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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보성·장흥 78코스 제2부
장흥 용곡해안-수문해변-키조개거리-한승원산책로-사촌-해창-원등마을
20220623
제1부에서 이어짐
1.종려나무길 따라오신 당신께 여닫이 바다의 연꽃잎을 보냅니다.
남파랑길 보성·장흥 78코스에서 보성 구간을 끝내고 장흥 구간으로 넘어왔다. 장흥군 안양면 수문리, 장흥의 동쪽 끝 용곡해안에서 길게 이어지는 득량만을 따라간다. 남파랑길79~80코스를 이미 걸었기 때문에 장흥 서쪽의 대덕읍 가학리, 잠두리, 신리의 득량만 서쪽 끝이 그려진다. 득량만이라 이르는 보성과 장흥의 해안선을 걸으며 맞은편 고흥반도와 다도해 섬들의 올망졸망한 섬들을 살피며 그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남파랑길 78코스 장흥 구간은 장흥군 안양면의 득량만을 따라가는 길이며 장재도 앞에서 득량만 북쪽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용산면 덕암리에서 마치게 된다. 이 구간에서 아름다운 풍경 조망지는 수문해변 해상전망뎈이다. 전망뎈에서 바라보는 득량도는 헤엄쳐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듯 가깝다. 몸집은 작지만 바다에 뿌리를 깊숙하게 내리고 낮게 엎드려서 바다 전체를 품에 안고서 고흥만과 득량만 전체를 지배하는 당당한 섬, 득량도는 그렇게 보였다. 해상전망뎈에서는 득량도를 중심으로 하여 360도 회전하며 바다와 해안과 마을을 살필 수 있다. 그 동쪽 끝 언덕에 스파리조트 안단테가 득량만 위치 가늠의 표지가 되어 준다.
수문해수욕장은 일제시대 때 소록도로 들어가던 음성나환자와 관헌들이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질병이 낫게 되자 해수욕장으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해수욕장 한 켠에 '망향문(望鄕門)'이라는 현판이 붙은 제각이 있는데, 이 제각은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는 제사를 올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향을 잃은 사람이 누구일까? 나환자일까? 망향문 현판 왼쪽 끝에 '本山春雄 建立'이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이 건물은 일본인을 추모하는 제각일까? 혹 해수욕장을 개발하면서 아니면 이곳에서 예기치 못한 일로 사망한 일본인의 혼령을 위로하기 하기 멀리 고향 땅 일본을 바라보는 이국의 장흥 수문해변에 이 제각을 세운 것일까? 아니면 장흥에서 죽은 외지인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일본인이 건립한 제각일까?
수문해수욕장 공원 벤치에서 길동무 송다래님과 함께 맥주 한 캔을 마시며 휴식을 취하였다. 여름날 트레킹에 지친 몸에 시원한 맥주 한 캔의 용량이 몸에 들어가 몸의 감각을 일으켜 세운다. 알콜의 덕분에 몸과 마음이 싱싱해진 느낌이다. 수문항 장흥키조개거리로 나갔다. 키조개 상징조형물이 위치한 장흥키조개거리 입구에서부터 키조개 음식점이 펼쳐져 있고, 수문항 넓은 공터에는 대형키조개 조형물이 세워져 있으며, 그 옆에는 키조개 생태와 효능 그리고 키조개 레시피를 소개하는 안내패널이 세워져 있다. 그 뒤에 키조개상설전시판매장이 있다.
