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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광. 오마이뉴스에서 |
구조의 골든타임을 허무하게 보내버리고도 수장된 실종자들 수색 수습에도 우왕좌왕만 할 뿐이었다. 결정적인 수색 수습의 다이빙벨 투입을 놓고도 이해할 수 없는 오락가락을 번복하다가 결국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메이저 방송사들을 통해 시선을 그 바다로부터 옮겨 선박회사인 ‘청해진 해운’과 그 경영진에다 맞췄다. 해운사와 깊이 관여된 이른바 ‘구원파’라고 알려진 종교단체는 ‘한국복음침례회’였고, 교단의 대표인 ‘유병언’씨 ‘몰이’에만 초점을 맞춰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마음만 조린 채 팽목항으로 달려 가보지도 못하고 연일 유병언 몰이 방송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몇 개월이 흐르는 동안 유가족들은 진도 팽목항에서 상경하여 국회 앞으로 청와대 앞으로 다가갔다.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 호소하고 국가 원수인 대통령을 만나겠다고 올라 온 것이었다. 많은 국민들이 슬퍼하고 답답해하였고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에 돌입한 유가족들의 원통함에 공감하였고, 지방마다 세월호 단식 농성장이 생겨나고 거리마다 노랑리본의 물결을 이루었다.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라며 500만 명 이상의 자발적 서명운동도 일었다.
유가족 중 ‘유민아빠’로 불리는 김영오씨의 단식이 30일이 넘어서고 38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온 국민이 시청하는 TV 화면에 마른 풀대처럼 야윈 몰골로 비척거리며 지팡이에 의지해 청와대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대통령님 제발 만나주세요.’라는 간절한 호소를 안고 청와대 앞까지 갔으나, 아무런 응답도 듣지 못한 채 경호직원들 벽에 막혀 발길을 돌렸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쓰러졌고 병원으로 응급 후송되었으나 단식은 중단하지 않고 있다는 소식... 자신의 한 목숨 던져 진실을 찾겠다는 일념에 찬 단식과 이를 어떻게든 중단시키기겠다는 끈질긴 회유들,,, 게다가 그의 개인사를 헤집고 폄훼하는 소리들이 난무하였다.
결국 김영오씨는 46일 만에 단식을 중단했다. 정치권은 그동안 정점으로 치닫던 ‘진실규명’요구에 절절매다가 김영오가 단식을 중단하자 하루아침에 태도가 돌변하였다.
2.
광주의 한 절친한 동지목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영오씨가 쓰러졌는데 어떻게 목사들이라도 올라가 몸을 던질 곳을 찾자며 12명의 자원자를 모은다는 거다. 나는 흔쾌히 응낙했다. 주일 다음날 8월 25일 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웬 늦여름 장대비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와중에 대충 짐을 꾸려 나섰다. 광화문 국민 단식장에 가는 걸음이라 일단 일주일 정도나 늦어도 2주간 쯤 단식할 각오로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엔 멀쩡한 날씨로 뜨거운 햇빛에 숨이 컥컥 막혔고, 도착한 광화문 국민 단식장 천막촌은 노랑색 물결과 사람들로 북적였다. 천막 부스마다 연극 영화인방, 정의당방, 작가모임방, 학부모 모임방, 종교인방 등 다방면의 소속 단체별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가 찾은 곳은 종교인 부스였는데 세 개의 천막을 길게 터서 기독교, 불교, 원불교가 함께 쓰고 있었다. 천주교 측은 정의구현사제단 중심으로 아예 독립적으로 세종대왕 좌상 앞으로 천막을 따로 치고 있었고, 통합진보당도 천막촌과 천주교 측 중간 쯤 지하 내려가는 곳 입구에 자리를 잡고 천막 없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청주의 김창규 목사의 환영을 받으며 붙박이 최헌국 목사 등 몇몇 목사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조금 있으니 광주의 김희용 목사, 나주의 김병균 목사, 강진의 홍요한 목사가 도착하였고, 근처와 서울의 양재성, 이승철, 정태효, 조헌정, 이적, 김희헌 목사와 원로 조화순 목사까지 12명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 모였다. ‘12사도 행동단’을 제안한 김창규 목사는 6월 항쟁 때의 국민적 항쟁을 일으키기 위해 작은 밑불이 되자고 제안했고, ‘기장’ 교단본부에서 보라색 로만칼라 셔츠를 12벌 준비해 왔다.
바로 옆 부스에는 문재인 의원이 김영오씨의 단식을 만류하러 찾아 왔다가 단식에 합류하며 일 주일여를, 다른 정청래 의원도 문 의원보다 이틀 뒤인 21일부터 단식의 대열에 벌써 참여하고 있었다. 또 우리 부스의 한 쪽 구석에는 팔순의 원로이신 전 의원 김병오 선생도 역시 3일째 앞서서 진행하고 계셨다. 이곳 국민 단식장 천막촌에는 주로 하루단식이 많았고, 3일, 5일 등 스스로 일정을 정하여 가슴에 몇 일째 날 표시를 달고 다녔다. 이렇게 많은 단기단식 참여자들 중 장기단식 참여자가 간간 부스마다 몇 명씩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사흘째 되는 날 오전 방인성 목사가 우리 천막으로 들어왔다. 방 목사는 40일간 단식을 작정하고 나왔다고 하였다. 개인적이라기보다 이미 세월호 관련 대책기구의 중심에서 활동한 바 있는 방 목사는, 김영오씨 쓰러진 이후 대신 할 종단별 장기단식 논의가 있었는데 타 종단에는 자원자가 없었고 기독교 측에서 불쑥 자원하여 오늘 들어오게 되었다는 거였다. 방 목사는 나와는 구 면식이 있어 친근한 관계였지만 김창규 목사는 첫 인사를 나눴다. 방 목사도 김 목사의 권유에 함께 보라색 로만칼라 셔츠를 입기로 했다.
우리 12사도 행동단은 첫 주간이 지나면서 제 역할을 찾지 못하고 개별화되어 갔다. 주말쯤 되니 하나 둘 자신의 교회로 돌아가고 먼 지방인 관계로 매 주일을 지내고 다시 오는 것이 간단치 않는 사정이었다. 명색이 자원 단장격인 김창규 목사만 열정과 책임감에 주말 청주 시무교회로 갔다가 다음날이면 서둘러 올라왔다. 우리가 공동행동을 하기로 해 움직인 건 동부시립병원에 입원해 있는 김영오씨 위로방문 이었고, 팽목항에서 과로로 쓰러진 문명수 목사를 문병 차 현대아산 병원에 방문한 일이었다.
우리 종교인 천막 부스에는 기독교 측 2,0 목회자 모임의 목사들 몇몇이 자주 드나들었고, 내가 주로 함께 활동하는 에큐메니칼 목회자들도 몇몇 찾아왔다. 기독교 측은 다소 많은 편인데 비해 불교 측과 원불교는 좀 뜸하였다. 그런데 한 주간 정도 지나자 원불교 측은 조직적으로 교무들이 순번으로 참가하는 모습이 눈에 띠었다. 천도교도 적혀 있었지만 거의 볼 수 없었다. 8월이 다 기울었지만 여름 불볕더위 위세는 대단했다.
3.
방인성 목사는 나보다 이틀 뒤인 8월 27일 들어왔다. 그리고 이튿날 28일에 우리는 김영오씨가 병원서 단식 46일 만에 단식을 중단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다행이었고 방인성목사가 40일 단식을 이어가는 게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절묘했다. 이날 더욱 흥미로운 건 방 목사의 60회 회갑 생일을 맞은 날이었다. 방 목사는 ‘회갑 선물치고 너무 감격스런 선물을 유민아빠로부터 받은 거다.’며 기뻐했다. 한편 방 목사의 주변 지인들은 이날 급조하여 단식장 부스 방에 모여 조촐한 회갑 감사예배를 준비하여 함께 했다. 이정배 교수는 격정적인 설교를 통해 은혜의 자리로 이끌었고, 원로 조화순 목사는 방목사와 나의 두 손을 꼭 잡은 채 사랑과 눈물의 축복기도를 빌어 주었다. 8순을 넘긴 조 목사는 단식에 함께하지 못하는 마음을 너무 미안해하시면서 매일 찾아와 곁을 지켜주며 함께 기도하시겠다고 다짐하셨다.
다음날 단식 5일째 되는 이날 나는 방 목사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40일간의 먼 마라톤 코스에 외롭고 힘들 터인데 내가 동행하며 같이 뛰어도 되겠느냐고... 방 목사는 여부가 있느냐며 너무 고맙다고 반색하면서도 걱정스럽고 미안스러워 했다. 그리고 원래 마라톤 레이스에 ‘페이스메이커’가 있는데 ‘김 목사가 페이스메이커가 되는 거다.’며, 페이스메이커가 선수보다 앞서는 적도 있다고 했다. 우리는 손을 꼭 잡고 눈물과 애통에 잠겨있는 유가족의 아픔에 동참하고, 유가족이 원하는 세월호 특별법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기도의 동행을 약속했다. 김창규 목사는 주일은 청주의 교회에 내려갔다가 다음날 곧장 올라와 우리 둘의 곁을 함께했다. 다른 열 명의 행동단원이 미안해하는 마음을 대신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나는 일주일간이나 늦어도 2주 안에는 마치고 부산으로 내려가려 했었는데, 마음에 오는 어떤 움직임이 처음 올 때 계획을 밀어버 렸다. 부산의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 ‘부활의집’에는 연약한 형제들 6명이 나만 보고 추석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그 작은 형제들을 제치고 더 우선해야 하는 비중이 세월호 기도 단식에 있다는 걸까? 그 날 나에겐 고민과 갈등이 다시 밀려왔다. ‘부활의집’은 상경하는 날부터 엄청난 집중호우가 쏟아져 집 뒤편 높은 공원의 토사가 밀려 내려온 사태가 벌어졌다고 소식이 왔었다. 공원, 구청, 소방서 등에서 찾아오고 식구들은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는 모습이 선하였다.
아, 세월호에 희생당한 304명 통한의 영혼들이 구천에 떠도는데... 그 생때같은 소년소녀 260여명이 엄마아빠 부르면서 버둥거리다가 뜨거운 피 토하지도 못하고 숨 앗겨갔는데... 건국 이래 이런 애통하고 참혹한 역사가 있었던가? 대한민국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 중 그 어떤 슬픈 사연을 안고 사는 사람이라도 비켜갈 수 있단 말인가? ‘부활의집’의 지극히 작은 자들이여, 그대들의 아픈 생을 잠시 양보해 다오! 오늘은 십자가의 예수가 그대들로부터 나와 진도 앞바다에 수장되었으니 나 그 예수를 뵈러 가리라! 21세기 반 조각 조국 대한민국에 이렇게 오신 예수를 나 만나리라! 그리고 물어보리라!
