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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주현대불교 원문보기 글쓴이: 파란연꽃
17명의 순례 참가자 첫 행사로 아리랑 공연 감상
본지에 몇 차례 모집광고가 나간대로 본지에서는 순례객을 모아 지난 9월 5일부터 12일까지 필자를 포함하여 총 17명이‘제 2차 북한사찰순례'를 다녀왔다. 1차 순례였던 지난 2005년에는 총 23명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때에 비해 7명이 줄은 숫자이다. 뉴욕. 뉴져지 지역에서 가장 많이 참여하였고 보스톤, 필라델피아,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참가하였다. 이중에서 2명은 불교인이 아니지만 북한 관광을 위해 참석한 여행 전문가들이었다. 17 명 중에 보스톤에 거주하는 변복순 보살님, 필라델피아 김상철 거사 부부는 이산가족 상봉으로 이미 북한을 방문한 경험이 있었고 뉴욕의 김긍수 보살님은 지난 1차 순례에 참가한 적이 있다.
지난 1차 순례때에는 미국에 있는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재미동포전국연합’을 통해 북한의 ‘해외동포위원회’를 창구로 북한 입국 수속을 하고 방북하여 ‘해외동포위원회’의 안내로 사찰 순례를 하였는데 이번에는 뉴욕에 있는 북한 전문 여행사인 ‘우리여행사-URI TOURS’를 통해 북한 비자와 순례스케줄을 준비하고 평양을 방문한 후에는 ‘조선국제청년여행사’를 통해 북한사찰 순례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우리 일행은 4일 인천공항에서 모두 모여 북경으로 갔다. 북경의 숙소인 북경에서 '이화원' 관광을 하며 하루밤을 보내고 오전 11시에 북경 제 2 공항으로 나갔다. 숙소인 할리데이 인 익스프레스에서 우리 일행외에도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인도네시아 젊은 사람 1명, 미국인 1명과 일본인 여자 1명, 그리고 우리 여행사 직원인 미국인 1명 등이 우리와 함께 북한에 가기 위해 같은 버스로 공항에 갔다. 북경에는 모두 3개의 국제 공항이 있다고 한다. 평양으로 가기 위해 출국 수속을 하고 난 후 고려항공 비행기 수속을 위해 고려항공 카운터로 갔다. 고려항공 수속을 하는 곳에 도착하니 이미 수 백명의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는데 대부분 서양인들이었다. 필자는 이번이 3번째 이므로 별다른 감정이 없었으나 처음가는 사람들은 ‘북한에 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가 ?’하고 놀라워했다. 북한에 대한 고정관념이 충격 받기가 시작된 듯 하였다. 우리 일행이 기다리는 줄의 수속을 하는 컴퓨터가 고장이 나서 우리는 가장 늦게 수속을 마치게 되었다. 짐은 한 사람당 20키로 한 개만 보낼 수 있었다. 비행기 수속을 마치고 나서 북경공항 수속대를 다시 통과하니 수속에만 2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미국 공항들이 수속대를 통과하기가 까다로운데 북경 공항도 이에 뒤지지 않았다. 이 절차를 마치고 나니 좀 지쳤다.
비행기는 만석이었다. 필자의 왼쪽에는 워싱턴 사는 백인 여성이 앉았는데 60대 중반의 여성으로 단체로 15명이 순수 관광을 하러 간다고 했다. 오른 쪽에도 역시 백인 남성이었는데 30대 후반으로 현재는 경남 창원에서 원어민 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관광으로 혼자 간다고 했다. 이들과는 그 후로도 여러 차례 호텔에서 만나게 되었다.
드디어 5시 무렵에 펑앙 순안공항에 도착하였다. 수속대에서 핸드폰을 가지고 있으면 내놓으라고 했다. 하지만 오기 전에 본 뉴스에 의하면 남한에서 사는 사람도 핸드폰을 공항에 맡기라고 하지 않고 통과시켰다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필자는 미국과 한국에서 각각 사용하는 2개의 핸드폰을 보여주었는데 검사요원이 기록만 하고 그냥 통과시켜주었다. 전에는 책 반입이 아주 까다로웠는데 이번에는 책 검사는 하지 않았다.