키조개는 생김새가 알곡과 겨, 껍질을 분리해내는 데 쓰던 키를 닮았다고 하여 이름이 붙은 큼직한 조개라고 한다. 키조개는 전남 여자만, 가막만, 충남 천수만, 경남 진해만 등에서 자연산이 생산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양식하고 있는 곳은 장흥 득량만 수문 앞바다뿐이며, 2004년 4월 9일 우리나라 최초의 키조개 양식어장이 수문 앞바다에 개발되었다고 한다. 아, 장흥이 키조개의 중심지로구나. 조개에 무지한 길손은 이제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장흥은 장흥 키조개의 자존심이 강하여 키조개 홍보에도 열정을 쏟고 있다. 홍보는 키조개의 1차적 먹거리에서 정신의 단계로 나아가 한승원의 소설 <키조개>를 소개하고 있다. 소설 <키조개>에서 '키조개'는 생명의 근원이며 원형적 상징이라고 한다. 장흥 키조개거리 홍보쉼터에 한승원의 소설 <키조개>를 평가하는 내용이 이렇게 적혀 있다. "장흥 바다를 무대로,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배우로 나와 한바탕 살풀이춤을 추며 비틀린 한을 달래는 굿판을 벌인다. 그 충돌하는 굿판의 한가운데에서 허우적거리며 자신을 아낌없이 열어 사바세계(허방)의 뒤엉킨 운명의 올가미를 풀어내려고 애쓰는 무당이 허소라의 역할이다. 모티브인 키조개는 바로 생명의 근원인 여근의 원형적 상징이며, 허소라가 갯벌 속에 뛰어들어 획득한 여성성과 모성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또한, 생생한 갯가의 풍광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소설의 재미를 더해 준다. 사물에 대한 에로틱한 상상력, 남도 바다와 거칠면서도 소박한 갯가 풍광의 서정적인 묘사, 구석구석에서 튀어나오는 질박한 남도 사투리는 소설을 더욱 감칠맛 나게 해주는 요소이다." 한승원 작가는 키조개는 장흥의 특산품이며 이 고장의 정신적 원형임을 소설 <키조개>를 통해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수문천의 해안교를 건너 정남진종려거리조성 기념탑이 세워져 있는 여닫이 해안 소공원으로 나갔다. 장흥군 안양면에서는 장흥의 중심 국도 18호선의 가로변 '안양면 수양리~보성군과의 경계인 수문리 용곡마을까지' 종려나무 1천 5백 8십 3그루를 심어서 2004년 4월 10일 종려 거리를 조성하고, 12월에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기념탑 한 면에, "종려나무길 따라 정남진 장흥 안양의 연꽃 바다에/ 검은 댕기 두루미처럼 훨훨 날아오신/ 사랑하는 당신/ 어지러운 티끌 길이 끝나는 곳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꿈의/ 길은 열립니다"로 시작하는 한승원의 시 '종려나무길 따라오신 당신께'가 적혀 있다. 종려나무는 "의인의 번성과 아름다운 미인, 그리고 승리"를 상징한다고 한다. 종려나무 가로수 도로를 거쳐오지 않았지만, 용곡마을 입구와 수문해수욕장 소공원에서 야자수를 보았는데, 그 나무가 야자수가 아닌 종려나무였음을 이제사 알게 되었다. 종려나무는 야자수에 비해 키가 작고 잎이 좁은 나무라고 한다.
여닫이 해안에 '시가 있는 해닫이 바닷가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그런데 산책로 이름이 너무 길어 한승원문학 산책길이라 일반적으로 부르고 있는 듯하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한승원이 안양면 사촌리 율산마을의 집필실 '해산토굴'에서 창작한 시들을 여닫이 해안 600m거리에 20m 간격으로 30개의 시비를 조성해 놓은 산책길이다. 그러니까 이 산책길은 여댣이 바닷가를 찬양하는 작품들이며 특히 '연꽃 바다 이야기' 작품은 키조개를 사랑과 금슬의 상징으로 표현하여 연꽃잎으로 묘사하고 있다. 길손은 시간이 없어 그 자리에서 다 읽을 수는 없고 사진을 찍으며 휙휙 스쳐 지나왔다. 짧은 시들 중에 '물보라' 작품이 가슴에 물보라를 일으켰다. "파도같이 일어나서/ 파도처럼 달리다가/ 파도같이 부서져서/ 하얀 거품 되어 없어진다/ 우리들은 누구든지" 나는 지금 파도처럼 달리고 있는가? 어느 날 파도같이 부서져서 하얀 거품이 되어 없어질 때까지 달려가리라.
안양면 사촌리 득량만에 위치한 장재도(長財島)는 장재(長財), 장자(長者)와 부자(富者)가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조선 중종 때 공조판서를 지낸 정국공신 백수장((白壽長, 1469~1543)이 사패지로 받아 만년에 백사정(白沙亭)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고 전한다. 후손들은 주로 용산면 상금리를 중심으로 세거해 왔다고 한다. 그런데 장재도를 '해를 품은 소통의 섬'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왜 소통의 섬이라 이를까? 장재도가 안양면 사촌리 사촌마을과 용산면 남포마을을 이어주기 때문일까? 장재도는 사촌마을과는 장재교로 이어지고, 남포마을과는 최근에 개통한 정남진대교와 이어진다. 그렇다면 남파랑길은 득량만 북쪽 용산면 원등마을로 이어지는 기존 코스에서 사촌마을 앞-장재교-장재도-정남진대교-남포마을로 코스가 변경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되면 득량만 해안을 따라가며 소등섬을 볼 수 있게 되고 상발리마을 앞 전망대로 이어진다.