아, 우리 대한민국이 그 짧은 반세기 만에 정녕 부자가 되었단 말인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으로 부상한 놀라운 성장으로서 배고픔과 헐벗음으로부터 벗어났으니 그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과연 ‘세월호’와 ‘청해진 해운’은 대한민국의 축약판이었다.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야수가 되어버린 ‘졸부’ 대한민국이었다. 일찍이 예수가 묻기를 ‘하느님을 택할 건가 재물을 택할 건가’ 했었는데, 우린 이미 재물을 택하였다. 진실이요 정의요 생명인 하느님보다 물신인 자본을 택하였다. 잠시 진리와 양심과 도덕을 덮어두고 이익과 국익을 택했다. 그래서 저 ‘청해진 해운’처럼 자본과 종교와 권력이 환상의 삼합을 이루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평범한 대한민국의 국민이었다. 열심히 일하여 가족과 함께 단란한 행복을 누리고 싶은 민중이었다. 이렇게 자본주의 세상이 천박하게 폭삭 내려앉아버린 대한민국에, 왜 하필 그들이 선택되어 그 목숨 그 아깝기 그지없는 아이들의 생명까지 제단위에 바쳐야 했을까? 결코 원하지도 않았던 순박하기 그지없는 민중들과 그들의 새순 같은 아이들이 왜 그 추악한 죄의 짐을 져야한단 말인가?
자본과 종교와 권력이 영악하게도 민중들을 착취하고 마취시키며 갈취해도 몰랐다. 민중은 약육강식과 무한경쟁에 내몰렸고 먹이사슬에 꽁꽁 묶여서 구조화되어버린 세상을 만들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동조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민중으로서 미안함을 너머 깊은 죄의식과 공황에 헤매고 있다. 한때 깨어있는 양심들이 민주주의와 정의평화를 위해 저항하다 고난을 받았으나, 달콤한 권력과 자본의 유혹에 재갈이 물려져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아, 참으로 원통한 역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4.
광화문 국민단식장 천막 곁 분수대에서 뿜어대는 물줄기는 복사열을 식혀주는 대는 역부족이었다. 낮에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지만 점점 세월호 방문객들이 늘어났다. 늦은 오후가 되면 퇴근하는 직장인들이나 일부러 나오는 일일 단식 참가자들로 북적인다. 부산에서 무명 목사로 올라 온 나에게는 방문 손님이 거의 없지만, 방 목사와 김 목사에겐 점점 손님들이 늘어갔다. 밤이 되면 그나마 더위는 좀 누그러졌는데 천막 옆을 바짝 붙어 달리는 차량들의 질주가 장난이 아니었다. 바닥이 흔들리는 진동과 소음이며 게다가 간간 대형 차량이 지나가면 천막이 쓰러질 정도로 출렁거림이 컸다.
격려, 응원, 위로, 미안한 마음으로 연대 차 찾아오는 방문 손님 가운데는, 생수 물을 포장 박스채로 사 오 시는 분이나 죽염 등 좋은 소금이라면서 사 오시는 분도 있었다. 어떤 분은 책도 사 오시고 작은 화분을 들고 온 분도 있다. 며칠 째 되는 날이었을까, 우리 동료 목사 중 농촌목회에서 ‘생명목회’라는 차원으로 진화한 차흥도 목사가 찾아왔다. 차 목사는 단식에대해서 나름 대가였는데 우리 두 목사에게 장기단식에는 효소가 필요하다며 권한다. 자신이 생산하는 ‘생야초 효소’였는데 그냥 대 주겠다는 거였다. 우린 전문가의 고마운 제의를 받아들이고 물에 조금씩 타서 음용하기로 했다.
나와 방 목사는 그 험난한 환경에서 일주일 여가 지났는데도 아주 적응이 잘 되었다. 낮의 그 뙤약볕 더위와 북적이는 인파와 손님들, 그리고 밤의 엄청난 진동과 소음과 매연 그리고 넘어질듯 한 천막의 휘청거림이 잠자리를 위협했지만 평온한 잠을 잤다. 스스로 생각해도 좀 이상하다 여길 정도로... 마치 성경의 말씀처럼 암탉의 포근한 날개 아래처럼 품어 주는 그런 느낌이랄까? 우리 둘은 똑같이 경험한 이 묘한 은혜를 이야기 나누기도 하였다.
동조단식 형식이고 또 ‘페이스메이커’로 함께하는 40여 일간의 단식이, 내 생애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엄청난 사건인데 이렇게 예상 밖에 이끌릴 줄은 몰랐다. 내 신앙적 유년시절부터 금식이라는 건 무척이나 많이 했었지만, 주로 7일간을 일체 물은커녕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는 고요한 산중 홀로금식이었다. 그런데 이런 악조건 환경에서 거의 죽음을 불사하는 장기간의 사실상의 금식이 가능할 건가? 사람들은 방 목사의 페이스메이커로 가는 내게도 완주할건가에 관심을 갖고 묻기도 했다. 나는 뭐라 딱히 말하기도 그렇고 해서 ‘주님의 인도하심에 맡기고 그냥 가기로 했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고 두 주간이 차가는데도 기운만 조금씩 깔릴 뿐 몸과 마음은 너무도 평온하고 안정적이었다. 단식장 건너편에는 119 응급구조대가 있었고 일주일 정도가 지나는 시점부터는 청년한의사협회에서 자원진료단 한분씩 매일 와서 기본건강 체크를 하였다. 단식장 내에는 우리를 포함한 10여명의 장기단식자가 있었다. 우리보다 앞선 문재인 의원은 내가 나흘째 되던 날 10일간의 단식을 접고 돌아가면서, 같은 부산서 온 내게 들러서 ‘고생하신다’며 ‘건강하길 바란다’고 인사하고 떠났다. 그가 돌아 간 후 ‘새민련’에서는 하루 두 명의 의원이 돌아가면서 릴레이 단식으로 이어갔다.
우리는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월호법 정국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고 방문객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특별한 개인기도 시간을 가질만한 상황이 못 되었지만 아침에 일어나 사람들이 없는 잠시 묵상에 잠기곤 했다. 손에 잡힐 듯이 보이는 청와대를 바라보고 간절히 만나주기를 요청하는 유가족들의 안타까운 마음과, 두려움과 완악함에 휩싸여 모르쇠로 문을 닫고 있는 대통령과, 세월호의 정국에 두 갈래로 갈라져 소모적이고 허망한 세월만 보내고 있는 국민들을 향해, 정의롭고 자애로우신 하늘 아버지께 마음 깊은 곳의 간청을 올릴 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종교인 단식장 천막에는 우리 두 목사가 자리를 잡고 중심을 잡자, 에큐메니칼 권의 본가인 KNCC 총무와 정평위 소속 목사들, 최근 결성된 ‘민주쟁취 기독인연대’와 기장 교단을 비롯한 몇몇 교단 관계자들, 목정평, 예수살기, 생명평화마당, 여민목 등 수없이 많은 단체나 개인들이 찾아왔다. 방 목사가 주로 활동하던 복음주의권 단체나 교회의 목회자 일꾼은 물론 교인들의 방문도 종일 이어졌다. 특히 눈에 띈 점은 2.0 목회자 모임과 성결교단 목회자 모임인 ‘성결행동’의 조직적 참가였다.
한편 특이하게도 아랍권이나 인도에 선교사로 헌신하던 분들이 가족단위로 찾아와 1박 단식까지 하거나, 유럽권이나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목회하거나 사업하는 이민 동포들이 찾아와 깊은 연대를 함께 하는 감동적인 자리였다. 세월호는 국내와 해외를 막론하고 오프라인이나 온라인, 직업이나 어떤 사회적 신분을 떠나서 국가 중심적 사고와 국민(민중) 중심적 사고의 구별을 짓는 사건이었다. 즉, 국익과 국가안보와 국가경제를 중요시하고 특수한 안보상황과 그것을 위해 국민은 양보해야 한다는 층과, 사람의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 공동체의 소통과 믿음, 정의와 진실에 국가는 복무해야 한다는 층이 나뉘는 역사적 정점이었다.
5.
온 나라를 들썩이는 ‘세월호 특별법’ 정국은 결국 이른바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된 법으로 제정되게 하느냐 여부에 첨예하게 맞붙어 있었다. 우리 단식천막에는 굵직한 야권 인사와 ‘새민련’ 국회의원들이 많이 들렀다 갔다. 한명숙 전 총리와 한완상 전 부총리, 조희연 교육감이 찾아왔다.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이자 현 교육감은 몇 차례나 왔었고, 이학연 의원은 자주 들렀다. 하지만 철면피 여당을 상대하는데 거대 야당이 너무 무력하다고 불만이 높다. 뉴스를 통해 여당과 협상권을 쥔 박영선 의원이 두 번이나 헛발질 한 보도는, ‘세월호 특별법’에 열망을 갖고 울부짖고 있는 유족과 국민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 줄 뿐이었다.
우리가 단식장에 들어설 때 천주교는 따로 광화문 광장 앞쪽으로 나아가 세종대왕 좌상 앞에 이미 별도의 천막을 쳤다. 엄청난 경찰의 경계를 뚫고 자리를 잡은 사제단 중심의 천주교 천막은 매일 저녁 상당한 규모의 미사집회를 열고 있었다. 열 댓 명의 신부님들이 강렬한 뙤약볕 아래 천막 안에서 이미 일주일 여 앞서 단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어느 날 갑자기 천막을 자진 철거하고 물러가 버렸다. 참 궁금한 일이었다. 며칠 뒤 통진당 단식농성장도 자진 철수하였다. 결국 세게나간 두 곳은 없어지고 청운동 주민센터 마당에 자리 잡은 유가족들과 이곳 광화문 단식천막 부스 촌만 남게 되었다. 다행히도 기독교 측이 청운동 주민센터 맞은편 보도에서 매일저녁 기도회를 열고 있었으며, 광화문 단식장에는 국민대책위가 문화마당을 이어가고 있었다.
불교 측은 조직적인 참여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마침 내가 들어온 다음 날 불교계 유명한 도법 스님 이 몇 명의 일행과 함께 우리에게 들렀는데, 세월호법 제정을 두고 한판 촌각을 다투는 현장에 와서 ‘지리산 실상사에서 긴 호흡으로 일천일 기도제단을 쌓기로 했다’며 우리와 이견을 확인만 한 채 돌아 갔다. 이 후 몇몇 스님과 비구니 스님 여럿이 간간 들르는 가운데, 한 비구니 원정 스님이라는 분은 매일 저녁 꼬박꼬박 들러서 우리 두 목사의 손과 팔과 등을 쓰다듬으면서 이른바 ‘기(氣 )치료’를 해 주었다. 흡사 기독교의 ‘안찰기도’와 비슷하였는데 치료도 치료지만 이웃 종교인 간의 정겨운 모습에 사람들의 이목을 이끌기도 했다.
불교와 달리 원불교는 달랐다. 천주교와 비슷한 종단 위계질서의 특성도 그렇지만 정갈하고 품격을 내뿜는 남녀 교무들의 행동이 자못 모범적이었다. 조용히 그리고 배려와 겸손함이 배어있는 지도자들과 신도들의 품행이 돋보여 부럽기도 했다. 그 특이한 여운이 긴 종소리와 경건하고 예스러운 주문기도가 끝나면 주변 인사와 명랑한 대인관계가 열린 모습의 종교임을 보여줬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나 기독교나 천주교에 비해 규모가 비교되지 않게 군소 종단이지만, 대 사회적 참여와 종교간 대화 등에도 적극적인 편으로 알려졌다.
자고로 종교란 종교를 따르는 자들 곧 지도자들과 신도들의 모습이 그 종교를 말해준다. 종교의 가르침과 교리의 심오함이 아무리 하늘을 찌른다 하여도, 그것을 믿고 전파하는 자들의 품성과 언행이 세상의 뭇 대중들에게 존경을 받을 만하지 못하다면 종교의 참 가치를 잃었다 할 것이다. 명색이 기독교란 종교의 지도자로 지칭 받는 목사인 나로서 오늘날 땅 바닥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기독교를 생각한다면, 오늘 우리가 목숨을 내 놓고 대한민국에 정의와 진실을 찾아 바로 세우겠다고 기도하며 몸부림하는 운동이 부끄럽고 면목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우리의 단식은 금식이 되어야 하며 그 금식은 옛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의 실천운동이어야 한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주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를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는 것이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다.”