공항에는 뉴져지 우리 여행사 앤드리아 이 사장이 나와 있었다. 변호사인 그는 이번 우리 순례단 행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순례가 잘 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 우리 순례도 함께 다니겠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를 현재에서 안내할 가이더 2명도 함께 있었다. 이중에서 김성이라는 남자 안내인이 책임자였는데 그는 유럽에서 유학도 하고 영어를 아주 잘했다. 또한 이은심이라는 여성 안내인도 영어 실력이 뛰어났다. 그는 관광학과를 졸업하였다고 하는데 중국어는 아주 유창하게 하고 영어도 좀 한다고 한다. 우리가 미국에서 오는 그룹이라 주로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공항은 아주 활기가 넘쳤다. 전에는 해외동포위원회에서 사람들이 나와 마중을 하였는데 해외동포위원회 사람들은 하나도없고 수 십명의 여행관계자들이 각자 마중나온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 하는 장면 북한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이들은 대개 핸드폰을 사용하고 있었다. 전에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아리랑'공연을 보러 갔다. 수용인원이 5만 정도 되는 큰 운동장에서 출연 인원이 10만명이 되는 아주 화려하고 정교한 지상 최대의 쇼이고 최대의 공연이다.
8년전에 본 공연은 일제하에서 항일투쟁을 거쳐 북한 건설 과정을 보여주는 기본 줄거리가 였는데 변화가 많아 보였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이와 관련해 피바다가극단 총장인 김목룡 총연출가(64)는 “이번 ‘아리랑’ 공연이 전승 60돌에 즈음하여 상연되는 것만큼 특별히 성대하게 진행되게 끔 준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이번 작품에는 두 제국주의를 타승하시고 조국을 굳건히 지켜주시고 부강조국을 일떠세우신 대원수님들(김일성, 김정일)의 영도업적을 더욱 부각시키고 김정은 원수님의 두리(주위)에 굳게 뭉쳐 최후승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조선인민의 기상을 보여주도록 보충, 개작되고 있다”면서 “김정일 장군님의 직접적인 영도 아래 창작된 ‘아리랑’ 공연을 김정은 원수님의 대에 더욱 훌륭한 공연으로 내놓게 된다”고 강조했다.
연출에 많은 변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 화려해지고 조명과 무대연출에 현대적인 기법을 많이 도용하였다. 이런 기법을 시도하려면 전기가 많이 필요할텥데 전기 사정이 좋아진 것으로 판단되었다. 실제로 7일간 있는 동안 전기시설이 많이 좋아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약 1시간 30분 동안 하는 공연인데 2005년에는 50 달러였는데 이번에는 80유로 로 달러로는 120 달러정도 되었다. 큰 운동장에서 하는 공연이라 끝나고 나올때는 한꺼번에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 일행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평양의 용화사가 폐쇄되었다
호텔로 돌아와서는 우리 순례단의 일정을 논의하였다. 우리 그룹의 목적은 사찰 순례가 주이고 여기에 사찰이 있는 금강산, 묘향산, 그리고 평양과 원산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원래 필자가 원하는 것은 평양에서는 광법사와 용화사, 원산의 명적사, 개성의 대흥사,안화사, 묘향산의 보현사와 하비로암, 금강암, 금강산 내금강의 표훈사, 정양사, 보덕암 등이었다. 그런데 개성의 안화사, 대흥사, 원산의 명적사는 갈 수 없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평양 시내에 있는 용화사는 2-3년 전에 폐쇄가 되어 없어졌다고 한다. 그 이유를 김 성 안내인은 용화사에서 발굴된 자료에 이 절이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지어진 절이라 보존 의미가 없어 그렇게 되었다고 들어다고 한다. 북한에서 발행안 ‘조선의 절 안내’라는 책에 의하면 이 절은 1935년에 처음 건립되었고 되어있다. 이 절에는 고려시대 건축물인 흥복사 6각 7층탑과 영명사 불감이 옮겨져 보존되어 있었다. 놀라운 사실이었다. 