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불안, 이길 수 있습니다.
“소심한 사람은 위험이 일어나기 전에 무서워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위험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 무서워한다. 대담한 사람은 위험이 지나간 다음부터 무서워한다.”
독일 소설가 “장 파울”이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어쨌든 늘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하버드대 정신과 교수 필레이 박사에 의하면, 우리 뇌는 ‘원하는 것’보다 ‘피하고 싶은 것’에 우선적으로 반응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한 가정의 가장이 한 명 있습니다. 성실하게 가정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자신이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하게 되면 가정의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우리의 뇌는 “불가능하다”라는 생각에 전 에너지를 쏟아 사용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려는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게 반응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아마도 인간이 연약하게 태어나서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강한 몸도, 강한 공격무기도, 특별히 자신을 보호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에 위험에 타고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엄청난 양육강식의 자연세계에서 인간이 살아남은, 그리고 만물의 지배자로 살아가게 된 이유는 아닐까요?
어쨌든 인간은 풍성한(?) “두려움”속에 살아갑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 두려움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실재하는 대상에 대한 “두려움”와 실재가 없는 대상에 대한 “불안”입니다. 문제는 실재하지도 않는 것들 때문에 “불안”해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불안”이 주는 폐해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불안은 우리를 안절부절하게 해서 결국 어떤 일을 시작도 해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불안으로 사람의 심신이 상처가 납니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쟁터에서 죽은 미국의 청년들의 수는 30만 명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놓고 염려와 불안과 근심으로 심장병에 걸려 죽은 사람의 숫자가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가희 “죽음에 이르는 질병”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넬슨 만델라”는 “용감한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을 정복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차동엽 신부님은 불안을 이기려면 두 가지 처방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째는 희망과 꿈을 품는 것입니다. 불안과 싸워서 이길 만한 장수는 역시 “희망”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희망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난 칼럼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둘째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 토론토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마이클 인즐릭트”는 2009년 《심리과학》 온라인 판에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습니다.
“신앙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테스트에서 실수를 하거나 잘 모르는 것이 나와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 같다.”
기도하면 마음의 안정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학교에서 제가 기도를 하면 일어나는 세 가지 현상을 강의한 적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그 기도내용이 어떠하든, 먼저 자신의 영혼이 정화되어집니다. 둘째, 내가 하는 기도와는 상관없이 가장 우선되는 기도제목에 기도의 힘이 부어집니다. 마지막으로, 내 기도제목에도 그 기도의 힘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 자체가 복이라고 말합니다.(이건 다음에 자세히 다룰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칼럼을 쓰면서 여기 저기 부지런히 뛰어다닌 느낌이네요. 두려움은 인류의 생존 비결입니다. 하지만 존재하지도 않는 것에 대해서도 “불안”하기 시작하면서, 인류의 비극은 시작됩니다. 실제로 그 “불안”으로 인해 정신적, 육체적 피해의 증거들이 많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불안! 해결해야 합니다. 희망으로 몰아내고, 기도로 정돈해야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불안이 없으면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도 잊지 마시고, 너무 기죽어 하지도 마십시오. 내일은 불안 대신 희망으로! 염려대신 도전으로! 걱정대신 기도로! 이겨냅시다! 우리는 용감한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