6.
방 목사의 회갑생일 감사예배에 참석하시어 뜨거운 감동으로 마지막 축복의 기도를 두 목사의 손을 꼭 잡고 해 주시던 조화순 목사님은, 매일 아침 빠짐없이 나오셔서 유니폼으로 삼은 보라색 로만칼라 셔츠를 꼭 갈아입으시고 종일 나란히 함께 해 주셨다. 사랑하는 후배 목사들이 이렇게 십자가를 지는데 같이하고 싶지만, 하루 한 끼 살이라도 해서 곁을 지켜주시겠다는 거다. 팔순이 넘으신 조 목사님은 이미 60년대부터 여성 노동자 운동과, 박정희 유신권력에 맞서 싸우다 모진 고문을 받으셨던 전설의 여 전사셨다. 원로 목사 중 유독 조 목사님만이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현장의 한 가운데 언제나 찾아 나오시는 분이시다.
나보다 며칠 앞서 단식하던 김병오 선생 역시 올해 80세의 고령임에도 견딜 수 있을 때까지 단식하신다며 혼자 조용히 구석에 자리를 하고 있었다. 처음엔 누군가 했었는데 며칠 지나며 인사하다보니 예전 11대와 14대 국회의원을 지낸 분이셨다. 아들이 광화문 광장 바로 옆 빌딩에서 변호사로 일하면서 퇴근길이면 매일 들렀는데, 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하고 만류하기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선생은 결국 20여일 만에 단식을 접고 돌아가시며 우리 두 목사에게 너무 미안해 하셨다. 참으로 자신을 감추시고 겸손히 당신의 자리만을 지키시는 어른을 뵈면서, ‘아 나도 저렇게 용기 있게 늙어 갈 수 있을까’하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방 목사와 나는 손님들이 없는 이른 아침이나 간간의 틈나는 대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린 너무도 대조적인 환경에서 목사로 살아왔었다. 방 목사는 오랜 영국 유학생활과 현지목회를 하다가 귀국하여서도 교회개혁에 꾸준히 사역해 오면서 익히 교계에 앨리트 개혁가로 알려진 반면, 난 그저 부산에만 콕 박혀 바닥으로만 기면서 맨몸으로 노숙자와 부대껴온 3류 목사일 뿐이다. 우린 누군가 갖다 준 좁은 텐트 안에서 몸을 부비며 마음도 열고 정도 들었다. 그리고 세월호와 온 국민이 함께 우는 광화문 광장에서 평생에 운명에 없던 40일 광야 단식으로 의형제를 맺기로 했다.
방 목사와 나는 점점 기운이 많이 가라앉았다. 광장 지하에 있는 화장실에 용변과 세면을 해결하고자 오가는 걸음이 흐느적거렸다. 우린 몇 번인가 화장실 장애인 칸에 들어가 걸어 잠그고 물수건으로 몸이나 닦고 있었는데, 어떤 여성 해직교사 한분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오피스텔이 낮에 비어있으니 마음껏 이용하시라고 하였다. 서로 면식도 없는 분이었지만 자신의 사적 공간을 기꺼이 개방하시겠다는 마음이 너무도 고마웠으나, 여러모로 생각해 본 결과 순수한 마음을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현실을 감안해야만 했다. 이런 사실을 알아차린 지인과 기장교단 감리교단 등에서 찾아와 금일봉을 내 밀면서 사우나를 이용하라고 강권하였다. 마침 그 오피스텔 부근 세종문화회관 뒤편 대중사우나 하나가 있는 걸 발견하고 이틀에 한번 아침에 나란히 다니기로 했다.
기어코 9월 8일, 한가위 추석날이 다가왔다. 대통령과 정치권은 끝내 유가족들에게 거리에서 추석을 맞이하게 했다. 단 한번이라도 만나주고 귀 기울여 답답한 사정을 들어만 주었더라면, 그리고 말이라도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하면서 집에 명절 쇠러 며칠이라도 다녀오시라고 위로 했더라면, 유가족들의 얼었던 마음이 조금이라도 녹지는 않았을까? 참 표독스러운 대통령이요 뻔뻔스러운 정치인들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서양에서는 전장에서도 성탄일은 서로 총성을 멈추고 축제를 즐겼다는데, 우린 민족 최대의 명절날 보름달 같은 미덕을 내 팽개치고 뭐를 얻으려 한다는 말인가? 정말 원통하고 가슴 아픈 역사의 바닥이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25년 동안 한 번도 공동체 가족들과 떨어져 명절을 보내본 적이 없었는데 결국 못 내려갔다. 형제들은 아버지 없는 집에서도 의연히 명절 시장도 보고 합동차례상도 잘 차렸으며 모여 차례도 잘 지냈다고 카톡으로 사진을 올려줬다. 참으로 미안하기도 했고 대견스럽기도 했다. 나는 자랑스럽게 방 목사에게 사진들을 보여주며 으슥거렸지만 마음 한편은 아렸다. 대한민국 온 국민들이 고향과 가족을 찾아가건만, 갈 곳이 없는 버림받은 형제들을 어루만지지 못하고 만 것이다. 오후엔 예 전 TV에서만 보았던 김영오씨가 그 차림 그 야윈 모습으로 지팡이를 의지한 채 광장을 찾아 왔다. 우리 둘이 있는 방도 들 러 미안하고 고맙다고 머리 숙이신다. 저녁 땐 어디선가 400인분의 음식을 잔뜩 준비 해 와서 추석날의 광화문 광장을 풍성하고 외롭지 않게 위로하여 줬다. 참으로 고마 운 손길들이다.
7.
추석연휴 마지막 날 흥미로운 일이 생겼다. 방 목사를 아는 J 목사가 찾아와 조용하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였단다. 그가 방 목사의 40일 단식을 두고 3일간 금식 기도를 했는데 ‘21일 만 하고 그만하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했단다. 반드시 방 목사를 만나서 직접 알리고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사람들을 동원해 강제로라도 이동조치 하라는 행동지침까지 주셨다는 거였다.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들었는데, ‘첫째는 긴 싸움이니 몸을 상하지 말라. 둘째는 40일 목표를 중단하는 게 하나님께 영광이다. 셋째는 21일은 어미닭이 알을 품고 부화시키는 기간이니 21일을 넘겨서는 안된다’는 거란다. 방 목사는 여러 단위들과 협의해서 시작한 거니 기도와 협의한 단위와 재 의논이 필요하다고 답했으나, 한편 일리 있어 보이기는 한데 정녕 하나님의 음성일까에 약간의 의구심도 든단다. 그리고 간간 방 목사의 건강과 더 역동적인 사역을 생각해 중단 권면이 있었고 들을 때 마다 마음이 불편한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J 목사는 거의 매일저녁 쯤 이면 찾아와 일행과 함께 멀찍이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 그였지만 정말 애정을 가지고 진정성으로 다가온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이른바 기독교권의 기도원 등에서 예언은사를 한다고 하는 ‘광신파’는 아니었다. 게다가 J 목사는 한 기독교의사선교단체의 회장이라는 가정의학과 조계성 원장을 직접 모시고 와서 매일 아침 건강체크를 별도로 하자고 적극 제안하였다. 그래서 방 목사와 나는 저녁에 매일 오는 기존 한의사협회 회원 원장들의 건강체크와 아울러 하루 두 번을 검진 받게 된 셈이 되었다. 그리고 의사가 생명에 위험하다고 중단을 요구할 시는 그때는 따르겠다고 방 목사는 약속했다. 방 목사는 10여 년 전에 교인 한분한테 자신의 신장 하나를 떼서 준 사건이 기독교계에 화제가 되었기에, 그를 아끼는 많은 분들이 이번 40일 단식을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던 차였다.
우리는 처음엔 물만 마시기로 했었는데 주위의 전문가 권면에 ‘생야초 효소’와 ‘죽염’ 등을 조금씩 첨가하기로 했다. 그런데 10일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면서 방 목사와 나의 체질이 완연히 다른 것을 느끼게 되었다. 방 목사는 물맛을 예민하게 구별해 내고 결국 생야초 효소도 몸이 받지 않는다며 거절하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 나는 몸의 반응이 무디고 물을 섭취하는 양도 충분했고 생야초 효소도 너무 향기롭고 좋았다. 이미 보름여가 지났건만 몸의 기운만 깔리는 것이지 어딘지 모르게 ‘생기(生氣)’같은 것이 나를 든든히 붙들어 주는 느낌이었다. 아무런 근거 없는 상상이지만 ‘이런 효소는 옛 선인(仙人)이나 도인(道人)들이 산에서 이거로 연명하는 거로구나’하는 생각이 떠오를 정도로 신기했다. 이런 효소를 소량이지만 물에 타서 음용하는 단식은 40일은 물론 70일도 넉넉히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20일쯤 되면서 방 목사는 끝내 효소를 거절하고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주변 의사들이 처방하여 갖고 온 노란 색의 쥬스 같은 액체를 조금씩 음용하도록 했는데 처음에 괜찮다고 받더니 며칠을 못가 그것도 헛구역질이 나서 못 먹겠다고 하였다. 하는 수없이 스포츠 음료로 기성 제품인 ‘포카리스웨트’를 사와서 조금씩 음용해보니 다행히 몸이 받아들였다. 이날저녁 내가 예전 몸담았던 복음교단 후배 김 전도사가 늦은 시각에 도착했다. 멀리 군산에 살면서 서울 신림동의 작은 교회를 맡아 주일마다 올라오는데, 우리 두 목사를 위해 뭔가를 만들어 왔다며 내민다. 100cc 정도의 작은 병에 담긴 투명한 물 같은 액체인데 고농도의 미네랄 성분이란다. 특별한 재주가 있는 만년(晩年) 김 전도사의 뜻밖의 선물을 두고, 우리 둘은 고민 끝에 몇 방울씩 물에 타서 음용하기로 했다.
한의사들의 건강체크에 우리 둘은 특징의 차이가 있었다. 방 목사는 혈압과 당이 낮으면서도 건강을 유지해 온 특이한 체질이었고, 10여 년 동안 신장 하나로도 정말 건강을 잘 유지해 왔었다. 그런데 난 맥박의 횟수가 너무 낮아 한의사들과 조 원장도 놀랐다. 예전에 잘 몰랐던 건데 이런 늦은 맥박은 대단한 운동선수나 도력(道力)을 지닌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맥이라는 거였다. 우린 20여일이 지나면서 혈당이 왜 뇌 활동에 필수 요소인지, 혈압과 맥이 생명을 유지하는 건강체크에 왜 중요한지 등을 몸으로 체득하면서 배울 수 있었다.
J 목사가 말한 21일 기한이 다가 오면서 조 원장도 초조해 지는 모습이었다. 일반 환자가 아닌 단식자를 진료하는 것도 처음이지만 이런 장기간의 단식자들을 주치의로도 처음이기에 더욱 무거웠던 모양이었다. 조 원장은 신실한 신자이면서도 의사의 양심으로 아마 J 목사가 부탁해 왔을 때 ‘21일간 하나님의 음성’ 이야기를 못내 잊을 수 없었을 거였으리라. 하지만 결국 아슬아슬하게도 의학상으로 중단시킬만한 위기는 맞이하지 않았고, 결국 ‘304인 목회자 철야기도회’를 마치면서까지 21일을 넘기고야 말았다.