필자는 여기를 오기 전 까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조계종단을 비롯한 남한 불교계에서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 큰 사건이었지만 이제 와서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둘째날에는 아침 일찍 일어난 사람은 6시 부터 호텔 밖으로 나가 운동을 할 수 있었다. 필자도 일찍 일어나 걷는 운동을 하였다. 우리 그룹에 온 사람들 3-4명도 아침 일찍부터 달리기를 하면서 운동을 하였다. 호텔에 있는 동안에는 호텔에 있는 대형 식당에서 부페식으로 식사를 하였는데 여러 종류의 빵을 비롯하여 힌 쌀죽, 즉석에서 만들어 주는 계란 요리, 가자미 등 생선튀김, 닭요리,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채소에 넣어 만든 음식 등 여러가지 음식이 잘 나왔다. 전에와 마찬가지로 주로 고기 위주이고 채소로 만든 음식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모든 사람들이 아침식사를 맛있게 하였다. 식당에서 무료로 주는 음식으로는 아주 훌륭한 음식이었다.
아침 식사가 끝난 후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동상이 있는 곳으로 안내를 받았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으로 따르라고 북한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이 곳에 안내되어 동상에 존경의 표시를 엄숙하게 하여야 한다. 원하는 사람들은 헌화를 할 수도 있다. 2005년에는 김일성 주석의 동상만 있었는데 이번에는 한 자리에 두 사람의 동상이 나란히 있었다.
북한에서는 고려불화와 고려 사경 작품을 볼 수가 없었다.
이후의 일정은 개성과 판문점 방문 그리고 다시 평양으로 와서 ‘조선 역사중앙 박물관’ 관람이었다. 원래 개성에서 대흥사와 안화사를 순례하기로 했는데 현지 사정상 방문 할 수 없다고 한다. 올 북한에 비가 많이 내려 도로가 갈 수 없다고 한다. 우리 일행의 방문이 사찰순례이기 때문에 필자는 꼭 가고 싶었지만 초반부터 싸울수도 없고 또 실제로 북한에는 남한의 1970년 수준정도로 도로 사정이 나쁘다. 포장 도로가 많지 않고 비가 오면 도로가 파이고 다리가 문제가 생겨 갈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개성의 고려유물을 전시한 개성의 고려박물관에 갔다. 박물관은 2005년에 본 것에서 거의 변화가 없어 보였다. 고려시대는 한국 역사에서 문화부흥기이다. 불교문화에 바탕을 둔 고려시대 찬란한 문화는 고려청자, 고려불화, 고려사경이 고려시대 3대 문화로 평가되고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이중에서 고려청자는 이미 많이 알려졌고 청자 재품은 남북한에 수 만점이 있다. 하지만 세계 회화사적으로 가장 훌륭한 회화로 평가받는 고려불화의 경우는 총 160점이 있는데 대부분 일본으로 유출되었고 남한에는 겨우 10여점이 있을 따름이다. 올 초에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국립동양예술박물관에서 고려불화(아미타내영도)가 한점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남한의 주요 언론들이 일제이 보도하였다. 고려 불화를 본 어느 영국인은
"그림들의 생기 넘치는 색감과 이를 표현해 낸 화가들의 솜씨가 일품입니다. 또한 매우 섬세하며 복잡한 가지각색의 요소들이 함께 모여 만들어 내는 그림들의 총체적인 고요함과 통일성에 매료되었습니다. 그 당시 화가들은 현대 화가들보다 훨씬 더 박식했던 것 같습니다. 채색염료를 만들기 위해 광석을 얼마만큼 갈아야 하며 얼마만큼의 풀을 더해 칠해야 되는지, 이러한 지식들을 오늘날에는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불화를 보면 고요한 느낌이 마음에 차오릅니다. 오늘 고려불화를 보면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긴 선을 단 하나의 선으로 표현했다니 자신감에 넘치는 화가들이였을 것 같습니다. 다른 나라들보다 고도로 발전했던 한국의 문화와 예술이 더 많이 발견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길 바랍니다. "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귀중한 문화유산인 고려사경은 유교를 기본으로 하는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맥이 끊겼는데 최근에 외길 김경호 선생에 의해 복원되어 이제는 남한에서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유물 또한 많은 작품이 일본으로 약탈되어 갔다.
