작업장 밖 수퍼에 갈 일이 생겼습니다. 겁은 났지만 우리는 용기를 내어 정문 밖으로 나서서 한참 걸었습니다. 그때 지나가는 경찰관이 보였습니다. 우리는 깜짝 놀라서 돌아선 후 작업장을 향해 달렸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경찰관이 아니라 한국 전력의 가설공이었습니다. 그의 작업복 복장이 경찰과 흡사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진짜 경찰관이 작업장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경광등이 달린 경찰차를 타고 들어온 그는 무전기도 휴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상하차> 작업을 하던 우리는 기겁을 하여 숨었습니다. 쓰리람은 컨테이너 안에 들어가 스치로플 더미 속에 숨었고 덩치가 작은 저는 옷장 안에 숨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정말 머리칼이 쭈볏 서는 일이었습니다.
한동안은 오로지 집과 식구들 생각만 났습니다. 때로는 술 마시며 울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고 한국어도 조금씩 알게 되고, 일 하는 방법도 터득하고, 제품의 이름도 조금씩 알게 되고, 물건에 차에 싣고 내리는 <상차> <하차>의 기술도 늘게 되자 일에 재미가 붙었습니다.
저희가 해야 하는 일은 00강철 대전 공장에서 오는 27톤 짜리 대형 콘테이너와 8 톤 트럭 3대 정도를 하차하여 창고에 넣고 2.5 톤 트럭 10 대 이상, 1.5 톤 20 대 이상에 물건을 상차하는 일이었습니다.
저희는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일하는 방법도 저희가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전에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든 제품을 상하차 할 때 전부 바퀴 달린 운반 수레를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모든 제품을 등이나 어깨 또는 머리에 져 날랐습니다. 운반 수레를 이용했던 전에는 대형 콘테이너 한 대의 물건을 하차하는데 세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저희는 직접 몸으로 져 날랐기 때문에 한 시간 밖에 안 걸렸습니다.
한 잔 두 잔 받아 마시다가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하니 회사나 대리점에서 오신 모든 분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회사에서도 저희에게 너무 잘 해 주셨습니다. 몸보신하라고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마당에 불 피우고 삼겹살을 구워 먹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00강철 광주 직매소 김규환 과장님은 저희에게 너무나 잘해 주신 분입니다. 팔목에 차고 다니던 일제 시계를 그냥 주시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시계를 지금도 차고 있습니다. 여태 고장도 한번 안 났습니다. 배터리만 한번 갈았습니다.
윤권호 씨(지금은 대전 3공장 총무부 대리)도 저희가 외롭고 힘들어 할 때 술도 사 주시고 여관에서 같이 잠도 자고 하면서 위로해 주신 분이었습니다. 저는 그 분들을 절대로 잊지 못 할 것입니다.
그 후 김 과장님은 그만 두시고, 윤권호 씨는 계장으로 진급해서 대전 00강철 3공장에 가셨습니다. 새로 오신 김권일 과장님, 홍순철 계장님, 이명하 씨들도 저희에게 역시 잘 해 주셨습니다. 저희를 항상 챙겨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했습니다. 회식도 자주 해 주시고 이렇게 너무나 잘 해 주시니까 저희도 건방져져서 한번 회식 자리에서 실수를 했습니다. 과장님의 말씀하시는 중간에 제가 술에 취해서 다른 얘기하다가 안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죄송한 마음 그대로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술을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술을 못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술자리에서 술을 억지로 마시라고 합니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술 한잔씩은 할 줄 알아야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남자인지라 술을 한 잔 두 잔 하다보니 술꾼이 돼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술자리에서 실수도 하게 됐습니다.
술자리에서는 담배도 곧잘 권합니다. 저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해서 졸업할 때까지 피웠습니다. 부모님 몰래 피웠습니다. 어느 날, 그러니까 졸업할 때쯤 어머니께 들켰습니다. 이크 큰일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오히려 제게 담배를 통째로 한 갑을 주시면서 숨어서 피우지 말고 내 앞에서 피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우리 어머니를 너무나 멋있는 어머니로 다시 봤습니다. 부모로서 사랑하는 자식이 담배 피우는 것을 싫어 하시면서도 자식이 좋아한다고 해서 그렇게 허락을 해주신 우리 어머니 정말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몰래 피는 담배하고 알게 피는 담배 맛은 달랐습니다. 그전에 그렇게 맛있던 담배가 나중에 그렇게 맛이 변할 줄 정말 몰랐습니다. 저는 담배를 끊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머니도 담배를 싫어하시고 아버지는 더욱 싫어하십니다. 이렇게 모두 싫어 하시면서도 담배를 피우라고 어머니가 허락을 해주신 뒤에는 저도 모르게 담배를 그만 피우자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냥 끊기는 너무 힘들어서 어느 날 법당에 가서 부처님 앞에 절을 세 번 하고 맹세를 했습니다. <만약에 제가 오늘부터 담배를 피우면 저희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라고. 저는 그때 부처님 앞에서 맹세한 게 있기에 담배는 안 피웁니다.