8.
한편 김창규 목사는 지난 87년 민주화 운동에 온 몸으로 저항운동을 하던 시절을 상기하면서, 지금이 바로 그때처럼 온 국민적 운동으로 나가야 할 때라고 흥분하였다. 그러면서 이곳 광화문에서 300명 기드온의 용사를 일으키자고 제안했다. 이에 방 목사는 오히려 세월호 참사가 난 4월 16일의 416보다 희생자 304명을 기리는 304의 상징성이 더 의미가 있다고 했다. 이런 대화에 나는 광화문 광장의 1박 철야 기도회로 목회자 304명을 모집하자는 구체적 방안을 보탰다. 우리 셋의 이야기는 단박 의기투합이 되었고 희생자 한 명 한 명의 명단을 목에 걸자고... 오늘 한반도의 죄악을 지고 간 희생자 아이들이 오늘의 예수로 고백하는 사건이 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현장에서 뜨겁게 제안된 우리 셋의 이야기는 삽시간에 두루 공명이 되었다. 그래서 주일이 지난 9월 1일 저녁에 20여명의 준비회합이 우리 단식천막에서 이뤄졌다.
우리 단식 현장에서 제안된 ‘304인 목회자 철야기도회’는 마음과 마음으로 공명이 되어 널리 전파되었다. 기존 조직단체와 평신도 리더로부터 약간의 크레임 제기도 없지 않았으나 비교적 은혜롭게 협력과 연대로 이어졌다. 복음주의적 운동성의 교회들과 진보적 성향의 교회가 각각 100명이상 200명이상 참여키로 논의가 끝나자 실무팀들이 꾸려지고 집회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불과 보름 여 만에 전국 방방곡곡에 입에서 입으로 SNS 소통으로 ‘모이자! 모이자! 광화문으로...’하며 서로를 두드렸다.
9월 15일 오후가 되자 각 지역별 교단별 목회자들이 구름떼처럼 모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고 저녁 8시가 되자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좌상 앞에는, 304명을 이미 초과하여 5~6백 명의 목회자와 신도들이 꽉 메워 앉았다. 목회자 대부분은 이미 약속한 대로 흰 가운에 보라색 스톨을 걸쳤다. 그리고 304명의 희생자 이름 하나 하나의 명찰을 목에 걸었다. 내게 온 명찰의 이름은 ‘정원석’이었다. 아마 단원고등학교 남학생인 것 같았다. 명찰을 꼭 쥐고 조용히 속으로 ‘원석아’하고 불러보았다. 뜨거운 눈물이 금시 고인다. ‘아!...’
제단 위에는 투박한 우리식 토기의 성찬용 잔과 그릇들이 나란히 진설되었고, 제단 옆 세워진 나무 십자가에는 노란 리본과 띠로 둘러싸여 있었다. 나와 방 목사는 차가운 밤기운에 담요를 걸치고 앞줄에 앉았다. 여는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광화문 광장을 덮고 있는 뜨거운 기운을 느낀다. 간간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떡과 포도주를 받으러 나오는 긴 행렬들... 그 떡을 받아 포도주에 적셔 입에 넣고 목을 넘기려 할 때, 누구나 하나같이 목이 메었으리라. 그 아이들의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었으리라.
우리 두 목사는 예배 후 여러 동지 목사들에 등 떠밀려 단식천막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광장에 머물렀다. 밤을 꼬박 새워가며 기도하는 304인의 이 시대의 ‘적은 무리 목회자들’이 그나마 눈물겹게 고맙고 감격스러웠다. 강원도 산골에서도 오고 전남의 어느 섬마을에서도 왔다. 충청북도 내륙의 시골에서도 왔고 제주도에서까지도 날아왔다. 모두 한결같이 작은 교회들의 목회자들이었다. 그냥 있을 수 없어서... 함께하고 싶고, 함께 울고 함께 기도하려고 왔을 거다. 우린 그렇게 긴 긴 밤을 보냈고 새 아침을 맞았다. 9월 16일 아침이었다. 세월호가 맞이한 4월 16일로부터 딱 5개월이 지난 그 아침을 맞았다. 아, 추위와 허기진 밤을 지샌 광화문 광장은 후일 ‘통곡의 광장’으로 기억될 것이다.
11시 결단의 예배에 우리 두 목사는 다시 합류하였다. 16시간을 꼬박 지켜준 동지들에게 미안한데 오히려 우리를 염려해 준다. 따스한 가을 햇볕이 간밤의 차가운 바람을 몰아내고 광장을 포근히 감싸주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참가자들은 서로서로를 꼭 안으며 손잡으며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돌아가야만 했다. 눈물짓는 유가족과 우리 두 목사를 남긴 채 가는 걸음들이 못내 아리랑이었으리라. 결코 잊지 말자고... 기어이 특별법을 제정하자고... 다짐하고 가슴에 새기고 맹세했으리라.
9.
고요한 아침 6시 반 즈음, 광화문 광장도 간밤 비가 살짝 내려서 상쾌한 공기가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항상 그렇듯 단식장 천막촌 앞뒤에는 경찰 두 명씩이 배치 되 24시간 지켜 서있다. 방 목사와 나는 의형제를 맺은 후 더 정답게 나란히 사우나를 향하였다. 참으로 행복한 아침나들이다. 우린 처음엔 광화문 광장 대로를 따라 세종문화회관 옆을 끼고 뒤로 가는 길을 걸었다가, 며칠 전부터 광장 사거리 쪽에서 이어지는 뒤 골목길로 가기로 했다. 왜냐면 광장대로를 따라가는 길은 조금 거리는 짧지만 밋밋하여 재미가 없었으나, 뒷골목 길은 이런저런 볼거리와 특히 이른 아침 냄새거리가 잠시나마 우리 예민한 후각을 즐겁게 해 주기 때문이었다.
내가 먼저 방 목사에게 ‘형, 저 칼국수 정말 좋아하는데... ’ 하면, 방 목사는 ‘나두... 진짜 좋아하는데... 만두도...’하며 맞장구친다. 돌아오는 길에 어느 카페 앞을 지나는데 향긋한 커피냄새가 그윽히 코를 자극한다. ‘아우, 야~ 냄새 넘 좋다. 그치.’하면 나도 ‘와~ 쥑이네.’하며 화답한다. 우린 이렇게 애들처럼 천진스럽게 웃기도 하고, 세종문화회관 뒤 쌈지공원 벤치에 앉아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며 정이 깊어졌다. 쌈지공원 가운데에는 벤치에 책 읽는 한 소녀상이 앉아 있는데, 어깨 너머로 책을 보니 고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있지 않은가! 우린 천천히 함께 소리 없이 읽어 내려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그런데 오늘 사우나에서 정말 큰 사고가 날 뻔하였다. 여느 때와 같이 방 목사와 나는 사우나에 들어갔고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들이 좀 있었다. 방 목사도 나도 얼굴과 몸이 많이 빠졌다. 방 목사는 몸을 씻고 먼저 온탕에 들어갔고 나는 먼저 속옷을 빠느라고 온탕을 뒤로하고 의자에 앉아 양치와 머리를 먼저 감은 다음 빨래를 하는 참이었다. 방 목사가 온탕에서 나오면서 나의 옆으로 오려고 하더니 앉기도 전 서있던 자세가 갑자기 풀리면서 순식간에 내 쪽으로 쓰러지는 게 아닌가! 나는 제 빨리 빨래를 놓고 내 쪽으로 떨어지는 머리를 받았다. 방 목사는 한 3초간 눈이 풀렸고 나는 목 뒤를 주무르면서 호흡을 살폈다.
‘형, 괜찮아?’ 마침 바로 방 목사는 눈이 돌아오더니 나를 이상한 듯 쳐다보며 자세를 바로 해 일어났다. 그러고 ‘내가 왜?’ 하길래, ‘방금 쓰러졌어’ 바닥이 대리석인데 천만 다행으로 내 쪽으로 넘어져서 다행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혈압이 낮아진 상태로 온탕에서 혈관이 확장되었기 때문에, 갑자기 일어서서 탕에서 나오면 모세혈관에 혈액이 통과하지 못하는 찰나가 발생하고 그때 의식이 잠시 멎는다는 거였다. 방 목사는 나오면서 의사에게만 상의하고 일체 말하지 말아달라고 한다. 가족이 알면 곤란한 일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 일은 며칠 뒤 결국 다 알려지는 비밀이 되고 말았다. 의료진이 진료일지에 적어놓은 걸 다음 의료진이 와서 보고는 ‘목사님, 목욕탕에서 쓰러지셨어요?’하고 묻는 소릴 곁에서 듣던 사람들로부터 결국 사모님까지 알게 되어버렸다. 이 후로 우리 둘만 사우나에 가는 건 안 된다면서 지정된 당번이 함께 욕탕까지 들어가 씻는 것을 돕고 지켜주기로 대책이 세워졌다. 사실 단식 열흘이 넘어가면서부터 복음주의 권 교회들에서 두 목사님의 잠자리나 생활 도우미를 해야 한다고 논의가 되었고 당번제로 한명씩 매일 단식 장에 파송해 주고 있었다. 특히 이현우 목사는 별도로 거의 매일 잠자리 곁을 지켜줬고, 교회의 새벽기도 인도를 다녀와서도 낮에 일을 보고 와서도 우리 곁을 정성을 다해 지켜주었다.
10.
어느 날 누군가 조용히 두고 간 지팡이 두 개가 천막 귀퉁이에 놓여 있었다. 경북 봉화 깊은 시골서 뿌리가 이어진 나무를 불로 휘어 직접 만든 정성이 깃든 멋진 지팡이였다. 어찌 우리 둘이 휘청거리면서 걷는 걸 알고 이런 걸 다 만들어 준걸까. 참으로 색다른 선물에 마음속 여운이 남는다. 화장실 왕래와 운동은 물론 이틀에 한번 꼭 찾는 이른 아침 사우나를 다녀오는데 제격이었다. 9월 중순에 접어드니 아침저녁이 제법 선선하여졌다. 보라색 로만칼라 셔츠 위로 입으라고 누군가가 같은 보라색으로 스웨터를 선물로 사오셨다. 어떤 교회 청년들은 체온도 떨어지는 것까지 섬세히 챙기면서 검정색 재킷을 일찍 잠든 머리맡에 사다놓고 갔는데, 새 깃털처럼 가볍고 편했다. 내복, 속옷과 수건, 목도리, 손에 꼭 쥐고 기도하는 나무십자가, 전기매트, 침낭, 무릎담요 등 갖가지 마음담은 선물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또 일지 노트에 격려, 응원, 연대의 메시지를 남기고 갔다. 모두 하나같이 세월호 아픔과 분노에 함께하고픈 절절한 마음, 쓰러진 김영오씨의 뒤를 이은 우리 두 목사의 40일간 단식에 함께하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이 배어있는 걸음들이었다.