사촌마을에서 길게 이어지는 방조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간다. 장재도는 득량만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바다는 장재도 북쪽으로 더 깊숙하게 올라간다. 그곳에 해창포구가 있다. 해창포구는 조선조에 세곡을 보관한 큰 창고가 있어 해창이라 불리게 된 곳이다. 세곡선이 득량만의 해창으로 올라와서 이곳의 세곡을 싣고 서해를 통하여 한양으로 운송했다고 한다. 이 해창포구와 관련한 논쟁이 있어 주목된다. 이순신 장군이 정유재란 때 명량대첩으로 나아가는 출발지가 된 곳이 ‘군영구미(軍營仇未)’라고 하는데, 이 군영구미의 위치를 두고 보성과 장흥이 충돌하고 있다. 현재는 보성측에서 주장하는 보성군 회천면 전일리 군학포구를 군영구미라고 보고 있지만, 장흥에서는 득량만 북쪽 사촌방조제 끝에 보이는 툭 나온 곳인 해창(海倉)포구를 군영구미라고 주장하고 있다. 길손은 남파랑길 78코스 군학마을과 해창마을을 모두 지나쳤다. 해창포구는 장재도에서 득량만 북쪽으로 깊이 올라와 있다. 안전면에서 본다면 해창마을이 더 안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양면 들녘은 푸르고 하늘엔 구름이 떠가고 제암산은 구름에 가려 있다. 싱그런 들녘은 마음을 싱그럽게 하고, 능선의 구름은 한가하게 하늘거리지만 제한 시각에 쫓기며 미지의 길을 탐방하는 길손의 마음은 허둥거린다. 득량만의 바다는 어디까지일까? 길손은 아무것도 모른 채 방조제 아래 농로을 따라가다가 남파랑길을 따르지 못하고 그 길로 계속 걸어 용산면 덕암리로 넘어갔다. 덕암배수갑문과 배수펌프장 앞에서 남파랑길과 재회하였다. 허둥지둥하면서 남상천을 내려본다. 남상천의 하류, 그 하구를 어디로 어림해야 할까? 득량만 북쪽은 남상천이 그 열쇠를 쥐고 있는 것 같다. 득량만 북쪽을 장재도로 보아야 할까?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해창포구에서 출항했다면 득량만은 해창포구 그 북쪽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지금은 방조제로 인하여 드넓은 간척농지가 되어 있지만 예전에 이곳은 바다였을 것이다. 득량만 동쪽의 득량천과 조성천을 가로막아 보성방조제를 건설하여 득량만은 그 방조제가 득량만 해안이 된다. 또 고흥반도 남쪽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있던 고흥만은 고흥방조제가 건설되면서 고흥만은 그 북쪽으로 올라왔다. 그렇다면 장재도를 잇는 장재교와 정남진대교에 방조제를 건설한다면 득량만 북쪽 해안은 장재도 해안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현재 득량만 해안을 어림잡으면 적어도 해창포구를 넘어 남상천의 하구를 득량만 북쪽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식하면 용감한 탓이리라.
원등마을회관 앞 220년 수령의 푸조나무가 짙은 그늘을 드리고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어제 아침 이곳에서 남파랑길 79코스를 먼저 탐방했다. 낯익은 곳, 두 번째 온다는 정겨움이 마음을 풀어준다. 안녕, 이렇게 남파랑길 77~79코스를 마무리한다.
제1부에서 이어짐
2.걸은 과정
남파랑길 보성·장흥 78코스 중 보성 지역을 끝내고, 장흥 지역으로 들어와 안양면 수문리 용곡마을 앞을 통과한다. 중앙에 장재도가 누에의 등 같은 미끈한 선을 보여준다. 중앙 뒤의 산은 노승산인 듯.
득량만 바다와 득량도에 상서로운 구름이 일어나는 풍경을 조망하기 좋은 자리에 위치한 것 같다.
스파리조트 안단테는 등대 같은 기준이 되어 준다. 보성과 장흥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가 중앙 뒤에 보인다.
득량도는 고흥군에 속하는 섬인데, 보성에서 장흥으로 이어지는 해안을 득량만이라고 명명할 정도로 고흥보다는 보성과 장흥에 더 밀접하며 보성과 장흥 앞 바다 전체의 중심을 잡아주는 섬처럼 보인다.
용곡길에서 수문용곡로로 나가 왼쪽 수문해수욕장 방향으로 이어간다.
오른쪽 용곡마을 앞 해안의 용곡길을 따라 수문용곡로로 나왔다. 장흥에서 조성한 종려나무 가로수길이 이어지고 있다.
용곡마을 표석 뒤에 두 그루 종려나무가 이국적 풍경의 분위기를 풍긴다.
1.용곡마을은 1848년(헌종14년)~1851년(철종2년) 한 조상님으로부터 터를 이루고 산 흔적이 옛 고가(古家)의 상량 머리보에 쓰여 있었다. 마을은 U자 형식으로 뒤와 양옆은 산으로 둘러싸여 겨울의 북풍을 막아주는가 하면 앞면은 바다가 있어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다. 옛 조상님들이 마을 주위의 산과 들에 이름을 지어 마을 사람들이 찾아가기 쉬운 용어로 큰골, 담삭개, 바깥도지기, 영골, 소마구청, 모개넘굴, 청영골이라 지금도 부르고 있다. 마을은 보성군 會泉面과 경계를 이루고 있고, 마을 뒤의 형국이 병풍을 둘러놓은 것 같다고 하여 도지기(圖紙記)라 불렸으며, 장흥군 안양면 수문리 1반에 속해 있다가 1982년에 分里가 되면서, 마을 뒷산이 용의 형국이며 마을 뒤 골창이 용골이라 하여 용곡(龍谷)이라 하였다. 현재 마을의 성씨(姓氏)는 12성(姓)이며, 인구는 160여 명 살고 있다. 마을은 주택 45호가 상가, 해수탕, 펜션, 민박, 횟집으로 이루어져 있고, 밭(田) 2ha, 논(畓) 17ha, 선박 25여 척, 반농반어촌의 해안마을이다. 전어, 숭어, 뻘낙지, 새우, 바지락, 키조개 등의 수산물이 생산되고 있다.