00강철 직매소 홍순철 계장 님은 저희를 진짜 친동생처럼 대해 주신 분입니다. 술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삼겹살을 구워서 술 한잔하고 직매소 마당에서 족구를 많이 했습니다. 홍 계장 님은 공격수 저는 수비. 제는 수비를 잘 했습니다. 저희 둘이 한 팀이 돼서 겨울에는 소주 내기, 여름에는 맥주 내기 해서 이긴 덕분에 많이 먹었습니다. 홍 계장 님하고 진짜 술 많이 마셨습니다. 마시다 보면 취하셔서 저희가 집으로 모셔 갔는데 왜 그렇게 무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구리시에 있는 아파트에 모셔다 드리고 저희도 그냥 거기서 자고 아침에 같이 직매소로 출근해서 해장 라면을 끓여 먹은 적도 많습니다.
제가 술 주정도 많이 부렸습니다. 그래도 다 이해해 주셨습니다. 직매소 직원 이명화 형님은 저와 제일로 가까이에서 일했던 분입니다. 그분이 <오다>를 내주시고 저는 물건을 출고했습니다. 제품을 잘못 출고해서 혼난 적도 많았습니다. 이명화 형님은 근무 시간 끝나고 사무실에 있는 컴퓨터로 컴퓨터도 배우라고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제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때 좀 배워 두었더라면 지금 이 글을 컴퓨터로 작성하는 일이 훨씬 쉬웠을 텐데 말입니다.
함께 일하던 사람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강수영 아저씨를 저희는 <강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저희는 한국에서 많은 아버지를 모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를 진짜 친자식처럼 해주신 분은 <강 아버지>뿐이셨습니다. 아버지랑 저희는 5 년간 같이 먹고 잤습니다. <강 아버지>는 요리를 잘 하셨습니다. 그 분이 아침 점심 저녁 세 때 밥을 해주셨습니다. 저희는 아침 여덟 시까지 잠을 잡니다. 그 분은 새벽 5 시쯤에 일어나서 밭일을 하시고 아침을 준비하신 후 저희를 깨우러 오십니다.
<얘들아 어서 일어나서 밥 먹어라> 하시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가끔 욕도 잘 하시지만 정말 저희는 친부모와 같은 사랑을 그 먼 땅에서도 그대로 느낄 수가 있어서 저희는 고된 노동으로 살아야하는 어려움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강 아버지>는 농사일을 참 좋아 하셨고 또 잘도 하셨습니다. 저희는 일요일에는 아버지 농사일을 도와 드립니다. 고추도 심고 ,배추도 심고, 알타리 무우도 심었습니다. 밭에서 <강 아버지>와 그 분의 여자 친구들인 아주머니들과 막걸리도 마시면서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강 아버지>는 그렇게 힘들게 농사일을 하시고도 그 농작물들을 모조리 아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저희는 <강 아버지>에게 따졌습니다. 힘들게 일해서 다 나누어 줄 것이면서 왜 우리까지 고생을 시키냐구요. 그럴 때마다 <강 아버지>는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면 못써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모든 음식은 나누어 먹어야 맛있다>고 하셨습니다.
<강 아버지>는 밭일만 아니고 개도 많이 기르셨습니다. 개가 40 마리 정도 되는데 <강 아버지>가 안 계실 때는 저희가 개밥을 주어야 했습니다. <강 아버지>는 개를 귀여워하면서도 보신탕도 곧잘 드셨습니다. 저도 <강 아버지>가 시키는 바람에 몇 마리 매단 적이 있습니다.
<강 아버지>가 끓인 보신탕은 인기가 있었습니다. <강 아버지>는 개를 잡으면 온 동네 아저씨들을 다 불러모아 나누어 드셨습니다. 그래서 동네 아저씨들은 <강 아버지>와 형님 아우 하는 사이입니다. 저희는 그 모든 분들을 삼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삼촌들 중에는 저희가 좋아하는 삼촌이 한 분 계셨습니다. 개인 택시 운전 기사인 그 분의 집은 저희 회사에서 얼마 멀지 않았습니다. 걸어서 7 분 정도 거리입니다. 삼촌은 시간이 나시면 저희 회사에 오셔서 소주내기 족구를 했습니다. 여름에는 샛강에 가서 투망을 쳐서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먹기도 했습니다.
저희들의 단골이었던 <대웅 수퍼> 아주머니도 저희가 잊어서는 안돼는 분입니다. 저희가 서울에 나갔다 들어와서 배고프다고 하면 밥상을 차려주시곤 한 어머니 같은 아주머니입니다. 저희는 그렇게 대쌍리에서 6 년을 살며 이웃 사람들과도 정이 들었습니다. 어느덧 대쌍리가 저희 고향처럼 돼버렸습니다.
지긋지긋했던 토요일과 일요일들
<강 아버지>는 집 짓는 일도 잘 했습니다. <강 아버지>와 저희 네팔 사람 둘은 유 사장님 집 뒤의 빈터에 방 하나 짜리 집을 짓기도 했습니다. 대쌍리 현장 일이 없는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의정부 유 사장님 댁에 가서 집 짓는 <노가다>를 했습니다.
<강 아버지>와 저희는 토요일 오전 근무 끝나자마자 유 사장님의 트럭을 타고 의정부 유 사장님 댁으로 갔습니다. 가서 저녁 일곱 시까지 일하고 다음날 아침 여섯 시부터 집 짓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강 아버지>는 기술자, 저희는 <데모도>를 했습니다. <데모도>가 하는 일은 모래와 자갈과 시멘트와 철근을 져 나르고 배합하는 일들이었습니다.