한편, 우리 단식장 천막촌 건너편에는 극성스런 극우파들이 천막을 치고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고, 매일 커다란 확성기로 우리 쪽을 향해 온갖 비난과 모욕적인 언사를 외쳐대었다. 그 중 ‘일베’(일간베스트) 회원들은 간간 우리 쪽 천막촌을 넘보고 침투해 와서 험악한 욕지거리와 시설물 손괴하는 등의 행동을 저지르곤 했다. 그때마다 우리 쪽 진행요원에 의해 경찰에 넘겨지는 모습이 너무 씁쓸하였다. 남북의 심리전을 그대로 옮긴 축소판과 같았다. 어떤 때는 집단적으로 우리 쪽에 와서 치킨파티를 열기도 하고, 어떤 기독교 단체는 확성기를 단 차량을 동원해 광화문 광장을 빙글빙글 돌며 ‘사탄’ 운운하면서 저주의 말을 서슴지 않고 질러댔다. 아, 정말로 대한민국의 막장을 보는 역사의 현장이 아닌가! 세월호가 가져온 국민 분열현상은 지난 66년간의 우리 국가가 정말 국가인가를 묻고, 현 대통령 말대로 ‘국가 대 개조’의 임계점이 찬 게 아닐까!
단식 26일 째날 아침, 제체기가 연발 나오더니 콧물이 점점 뚝뚝 떨어진다. 감기가 오는 증상인 모양인데 약간 난감이었다. 의료진은 다급하게 감기약을 보내왔지만 나는 일단 안 먹기로 했다. 계속 먹던 찬물 생수를 끓여서 뜨겁게 하여 마시고 했더니 다음날 뚝 떨어졌다. 천만 다행이고 감사했다. 나는 매일 진료진이 올 때마다 혈압과 맥박과 혈당 수치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사우나에 갈 때마다 체중도 체크하여 함께 기록에 남겼다. 31일째 되는 날 9월 24일자를 보니 혈압 112~63, 맥박 46, 혈당은 83이었다. 체중은 61.7㎏ 이었는데 단식 전 평소 76㎏ 정도였으니 14㎏ 이상이 빠진 셈이다. 의료진은 평소 체중에 15㎏ 이상 빠지는 것은 위험수위를 넘기는 거라고 하였다. 20일 이상 단식하는 사람이 단식장 내에는 우리 두 목사만 남았기에 상주하는 소방 119 응급팀은 비상이 걸린 모양이다.
사람들이 처음엔 40일 단식 목표로 들어온 방 목사에게 관심을 갖더니 전혀 함께 할 계획에도 없던 내가 ‘페이스메이커’로 자청해 이틀 앞선 단식기간이 30여일이 되자 내게도 관심이 쏠렸다. 그러니까 방 목사의 40일 끝나는 날이 10월 5일인데 나는 그날이 42일째 되는 날이라 함께 마무리하는 게 당연한 듯 묻는 거였다. 그래서 난 내 의식이 유지되는 한 할 거고 의식이 있는 한 어떤 의학적인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말한 이후로 의료진과 주변에서는 긴장과 불안의 분위기가 드리워졌다. 나는 이번 처음 경험하는 효소단식이 이렇게 장기간 가리란 걸 몰랐다. 효소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 확실히 모르지만 경험상 아주 오래토록 갈 것 같아서, 40일 다음 날부터는 물과 효소와 소금 등 일체의 것을 끊겠다고 하였기에 초긴장을 불러 일으켰다.
안양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는 한미정 원장은 여러 한의사 진료팀원 중 기억에 남는다. 일주일에 두어 번씩 방문해 주는 한 원장은 진료 중 특유한 소탈한 밝은 성격에서인지, 자신이 세월호 이전에는 가족의 행복과 찾아오는 환자들 진료에만 묻혀 사는 평범한 한 사람이었다고 하였다. 특정 종교와 무관한 무종교인이지만 이번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 세상을 좀 더 넓고 깊게 보는 안목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리고 억울하고 아파하는 자와 공감하고 봉사하고 정의감을 공유하는 새로운 인생을 경험하는데 대한 기쁨을 느낀다고 하였다.
특별히 J 목사의 소개로 찾아온 가정의학과 조계성 원장은 신실한 신앙심으로 우리 두 목사에게 성심을 다했다. 조 원장도 세월호 희생자 학생과 같은 또래의 엄마의 심정으로서 마음깊이 공감하며 기도하던 차에, 이렇게 연결되어 광화문 광장까지 나와 두 목사님을 뵈올 줄 몰랐다고 하였다. 장기단식자를 환자 아닌 환자로 처음이라면서 저녁때는 한의사들이 오니 매일 아침 출근하면서 들르겠다고 하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주었다. 조 원장은 매일 검진뿐 아니라 간절한 기도로도 함께했고, 두 번씩이나 혈액과 소변을 채취를 해서 종합검사 데이터를 체크해 주었다.
토요일 밤이 깊어간다. 광화문 단식장엔 주말의 붐비던 저녁문화제도 마치고, 늦은 밤 어둠속에 빌딩 불빛들과 세종로를 질주하는 차들만 요란하다. 오랫동안 광화문 광장 충무공 동상아래 자리를 잡고 있었건만, 정작 충무공 이순신에 대해 그저 그렇게 생각 없이 하루하루 보냈었다. 오늘따라 유달리 서울의 달이 긴 칼에 걸려있어 동상 충무공이지만 쳐다보고 마음의 주파수를 맞춰본다. ‘명량’ 영화를 통해 많이 알려졌듯이 공은 선조 왕으로부터 ‘백의종군’이라는 치욕을 안고서도, “무릇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忠)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하는 것”이라고 한 말이 울려오는 것 같다.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충성’은 국가를 위해 있는 것이지 국민을 위해 의미가 있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어 왔다. 국민이 곧 국가이지 않는가! 특히나 여기서 국민은 더 아파하고 슬퍼하는 소수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영토나 시스템은 껍질이지 않는가! 물론 껍데기도 알맹이를 위해 중요하고 필수 요소다. 허나 영혼 없는 몸이 그러하듯 국민에 앞설 수는 없다. 마침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했을 때 온 국민은 그의 리더십에 감동했다. 그의 눈길과 가슴 그리고 손길과 발길에서 우리는 열광하고 위로를 받았다. 한편 부끄러웠다. 죽음까지 불사하고 책임감과 희생정신으로 국민을 챙기는 오늘의 이순신이 그립다. 아니, 이젠 누군가가 이순신이 되어야 한다.
11.
9월 27일 오후 5시 시청 광장에서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촉구 국민대회가 열렸다. 방 목사와 나는 다소 먼 거리지만 걸어서 참석하기로 했다. 광장 잔디밭에는 전국 각지에서 참가한 사람 1만 여명이 꽉 차 있었다. 우리기 도착하자 서울뿐 아니라 지방서 오신 분들 중 아는 분들이 알아보며 인사를 해오고 사진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우리 두 목사는 진행팀의 요청으로 단상 뒤편으로 안내 되었고 대회 진행 중 단상에 올라 인사와 발언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방 목사가 대표로 인사말을 하기로 하고 단상에 올랐다. 우린 부축을 받으면서 지팡이를 짚고 올라가 단상 가운데 섰다. 방 목사의 인사말이 시작되었는데 점점 목소리가 커졌다. 은근 걱정스럽기도 했다.
방 목사는 중간 중간 울먹이면서 ‘저희가 34일, 32일 단식하는 동안에 21세기 한국 사회가 어떠한가를 똑똑히 보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야만적이고 비극적인 사회, 약자들이 억압받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어찌 성직자로서 목숨을 내놓고 헌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국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청년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 사회를 바꾸어야 합니다. 진실 규명은 정의를 세우는 일입니다. 정의를 세우는 것은 정직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정직은 진정한 힘입니다. 대통령과 청와대여, 정직하십시오. 새누리당이여, 정직하십시오. 정직이 힘입니다. 정직이 신용입니다. 정직이 축복입니다. 정직이 경제를 살리는 길입니다. 세월호 진실 규명 없이는 경제가 살아나지 않습니다. 속지 마십시오.’하고 외쳤다. 30일 이상을 굶고 어디서 저런 우렁찬 소리가 나는지... 아니, 오늘 저녁이 걱정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방 목사는 끝내 발언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오는데 휘청이면서 주저앉을 뻔 했다.
보름여일 전부터 밤사이 일어나 소변을 해결하러 가는 게 너무 벅차 패트 병 하나를 요강으로 삼았던 터라 아침이면 도우미 후배들이 비워 준다. 가지고 나가는 그것을 보니 둘의 소변 양이 많이 줄었고 색깔도 노란색이 진하다 못해 붉은색에 가깝고 냄새도 고약하다. 도우미 동지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그리고 걷는 게 위험하다고 휠체어 두 대를 준비해 놓고 움직일 때면 의례 밀고 다녀서 환자대우를 받는다. 그리고 낮에는 방 목사와 번갈아 가면서 텐트 안으로 들어가 누워서 휴식을 가지기로 했다. 도우미 동지들이 등 떠밀며 성화를 대기 때문이었다. 오는 내방객들을 30일이 넘도록 맞이하고 이야기 나누고 하는 게 즐겁고 기쁘지만, 저녁이 되면 기진하여 일찍 드러누워 잠을 청해야 했다.
이윽고 10월 3일 개천절, 하늘이 열리는 날 아침이 밝았다. 이날은 나의 단식 40일째 되는 날, 여느 날처럼 우리 둘은 6시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서로 단잠 잘 잤느냐고 인사를 나눴다. 번데기처럼 침낭 속을 빠져 나오면서 잠시 앉은 채로 감사와 오늘 하루의 날을 기도해 본다. 아, 40일을 왔다니... 하늘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설명이 될까? 세월호 가족을 이어 동조단식에 나선 동지 목사의 결사각오 길에 페이스메이커로 함께 뛰겠다는 게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하늘 아버지여, 부활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듯이, 한반도 바닥을 치는 곳 세월호에 오신 예수를 다시 만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죽음으로 부활을 얻듯 40일간의 죽음으로 우리의 몸과 영혼을 새로 만들어 부활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새로이 당신으로부터 받은 몸과 영혼은 세월호 이후의 조국과 교회를 위해 바치는 제물이 되겠습니다. 자본과 거짓에 맞서고 불의한 권력과 평화에 저항하며 싸우겠습니다. 의의싸움, 선한싸움에 평화의 전사로 살겠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버림받은 영혼들과, 억압과 폭력에 고통당하는 자의 자리에 함께하겠습니다. 자애로우신 손 내밀어 주시고 이끌어 주소서. 아멘.’
텐트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밖의 소리가 좀 달랐다. 얼굴을 내밀고 나오니 J 목사와 동행하여 왔었던 한 자매가 너무 아름답고 푸짐한 꽃다발 두 개를 준비해 왔다. 이미 방 목사가 받으면서 여러 주변 사람들의 축하 박수를 받고 있던 차였다. 그 자매는 내가 나오니 나에게도 환한 미소와 우아한 자태로 꽃다발을 안겨준다. 난생 처음 이런 꽃다발이 처음이었다. 또다시 박수가 터지면서 단식 40일 째날, 하늘이 열리며 조국의 탯줄이 끊어지고 첫 울음을 울던 날을 축하했다. 축하를 하고 받는 게 맞는 일인지 모르지만, 아마 모두들 우리 둘을 제단위에 올려놓고 세월호 이후의 국가를 앙망하는 환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오후 늦게 부산서 안현식 교수가 찾아왔다. 안 교수는 교회개혁운동에 열심이어서 부산서 몇 번 뵈었던 분인데 방인성 목사와 나를 만나러 일부러 올라온 모양이었다. 고맙게도 안 교수는 얼마 후면 내가 병원으로 또 부산으로 옮길 터인데 짐들을 꾸려 부치자고 제안해 주었다. 자신이 내려가면서 우리 ‘부활의 집’까지 부쳐 주겠다는 거다. 이런저런 짐들이 많이 늘어 챙겨보니 한 짐이다. 불과 40여일에도 덕지덕지 이런 짐들이 달라붙는데 인생 80평생 얼마나 붙은 게 많겠는가! 출발 한 날은 너무도 간출했었다. 방 목사와 나는 먹는 것도 물밖에 없어 뭘 먹을까 할 거 없고, 입는 것도 한 두 벌로 족해서 너무 좋다고 입을 모았었다. ‘아우, 김 목사~ 우리가 이렇게 씸플하게 살아야 하는데... 그지.’ 그랬었는데 방 목사와 나는 결국 짐이 짐 되고 말았다.
