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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는 결정적인 위사(僞史)들(2)
현재까지 알려지기로는 요(遼) 남경의 위치가 현재의 북경시라고 한다. 전세계 역사학자들이 그리 알고 있다. 그러니 일반 백성(百姓)들도 그리 알 수밖에 없다. 즉, 전 세계 70억 인구가 거의 모두 그렇게 알고 살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런 것인가?
물론 전 세계 70억 인구 속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은 안녕(安寧)할 것이다. 왜냐하면 같은 생각과 같은 믿음을 갖고 살고 있으니 누가 나무라는 사람도 없고 손가락질 당할 위험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모두 같은 편(?)이라는 안도감 속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또 『사기』화식열전에 따르면, 춘추전국시대 연(燕)의 도읍지가 계(薊)라는 곳으로서 그 위치가 현재의 북경시로 알려져 있다. 더우기 세계역사지리지도에 그리 표기되어 있느니 전세계 역자학자뿐만 아니라 고등교육을 받은 교양인들 모두가 그리 알고 있는 것이다.
본 연구원은 그간 고대 지명의 본래 위치를 찾기 위하여 중국 23사 지리지들을 모두 통독하고 비교한 결과, 춘추전국시대 연(燕)의 도읍지 연도(燕都)의 위치와 진·한(
秦·漢)의 유주(幽州), 수(隋)의 탁군(涿郡), 당(唐)의 유주(幽州), 요(遼)의 남경(南京), 금(金)의 중도(中都) 등의 위치가 모두 같은 위치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각 지리지에서 특정 지명의 위치를 기록할 때, 대부분 앞 왕조의 지명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또 청(淸) 대에 제작된 『대청광여도』에서 상기한 지명들의 위치를 찾아보면,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두 현재의 북경시에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역사지리를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단순히『대청광여도』에 표기되어 있는 지명들을 보고 지명의 본래 위치를 찾은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왕왕이 있다.
[그림 1] 현 북경시(춘추전국시대 유도, 수·당 유주, 요·금·원·명 도)
그러나 『대청광여도』에 표기되어 있는 대부분(거의 80%이상)의 지명들은 명 대 초기(대략 1421~1512년으로 추정)에 지명변이가 이루어진 상태를 그려논 것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명백하게 단정할 수 있는 분명한 근거들을 몇 가지 거론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간단하고 명료한 근거는 『요사』 지리지의 남경(南京, 연경)에 관한 기록이다.
아울러 동『요사』 지리지 남경에 관한 기록은 앞 편에서 제기한 바와 같이 『후한서』, 『신당서』, 『구당서』 등에서 요동과 낙랑의 위치를 가리키는 거리수치들이 모두 위사(僞史)임을 명백히 밝혀주게 될 것이다.
즉,『요사』지리지 제4(남경)에 따르면, 요(遼) 대의 남경(南京) 석진부(析津府)를 연경(燕京)이라고 불렀는데, 남경에 석진현(析津縣), 완평현(宛平縣), 창평현(昌平縣), 양향현(良鄉縣), 로현(潞縣), 안차현(安次縣), 영청현(永清縣), 무청현(武清縣), 향하현(香河縣), 옥하현(玉河縣), 곽음현(漷陰縣) 등 11개 현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석진현은 진(晉) 대의 계현(薊縣)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상기 11개 현 중에서 남경으로부터 거리와 방향이 기록되어 있는 9개 현의 거리와 방향을 고려하면 [그림 2]의 왼편 그림과 같이 그릴 수 있다.
[그림 2] 요 남경(유주) 주변 지역 지명 배치도(『요사』 지리지 남경)
또 『요사』지리지 제4(남경)에 따르면, 송(宋) 왕증(王曾)의 상거란사(上契丹事)를 인용하면서 웅주(雄州) 백구역(白溝驛)에서 하(河)를 건너 유주(幽州) 연경(燕京)에 도달하는 경로(220리)를 따라가면서 각 지명의 배치 관계를 그려보면 [그림 2]의 오른편 그림과 같다. 동 오른편 그림에서 역, 고안, 내수, 용성 등의 위치는 『요사』지리지 역주(易州)의 기록을 덧붙여 표기한 것이다.
그런데 상기 두 그림 간에 공통된 지명을 찾아보면 양향(良鄕)이 있다. 즉, 양향으로부터 유주(幽州)와 남경(南京)이 각각 방향(북쪽)과 거리(60리)가 같으므로, 유주와 남경은 같은 지역으로서 상기 두 그림은 같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더우기 두 그림이 서로 인근 지역의 지명들을 상호 보충해 주고 있다.
따라서 상기 [그림 2]의 두 그림에서 요(遼) 대의 남경은 연경(燕京)이라고 불렸는데, 당(唐) 대에는 유주(幽州)였으며, 진(晉) 대에 계현(薊縣)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수서』지리지 탁군(涿郡)의 기록에 따르면, 계(薊)는 연군(燕郡)이었는데 폐지하고 탁군을 설치하였다고 하므로, 계(薊)는 수(隋) 대에 탁군의 치소였음을 알 수 있다. 또 『구당서』지리지 제2 유주에 따르면, 당(唐) 대의 유주(대도독부)를 수(隋) 대의 탁군에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요(遼) 남경(연경)=당(唐) 유주(幽州)=수(隋) 탁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10여 개 지명이 각각 주어진 거리와 방향에 따라 배치되어 형성된 지역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만약 4~5개 미만의 지명들이 형성하고 있는 지역이라면, 중국 대륙 안에 유사한 지역이 무수히 많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10여 개 지명이 형성된 지역은 중국 대륙이 아무리 넓고 크고 작은 도시들이 수없이 많다고 하더라도 몇 군데에 불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몇 군데나 나올 수 있을 것인가?
