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 울고
김병규
나 자신은 굳이 사양한 일이었지만 크게 벌어지고 만 일이 있었다. 호의와 은혜는 나날이 불어만 가는데 이에 대한 보답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자책만 늘어나는 일이었다. 그것은 내 환갑 기념논문집 발행 축하의 모임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아미엘의 말을 인용한 기억이 난다. 그것이 어쩐지 내 마음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한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그렇게 자랄 수밖에 없었던 정신적인 고독을 생각할 때 연구의 즐거움이나 사고의 생활이랑 학문이라는 조용한 도피가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생각해보면 나는 내 생활의 밑바닥이 쓸쓸한 것이라 함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버려진 채 자기 속에 갇혀 홀로 살아왔는데 인간이 홀로 있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딴엔 그래도 학문을 해본답시고 흉내를 내본 셈이었는데, 그것이 나에겐 한갓 도피의 구실을 한 것 같이 느껴져 스스로 놀란 것이다. 그만큼 난 쓸쓸한 인간이었으며 아무도 돌아보는 사람 없이 팽개쳐져서 내 작은 껍데기 속에 파묻혀 살아 왔다.
그것이 아미엘의 날카로운 말에 탄로가 난 셈인데, 그의 마지막 말이 나에게 충격을 주는 것이다. ‘인간이 홀로 있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란 단언이 사정없이 나를 후려치는 것이다. 오랫동안 정신적으로 홀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을 별로 깨닫지 못했다. 홀로 있는 것이 탓할 일도 아니라는 막연한 생각에 자위를 하고 있었다.
오히려 강점일 거라고 내심 생각했다. 그만큼 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언제 삐뚤어질지 모를 상황이었지만 의식하지 못했다. 쓸쓸한 것이 을씨년스런 것이 되어 되레 스스로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았고 그 속에서 난 중독 증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홀로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나의 객관적 현실이어서 여느 사람들의 눈엔 숙명론자로 비쳤을 것이다. 이처럼 삐뚤어진 자화상을 안고 안간 힘을 쓰며 살아왔다. 이런 나를 돌이켜보면서 소스라치게 놀란다.
옛사람들이 흔히 ‘신독(愼獨)’이란 말을 쓰는 것을 듣고 그것은 헛말이라고 여겼다. ‘신독’은 홀로를 삼간다는 말인데,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마음을 바로 잡고 몸을 바로 지킨다는 뜻이리라.
그게 뭐 그리 중요할 것일까 하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아니 거부반응까지 느끼며 유교 도덕의 빈말 내지 허세로 생각했다. 이러한 나의 경솔한 태도에 대하여 자괴감(自愧感)이 든다. 나의 잘못을 아미엘의 말에서 깨달았다.
아미엘의 말을 인용한 뒤에 “나는 이처럼 내 껍질 속에 틀어박혀 살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무엇이든 해드릴 수 없는 계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막무가내로 이처럼 푸짐하게 베풀어주셔서......”하다가 나도 몰래 울먹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말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이상야릇하게도 입술이 자꾸 뒤틀려서 말을 못했다. 장내가 갑자기 찬물을 끼얹는 양상이 되어 나는 무슨 죄지은 사람처럼 민망한 꼬락서니가 되고 말았다. 이런 판국이라 녹음을 하려던 분이 그것조차 잊어먹는 결과가 되었다.
참석자들은 참 고마운 분들이었다. 그들 중 우리 대학 교수는 극소수였다. 교수들에겐 일체 알리지 않도록 미리 신신당부를 했다. 내가 무엇이 잘났다고 여러 사람들을 불러들이는가 싶어서였다.
실은 1년 전에 논문집 발행의 뜻을 P교수에게서 들었었다. 나에겐 영광스런 일이지만 그것을 바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계획을 그만두라고 당부했다. 그동안 세상이 시끄러웠기 때문에 중단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는데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고 했다.
