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해랑길 78코스 제1부
도성3리마을회관-고지기골-바깥고잔-
안고잔-선배골입구-도성리·대요리제방-
상무지골입구-진충사-무쇠점골-절골-
큰골-통개 들녘-환성고라리길 언덕
2024년 2월 21일
1.봄비 내리는 서산시 지곡면 가로림만 수묵화
두루누비에서 서해랑길 78코스를 '농어촌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로 밭길과 저수지를 지나는 코스'라고 소개하며, 관광포인트는 곰을 닮았다는 섬으로 세계 5대 청정갯벌인 가로림 만에서 갯벌체험을 즐길 수 있는 '웅도'와 폐교를 활용하여 숙박시설로 개관한 '한글도서관 서산글램핑'을 소개하고 있다. 시점은 서산시 지곡면 환성리 도성3리마을회관, 종점은 서산시 대산읍 대산리 대산버스터미널이다. 거리 13km, 소요시간 4시간, 난도 쉬움. 도성3리마을회관, 3.7Km 진충사, 4.6Km 환성3리마을회관, 2.0Km 염전저수지, 2.7Km 대산버스터미널로 소개하고 있다. 코스 소개와 관광 포인트를 좀더 구체적으로 소개할 수 없을까? 서해랑길 78코스를 탐방한 뒤에 탐방객의 마음에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하루내내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며 운무에 덮인 날씨였지만 미지의 새로운 길을 걷는 탐방객에게는 모든 것이 탐구의 대상으로 가슴을 달구었다. 탐방 체험을 2부로 나누어 기록한다.
제1부 : 비가 내린다. 가느다란 비가 봄을 최촉하듯 내린다. 충남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 도성3리 마을회관 앞 칠지도 제작 야철지 기념비 앞에 2주만에 다시 왔다. 그때에는 이곳에서 서해랑길 77코스를 역방향으로 출발하였지만, 이번에는 78코스를 정방향으로 출발한다. 두 번째로 만나는 도성3리 마을회관과 칠지도 제작 야철지 기념비, 그리고 쇠풍리 들녘과 망미산이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온 사람을 반기듯 길손을 다정하게 맞이한다. 가랑비가 내리는 풍경은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사람이 느낄 법한 애상감을 길손에게도 고스란히 전한다. 그러나 애상감은 잠시, 마음은 곧바로 서해랑길 미지의 78코스를 탐방할 기대감으로 출렁인다. 목적지는 서산시 대산읍 대산리 대산 버스터미널, 주요 경로는 진충사, 환성3리 마을회관, 염전저수지이다.
칠지도 제작 야철지 기념비 옆 나무 줄기에 붙어 있는 서해랑길 78코스 시작점 표지판에서 출발하여 도성국사봉길과 도성1길 갈림목인 삼거리에 세워진 서해랑길 77·78코스 안내도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도성1길을 따라 새로운 길을 간다. 우수(雨水) 절기를 이틀 지나서 살금살금 내리는 가랑비는 봄의 그리움을 한 올 한 올 풀어내듯 길손에게 봄 소식을 전해온다. "남국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하얀 행복/ 꽃이 피었다고// 하늘 빛/ 풀잎들이/ 피아노 이중주로/ 연주하고// 알바트로스/ 잊고 있던 하늘의 무지개를/ 새롭게 날개로 얹어 봅니다/ 아 새 하늘이여// 다시 불러야 할/ 새 노래는/ 이 봄 편지에 실려오는가// 바라거니/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라/ 이 하늘과 이 나라의/ 거리들은/ 모두 우리들의 장미밭이다" - 황금찬의 '봄 편지' 전문. 시인의 봄 편지를 읽듯 가랑비의 봄 소식을 들으며 새 풍경, 새 길을 걷는다. 그 길에서 이미 탐방한 곳의 위치를 확인하는 즐거움에 빠진다. 서해랑길은 비순환 탐방길이라고하지만, 가로림만 해안 탐방길은 순환 탐방길처럼 이미 탐방한 건너편을 마주보며 걷기에 이런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야철터가 있었다고 전하는 쇠풍리골, 가로림만에 제방을 축조해 조성된 벌담들, 중리포구, 망미산 등을 확인하며 고지기골로 내려간다. 하늘로 쏘아올린 로켓 같은 스카이로켓향나무 묘목지, 비닐을 씌운 마늘밭이 펼쳐져 있는 고지기골 마을을 지난다. 고지기는 고직(庫直)에서 온 말로, 조선 시대에 관아의 창고를 살피고 지키던 사람인 창고지기를 이르는 말이다. 그렇다면 고지기골은 이곳에 곡물을 비롯한 철기 제품들을 보관하던 창고들이 있었을 것이며, 이들을 지키던 창고지기들이 살았기 때문에 고지기골이라는 지명을 얻지 않았을까? 길손은 지명의 정확한 유래를 알지 못하여 다만 추정해 볼 뿐이다. 철기 제품들을 생산하는 야철터가 쇠풍리골에 있었다면 이곳에 창고가 있을 개연성이 높으며 그래서 고지기골이라는 지명이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지기골 언덕을 올라가, 고지기골을 통과하느라 방금 헤어졌던 도성1길 간선도로와 재회한다. 이제부터 도성1길 간선을 따라간다. 도성1길 왼쪽에 고잔골, 도성1길에는 바깥고잔 버스정류소가 있다. 고잔은 곶(串)의 안쪽을 이르니, 고잔골은 곶 안쪽의 골짜기를 이르는 것이고, 바깥고잔은 고잔 바깥 지역이라는 뜻일 것이다. 바깥고잔 지역에서 보면 고잔골 앞쪽에 가로림만 바다로 돌출한 곶(串)부리가 보인다. 이 곶부리 남쪽에 도성리 벌담들 제방이 있고, 이 제방은 중왕리 어름들 제방과 중리포구로 이어진다. 77코스 탐방길에서 이들 지역을 지나갔기에 그림이 그려진다. 중리포구 앞의 저도와 솔섬, 고파도가 파란 물결 위로 솟아오르는 것 같다.