2.키조개(Atrina pectinata japonica)는 모양이 곡식을 까부르는 키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보통 수심 3~50m 정도에서 자기 몸의 2/3 정도를 뻘 속에 묻은 채 생활한다. 성숙한 개체의 산란기는 6~9월이다. 전남 여자만, 가막만, 충남 천수만, 경남 진해만 등에서 자연산이 생산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양식하고 있는 곳은 수문 앞바다 득양만뿐이다. 2004년 4월 9일 수문 어업인의 노력과 국립수산과학원 장흥수산사무소 시험연구 결과로 우리나라 최초 키조개 양식어장 200ha가 개발된 것이다. 현재 수문어촌은 어가 250호 중 100호가 키조개 양식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지역 명산물로 육성하고 있다. 수문산 키조개는 60% 이상을 일본에 수출할 정도로 품질이 우수하다. 패주(貝柱)의 빛깔이 황금색을 띠고 맛이 담백하기 때문에 혼탁하고 질긴 다른 지역 키조개와 확연히 구분할 수 있다. 특히 수문산 키조개는 식품영양학적으로 아연, 마그네슘, 단백질, 아미노산 등 필수 영양소가 풍부하여 자양강장제로도 사용한다. 끓이면 우윳빛으로 우러나는 국물은 정력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한국 문학의 거장 장흥 출신의 소설가 한승원은 이곳을 무대로 키조개를 모티브로 하여 장편소설 <키조개>(문이당, 2007년 2월)를 펴내 전국의 독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종려나무 가로수가 줄지어 선 수문용곡로에서 수문해안 해상전망뎈로 내려간다.
보성과 장흥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 그 아래 용곡선착장과 방파제, 스파리조트 안단테, 용곡마을이 모두 들어온다.
스파리조트 안단테, 용곡마을과 용곡해안, 용곡마을 입구의 소공원(맨 왼쪽)이 북쪽 산 아래서 평안하다.
수문리조트&펜션(오른쪽)과 그 왼쪽의 수문마을, 수문해변과 파란색 수문해수욕장 샤워실 건물이 보인다.
수문해수욕장 샤워실 파란색 건물부터 맨 왼쪽의 키조개마을까지 이어지는 수문해변과 중앙의 수문해수욕장이 아름답다.
수문 키조개마을과 키조개거리, 그 왼쪽의 수문항, 수문항 뒤쪽에 누에처럼 누어 있는 장재도, 그 앞의 작은 자라섬이 보인다.
득량만 이름을 짓게 한 득량도가 고흥만과 득량만 사이의 바다 전체를 통제하는 섬처럼 보인다.
해상전망뎈에서 전망을 마치고 수문해변을 걸었다. 수문해변공원 이르기 직전에 망향문이라 적힌 솟을대문이 보인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문, 현판 왼쪽에 本山春雄 建立이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이 건물은 일본인을 추모하는 제각일까?
해변체육공원에서 오른쪽으로 수문한옥마을과 수문랜드 블루투어 오트캠핑장으로 들어간다.
수문해수욕장은 백사장 길이 1km, 너비 300m로 장흥읍에서 동남쪽으로 16km 떨어진 곳에 있다. 수온이 따뜻하고 경사가 완만해 피서지로 적합하다. 백사장 뒤편에는 소나무숲이 울창하고 일림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담수가 있어 담수욕도 즐길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음성나환자들을 태우고 소록도로 가기 위해 정기여객선을 기다리다가 더위에 지친 일본 관헌과 나환자들이 이곳에서 목욕을 하였더니 나병이 완치되어 해수욕장으로 개장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앞 바다에 득량도가 있어 사철 싱싱한 활어회를 맛볼 수 있고, 사촌리와 연결되는 해안일주도로를 따라 장재도에 가면 갯바위 낚시를 할 수 있다.
키조개모형물, 키조개의 생태와 효능 그리고 키조개 조리법 등을 적은 설명판, 그 뒤에 키조개상설전시판매장이 있다.