일요일 저녁에 일이 끝나면 유 사장님은 저희에게 수고했다며 만 원 짜리 한 장씩을 주셨습니다. 목욕탕에 가서 목욕하고 자장면 사먹으면 몇 푼 남지 않는 1만 원이었습니다. 한국 노동자들은 그렇게 힘든 막노동을 하면 몇 만원 씩 받는다는데 저희는 고작 1만 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만일 네팔에서 일하면 이 정도도 받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휴일마다 집 짓는 일을 5개 월 이상이나 계속 했습니다. 나중에는 정말 지겹고 힘들었습니다. 그전에는 토요일이 되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랐는데 집 짓는 동안은 제발 토요일 좀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토요일은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저희는 <강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집 지을 줄 모르셨다면 저희도 이 고생을 안 하잖아요.
-나도 마찬가지야 이놈아. 어쨌든 미안하다.
우리는 <강 아버지>의 그런 말을 듣고서야 괜한 말을 했다 싶어 후회했습니다.
1995 년 초에 저희 사장님이 바뀌셨습니다. 유00 사장님은 떠나시고 전00 사장님이 오셨습니다. 전00 사장님은 00강철 회장님의 자가용 승용차인 링컨컨티넨탈의 운전기사인 00강철 본사 전차장님의 동생이셨습니다. 그러니까 전 차장님의 친구 분이셨던 유00 사장님 대신 전차장님의 동생인 전00 사장님이 00강철의 <상하차> 용역을 하청 맡게 되신 것이었습니다.
유00 사장님께서는 지난 3 년 동안 저희를 한 식구처럼 잘 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섭섭한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급료를 정확히 계산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식구처럼 잘 먹여 주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희는 돈을 벌러 한국에 갔기에 돈 모으는 게 더 중요했습니다. 저희는 잘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모든 것을 네팔에 남긴 채 한국에 갔던 것입니다.
쓰리람에게 닥친 사고
유 사장님은 일을 시작한지 3개월이 지난 후 <월급이 요만큼 올랐다>고 손짓으로 말했습니다. 그 뒤로도 6개월마다 <또 요만큼 올랐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얼마나 올랐는지는 모르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힘든지 모르고 더욱 열심히 일했습니다.
유 사장님은 월급을 매달 주지 않았습니다. <얘네들 월급 주면 그때그때 다 써버린다>며 <아버지가 모았다가 나중에 필요할 때 한꺼번에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믿었던 <아버지> 유 사장님은 1992년 2월부터 27개월 동안 일한 대가로 월 4백 불, 그러니까 월 37만 5천 원으로 계산 하셨습니다. 마지막 5개월 만 50만원씩 계산해서 주셨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유 사장님은 제 월급에서 1백만 원을 떼어냈습니다. 전에 제가 가져다 썼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진짜로 그 1백만 원을 받아 본 적이 없는데 유 사장님이 그렇게 나오시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저희는 유 사장님에게 따졌습니다. <저희는 사장님을 아버지처럼 믿고 아버지가 하신 말씀 그대로 돈이 모이는지 알고 일했습니다. 아버지는 저희에게 매번 월급을 올렸다고 말하셨는데 어째서 처음에 말한 월급 그대로 입니까> <아버지> 유 사장님은 <시끄럽다> <조용히 해>라고 말했습니다. 외국인으로서 불법으로 체류하고 있으며 취업까지 하고 있는 저희로서는 이것저것 꼬치꼬치 따질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어떤 대우를 받더라도 조용히 받고 마는 게 저희의 살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야만 저희가 한국에서 오랫동안 체류하며 돈을 벌 수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 사장님과의 3 년을 그렇게 마친 저는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만 제 친구 쓰리람은 딱한 일이 있었습니다. 1994 년 초쯤입니다. 저희는 일을 끝낸 오후에 술 한잔하고 씨름판을 벌였습니다. 저는 심판이고 선수들은 제 친구 쓰리람과 그 동네에 사는 저희 회사 트럭 기사 김00이었습니다.
저는 <시작>이라고 말하고 두 선수는 맞붙었습니다. 김 기사가 이겼습니다. 시합에 진 쓰리람은 다리가 몹시 아프다고 했지만 저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쓰리람은 일어서지를 못했습니다. 사무실 모든 직원이 출근하고 사장님도 오셨습니다.
