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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2:1-22
찬송가 484장 “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
욥기 29장부터 31장은 욥과 친구들 간의 논쟁의 전환점이 된 욥의 후기 독백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오늘 본문 32장에서부터 37장까지는 욥의 마지막 변론 부분과 하나님의 나타나심 사이 교량 역할을 하는 전환 부분에 해당합니다. 그중 32장과 33장은 네 차례에 걸친 엘리후의 긴 변론 중 첫 번째에 속합니다. 엘리후의 중재 변론을 끝으로 이후에는 절대 주권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엘리후의 중재 변론은 욥의 고난에 대한 인간들 간의 변론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도입하게 하는 성격을 지닙니다.
우리는 욥기를 읽고 묵상하면서 세 부류의 사람, 욥과 세 친구, 그리고 엘리후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때로는 욥과 같이 인생의 고난 중에서 욥을 떠올리며 우리 자신도 욥의 처지에서 우리와 하나님을 생각해보고, 또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됩니다. 또한 세 친구처럼 우리 주변에 고난 당하는 자를 바라보며, 그들을 향한 나의 생각, 태도 등을 점검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엘리후의 모습 속에도 우리의 모습이 담겨 있음을 봅니다.
엘리후는 욥과 세 친구와는 달리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에 초점을 맞추어 보다 수준 높은 논지를 전개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주장했던 현세적이고 도식적인 인과응보론에만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에 의한 구원의 소망을 피력하는 성숙함을 보입니다. 또한 고난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속에서 파악하여 연단의 기회로 이해하는 성숙함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한계를 가진 인간이기에 내용이 완벽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등장하셔서 그분의 절대 주권을 말씀해 주십니다. 본문의 엘리후의 모습을 통해서 배울 점을 생각해보고, 또한 그의 한계도 함께 짚어보기를 원합니다.
엘리후의 등장(1-9)
(1-3)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
엘리후는 ‘그는 나의 하나님이다’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사무엘상과 역대상에 동일한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바라겔’의 뜻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입니다. 엘리후의 가문은 신앙적인 전통이 있는 가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학자들 중에는 엘리후가 욥과 친족관계로 욥이 재난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것으로 보지만, 성경에서 자세히 말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엘리후는 욥과 친구들의 변론이 잠잠해지자 드디어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시작이 화를 내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분노의 대상은 욥과 세 친구 모두였습니다. 욥에 대해서는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고 이야기한 내용에 대해서, 그리고 친구들을 향해서는 욥의 변론에 대해 능히 대답하지도 못하면서 욥을 정죄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보면, 엘리후가 욥에 대해 잘못 판단한 내용이 있습니다. 욥이 스스로 하나님보다 자신을 의롭게 여겼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고난을 죄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친구들에게 변론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했을 뿐, 자신이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었습니다.
엘리후가 이렇게 말한 것은 욥이 자신의 의로움과 떳떳함을 너무 강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에 대해 엘리후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를 책망합니다. 이를 볼 때 엘리후는 스스로 하나님의 의로움과 진리를 수호하고자 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이 변론에 뛰어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변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4-9) 엘리후는 그들의 나이가 자기보다 여러 해 위이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화를 내니라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엘리후는 다른 친구들이 상대적으로 연로하고 나이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참으면서 기다렸다고 말합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먼저 말하고,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고 보통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신앙생활할 때 나이가 많다고 해서 꼭 올바른 지혜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람의 속에 있는 영에 의해 하나님이 깨달음과 지혜를 허락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른이라고 다 지혜롭고 노인이라고 다 올바른 것을 깨닫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화에 의해서 나이가 들수록 판단력이 오히려 흐려질 수 있다는 것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과 주변의 사례들을 통해 파악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후의 이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표현하기는 했어도 여전히 욥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에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엘리후는 계속해서 자신이 변론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고 간청합니다.
엘리후의 변론 참여의 이유(10-22)
10-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말하리라 보라 나는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노라 당신들의 슬기와 당신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노라
엘리후는 겸손한 자세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 행동을 취했습니다. 우리는 때로 먼저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보다 먼저 말해야 나의 주장이, 나의 뜻이 관철될 것으로 생각하고, 내 말이 더 맞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생각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은 먼저 듣고 상대의 말에 맞추어 대답합니다. 그러면 좀 더 논리적으로 반박을 할 수 있고, 또 그 말에 반응함으로 상대의 마음을 또한 얻을 수 있습니다.
(12-13) 내가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의 말에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당신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진상을 파악했으나 그를 추궁할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지니라
엘리후는 욥의 세 친구를 향해 스스로 판단하기를 자신들이 지혜롭게 욥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으나 욥을 납득시키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일침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과 자세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들의 지혜와 능력으로 욥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함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이에 엘리후는 자신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로 말하겠다는 각오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왜 자신이 나서서 말을 해야 했는지에 대해 계속 설명합니다.