키조개는 연근해의 수심 20~50m의 뻘모래에 서식하며, 남해안의 청정 해역인 득량만, 여자만과 서해안의 보령, 서천 근해가 주산지입니다. 패주(貝柱, 키조개)는 단백질이 풍부하고 정혈작용이 있어 임산부의 산후 조리에 좋으며, 키조개는 생김이 우리네 옛 살림도구의 하나로 알곡과 겨, 껍질을 분리해내는 데 쓰던 키를 닮았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은 큼직한 조개입니다.
어른 손바닥만큼이나 커서 대개의 조개류는 폐각근(閉殼筋), 곧 조개껍질을 여닫는 근육이 고작해야 손톱만한데 비해 키조개는 500원짜리 동전보다도 훨씬 더 크며 맛도 뛰어나 오래전부터 식용으로 사랑받아 왔습니다.(장흥 키조개마을)
뒤쪽에 완도해양경찰서 수문출장소가 있다.
남파랑길은 키조개 거리와 키조개마을 앞을 거쳐 수문1길을 따라 진행한다.
스파리조트 안단테로부터 용곡해안, 수문해수욕장을 거쳐 키조개거리로 나왔다.
장흥 바다를 무대로,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배우로 나와 한바탕 살풀이춤을 추며 비틀린 한을 달래는 굿판을 벌인다. 그 충돌하는 굿판의 한가운데에서 허우적거리며 자신을 아낌없이 열어 사바세계(허방)의 뒤엉킨 운명의 올가미를 풀어내려고 애쓰는 무당이 허소라의 역할이다. 모티브인 키조개는 바로 생명의 근원인 여근의 원형적 상징이며, 허소라가 갯벌 속에 뛰어들어 획득한 여성성과 모성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또한, 생생한 갯가의 풍광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소설의 재미를 더해 준다. 사물에 대한 에로틱한 상상력, 남도 바다와 거칠면서도 소박한 갯가 풍광의 서정적인 묘사, 구석구석에서 튀어나오는 질박한 남도 사투리는 소설을 더욱 감칠맛 나게 해주는 요소이다.
키조개의 특유한 맛은 글루탐산, 이노신산 등을 중심으로 이뤄지는데 열을 가하면 영양가를 잃게 되므로 생으로 먹는 것이 좋습니다. 키조개 패주는 얇게 나박나박 썰어 문어와 함께 술안주로 먹으면 그 맛이 부드럽고 순후하여 즐겨먹고 있습니다. 키조개 살에 쌀가루를 넣어 끓인 국물은 달짝지근하게 혀를 자극하며, 키조개 살이 쌀가루 국물과 감칠맛 나게 엉기어 환상적인 맛을 내고, 속앓이를 부드럽게 푸는 입맛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장흥 키조개마을)
소나무 세 그루 그리고 홍매화일까? 수직적으로, 비스듬하게, 수평적으로, 네 그루 나무가 자라고 있다.
앞에는 장재도, 그 뒤 왼쪽에 작은 자라섬, 중앙 왼쪽 뒤에 장환도가 흐릿하게 들어온다. 오른쪽에 안양면 사촌리 사촌마을과 장재도를 잇는 연륙교 장재교가 보인다. 오른쪽에 보이는 해안을 여닫이해안이라 이르고 있다.
해안교를 건너 지방도 819번 수문용곡로, 한승원산책길로 명명된 길로 나가 왼쪽으로 이어간다.
오른쪽 앞 소공원에 정남진종려거리조성 기념탑이 보인다.
종려나무 2그루가 왼쪽과 오른쪽에 보인다.
서기 넘치는 억불, 삼비, 사자산의 정기를 모아 안양면민과 출향인이 고향가꾸기 운동을 전개하여 모은 성금과 군의 지원금으로 우리 고장 중심인 국도 18호선의 가로변 '수양~용곡마을 보성군 경계까지'에 "의인의 번성과 아름다운 미인, 그리고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1천5백8십3그루를 심어 2004년 4월 10 이 거리를 조성하였으니 그 높고 고결한 정열을 사랑으로 승화시켜 안양면민의 안녕과 번성을 기원하고자 이 탑을 세우노라. 2004년 12월
종려나무길 따라 정남진 장흥 안양의 연꽃 바다에
검은 댕기 두루미처럼 훨훨 날아오신
사랑하는 당신
어지러운 티끌 길이 끝나는 곳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꿈의
길은 열립니다 당신이 싣고 다니시는 암갈색으로 녹슨
당신의 육체와 영혼
꽃무지개 뜨는 꼬마 나폴리 수문항과 여닫이 연안의
은모래밭
수억천만 개의 유리대롱 같은 금빛 햇살 아래서
배릿하고 달콤한 키조개 바지락 숭어 전어 농어 도미 쭈꾸미 낙지들의 맨살과 더불어
세모시처럼 하얗게 바래 가지고 가셨다가
정남진의 연꽃 바다처럼 싱싱해지고 향기로워지고 싶으시면 가시는 듯 되짚어 오십시오
검은 댕기 두루미처럼 사랑스러운 당신.