저희는 사장님에게 엄청나게 혼났습니다. <술 처먹고 지랄했다>고 유사장님이 욕을 하셔도 저는 쓰리람이 어떻게 됐는지 그게 걱정이었습니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병원에 가보니 다리 인대가 늘어났다고 대수술을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수술비용은 1천만 원 이상 든다고 했습니다. 큰 걱정이었습니다. 네팔로 보내야 되는지, 한국에서 수술을 해야 하는지 어쩔 줄 몰랐습니다. 유 사장님은 근무 시간에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마침 온양에 00강철 회장님 사위가 의사인 병원이 있었습니다. 쓰리람은 그 병원에서 수술하기로 했습니다. 거기서 수술 끝나고 한 달 정도 입원한 후에 쓰리람은 다리에 기브스를 한 채 직매소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제 친구가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몇 개월 후면 쓰리람과 함께 일하게 된 것입니다. 인원을 보충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쓰리람이 없는 동안 저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수술비는 700 만 원이나 들었다고 사장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돈 700 만원 중에서 400 만원 정도는 쓰리람의 월급에서 털어 제하고 나머지 300만 원은 사장님이 대주신 것입니다. 제 친구 는 온양 공립 병원 의사 선생님의 은혜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장님에게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처음 받아본 추석 보너스 10만 원
이렇게 유사장님은 저희를 떠나셨습니다. 마지막 <그 일>만 빼면 3년 간 정말 재미있게 잘 보냈습니다. 저희는 그 3년 동안에 많은 사람들과 알고 지냈습니다. 우리의 용역으로 납품하는 00강철 대리점이 서울 경기 지방에 만 스물 몇 군데에 있었습니다. 저희는 그 모든 대리점에 제품을 배달하러 가 봤습니다. 모두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성동 대리점 전무님, 특수품 대리점 이 사장님과 이 대리님, 영등포 대리점 과장님 한 분, 여의도 대리점 욕쟁이 한 분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이분들은 저희에게 진짜 잘 해주신 분들입니다. 저희가 배달하러 대리점에 가면 밥도 사주시고 커피도 사주시고 음료수도 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이 직매소에 직접 오실 때는 빵 과자 음료수를 사들고 오셨습니다. 저희를 따뜻하게 대해주신 그분들께 감사합니다.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새로 오신 전00 사장님과도 같은 일을 했습니다. 저희는 그대로 있고 사장님만 새로 오신 것이었습니다. 전 사장님은 처음 오시던 날 <나는 이 직장을 가족 같은 분위기로 일하는 직장으로 만들겠습니다. 여러분이 많이 도와주십시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도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전 사장님은 처음 추석 때 저희에게도 추석 보너스로 10 만원을 주셨습니다. 기분의 아주 좋았습니다. 전 사장님은 저희에게 아주 잘 해 주실 것 같았습니다.
전 사장님과 함께 일한 지 일 년 좀 지나고 나서, 그러니까 1996년 초에 00강철 직매소가 대전으로 옮겼습니다. 우리도 직매소를 따라 대전으로 가야했습니다.
우리가 일하던 직매소 자리에는 00강철 알루미늄 샷시 조립 공장이 들어왔습니다. 00강철 직원들은 우리더러 대전으로 가지 말고 샷시 공장에서 같이 일하자고 했습니다. 샷시 기술도 배우고 월급도 전 사장님이 주시는 만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희 사장님은 <내 새끼들이니까 내가 데려간다>며 저희를 대전으로 데려갔습니다.
저희는 대전 00강철 가구 3 공장 <상하차반>에서 2-3개월 동안 일하다가 <가구 납품 및 조립>을 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때 저희를 관리한 사람은 전 사장님의 막내아들 전00이었습니다. 저희는 납품과 조립 일을 시작하면서 전 사장님 댁에서 함께 숙식을 했습니다. 이때 우리는 한국 방방곡곡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납품을 하러 다녔습니다.
서울, 대전, 대구, 부산, 경주, 포항, 전주, 강화...그렇게 멀리 다니며 납품을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포항 제철 포스콘 전국 사무실 사무용 가구 교환 작업이었습니다. 그때 저희는 포스콘에서 밤 낮 없이 계속 일했습니다. 토요일 오후, 포스콘 사무실의 근무 시간이 끝나면 저희의 철제 가구 교환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월요일 아침 여덟 시까지 책상 등 가구 배치를 끝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무실 직원들이 근무하는데 지장을 주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태풍 속에서 벌인 사투
00강철 책상은 조립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일이 짜서 맞추느라고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이틀 밤을 꼬박 새우는 철야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경주에 있는 <이태아 세무사> 사무실 전체 가구 교환은 정말 재미있게 했습니다. 세무사 사장님은 여자 분이셨는데 네팔에 열 번 이상 가봤던 분이셨습니다. 네팔 말도 진짜 잘 하셨습니다. 그 분은 작업을 하는 동안 갈비도 사주시고, 회도 사주셨습니다. 납품하러 간 우리에게 그렇게 잘해주신 곳은 <이태아 세무사> 뿐이었습니다. 일 할 때도 저희는 조립만 하고 박스 뜯는 일 쓰레기 치우는 일은 사무실 여직원들이 다 해주셨습니다. <이태아 세무사> 여사장님은 아직도 네팔에 자주 오시면 꼭 한 번 뵙고 싶습니다.
부산 시청 신관 4,5,6,8, 층 파티션 작업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매일 아침 여섯 시부터 밤 열두 시까지 하는 작업을 10 일 정도 계속했습니다. .6시부터 오는 11 톤 트럭의 철제 가구를 <하차>하여 각층마다 올려서 일일이 조립했습니다. 11톤 트럭이 하루에 2대에서 3대까지 오는데 우리 뿐 아니라 다른 업체들도 함께 납품을 하고 있어서 <하차>할 자리도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엘리베이터도 업체별로 시간제로 이용했습니다.