12.
10월에 접어드니 날씨가 제법 쌀쌀해 졌다. 한여름에 올라와 반바지 차림으로 시작했는데 완연한 가을로 들어서니 날씨도 그렇지만, 긴 단식에 체력과 체온이 급격히 떨어져 내의와 점퍼로 무장해도 아침저녁으론 추웠다. 게다가 난 4일 아침부턴 물도 끊고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기에 아침부터 종일 주변에서 걱정이 태산이다. 물이 들어가지 않으니 소변도 안 나온다. 혈압은 아직 이상이 없는데 혈당이 문제였다. 조계성 원장은 이날 토요일이라 아예 이곳으로 출근을 했다. 어제까진 하루 오전 오후 두 번 건강 체크를 했으나 오늘부터 나만 한 시간 간격으로 당 검사를 하겠단다. 조 원장은 당이 70 이하로 떨어지면 뇌로 공급이 안 되어 생명이 위태로울 뿐 아니라, 생명을 구한다 하여도 의식이 중지되는 동안 뇌가 손상을 받아 큰 장애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경고를 한다.
마침 두 번째 방문 온 유민아빠 영오씨가 주치의였던 동부시립병원 이보라 과장과 동행해 도착했다. 이 과장은 나의 ‘절대단식’ 소식을 듣고 아예 포도당 링거를 준비해 왔다. 그리곤 영오씨도 40일째 날 당이 떨어져 의식을 잃어 쓰러졌다고 하면서 위험수치에 다다르면 반드시 링거를 맞아야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두 의사에게 나의 의식과 의지가 있는 한 주사는 받지 않을 것이며, 의식이 꺼진 직후에는 의료진에게 몸을 맡긴다고 하였다. 나의 강경한 입장에 모두들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발만 동동 구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방 목사와 나는 우리를 염려해 찾아와 준 이 과장이 고맙기도 했지만, 오히려 김영오씨의 주치의를 자원해 되받는 언론의 악성 모함과 여당 정치인들의 공격에 대해 염려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회원이기도 한 이 과장의 의연한 자세를 치하하기도 하고 꿋꿋이 이겨나가자고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혹시 동부시립병원에서는 우리가 단식을 끝낸 뒤 그 병원으로 입원할 것으로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녹색병원서 모시겠다는 통보를 받았기에 우린 이 과장의 방문에 약간의 미안함이 있기도 했다.
실은 앞서 광화문 집행부와 여러 번 논의를 가진바있었다. 특히 나의 의식이 혼절되는 순간 어떻게 어디로 옮기느냐가 문제였다. 의식의 불이 꺼진 후 7분~10분이 지나도록 당 공급이 중단되면 심각한 뇌손상을 동반하기에, 일단 포도당 링거를 주사하고 이동하되 어디로 갈 것인가도 중요하였다. 가까운 대형 의료기관들의 응급실은 신속히 도착할 수 있어 응급처치 상 좋지만, 우리의 단식 정신과 공감이 되는 의료기관을 알아본 결과 녹색병원에서 흔쾌히 받아주기로 했다는 거다. 들어본 녹색병원은 각종 민주민생 그리고 평화통일 투쟁현장에서 응급사고가 발생할 시 도맡아 봉사해 온 의료기관 임을 알게 되었다.
이날 우리 둘은 평소보다 좀 늦게 사우나를 찾았다. 단식기간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가장 편안하고 아늑한 시간이다. 두 명의 자원봉사자가 휠체어를 밀고 동행했다. 한 명은 인터넷신문사를 운영하는 김 아무개 대표이시고 다른 한 분은 젊은 임 모 목사였는데,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도와주는 게 너무 고맙기도 미안키도 했다. 목욕탕 안에서도 일거수일투족 근접보호와 앙상하다시피 빠진 우리 둘의 몸까지 씻어주며 안타까워했다. 김창규 목사는 탕 안에 들어와 내 등과 배를 만져보더니 ‘아이고, 등가죽과 뱃가죽이 붙는다더니 정말 붙었네!’ 하며 놀란다. 그 두 봉사자는 우리 둘이 다 씻고 안락의자에 앉아 쉬는 것을 보고야 자신들의 목욕을 하였다. 나는 몸무게가 59킬로로 17킬로나 빠졌는데, 야윈 몰골을 찍어놓고 싶어 주변의 눈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휴대폰에 담았다.
오후에는 고교친구 고 아무개가 부부동반 나란히 나를 찾아 줬다. 친구는 30여일 째 되는 날도 내외가 불쑥 찾아오더니 이날도 일부러 왔단다. 오랫동안 ‘슬로우푸드’나 ‘자연의학’ 운동에서 깊은 소명의식을 가진 친구 부부는, ‘디톡스 건강과 치유’ 방면에 조해와 전문가로 활동해 왔었다. 나와 몇 번 대면과 짧은 대화에서도 서로 관점과 말이 통했다. 사실 추억과 우정의 40여년 고교 동기들 모임에서 그간 쌓아온 우애가 최근 요동을 쳤고 결국 사달이 났었다. 동기들의 카톡방이 ‘서울방’과 ‘부산방’이 따로 있었는데, 내가 세월호 단식에 돌입한 이후 서울방의 동기들이 각을 세우고 ‘왜 나라를 흔드냐?’느니 ‘홍술이 니도 좌경 운동권이었더나?’하며, 급기야는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인하면 아예 북으로 가서 살아라.’ 하더니만 카톡방에서 ‘왕따’도 성에 안차 필경 다른 카톡방을 만들어 모두 나가버리는 사태까지 갔다. 세월호에 공감하고 나에게 조용히 찾아오거나 개인문자로 응원하는 친구는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베이비부머’ 우리세대가 반공수구에 콘크리트라더니 이렇듯 확실히 경험하고 보니 참으로 놀라웠다.
13.
어제 늦은 저녁까지 살피고 귀가한 조 원장이 걱정이 앞서서인지 아침 일찍 도착했다. 절대단식 이틀째 날이라 기운은 급강하였다. 조 원장은 머리맡을 떠나지 않았고 나는 일어나 앉기도 힘겨워 텐트 안에 누워있었다. 일요일 출석하는 교회도 나가지 않고 오늘도 이틀 연이어 종일 우리 두 목사 곁을 지키려는 게 분명했다. 가을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는 우리 천막에는 점점 사람들이 많이 모였고, 누워있는 내가 걱정되어서 인지 들여다보고는 말을 붙이지도 발길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방 목사의 40일이 끝나는 날이라 오늘 오후에 공식적인 결단의 모임인 ‘해단예배’를 의논하고 있었다.
건강상 문제로 일찍 은퇴했던 이필완 목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단 걸음에 내 텐트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다혈질이고 순수파인 이 목사는 다짜고짜로 ‘야, 이 새끼야 너 죽으려고 작정했냐? 아니 걍 죽는 게 아냐 마~ 응!’ 이마에 땀이 송알송알, 눈알은 튀어나올 마냥 부릅뜨고 침을 튀기며 정겨운 욕을 퍼붓는다. ‘홍술아, 나는 뭐니? 넌 죽으려한다면 나는 뭐냐고?’ 급기야 눈물까지 글썽인다. 이 목사는 인터넷 신문 당당뉴스를 창간하고 뜨겁게 한국교회를 향해 일갈하다가, 몸이 상해 소백산 깊은 산골에 묻혀 구사일생의 생명줄을 이어오고 있다. 낙엽처럼 누워있는 나는 득달하는 이 목사의 성화에 작은 목소리로, ‘필완 형, 미안해. 고마워~ 그냥 기도하면서 가야지...’하며 뒷말을 흐리고 말았다.
거의 매일 단식장을 찾아와 저만치 거리에 있다가 조용히 사라지고 했던 J 목사가 조용히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아주 부드러운 톤으로 ‘김 목사님, 진즉 인사 나눴어야 했는데... 나 지승룡이라고 해요. 알고 보니 나와 갑장이고 한데 친구하면 어때?’ 하면서 아주 쿨하게 프로포즈해 왔다. ‘아니, 나 같은 촌놈에게 과분한데요.’하니, ‘친구니깐 편하게 말 놓자고~’하면서 더 가까이 다가선다. ‘그래, 그러지...’ 나는 광화문에서 방 목사를 ‘의형’으로 얻은 후 졸지에 친구까지 생기게 되었다. 그간 방 목사와 주변을 통해 그는 기성 목회자가 아니라 아주 특별한 사역자라고 들었었다. 인간에 대한 심층적이고 폭넓은 관계망을 중심으로 자본의 힘에 저항하는 기업을 꿈꾸는 ‘별종’의 목사임을 차차 알게 되었다.
오후 5시로 예정되어있는 ‘해단예배’가 다가오는 모양이다. 이리저리 준비하는 손길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 같다. 방 목사와 나는 이 예배의 의의를 알고 있던 터라 꼭 같이 참석해야 하는데 도저히 일어날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래서 방 목사만 휠체어에 몸을 싣고 참석하기로 했다. ‘형, 미안해. 갔다 와.’ ‘응, 코앞인데 혼자가기가 그러네.’ 방 목사와 나는 어느새 쌍둥이 같은 단짝이 되어서 혼자는 왠지 허전함이 있었다. 이윽고 예배는 시작 되었고 단식장 마당은 입추의 여지가 없이 많은 인파가 꽉 메웠다. 나는 누웠으나 마음과 귀는 마당에 나가 있었다. 그런데 몸은 그렇지만 마음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마당으로 나가겠다고 도움을 청했다. 여러 손길들이 나를 휠체어에 조심스럽게 태우더니 천천히 예배가 진행되는 마당으로 끌어준다. 마침 방 목사의 발언의 시간이었는데 내가 나오는 모습을 보고 마이크를 건넨다. 나는 겨우 인사말만 한마디 하고 다시 되돌아왔다.
이윽고 예배가 마치자 군중들이 우리 텐트 주위에 많이 몰려왔다. 입으로 귀로 내가 물도 끊고 의식이 꺼질 때까지 간다는 소문이 번졌던 모양이다. 나는 얼마 전 방 목사와 주변 몇 명에게 물을 끊고도 일주일 정도는 가다가 의식의 불이 꺼지지 않겠느냐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이틀째 날이 저물면서 컨디션이 급격히 떨어지는 게 속으로 며칠 더 갈건 지 자신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조용히 방 목사에게만 이틀만 더 있다가 갈 터이니 형이 먼저 가 있으라고 말해 두기도 했다. 이틀간 계속 한 시간 간격으로 혈압과 당 체크를 마음 조리면서 지켜봐온 조 원장님은, 아무래도 오늘 밤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고 오늘은 밤 12시까지는 지켜보겠다고 했다.