이 '시가 있는 여닫이 바닷가 산책로'는 푸르고 향기로운 세상을 꿈꾸는 장흥군과 율산마을 사람들의 뜻에 따라 조성하였습니다. 무지개처럼 휘움한 여닫이 모래 언덕 약 600미터 사이에 20미터 간격으로 해산 한승원 선생의 시비 30기를 놓았습니다. 여기에 새긴 글들은 선생이 율산마을로 이거하신 이후 쓴 작품들로, 이 바다에서 낙지, 주꾸미, 도미, 숭어, 노어, 바지락, 키조개를 잡으며 사는 마을 사람들의 희망과 이 바다에 뜬 해와달과 별과 불어오는 바람과 춤추는 파도와 찾아오는 물새와 방긋 웃는 꽃과 안개와 이슬들을 무지갯살처럼 피어올린 것들인데, 이 바다를 찬양하는 헌사로 읽힙니다. 이 산책로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 여기를 찾는 이들의 삶이 신화와 전설처럼 그윽하고 햐익로워지기를 바라며, 문학산책로 조성을 기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놓습니다. 2006년 10월 10일. 향기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 장흥군 안양면 율산마을 주민. 글씨 이봉준
'그의 문학에서 고향은 하나의 운명, 하나의 원죄, 하나의 근원, 하나의 원형으로 다가온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바다 이야기를 시와 소설로 형상화시켜 온 해산 한승원 선생은 1939년 장흥군 회진면 신덕리에서 태어나 장흥중·고등학교를 거쳐 서라벌예대를 졸업했으며, 시인 소설가로 활동하여 왔다. 주요 작품은 소설집으로 <그 바다 끓어 넘치며><아제아제 바라아제><아버지와 아들><초의><해변의 길손><키조개> 등. 시집으로 <열애일기><사랑은 늘 혼자 깨어 있게 하고><노을 아래 파도를 줍다>. 산문집으로 <바닷가 학교><이 세상 다녀가는 것 가운데 바람 아닌 것이 있으랴> 등이 있으며, 전라남도문화상, 한국소설문학상,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한국문학상, 이상문학상, 미국 기리야아 환태평양 도서상, 해양문학상, 한국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하였고, 이천육년 가을 현재 장흥군 안양면 율산마을의 작가실 '해산토굴'에서 집필 중이다. 글씨 이봉준
간단하게 한승원문학산책로라고 부르는 듯. 여닫이해안이 활 모양으로 굽어져 있다.
사랑하는 그대여 보았습니까,/ 안개 낀 봄밤에 별들이 여닫이 바다하고 혼례
치르는 것, 보았습니까, 한여름 보름달이 마녀로/ 둔갑한 바다와 밤새도록 사랑하고 아침에
서쪽으로 가며 창백한 얼굴로 비틀거리는 것,/ 보았습니까, 늦가을 어느 저녁에 여닫이 바다가
지는 해를 보내기 싫어 소주 한 병에 취하여/ 피처럼 불타버리던 것, 보았습니까, 달도 별도 없는
겨울밤 눈보라 속에서 여닫이 바다가 혼자 외로워/ 울부짖으며 몸부림치는 것, 그대 알아채셨습니까,
여닫이 바다의 몸짓이 사실은 제 마음을 늘 그렇게/ 표현해주고 있다는 것
짐승들 가운데 사람보다 더/ 무섭고/ 더러운/ 짐승이 있을까/ 꽃 중에 사람꽃보다 더/ 곱고/ 아름다운 꽃이 있을까
율산마을이라고 가늠한다. 한승원 작가는 율산마을의 집필실 '해산토굴'에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옛날 율산마을의 한 총각이 별 총총한 밤에 여닫이 연안 모래밭에 엎드려 천관산에 주석하는 보살님에게 비손했다. "제 사랑하는 여인이 병들어 있는데 어떠한 약을 써도 낫지 않습니다. 그 여인을 살려주십시오." 천관보살이 모습을 드러내고 말했다. "사향노루 암수가 사랑할 때 나는 향기를 풍기는 연꽃잎을 따다가 먹이면 나을 것이다."
이튿날 아침부터 이 산 저 산을 더듬고 다니던 총각은 사자산 골짜기에서 사향노루 암수가 사랑 치르는 것을 목격하고 아릿한 사랑향기를 맡았다. 산을 내려와 그 향기 풍기는 연꽃을 찾아 방방곡곡을 누볐다. 무안 연꽃 방죽, 전주 연꽃 방죽, 안양 해창 가시연꽃 방죽에도 가보았지만, 그 향기 나는 연꽃은 없었다. 사랑하는 여인은 뼈만 앙상해지고, 마침내 정신을 놓아버렸다. 총각은 여닫이 모래밭에서 엎드려 슬피 울었다. 그때 썰물 진 갯벌 밭쪽에서 그 향기가 날아왔다. 이 바다 어디에 연꽃이 있을까. 바다에는 연꽃잎 같은 섬들이 빙 둘러서 있었다. 그는 천관보살에게 "대관절 그 연꽃은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물었고, 천관보살이 대답했다. "여닫이 바다에서 나는 바지락하고 키조개가 바로 그 연꽃잎이니라."