부산 <동부 화재>에 납품할 때는 태풍이 불었습니다. 여름이었습니다. 저희는 납품 일정보다 하루 먼저 갔습니다. 휴가 겸해서 부산 해운대 구경을 하기로 했습니다. 낮에는 바닷가에서 놀다가 밤에는 노래방에 가서 부산 아가씨들과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하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해운대에서 그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잠시 힘든 세상살이를 잊을 수 있었습니다. 저희는 바다를 바라볼 수 없는 나라에서 왔기에 무척 좋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동부 화재> 사무실에 납품을 하러 갔습니다. 저희는 트럭에서 짐을 내리느라고 밧줄을 풀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시무시한 비바람이 몰아 닥쳤습니다. 태풍이었습니다. 트럭 위에서 책상과 의자가 바람에 날아가는데는 대책이 없었습니다. 날아간 의자가 길 가운데 떨어져 구르는데 차들은 쌩쌩 달려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저희는 그런 상황에서 의자와 책상들을 들어 나르는 저희들도 바람에 밀렸습니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저희가 일을 하면서 목숨을 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가로수가 뿌리 채 뽑혀 넘어지고 건물 간판이 떨어지고 신호등도 떨어질 듯 흔들렸지만 저희는 제품을 계속 하차하여 건물 안으로 옮겼습니다. 밖이나 트럭 위에 놔두면 다 날아가 버릴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이렇게 목숨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간신히 납품을 마치고 건물의 후문을 나서다가 큰 간판 하나가 떨어져 자동차 한 대가 박살이 나는 걸 봤습니다. 처음으로 태풍의 위력을 실감했습니다. 우리 네팔에는 태풍이 안 오니 정말 다행입니다.
신촌 연세대학교 기숙사 납품은 가장 고생이 심했습니다. 한 층에 방이 28개가 있는 5층 건물 3개 동, 그러니까 420개의 방에 각각 옷장 2개, 벽장 2개, 침대 2개를 들여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철제 침대 840개, 옷장 840개, 벽장 840개였습니다. 옷장과 벽장은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는데 철제 침대는 안 들어갔습니다. 침대를 계단으로 5 층까지 올리자니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한국인 직원들은 침대를 못 올린다고 하여 저와 쓰리람 둘이서 840개의 침대들을 져 올렸습니다.
하루에 8 톤 트럭 6 대씩 근 열흘 동안 그렇게 져 올렸습니다. 침대를 들고 5층까지 계단을 올라갈 때는 온몸이 땀으로 젖고 다리가 덜덜 떨리고 가슴이 터질듯 숨이 찼습니다. 그 작업을 모두 마치자 몸이 안 아픈 곳이 없었습니다. 여기저기 쑤셨습니다. 정말 이런 식으로 일을 계속하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다리차>로 올릴 수도 있었지만 경비를 줄이기 위해 저희는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저희가 고생해서 사장님에게 이익이 되도록 했습니다.
민통선 검문소에게 당한 불심검문
우리는 이런 작업을 매일 여기저기 다니면서 했습니다. 힘들기는 했지만 덕분에 한국 구경도 잘했습니다. 한번은 민통선을 통과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강화도의 무전기 만드는 공장 <팬택>으로 납품을 하러 갈 때였습니다. 그 전날 우리는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빌딩에서 밤샘 작업을 한 후 강화도로 향했는데 운전을 하던 00이가 잠에 취해서 목적지가 지났는데도 차를 계속 몰아 민통선까지 갔던 겁니다. 거기서 우리는 헌병들에게 불심검문과 함께 몸수색을 당했습니다. 헌병들이 <당신 어디서 온 사람인가> 물었습니다. <네팔에서 왔다>고 했더니 <북한에서 왔는지 네팔에서 왔는지 모르니까 증거를 대라>고 했습니다. 반시간 정도 승강이 끝에 우리는 풀려났습니다. 밤샘 작업을 하고 거기까지 간 탓에 눈은 퉁퉁 붓고 얼굴에서는 땟국이 흐르는 우리의 모습이 불쌍해 보였던 가봅니다. 헌병은 <외국인 불법 체류자 신고기간이지만 특별히 봐준다>는 말도 했습니다.
이렇게 구경은 잘 했지만 7년 동안의 극심한 노동으로 인하여 지금 제 몸은 많이 망가졌습니다. 골병에 속병까지 생겼습니다. 온 몸에서 종기가 여기저기 튀어나오는데 병원에 다니며 치료해도 전혀 낫지 않습니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제 척추 등 골격마저 비틀어졌다고 합니다.
저희는 일 열심히 한다는 점에서는 00강철 영업부에서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영업부 오의진 차장님은 저희가 믿고 존경했던 분입니다. 그분은 저희를 사랑해 주셨고 늘 챙겨주셨습니다. 한마디로 든든했습니다. 저희는 오 차장님이 00강철에 계시는 동안만큼은 어떠한 어려움이나 문제도 생기지 않으리라 믿었습니다. 그 분은 00강철 본사 차장님 저희는 하청업체의 현장 노동자였지만 그렇게 가까이에서 지낼 수 있었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 분은 명절 때마다 저희가 이렇게 외국에 나와서 고생한다고 선물도 항상 챙겨주셨습니다. 앞으로 계속 한국에서 같이 살아 보자는 말씀도 자주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제게 장가도 보내 주시고 신혼 살림할 집도 마련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이 직매소에 오시면 꼭 저희를 찾으시고 <잘 있었냐> <,밥은 잘 먹고 있냐> <라면 많이 먹지 마라> <어려운 일이나 문제가 있으면 항상 이야기하라>고 하셨습니다.