(14-17) 그가 내게 자기 이론을 제기하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이론으로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었더라 당신들이 말 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하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나는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엘리후는 지금까지 세 친구가 제시했던 논리로 접근하지 않고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고 설명하겠다고 말합니다. 엘리후는 상당히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변론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후는 보다 객관적 입장에서 욥의 고난에 대해 그에게 교훈해 주고자 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가만히 서서 대답지 않으므로 엘리후는 더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말하게 된 동기는 바로 하나님의 영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18-20) 내 속에는 말이 가득하니 내 영이 나를 압박함이니라 보라 내 배는 봉한 포도주통 같고 터지게 된 새 가죽 부대 같구나 내가 말을 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선포하지 못한다면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고 답답하여 견딜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엘리후 역시 자신의 처지를 봉한 포도주통 같고, 터지게 된 새 가죽 부대 같다고 비유합니다. 포도주가 발효되어 가스로 팽창해서 포도주통과 가죽 부대가 터질 지경이 될 정도로 자신의 마음이 답답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떳떳함과 강한 결기로 변론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21-22)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리니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이가 속히 나를 데려가시리로다
엘리후는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소신껏 발언하겠다는 표현을 합니다. 사람에게 영광 돌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식하며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사람에게 아첨하지 못하고 사람에게 좋게 보이려고 애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도 스스로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고 외쳤던 바울의 단호함이 지금 엘리후에게서도 느껴집니다.
엘리후는 이후의 논증을 통해서 욥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고통에는 하나님의 이유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침묵하신 것이 아니라 계속 말씀하셨다. 그리고 고통을 주신 것은 교만하지 않도록, 교만을 예방하기 위해서이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사도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것은 교만하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의 강하심이 나를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또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기독교 변증가 C.S. 루이스는 그의 아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고통에 대한 깊은 묵상과 많은 글들을 남겼습니다. 그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쾌락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다가와 내게 속삭이신다. 그러나 고통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다가와 큰 소리로 고함 지르신다.” 일이 잘 풀리고 즐거울 때는 하나님 말씀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통 속에, 고난 가운데 있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 가까이 크게 다가옵니다. 그렇다면 고통은 우리에게 은혜요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엘리후를 통해 욥을 깨우치시고, 이후 스스로 등장하셔서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엘리후의 변론을 들으며 우리는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리는 유익을 누리면서도 동시에 그 역시 한계를 가진 인간임을 또한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엘리후는 젊은 사람의 결기로 욥의 세 친구와 욥을 함께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반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분노하며, 사랑과 긍휼로 고난 당한 자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논리에 의해 상대를 바라보고 정죄하는 데까지 나간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엘리후의 모습을 보면서 에베소서 4장 15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엡 4:15)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이 말씀을 새번역 성경에서는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로 번역하였습니다. 쉬운 성경에서는 ‘사랑으로 진리만을 말하고’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말하고자 할 때 먼저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는 비판, 책망, 심지어 진리조차도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말을 하든지 사랑으로, 사랑 안에서 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무게가 더해갈수록, 지식과 경험이 쌓여갈수록 내 생각이 옳고 나와 다른 생각, 주장을 하는 사람은 틀렸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항상 옳다는 생각은 너무도 위험합니다. 나의 지식과 경험이 우리의 경험과 지혜가 앞서는 삶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앞서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나의 지식과 나의 뜻을 관철하기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늘 묻고 기도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는 발걸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이 곧 몸 된 교회를 향한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뜻일 것입니다. 오늘 그렇게 하나님께 창문을 열고 겸손히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복된 한 날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연약함과 한계를 늘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야 함을 다시금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약함을 인정할 때 주님께서 강함으로 역사하심을 늘 잊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때로 나의 지식과 의견이 옳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늘 인정하며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성숙한 주님 닮은 제자들로 자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 창문을 열고 우리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걸어가는 인생길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엘리후는 욥과 세 친구가 변론하는 동안 인내하면서 기다렸습니다. 나는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잘 듣고 경청하기를 힘쓰고 있습니까?
2. 엘리후는 인간적인 지혜와 경험보다 하나님의 지혜, 성령님의 지혜를 구하며 말하고자 했습니다. 성령님의 지혜로 말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묵상해 봅시다.
3. 엘리후 역시 진리를 말하고자 했으나 스스로 한계가 있는 인간임을 보게 됩니다. 나의 약함과 부족함을 깨닫게 되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그때 어떠한 행동을 취하십니까?
4. 오늘 하루 하나님께 창문을 열고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 어떠한 결단을 하시겠습니까?
(작성: 최정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