총각은 한겨울이었지만 물속으로 들어가 키조개를 캐고, 바지락을 파다가 고아 보얀 국물을 그 여인에게 먹였다. 시들어가던 여인의 살에 발그레 핏기가 돌고 정신이 깨어났다. 총각은 더욱 부지런히 바지락과 키조개를 고아 먹였고, 그 여인은 건강해졌고, 둘은 아들 딸 많이 낳고 백년해로를 했다. 이후 이 바다를 '연꽃바다'라고 불렀고, 금슬이 좋지 않거나 아기를 낳지 못하거나 시름시름 앓곤 하는 남녀들은 별밤에 은밀히 이 바닷가에 와서 천관보살에게 소원을 말하곤 했다.
논두렁처럼 갯두렁이 만들어진 여닫이 갯벌은 율산과 수문리의 반찬통입니다. 거의 모든 가구가 여닫이 갯벌에 바지락 양식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장에 내어 가용을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갑작스레 닥친 손님 밥상에 올려 체면치레를 해주고 있습니다. 여닫이 갯벌은 논두렁 마냥 10여 미터 간격으로 말목이 박혀 있거나 돌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여닫이 갯벌과 앞바다에서 패류는 바지락, 키조개, 똥꼬막(새꼬막) 등이 나오고, 어류로는 전어, 장어, 농어, 돔, 주꾸미, 낙지 등이 잡히고 있습니다. 특히 바지락, 키조개, 낙지 등이 유명합니다.(장흥 키조개마을)
안양면 사촌리 득량만에 위치한 장재도(長財島)는 장재(長財, 장자와 부자)가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조선 중종 때 공조판서를 지낸 정국공신 백수장((白壽長, 1469~1543)이 사패지로 받아 만년에 백사정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고 전한다. 후손들은 주로 용산면 상금리를 중심으로 세거해 왔다고 한다.
중앙 뒤에 보이는 산은 노승산이다.
이 길을 따라가다가 장재교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사촌마을 방향으로 진행한다. 노승산이 위치를 확인해 준다.
오른쪽 사촌큰길로 진입한다.
바다는 장재도 위쪽으로 깊숙하게 들어간다. 왼쪽에 솟은 산은 노승산, 남파랑길 79코스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사촌큰길을 따라 득량만 안쪽으로 깊숙하게 올라간다.
장자(長者)와 부자(富者)가 살았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장재도를 '해를 품은 소통의 섬'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왜 소통의 섬이라 이를까? 장재도에서는 바다낚시를 즐길 수 있다고 한다.
고상가옥으로 지어진 것 같다.
사촌가마등길을 따라 득량만 안쪽으로 계속 올라간다.
득량만은 북쪽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있고 해안(海岸)인 듯 강안(江岸)인 듯 방조제를 걸어 득량만을 따라간다.
고흥만과 득량만 사이의 바다에서 독불장군인 듯 유아독존인 듯 득량도가 당당하다.
방조제 중간 어름에서 안양면 사촌리에서 안양명 해창리로 넘어간다. 이순신 장군이 정유재란 때 처음 바다로 출항한 ‘군영구미(軍營仇未)’를 장흥에서는 득량만 북쪽 사촌방조제 끝에 보이는 툭 나온 곳인 해창(海倉) 포구를 이르는 듯하다.
지방도 819번을 확장하여 장흥군 안양면 사촌리 장재도와 용산면 상발리를 잇는 연륙교 정남진대교가 2022년 1월 4일 임시로 개통되었다고 한다. 정남진대교는 길이 430m, 폭 14.5m의 해상교량이다. 이제 남파랑길은 사촌마을 앞-장재교-장재도-정남진대교-남포마을로 코스가 변경될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소등섬을 볼 수 있게 된다. 왼쪽 다리는 장재교이다.
이 어름에서 사촌리에서 해창리로 넘어가는 듯. 남파랑길은 사촌배수펌프장 오른쪽 고개를 넘어 해창마을로 내려간다.
앞쪽은 배수펌프장, 뒤쪽은 배수갑문, 배수갑문 앞쪽에 시혜비라고 적힌 콘크리트비석이 있다. 바다 왼쪽에 해창선착장이 보인다. 정유재란 1598년 음력 8월 18일 이순신 장군이 득량만 북쪽 해창 포구에서 출항하여 장재도를 거쳐 득량만 서쪽 장흥의 회령진성으로 갔다는 것이 장흥측 주장이다. 보성에서는 군학마을 앞 포구에서 출항했다고 주장한다.
무슨 시혜비일까? 방조제 공사 시혜비일까? 시혜비 옆면에 천주교 주교 이름이 적혀 있고, 공로라는 단어가 보인다.