어둑해 질 무렵 친구 맺은 지 목사가 다시 조용히 다가온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저- 친구야 있잖아, 지금까지 인성형 곁에서 페이스메이커로 뛰었잖아, 이젠 마라톤 종착지 다 왔어. 낼 새벽이면 42.195야. 거기까지 종주하는 거야. 생각해 봐?’ 하지 않는가! 그래서 난 ‘응, 고마워, 주님의 인도로 가지.’ 라고만 했다. 조 원장은 차차 혈당 지수가 떨어지는 거를 보고 타들어가는 심정인 모양이다. 저녁 6시로 72을 가리키니 다시 링거 수액과 주사를 챙기면서 60대로 내려가면 링거를 맞자고 두 번째 권고한다. 아침 7시에 92로 시작했는데 8시에 84, 그리고 72, 72, 70, 76, 69, 69, 69, 79, 74, 72가 된 거다. 저녁 7시가 되니 기어코 67로 떨어졌다. 괜찮냐고 묻는데 정말 고요하고 편안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죽음의 고개를 넘어갈 때도 이렇게 평화롭게 넘어갔으면...
일반적으로 저녁으로부터 밤을 지나는 기간이 위험한 고비를 맞이할 수 있기에, 의사로서는 어떻게든 안전한 조치를 취하여야 하는데 조 원장은 밤 12시에 발길을 뗄 수 있을지... 침착한 표정 안으로 얼마나 타들어 갈까를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더 밀려온다. 그리고 조 원장에게 ‘걱정하지 마세요. 오히려 밤에 더 당이 보충되면서 올라가던데요?’ 하니, ‘아녜요 목사님, 목사님 체중도 15킬로를 넘어 20킬로 가까이 빠졌고 더 이상 당을 만들어 낼 여지가 없을 거 같애요. 외부 보충 없인 위험하죠.’ 하였다. 또다시 옛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2000년을 맞이하던 어느 날 관속에 들어가 무덤에 묻혀 있을 때,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생명의 요동침’을 경험했던 기억이었다. 그래서 ‘조 원장님, 하느님께서 아마 제 온몸 박박 긁어서 맨들어 주실 거애요.’ 하니, 그냥 헛웃음을 지어 보이신다.
그때였다. 아직도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방 목사가 뒤를 돌아보면서 텐트 옆 자락을 약간 젖히며, 천연덕스럽게 ‘자기야! 그냥 내가 모레까지 같이 있을게~ 혼자 두고 나 혼자 가면 뭐해?’ 하지 않는가. ‘아!’ 내 심장이 잠시 멎는 듯한... 그 어느 누가 타당한 이유로 나를 종용해도 꿈쩍하지도 않았는데, 별안간 무너지는 내 마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40일의 광야를 함께 걸어온 동지요 형이 한 이 한마디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말이었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아냐, 형! 낼 새벽 그냥 같이 가자!’ 하자, 방 목사는 놀란 듯이 ‘아니, 왜 갑자기...?’ 하며 영문도 모른 채 반문한다. ‘그러게... 형 한마디가 넘 고맙네? 낼 새벽이 42.195도 되구.’ ‘뭔 말이야? 42.195는 뭐구?’ 그러자 몇 명은 박수를 치면서 ‘잘 생각 했다.’느니, ‘고맙다’느니 하면서, 순식간 단식장 주변에 모여 염려와 기도로 함께 해 준 많은 사람들에게 퍼졌다.
이렇게 모두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갈 분위기지만 여전히 조 원장만은 조금도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낼 새벽 갈 거면 이 밤 링거를 맞고 자신도 좀 안심하고 돌아갔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런데 혈당이 8시에 69, 9시에 76으로 점차 오르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조 원장은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언제 어떻게 상황이 급변할지 모른다는 의사의 특유한 입장에서 일게다. 10시가 되고 11시 늦은 밤이 되도 천막 안 저쪽에는 수십 명의 신자들이 기도와 성원의 마음을 모으며 밤을 같이 지낼 심산인 것 같다. 10시에 77, 11시에는 87까지나 오르자 조 원장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처럼 의아해 한다. 이윽고 난 12시도 못되어 잠들고 말았고 그 밤은 내게는 그대로 멎어버리고 말았다.
깊고 깊은 잠은 정말 하늘 아버지가 주시는 은혜로운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눈꺼풀 문을 스르르 열고 보니 방 목사는 앉아서 웅크리고 기도인지 묵상에 잠겨있다. 내 침낭 재크 열리는 소리에 ‘어, 괜찮아?’ 한다. 나는 모기소리 정도로 ‘응.’ 하자, 방 목사는 재미있었다는 듯 내게 이야기를 한다. ‘자기 말이야. 나 거의 한숨 못 잤어. 혹시 밤에 어떻게 되지는 않을까 싶어서 보니까 꿈쩍도 않고 숨소리도 안 들리는 거야. 그래서 가까이 가서 손바닥을 코앞에 대 봤다니깐?’ 신난 듯 다시 이야기를 잇는 방 목사는, ‘첨엔 놀랬어! 사람 불러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어?’ 하며, 당 체크 한번 해 보잔다. ‘이거 뭐야? 89가 나왔어!’ 방 목사는 신기하고 놀랍다면서 ‘정말 자기 말대로 하느님께서 구석구석 박박 긁으셨던 거야!’ 한다. 우린 마지막 새벽 아직 어둠이 짙게 깔린 미명을 이렇게 맞았다. 깊은 밤 고요히 잠든 날 두고 발길 떨어지지 않았을 조 원장과, 지난 밤 그 뒤를 이어 잠 한숨 못자고 지켜봐야 했던 방 목사가 오래오래 지워지지 않을 거 같다.
14.
아마 6시 쯤 연락한 모양인데 녹색병원 구급차가 도착할 때 까지 기다려야 했다. 먼저 소방서 119 구급차가 와 대기했고 거리가 있는 녹색병원 차가 올 때까지 주변 도우는 손길들이 괜히 초조한 모양이다. 이윽고 차가 도착하자 우리는 무슨 사고현장에서 응급 구조되는 마냥 이동용 매트로 올려 졌고 벨트에 묶였다. 나는 119 차에 방 목사는 녹색병원 차에 각각 실려서 어두움이 막 걷히는 새벽녘 ‘웽웽’ 사이렌을 울리고 내 달린다. 벨트에 묶인 짐짝 같은 몸은 덜컹거림과 좌우 쏠림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차안에 다른 누군가가 곁을 지키고 있다. 눈치 빠른 판단과 손놀림으로 수발을 자처한 뉴스앤조이 대표 김종희 기자, 항상 그렇듯 말없이 그림자처럼 꼭 필요할 때 보면 옆에 있다.
이윽고 응급실에 도착하니 혈압, 맥박, 심전도 검사를 하고 환자복을 입혀준다. 링거를 붙이려하자 나는 그 와중에도 간호사에게 체중계를 부탁했다. 부축을 받고 겨우 체중계에 올라서니 아뿔싸 55킬로다. 조금 있으니 최헌국 목사, 권술용 선생, 김창규 목사가 뒤좇아 왔고, 8시쯤 수염 긴 특유한 인상의 한 분이 들어와 수더분하게 인사를 하는데 자신이 원장이란다. 초면에 특이한 용모지만 같은 ‘수염’과 라서 그런지 친근감이 간다. 우리 둘은 일단 3층 6인실로 옮겨졌고 곧이어 5층 2인실로 배치되었다. 병원 측서 일부러 둘만을 위해 2인실을 준비해 준 모양이다.
12시 30분경 드디어 대망하던 첫 죽식이 들어왔다. 쟁반위에 다섯 개의 하얀 그릇들... 희멀건 미음 반 공기 정도에 간장, 동치미국물, 쇠고기국물, 그리고 오렌지 주스였다. 몽땅 물 종류다. 우리 둘은 첫 상을 받아들고 너무 감격스럽고 기뻐서 입이 찢어지고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아! 이 밥상, 이 은혜로운 하늘이 내리신 선물. 그 향긋한 냄새와 혀끝을 자극하는 감미로운 맛... 우리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한술 뜨고 또 웃고, 이 기쁨을 아무나 잡고 말하고 싶어 방방 떴다. 김 기자는 우리의 천진스런 표정을 놓칠세라 기자정신이 발동해 잽싸게 앵글에 집어넣는다.
오후 4시가 돼서야 새벽부터 지금껏 여전히 방 구석구석 뭔가를 부지런히 뒷바라지 하던 김 기자가 그제야 볼일 보러 나간단다. 방 목사가 섬기는 교회에 자원하여 전도사 직도 맡고 있다는 그는, 오래전 구면이었지만 서로 깊이 알아가는 소중한 인연으로 다시 다가왔다. 수액 줄에 매달려 지내는 게 약간의 불편함이 따랐지만 미음 두 종지에 확연히 기운이 도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밤이 깊어 가는데도 우린 보식에 관련된 이야기와, 우리 없는 광화문 광장 이야기로 10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15.
병원의 하룻밤이 지났다. 광화문 광장의 엄청난 소음과 매연에 익숙해 있다가 조용한 병실에 오니깐 방 목사는 적응이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잠도 잘 이루지도 못하고 머리도 띵하다고 하였다. 난 그냥 좋고 너무 과분한 호텔인데... 다행히도 이틀째부터는 괜찮다하니 마음이 좀 놓였다. 이틀째 날부터는 방문객이 다시 줄을 잇는다. 광화문 단식장에 왔던 분도, 일부러 지방에서 올라 온 분도, 간간 금일봉을 내 밀면서 보식과 건강회복에 꼭 쓰시라고 한다. 참으로 사랑의 빚이 점점 늘어만 간다.
이틀째 날 오후 특별한 방문객이 찾아왔다. 허름한 차림에 50대의 두 사람은 서울역 맞은편 동자동이라는 동네의 쪽방촌에서 나를 보고자 왔다. 그들은 노숙자와 쪽방 거주자 등 바닥에 사는 사람들로 구성된 공제협동조합을 만들어 운영하는 리더들이었다. 방 목사는 흥미롭게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면서 관심을 보였다. 인간 바닥에 너부러져 있다가 겨우 일어서서 하루살이 생활을 하는 그들이, 1억이란 거금을 출자하여 적은 이자로 한 사람 당 5만에서 50만원까지 신용대출하고 있다는 놀라운 이야기였다. 방 목사가 회수율을 묻자 처음에는 50~60 퍼센트였지만 점점 늘어 지금은 80 퍼센트에 이른다고 하였다. 우리를 더욱 부끄럽게 한 건 ‘못 받는 돈은 어떻게 하느냐’의 질문에서였다. 그 둘은 서슴없이 ‘없어서 못 받는데 어떻게 해요. 기다리는 밖에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우리 두 목사는 그 두 방문객이 돌아간 후 아마 주님이 천사를 보낸 것 아닐까 하며 한동안 멍하였다.
사흘째 저녁때 조심스레 문이 삐끗 열리더니 환한 웃음으로 조계성 원장이 찾아왔다. 우린 앉자마자 떨어져 있다 만난 아이들 마냥 신나 지난 3일간의 병원생활을 앞 다퉈 보고하였다. 조 원장도 아침마다 광화문 광장을 들르다 며칠간 허전하고 보고 싶었다면서, 두 목사님들이 제 마음자리에 오래 남아있을 거 같다고 했다. 그리고 손에 뭔가 선물을 들고 왔는데 궁금해 열어보니 발목용 모래 주머니였다. 다리의 근력을 올려야 한다면서 수시로 차고 다니면서 운동하라고 권한다. 조 원장은 일전에도 단식 40여일이 다가오자 예쁜 보식용 휴대도시락 두 개를 사왔었는데, 자상하고도 세밀한 배려와 사랑이 듬뿍 담긴 선물이었다.