00강철 영업부의 다른 직원들도 저희에게 너무나 잘 해주셨습니다. 이병걸 대리님, 남기연 씨, 김동수 씨, 고종식 씨, 장만관 과장님, 이과장님 그리고 홍과장님......이 분들께도 저희가 항상 감사한 마음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의 일터였던 00강철 광주 직매소가 대전으로 옮긴 후로부터 저희는 전 사장님 댁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숙식을 하면서 트럭을 타고 전국으로 납품하러 다녔습니다. 그래도 자주 <오다>를 받으러 00강철 본사인 양재동으로 가서 영업부 직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그 분들은 저희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전사장님 댁에는 사모님, 사장님의 큰아들 전00 형, 막내 아들 전00 그리고 형수가 계셨습니다. 사모님을 저희는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집안이 한가족처럼 됐으니 저희가 생활하기에는 큰 불편이 없었습니다. 사장님도 술 좋아 하셨고 00이나 00이도 술을 좋아했습니다. 같이 술도 많이 마셨습니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인간 대우
술 마시면서 이런 저런 집안 얘기도 같이 하고, 일 얘기도 하면서 정말 한가족처럼 지냈습니다. 사장님도 <너희들 고맙다, 내가 사업만 잘 되면 이것저것 다 사다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월급도 못 주어서 정말 미안하다. 지금 내가 너무나 힘들고 어렵다. 그러나 걱정은 절대로 하지 말아라. 너희들 집에 갈 때 한꺼번에 목돈을 주겠다. 너희들도 목돈이 있어야 네팔 돌아가서 무엇을 해도 할 수 있다. 집에 조금씩 보내면 집에서 돈을 다 써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도 사장님의 말씀을 믿고 <괜찮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은 아침 신문에 명동성당에서 외국인 근로자들이 데모를 하는 기사가 났습니다. 그걸 보시고 사장님은 말했습니다.
<저런 개새끼들. 남의 나라에 돈 벌러 왔으면 돈이나 벌고 갈 것이지 무슨 데모를 하고 난리야. 너희들도 저렇게 하면 국물도 없다. 알았지?>
저희는 대답했습니다.
<얘, 저희는 그렇게 할 일이 없습니다. 저희는 평생 여기서 살 것도 아니니 인간 대우 같은 건 저희 나라에 가서나 찾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희처럼 한국에 돈 벌러 왔던 외국인 노동자들이 손이나 발이 짤라지고, 임금을 못 받은 채 공권력에 의해 강제 출국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 자살까지 했다는 기사를 읽으니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나갔습니다. 사장님께서 어렵다고 월급을 안 주신 지가 일년 반이 됐을 때 한국에 의 태풍이 몰아쳤습니다. 물가가 오르고, 실업자가 줄줄이 생기고, 공장들이 잇달아 부도가 나고, 나라까지도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같은 외국인 근로자에게도 타격이 왔습니다. 저희 사장님에게도 IMF 타격이 왔습니다. 저희가 하는 납품 양도 점점 줄었습니다. 납품하는 시간보다는 집에서 노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사장님께서는 많이 힘들어 하셨습니다. 그 정도는 저희도 같은 집에서 살기 때문에 알 수 가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견딜 수 있겠습니까. 저희도 생각을 바꿔야 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제는 저희도 귀국할 시간이 온 것 같았습니다. 막내 아들 전00이 <이제 형들도 집에 가야지>라고 말했습니다. 고향을 떠난 지도 오래 됐고 해서 저희도 귀국하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비행기 표도 사야 되고 쇼핑도 해야 되는데 저희는 아직 손에 돈 한푼도 없습니다. 저희는 00이와 함께 그 동안 정든 분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다녔습니다. 모두들 섭섭해 하셨습니다. 그 많은 세월 동안 쌓인 정 때문에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면서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는 98년 4월 1일에 귀국하는 비행기 표를 예약했습니다. 3월 25일까지는 납품 일을 하고 마지막 5일 동안에 모든 귀국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저희는 미리 00이 친구의 친척 되는 분의 <귀금속 가게>에서 금팔지랑 금목걸이를 주문했습니다. 왜냐하면 달러 환율이 급락하는 바람에 돈보다는 금을 가져가는 게 조금 더 이익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저희 생각뿐이었습니다. 마지막 가는 날까지 돈이 저희 손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예약해 둔 금들도 00이가 어느새 취소해 버렸다는 걸 알았습니다. 00이는 <내가 돈을 못 주기 때문에 취소했다>며 자기가 차고 있는 금목걸이를 제게 줬습니다. 저는 그걸 그 자리에서 바로 받기가 미안해서 우리 셋이 함께 쓰는 방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금목걸이는 없어졌습니다. 저는 집안 사람들 모두에게 물어 보았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귀국 준비중에 생긴 엄청난 사건
귀국하기 바로 전날, 우리는 00이로부터 각자 200만 원씩을 받아 쇼핑에 나섰습니다. 양복 한벌, 미니 컴퍼넌트 한 개, 소형 자동 카메라 한 대, 비행기 표 그리고 티셔츠 3벌, 바지 3벌, 여행용 가방 한 개, 등산 가방 한 개, 신발 세 켤레, 패션 시계 네 개, 싸구려 티셔츠 열 장이 전부였습니다.