학교 내부에는 일체 비밀(?)로 하고 외부 사람들과의 교섭이 아주 순조롭게 되어 간다는 P교수의 말이었다. 졸업생들이 잘 호응하고 있어 금액이 상당히 모였다는 것이다. 나는 솔직히 그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몰랐지만 그들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척척 호응한다는 것이다. 그중엔 직접적으로 내 제자가 아닌 사람도 끼어 있었다. 내가 무슨 힘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있는 처지도 아닌데도 적극적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선 암만 우둔한 인간일지라도 큰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논문집의 원고도 잘 들어오고 출판에 붙였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난 그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참 희한한 일도 다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것이 실현이 되고 발간과 겸하여 회갑을 축하하는 모임을 유명한 식장을 빌려서 아주 성대한 잔치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 쯤 되고 보니 나는 처음부터 격정을 가누기가 힘들게 되어 버렸다. 잔치의 자초지종을 지켜본 그곳의 전무는 그렇게 차분하고 감동을 주는 모임은 그의 오랜 경험에도 없다고 술회하더라는 이야길 전해 들었다. 그도 꼭 논문집을 하나 달라고 해서 주었다고 했다. 그 뒤 그 곳에 친구와 들렀더니 그것을 기억하고 서비스로 맥주를 주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나 홀로 이때까지 걸어온 셈이다. 혼자 산보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실은 그것이 나의 인생이라 싶어서였다. 산보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이 내 인생행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학교에 다녔어도 나는 항상 외로웠다. 친구나 선배 중에서 나를 이끌어 준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 중 꼭 한 사람의 선배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천재적이었다. 우린 의기투합했다. 그러나 그 기간은 아주 짧았다.
스승도 그랬는데 한 분 만은 잊을 수가 없다. 그 분은 여러 해 전 우리나라를 다녀갔는데 헤어질 때 그의 눈에 물기가 어린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는 앞날이 멀지 않다고 말했다.
그 선배의 권유에 따라 별로 마음에도 없던 법학공부를 하게 되었고 시험도 쳤다. 신문에 발표가 나서야 동료들이 놀란 것이다. 그 때까진 내가 응시한 것조차 몰랐었다. 시험을 치른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남이 괜스레 욕 할 것 같았다. 나만큼 못난 인간이 어디 있을라구 나는 항상 그런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학위를 받기위하여 내가 심사를 겪고 있다는 것도 다른 교수들이 잘 몰랐다. 학위 수여식에서야 겨우 알았다는 사람이 많았다. 그때 나는 가운도 없었다. 학교에 비치한 것을 빌려 입고 그때를 땜질했다. 학위를 받긴 했으나 도무지 내 것 같지 않았다.
요컨대 나는 못난 인간이었으며 지금도 그렇다. 여느 사람들은 대로를 활보하는데 나는 인생의 뒤안길을 발자국소리도 내지 않고 다녔다.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바로 박혀 있는데 내 이름은 거꾸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키에르케고르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는 모임에도 잘 나가지 않는다. 모임에는 두려움이 앞선다. 나가보면 모두 똑똑하고 잘 생긴 사람들이라서 아예 기가 죽는다. 그래서 뒤 구석에 앉아 있다가 슬쩍 빠져나온다. 어떤 때는 찾아서 앞으로 나오라고 해도 그냥 버틴다. 확실히 아랫자리에 앉는 것이 마음이 놓인다.
썰물의 갯벌에 나가보면 인기척에 놀라 구멍 속으로 도망치거나 더러는 숫제 껍데기 속으로 몸을 감추는 조그만 게가 있다. 그것들을 보고 비웃을 수가 없다. 게딱지 같은 걸 나 자신도 짊어지고 다닌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즐거운 자리에서 내가 찔끔했던 그것은 어설픈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숨소릴 죽여 살아온 내 인생살이가 햇볕을 보는 순간 폭삭 꺼지는 슬픈 사연일 것이다.
인간은 올 때도 갈 때도 운다. 태어날 때 울다가 죽을 때도 울다가 간다. 나는 그 사이에 꼭 한 번 운 것을 끼워 넣고 싶다. 나는 이 세상에 올 때 울었으며 60에서 울고 죽으면서 울 것이다. 세 번 울고 나는 떠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