우선 티벳 지역이나, 내몽골 지역은 인구도 적고 크고 작은 도시들 자체가 희박하므로 제외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림 2]의 오른편 그림에서 웅주 백구역에서부터 하(河)를 건너 연경이라고 불렀던 유주에 도달하는데 북쪽으로 230리였다. 즉, 230리는 당척 1리=540m와 굴곡지수(x)=1을 적용하면 직선거리로서 230리×540m/리=124km를 산출할 수 있다. 이는 4백만 분의 1지도에서 3.1cm이다.
다시 말해서 상기한 하(河)를 황하(黃河) 또는 황하 인근 지역에 있는 강으로 가정하고 황하를 따라가며 관찰해 보면,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屯留縣)과 로성시(潞城市)가 위치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4백만분의 1 지도에서 황하로부터 북쪽으로 대략 3.8cm 거리이며 약 280리임).
[그림 3] 산서성 둔유현과 로성시
다시 말해서 [그림 2] 왼편 그림의 남경과 로를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과 로성시에 각각 대입시켜 보면, 요(遼) 대에 남경(南京)이었으며 당(唐) 대에 유주(幽州)였던 곳이 바로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이었음을 알아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남경∙로∙양향∙탁주∙안차∙신성∙창평∙웅주∙영청∙무청∙향하∙곽음 등의 지명들 간의 거리와 방향이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대 지도상에서 산서성 둔유현과 로성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지명들과 서로 매우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림 4] 산서성과 하북성 경계지역 / 계, 양향, 로, 탁, 옹로 등
예를 들어, 4백만분의 1 지도에서 현재의 로성시로부터 둔유현까지 0.8cm이므로 축척 4백만을 곱하면 직선거리가 32km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요 대에도 당 대와 마찬가지로 당척 1리=540m를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직선거리 32km는 당척으로 32km÷540m/리=60리임을 알 수 있다. 즉, [그림 2]의 왼쪽 그림에서 로(潞)로부터 남경(南京)까지 60리라는 거리는 직선거리로 볼 수 있으며 굴곡지수(x)=1이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남경에서 남쪽으로 양향현까지 60리인데 현재의 둔유현에서 남쪽으로 장치(長治)까지 직선거리로 약 32km(4백만분의 1지도에서 0.8cm)이므로, 양향현은 장치 인근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그림 2]의 오른편 그림을 보면, 탁주는 고평시 인근 지역으로, 안차현은 현재의 릉천현(陵川縣)으로, 신성현은 현재의 대기(大冀) 인근지역으로 각각 추정할 수 있다.
또 창평현은 현재의 둔유현 북쪽에 있는 심현(沁縣) 주변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그림 2]의 오른편 그림에서 하(河)수를 현재의 심하(沁河)로 추정할 수 있으며, 웅주(熊州)를 현재의 심양(沁陽)시 또는 제원(濟源)시 인근지역을 추정할 수 있는데, [그림 5]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5] 산서성과 하남성 경계지역/양향, 탁주, 신성, 웅주 등
그런데 [그림 2]에 나타나는 남경(연경)∙로∙양향∙탁주∙안차∙신성∙창평∙웅주∙영청∙무청∙향하∙곽음 등의 지명들이 앞서 설명한 『대청광여도』뿐만 아니라 현대 지도에도 모두 현재의 북경시 주변에 표기되어 있는데, [그림 6]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6] 북경시 주변 지명들
그러나 북경시 주변에 있는 로∙양향∙탁주∙안차∙신성∙창평∙웅주∙영청∙무청∙향하∙곽음 등의 지명들은 현재의 북경시로부터의 방향과 거리가 『요사』지리지 제4(남경)의 기록과 전혀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요사』지리지가 엉터리 기록인가?
아니면, 북경시 주변의 지명들이 모두 산서성 남부지역에서 변이되어 올라 온 것인가?
만약 『요사』지리지가 엉터리라면,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것처럼 요(遼) 남경(연경)과 당(唐)의 유주가 현재의 북경시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 즉, 요(遼) 남경과 당(唐)의 유주가 틀림없이 현재의 북경시에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전세계 70억 인구와 함께 아무런 갈등없이 편안한 삶에 안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냥 세월은 흘러가 버리겠지...
그러나 요(遼) 남경과 당(唐)의 유주가 현재의 북경시에 있었다고 했을 때, 앞 편에서 제기한 『후한서』, 『신당서』, 『구당서』 등에서 요동과 낙랑의 위치를 가리키는 거리수치들이 여전히 위사(僞史)임이 밝혀지는 동시에 중국 23사 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 수많은 기록들을 하나하나 엉터리임을 설명해 낼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즉, 요(遼) 남경과 당(唐)의 유주가 현재의 북경시가 될 수 없는 근거를 다음 편에 밝히고자 한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