저희가 사장님에게 받아야 할 돈은 우선 1997 년 1 월부터 1998년 4 월까지 밀린 월급입니다. 사장님은 저희에게 월 75만원에 보너스를 30%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만 보너스는 그만두고 사장님과 함께 일했던 97년 1 월부터 6 월까지 6개월의 월급은 월 75만원 씩 계산해서 모두 450만원입니다.
7월부터는 00이와 일했는데 00이가 <나는 보너스는 못 주고 월급을 그냥 85만원으로 계산한다>고 했습니다. 00이는 우리에게 월급을 한 번 주었습니다. 은행에 170만 원을 입금시키고 우리에게 직불 카드를 주면서 매달 85만원 씩 찾아 쓰라고 했는데 <매달>이 아니고 단 한번뿐이었습니다. 00이는 우리에게 97년 7월부터 98년 3월까지 각각 765만원 씩 줘야합니다. 00이는 저희가 귀국하기 이틀 전까지 밀린 월급을 못 준다고는 안 했습니다. 3월 30일 밤, 그러니까 귀국하기 하루 전에야 00이는 말했습니다.
<형 내가 지금 돈이 없다. 정말 나를 한 번 도와 줘>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 모든 일이 잘 풀리면 내가 직접 형들 줄 돈을 가지고 네팔에 간다>고 했습니다. 00이의 아버지 전 사장님도 <내가 너희들 자식처럼 생각했는데 정말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이것만은 내가 장담 할 수 있다 돈은 반드시 보내 준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습니다. 아주 높은 데서 떨어진 느낌이었습니다. 밤은 깊어 가고 떠나야할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떠나야할지, 말아야 할지, 어떻게 이런 위기를 넘길 수 있을지 생각했습니다. 돈벌러 간 아들이 7년만에 집에 가는데 빈 털털이로 가니 집안 식구들이 뭐라고 하실지 앞이 캄캄했습니다.
집에 돈 못 보낸지도 오래 된 상태였습니다. 네팔 집에는 제가 돈 모아 가지고 간다고 미리 전화를 해 두었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고 선물도 많이 사서 당신 아들이 돌아간다는 걸 알려야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왔으면 하고 기다리고 계실 부모님......그러나 아들은 몸만 가게 된 것입니다.
부모님이야 물론 7년만에 아들이 돌아오는데 돈하고 선물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냥 아들이 반갑지요. 그러나 저로서는 그게 아닙니다. 제가 그 돈 피 땀 흘리면서 일해서 번 돈이었기에 아주 정말 소중합니다. 그러나 제가 거기 남의 땅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00이 말을 믿고 사장님을 믿고 마음이 아픈 채로 한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인호 형과 형수가 김포공항에 배웅을 나와주셨습니다. 공항을 떠날 때 제 손에는 100 달러 짜리 1장이 전부였습니다. 제가 그 돈을 인호 형에게 보여 주면서 <형, 이 돈을 가지고 제가 네팔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요. 형 제발 부탁입니다 제가 일 해서 번 돈은 꼭 보내 주셔야 돼요.>라고 말했습니다. 인호 형은 <그럼, 보내고 말고. 어떻게 해서든지 꼭 보내준다>고 다짐했습니다.
수중에 오직 1백 달러만 들고서
저희는 한 손에 비행기표를 들고 한 손을 흔들면서 마지막 문을 통과했습니다. 마지막 문을 통과해서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저희들 개인적인 문제는 어떻게 됐던지 한국과 한국인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한국인의 나라 사랑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 IMF 시대에 <금 모으기 운동>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자기가 아꼈던 소중한 것들을 모두 나라를 위해 바치는 건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이었습니다. 이 정도로 나라 사랑 하는 마음이 우리 네팔인들에게도 생기면 우리 네팔도 곧 선진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비행기 안에는 저희들처럼 한국에서 일하고 돌아가는 네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모든 사람의 얼굴에 웃음이 있고 기쁨이 보였습니다. 저희는 약 3시간 반 정도 비행 끝에 방콕에 도착했습니다. 네팔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서는 환승대기실에서 14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배도 고프고 잠도 자야 되는데 돈은 100불 밖에 없으니 그냥 참아야 했습니다. 정말 힘든 14시간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먹을 것도 사다 먹고 물건도 사는데 저희는 살 일도 없고 먹을 일도 없고 그냥 바닥에서 가방에 기대어 잠을 잤습니다.
14시간 후에 드디어 저희는 네팔 비행기를 타게 됐습니다. 승강장 입구에 네팔 전통 옷과 티베탄 옷을 입은 스튜어디스 아가씨들이 환영을 하는데 정말로 반가웠습니다. 아가씨들이 <너머스테>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 <너머스테>라는 인사말을 진짜로 몇 년만에 들어보니 정말로 새롭고 듣기가 아주 좋았습니다. 설레는 마음에 이것저것 생각하는 동안 벌써 카트만두 트리부원 국제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했습니다. 비행기가 착륙한 순간 비행기내에서는 환성을 지르면서 박수를 치고 노래를 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왜냐하면 그 비행기에는 저희들처럼 몇 년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네팔 사람들이 한 30명이 쯤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희 마음은 나가기 바쁜데 공항 내에서의 짐 검사는 왜 그렇게 오래 걸리는지 정말로 짜증나고 열 받는 일이었습니다. 저희가 가져온 미니 시디 컨포넌트는 관세를 내야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외국에서 7년간 살았고 그것보다 더 많은 물건을 가지고 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항 내 분위기는 달랐습니다. 다른 국제공항과는 달리 모든 일에 돈을 요구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화를 냈습니다. 우리는 장사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외국에서 고생해서 우리 나라에 달러를 벌어 오는 사람이다. 우리는 특별하게 검사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빨리 나가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쓰리람은 40달러를 주고 공항에서 나왔습니다.