맨 끝 사촌마을에서 오른쪽 방조제를 따라 걸어왔다. 방조제 뒤에 수로가 있다.
오른쪽 다리를 건너 해창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 해창마을회관으로 내려간다.
언덕의 나무가 우람하다.
중앙 뒤에 보이는 산은 성바위산인 듯. 해창마을이라 불리게 된 것은 이곳에 세곡창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양한 비석들이 있는데 무슨 비석인지를 알 수가 없다.
해창길을 따라 해안으로 나간다.
앞에 보이는 건물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방조제 아래로 나가 다시 해안으로 이어진다.
왼쪽에 득량만이 북쪽으로 깊숙하게 들어와 있다. 득량만 안쪽에서 방조제를 따라 이어간다.
이곳은 안양면 해창리에 속하는데 배수장 이름은 안양면 모령리의 이름을 따서 모령배수장이다. 아마도 해창리와 지천리 사이에서 득량만으로 흘러드는 홍거천 상류에 모령리 지역이 위치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득량만이 이렇게 북쪽으로 깊숙하게 올라와 있다. 방조제 위로 가지 못하고 방조제 아래를 통과한다. 홍거천의 물은 해창들녘을 흘러와 득량만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갇혀 있다.
건너편 마을은 해창리 덕동마을인 듯.
방조제에 의한 간척농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해창방조제 아래 수로 옆길을 따라 계속 이어간다.
드넓은 간척농지에서 벼들이 푸르게 자란다. 아름답다. 오른쪽 마을은 해창리 삼교마을, 왼쪽마을은 모령리 풍암마을인 듯. 그리고 중앙의 뒤쪽은 장흥군 안양면 운흥리 면소재지인 듯.
남파랑길은 왼쪽 중앙 곤포 사일리지가 쌓여 있는 곳에서 방조제로 올라가 득량만 북쪽 끝자락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제한시각에 쫓겨 허둥거리며 방조제로 올라가지 못하고 방조제 아래를 계속 통과하여 중앙 왼쪽 푸른 언덕 왼쪽으로 빠져 나갔다.
이곳에서 길을 찾느라 허둥거렸다. 지천마을로 나가다가 되돌아와 방조제 아래를 따라 이어갔다. 제한시각에 쫓겨서 머리가 빙빙 돌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남파랑길은 오른쪽 득량만의 방조제를 따라 올라와야 하는데, 길손은 왼쪽 푸른 언덕을 돌아 이곳으로 왔다. 남파랑길을 제대로 걸어야 득량만 북쪽 끝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 뒤에 장재도가 분명히 보인다. 왼쪽 푸른 언덕을 경계로 하여 안양면 지천리와 용산면 덕암리가 경계를 이루는 것 같다.
남상천의 하구가 어디인지 득량만 북쪽은 어디까지인지 분명치 않다. 남상천변에 갈대습지가 무성하다.
배수갑문 뒤에서 왼쪽 길은 덕암지천길, 오른쪽 길은 방조제길, 남파랑길은 덕암방조제를 따라 올라온다. 오른쪽 남상천의 하구를 어디로 보아야 할까? 여기보다 더 아래일까?
남파랑길 79코스에서 남상천 위 덕암교를 건너 맞은편 왼쪽으로 나와 풍길리 들녘을 가로질렀다.
남상천은 흘러흘러 득량만 바다로 간다. 득량만은 장재도 언저리로 돌아드는 해안이라고 해야 하는가? 남파랑길 79코스는 남상천 건너편 풍길리 들녘을 가로지른 뒤 덕암풍길로를 따라 풍길삼거리까지 이어갔다.
왼쪽 뒤에 남파랑길 78코스 종점인 원등마을회관 앞 그윽한 푸조나무가 보인다. 천변길을 따라 덕암지천길로 나간다.
남상천변길에서 덕암지천길로 나가 남하부엌 방향으로 진행한다.
남하부엌 음식점 앞을 통과하여 앞 삼거리에서 왼쪽 덕암풍길로를 따라간다.
대나무 통을 걸어 놓은 것은 풍경처럼 소리를 울리기 위한 것일까? 단순한 장식용인가?
오른쪽 덕암지천로를 따라왔다.
장흥군 용산면 덕암리 원등마을회관 앞 남파랑길 79코스 시작지점에서 벅찬 78코스를 마친다.
첫댓글 남하부엌 여기는 파스타가 맛있는곳이지요.
저도 그길이 이렇게 연결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걷다가 만나는 남하부엌이 어찌나 반가웠던지요.
기억이 생생해요. 걸어온길을 되짚으니, 더욱 감회가 깊어서 기뻐요!
아, 남하부엌이 파스타로 유명한 곳임을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네요.
그것도 모르고
그 위쪽에 있는 청요릿집에서
짬뽕에 맥주를 마셨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