4시 조금 지난 '개성박물관' 강사를 만나 유물 설명을 들으면서 고려불화와 고려사경에 대해 물었지만 이 말을 처음 듣는다고 했다. 고려시대의 수도였던 개성의 고려유물관은 너무 작고 유물도 빈약했다.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재정을 투여할 여력이 없다는 증거였다. 이후에는 판문점으로 갔다. 이곳에서 남쪽의 판문점 자유의 집을 보았다. 북한 병사의 설명에 의하면 남쪽의 '자유의 집'은 미군의 관할하에 있다고 한다. 저 멀리 개성공단이 희미하게 보였다.
다시 개성으로 와서 점심을 마치고 고려인삼에 닭을 넣어 몇 시간 뜸을 들인 아주 거창한 식사를 하였다. 시간 관계상 개성의 선죽교는 차에서 안내원의 설명을 들을수 밖에 없었다. 차 안에서 선죽교를 보면서 지나갔다. 많은 참가자들이 선죽교를 직접 건너보지 못해 아쉬워했다. 평양의 ‘조선역사중앙박물관’을 보려면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4시 조금 넘어 ‘조선역사 중앙박물관’에 도착하여 고구려, 발해, 고려 유적을 중심으로 관람하기 시작했다. 유물들은 사진 촬영이 허락되지 않았다. 필자는 1995년도에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여기는 개성에 비해 유물이 많았지만 박물관의 모습은 1995년에 비해 별로 변하는 것이 없어 보였다. 여기에 고려시대 불화나 사경 작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여기에서도 역시 없었다. 고려시대 유물을 전시해 놓은 곳에 고려사경 복사 작품을이 딱 한 점 걸려있었는데 안내하는 강사가 설명없이 그냥 지나치기에 필자가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여기에서 안내하는 강사는 그저 고려사경이라는 정도 밖에 알지 못했다. 고려불화와 고려 사경에 대해 물었지만 우리를 안내하는 안개 강사는 알지못했다. 아마 지하에는 있을지 모른다는 말에 위안을 받을수 밖에 없었다. 북한의 고려불화와 고려사경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면 이 박물관의 좀더 높은 관리자나 역사학자들에게 물어야 할 것 같았다. 고려 수도였던 개성이 있는 북한에 고려시대, 나아가 고조선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남북한 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인 고려불화와 고려 사경 작품이 없다면 그것은 너무 슬픈 일이다.
필자는 이번 순례가 단지 사찰을 방문하는 것 뿐만 아니라 북한의 고려불화와 고려사경의 실태를 대강이라도 파악하고 싶었다. 그래서 미국에서 이 작품들을 전시하여 소개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구상은 어렵게 되었다.
다음 날에는 북한의 대표적 사찰인 보현사를 순례하기 위해 묘향산을 갈 예정이다. 지난 여름에 북한에 비가 많이 내려 묘향산으로 가는 도로가 문제가 많이 생겨 평양에서는 갈 수 없다고 한다. 비행기에서 만나 미국인 그룹도 묘향산을 가지 못한다고 하는데 우리 그룹은 특별히 평양에서 묘향산까지 가는 고속도로가 아닌 지방도로로 돌아가도록 배려해 준다고 한다. 대신 시간은 많이 걸린다고 하였다.
내일은 북한의 대표적 사찰인 묘향산을 가는 것이다. 2005년 처음 인사를 나눈 최형민 스님이 살아계시는지 궁금하였다. (계속)
2005년 순례. 용화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