나와보니 어머니와 이모의 딸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얼굴을 본순간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고 눈물부터 나왔습니다. , 어머니는 제 얼굴을 만지면서 <내 아들이 진짜 왔냐>하시며 아직도 실감을 못 느끼셨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때 조그만 꼬마였던 이모의 딸들도 다 커서 제가 몰라봤습니다. 7년 세월이 과연 길기는 길었던 모양입니다.
사용하지 않는 전화 번호
우리는 택시를 타고 카트만두에 있는 <저희 집>으로 갔습니다. 이 집은 저로서는 의미 있는 집입니다. 이 집은 제가 한국에서 그 고생을 하면서 번 돈으로 만든 집입니다. 집에 들어 갈 때 어머니께서 <다 네가 고생해서 만든 집이다. 어떠냐 마음에 드냐>고 하셨습니다. <예, 마음에 들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제 스스로 번 돈으로 지은 집이라서 정말 달랐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고생한 보람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그 집을 짓느라고 친척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이 떠올랐습니다. 귀국할 때 사장님에게 돈을 받아 왔어야 빚을 갚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다음날에야 가까스로, 1백 달러만 가지고 귀국한 사정 얘기를 어머니에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나무라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사장님에 대해서는 아주 안 좋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의 아들을 데려다 돈도 안주고 일 시킨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저는 우리 사장님은 그렇게 나쁜 분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사장님은 10월 달에 돈을 보내주시기로 하셨고, 어쩌면 사장님이 돈을 가지고 네팔에 놀러 오실지도 모른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저는 우리 사장님을 믿었습니다. 언젠가 사정만 풀리면 돈은 반드시 온다고 믿어왔습니다. 제가 사장님을 안 믿었으면 한국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받아오려고 애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10월도 지나고 다시 4월이 되도록 돈은 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연락도 없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돌아 온 후에 여기저기 인사하러 다녔습니다. 고향도 가보고 아버지 어머니가 하시는 일도 도와 드리고 하다가 1년 뒤에 저는 디시 카트만두에 왔습니다. 저는 카트만두에서 한국에 연락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장님 댁에 전화를 해보니 <사용하지 않는 전화 번호>라고 합니다. 그 다음 저는 00강철 영업부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거기도 역시 <사용하지 않는 전화 번호>였습니다.
제가 한국에 가 있는 동안 이모는 똥바와 만두 그리고 국수 같은 것을 파는 조그만 식당을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그 식당에서 이모의 일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귀국하기 전부터 저희 식당에 자주 오시는 한국 손님 두 분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그 두 분이 저희 식당에 오셨습니다. 이모가 <저분들이 바로 그 코리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천>이라는 남자 분과 <수자타>라는 여자 분인데 두 분다 작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분들 에게 인사를 드리고 한국에서 7년 동안 일하고 왔다고 말씀드렸더니 아주 반가워하셨습니다.
그후로도 자주 식당에 오신 그분들과 친해진 후 한국의 우리 사장님 전화번호가 다 바뀌어 연락이 안 된다고 말씀 드린 후 도움을 청했습니다. 마침 수자타 누나가 모친상을 당해서 지난 4월에 한국에 가실 일이 있었습니다. 수자타 누나가 한국에 가서 수소문한 끝에 우리 사장님과 통화를 하셨고 00강철 오의진 차장님과도 통화를 하셨습니다.
수자타 누나 덕분에 한국에서 우리 사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사장님은 저보고 다시 한국에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수자타 누나 편에 우선 비행기 표 살 돈을 보내 줄테니 빨리 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 날이 지난 후 수자타 누나가 우리 사장님으로부터 받은 돈 100만원을 달러로 바꿔 가지고 오셨습니다. 우리 사장님은 그 돈으로 비행기 표를 사서 빨리 오라고 하루에도 대여섯 번 씩 전화를 하셨습니다. 저도 다시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병든 몸인데다가 한국 비자를 받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저는 우리 사장님에게 <비자 받기가 너무나 어려워서 못 간다>고 했더니 연락이 뚝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 후 어찌된 일인지 사장님의 전화번호는 또 바뀌었습니다. 전화를 걸면 수화기에서 <사용하지 않는 전화 번호>라는 말만 되풀이됩니다.
저는 몇 달 전부터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이미 읽고 쓰는 정도는 배웠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배우는 이유는 스무 살 때부터 스물 일곱 살까지 7년 동안 한국에서 살았던 이야기들로 책을 내기 위해서입니다. 써나가면 써나갈수록 새록새록 살아나는 한국에서의 추억 때문에 저는 이따금 눈시울이 젖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도 사장님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