늦은 저녁시간, 방 목사는 교우들 중 중견멤버들이 여럿이 왔을 때 아주 심각한 의논하는 걸 엿들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교회가 인탤리켄챠 중심으로 뭉쳐지고 가난한 약자들이 주변으로 밀려 나갔다는 걸 깊이 반성했다면서, 기존의 중심멤버들이 그들을 중심주체로 세우자고 하였다. 마치 온 국민이 상처받은 세월호 유가족을 찾아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귀를 기울여야 하듯 목회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방 목사는 얼마 안 남은 나의 목회는 ‘갈릴리에서 만나자’라는 주님 마지막 유언에 따라 ‘갈릴리 목회’를 하고 싶다고 도와달라고 호소하였다. 방 목사는 목사의 자리인 목회로부터 정직하게 돌파해야, 나아가 한국교회와 조국사회에 할 일을 할 수 있으리라는 용단을 가졌을까? 가슴에 뜨거움이 인다. 두고 온 나의 작은 자들과의 공동체 ‘부활의집’이 생각난다.
햇볕 따스한 날 우리 둘은 나란히 링거 대를 잡고 옥상 하늘공원에 나갔다. 공기도 싱그럽고 오밀조밀 모여 있는 동네가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한가롭게 햇볕을 쪼이는 일이 얼마만인가! 우리 둘은 이런저런 살아온 이야기도 나누고, 이제 새 몸 새 영혼으로 거듭난 이후의 살아갈 날들을 그려보았다. 예수께서 변화산(예수가 올라가 옛 선지자를 만나는 신비한 경험을 했다는 높은 산) 정상에서 제자들에게 이제 내려가자고 한 것처럼, 우리는 이제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다른 동지들 그리고 민중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자고... 손잡고 어깨 걸고 이 어둠 뚫고 새벽을 기어이 열자고 하자. 맘몬과 거짓의 영과 흑암의 권력의 벽이 철옹성 같지만, 기죽지 않고 정직히 대면할 수만 있다면 이미 우린 이긴 싸움이이라고 말하자.
5일간 연일 달고 다니던 수액 줄이 떨어졌다. 마치 탯줄 떨어진 아기처럼 젖 떨어진 아이처럼 뭔가 성장하는 단계를 느꼈다. 때맞추어 죽도 점도가 뻑뻑해졌고 4,5일째부터는 바야흐로 씹을 수 있는 음식이 조금씩 올라왔다. 참 진도가 빠르다. 나는 식욕이 너무 왕성하여 방 목사가 남기는 것까지 해 치웠는데, ‘자기, 너무 과식하는 거 아냐? 조심해~’ 하면서 걱정스레 쳐다본다. 나는 애써 ‘형, 난 운동 많이 하잖아. 형도 운동 많이 하면 잘 먹을 거야.’ 하며 궁색한 대답으로 응대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너무 잘 먹고 먹는 양도 더해서인지 5일째 되는 날 새벽 시원스레 첫 배변을 했다. 그리고 아침에 눈뜨자마자 나는 자랑스레 배변을 했다고 으스댔다. ‘야! 자기 부럽다. 좋겠네. 난 기미가 없어.’ 하면서 목소리가 주눅 든 양 깔렸다. 우리 둘은 이렇게 애들처럼 천진스럽게 정이 들어갔다.
16.
주일 이른 아침 막 잠에서 깨어나는데 방 목사는 지난 밤 한 잠도 못 잤다며 말끝이 흐렸다. ‘한 열 번은 들락거렸을 거야. 나올 것 같은데... 감감하네.’ 하며 난감해 하는 표정이다. 오늘은 교회예배에 갈려고 어제 양복도 갖다 놓고 설교준비도 해 뒀는데, 잠 설친 건 둘째고 배변이 시원히 해결되지 않아 불편하기 짝이 없으니 이게 웬 사단인가! 간호사에게 약을 받아 먹고 기다려 봐도 소용없고 점점 강도는 죄어오고 나도 어떻게 도울 수가 없었다. ‘아아! 아이고~’하며 방 목사는 아래쪽을 손으로 잡고 다시 엉거주춤한 자세로 화장실로 갔다. ‘안 되겠어. 자기, 가서 의사를 불러줘?’ 나는 바로 간호사실로 가서 어서 당직의사를 불러 응급조치를 해 달라고 고함을 내 질렀다. 이윽고 간호사 둘이 침대에다 응급처치를 할 준비를 하였고 의사를 기다리는 참인데, 화장실 내에서는 방 목사가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거의 출산하는 산모의 그것처럼 혼절이 올 것 같은 상황이 2~3분이나 되었을까? ‘으으~ 아이고 살았네. 나왔어!’ 하는 게 아닌가!
창문과 출입문을 열고 청소원들이 열심히 청소를 하였고, 방 목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샤워를 하고 웃으면서 나왔다. ‘야~ 정말 천당과 지옥을 두어 번 왔다 갔다 했어.’ ‘정말, 형은 단식하면서도 그렇고 이야기를 몸으로 쓰고 있어.’ 우리 둘은 사소한 것 같지만 일상적인 몸의 신진대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입을 모아 맞장구 쳤다. 방 목사는 아까는 정말 큰 수술이라도 해야 할 캄캄한 먹구름이었는데, 신사복으로 갈아입고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교회로 갈수 있다는 기쁨에 아이처럼 좋아했다. 40일 단식에 사람들이 주로 관심을 두지만, 세상이나 몸이나 막혀서 뚫리지 않는 통증 또한 얼마나 중요하고 심각한 것인지 알게 하는 사건이었는지 모른다.
우리를 담당하는 백 과장과 퇴원 일정을 의논했다. 백 과장의 립 서비스적인 말인지는 몰라도 그간 노동자들이나 운동권 단식자들을 봐 왔지만, 우리 두 목사는 하느님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고 있어서 그런지 회복력이 놀랍게 빠르다면서 언제든지 퇴원해도 되겠다고 했다. 다만 아주 조심스럽게 보식은 이어가야 할 것이라고 조언해 준다. 퇴원 날이 정해졌다. 10월 16일 점심 죽식을 하고 서울역에서 타야할 KTX 열차표도 예매했다. 하루 전날 아침 우리는 어지러운 짐을 다시 꾸리기 시작했다. 지난번 광화문 광장 단식장을 나오기 전에 거의 짐을 정리했고, 병원에 몸만 달랑 실려 왔는데 10여일 만에 또다시 짐들이 덕지덕지 늘었다. 한 출판사 대표 김요한 목사는 장시간 보식하면서 보라고 우리 둘 각각에게 출판사에서 발간한 신학서적 100권씩이나 택배로 보내 주겠단다.
녹색병원에서의 마지막 밤을 맞는다. 오줌을 누는데 약간 따끔거려 오줌검사 결과 요도염이 좀 왔다면서 약을 지어주었다. 일주일 정도 꾸준히 먹으면 괜찮을 거라 했다. 방 목사는 퇴원하면 서울 외곽에 있는 교회의 수양관으로 갈 계획이고, 나는 부산의 OK Q병원으로 가게끔 연락이 닿았다. 부산 지인들이 주선해서 정했는데 그 병원도 부산지역의 민주 통일 인권 등, 운동에 헌신하는 인사들에 특별한 의료봉사를 해 오던 병원이었다. SNS를 통해서 댓글로 내게 꼭 오라고 원장이 초청 글을 남기기도 해 참 인상이 깊었다. ‘형, 잘 자~ 마지막 밤이야.’ ‘응, 자기도~ 근데 잠이 잘 안 오네.’
16일 아침도 여전히 6시에 눈이 떠졌다. 아침식사는 흰쌀죽, 푸른배추국, 꽁치구이, 팽이버섯볶음, 간장, 단배추무침이 나왔고, 어제 김경호 목사가 가져온 백김치 남은 것도 내 놓았다. 난 어제 김 목사가 가져온 전복죽 남은 것을 아침에 먹고, 아침 죽은 점심용으로 미뤘다. 점심 때 나올 죽은 열차타고 가면서 먹을 작정이었다. 점심이 나오기 직전 지승룡 목사와 이서윤씨가 찾아왔다. 모 항공사의 스튜디어스로 있는 서윤씨는 지난번 10월 3일 40일째 날 꽃다발을 가지고 왔었는데, 오늘도 또 두 다발을 준비해 와서 하나씩 안겨준다. 여전히 단정한 용모와 환한 미소 우아한 자태가 몸에 배인 그녀는, 이제 떠난다니 너무 섭섭하다며 건강회복을 비는 마음을 담았다고 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친구 지 목사가가 서두르자고 가방을 챙긴다. 오후 1시 30분 열차라서 이곳서 서울역까지는 여유를 두고 가야한단다. 서윤씨 차를 대기해 놓았다는 거였다. 방 목사는 오후에 가족들과 교우들이 올 것이기에 나 먼저 빠져 나가야 할 참이다.
‘형, 잘 있어. 몸조리도 잘 하구.’ 하면서 방 목사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방 목사는 내 목을 꼭 감아 안고서 ‘자기도 건강 잘 회복해야 돼! 과식 조심하구!’ 하며 목이 멘다. 그때 지 목사가 ‘아, 다시다시...’ 하면서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댄다. 우린 다시 웃으면서 꼭 안으면서 등을 토닥였고 서로 놓을 줄 몰랐다. 지난 51일간을 그림자처럼 꼭 붙어 다니던 우리가 헤어지려니 지남철처럼 떨어지지가 않았다. 서윤씨의 아주 부드러운 운전에 몸을 맡기고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서울역에 이윽고 도착했다. 친구 지 목사는 예약한 열차표를 기어코 빼앗더니 좀 더 편한 비즈니스 석으로 바꾸고야 말았다. 그리고 둘이서 나를 부축해 열차 안까지 짐을 날라 주었다.
열차가 곧 출발하려고 안내방송이 나올 때 누군가 창문을 다급히 두드려서 밖을 보니 뉴스앤조이 기자 이사라씨가 손짓을 한다. 그래서 출입문으로 급히 나갔다. 이 기자는 헐떡이면서 퇴원하는 인터뷰를 하려고 병원으로 갔는데 방금 떠났다 해서 뒤좇아 달려왔단다. 젊은 기자의 열정이 너무 뜨거웠다. 광화문 단식장에서 여러 날 정들기도 했지만 자신의 하는 일에 기쁨과 소신으로 열심을 다하는 젊음이 아름다웠다. 이마의 송알송알 땀방울을 개의치 않은 채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재낀다. 나는 손을 흔들며 고맙다고 답례의 마음을 보냈다. 이윽고 ‘치~익 덜컹’ 하면서 출입문이 닫히고 열차가 미끄러지듯 천천히 움직인다. 차창으로 보니 손을 계속 흔드는 모습이 뭐라 하는 것 같은데, ‘잘 가세요. 건강하셔야 되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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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는 1956년 정읍에서 태어나 1963년부터 부산서 성장해 목사가 된 이후, 애빈교회와 사단법인 애빈회를 설립해 오늘까지 부랑인 노숙인 10여명과 가족처럼 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오면서, 빈민운동 인권운동 평화통일운동에 함께해 오고 있다. 특히 예수의 신과 합일의 신비적 영성과 가난과 저항의 삶에 관심을 갖고, 자신이 걸어왔던 기독교를 넘어 새로운 지평의 통합적 종교와 세상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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