도성1길은 벚나무가 가로수로 조성되어 있다. 머지 않은 봄날 이 길에는 벚꽃이 흐드러질 것이다. 벚꽃 사이로 가로림만 바다와 섬들을 조망하는 풍경을 상상해 본다. 꽃비가 흐드러지고 꽃비 속에 솟아오르는 섬들과 파란 바다, 건너편 태안군 이원반도 산줄기가 이 꽃비 풍경을 내려본다. 지금은 꽃비 대신에 봄을 최촉하는 가랑비가 내리고 가로림만은 침묵 속에 누워 있다. 이 침묵을 깨는 것은 닭섬, 가로림만 회색빛 바다에서 닭섬이 검은 빛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멀리 보여야 할 고파도와 웅도는 비구름 속에 숨어 있고, 안고잔골 앞에서 닭섬이 홀로 목청을 울어댄다. 닭소리가 들려온다. 가랑비와 함께 닭섬의 닭울음 소리는 봄 소식을 실어 보낸다.
대숲에 둘러싸인 안고잔골이 고적하다. 경계 훈련 중인 병사들이 안고잔골에서 도성1길로 나온다. 고적함이 아닌 경계심이 안고잔골 곶부리처럼 돌출한다. 안고잔골의 고요와 평화를 침범하는 자 누구인가? 안고잔골 도성1길을 따라 언덕을 넘어 다음 지역으로 이동하는 병사들을 따라 길손도 발걸음 속도를 내지만 거리는 멀어진다. 언덕의 대숲에서 불쑥 누군가 나올 것 같다.
언덕을 넘으면 안고잔골 곶부리 북쪽 해안에는 선배골과 도성리 포구가 있다. 선배골이 무슨 뜻일까? 골짜기 지형이 배를 세운 모양을 닮아서일까? 선배골 오른쪽에 마을이 형서되어 있고 그 오른쪽에 도성리 포구가 자리한다. 그 곁에는 닭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가 활개를 치며 목청을 높인다. 닭섬이다.
가랑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내린다. 봄의 그리움에 사무친 탓일까? 가랑비가 내리는 가로림만 바다는 비구름에 덮여 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길손은 이 흐릿한 잿빛 가로림만 풍경 속에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끙끙거리며 걷는다. 지곡면 도성리와 대요리를 잇는 제방으로 올라가 제방길을 걷는다. 가야할 길은 분명히 파악되지 않고, 맞은편 지곡면 환성리 해안을 어림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이 제방에서는 웅도와 도둑적섬, 가로림만 내해가 북쪽으로 이어지는 해안선을 조망하여야 하는데 아쉽지만 오리무중이다. 제방 안쪽의 대요리 간척 농지는 드넓게 펼쳐지고 그 위쪽의 지곡저수지는 보이지 않는다. 진충사가 있는 국사봉을 어림한다. 지곡저수지와 면해 있다면 분명 국사봉과 정충신 묘소 그리고 진충사가 가늠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안절부절 쩔쩔맨다.
제방 북쪽 끝 작은 곶부리 입구에서 경계 훈련하는 병사들을 다시 만났다. 그들은 곶부리 숲으로 들어가고 길손은 곶부리 해안에서 가로림만 동북쪽 대요리와 환성리 해안을 어림하며 애태웠다. 아, 맞은편 저 섬이 도둑적섬이고, 그 뒤에 환성3리 마을회관이 있겠지. 맞을까? 어림과 짐작은 불분명하며 짐작이 맞을 때 환호한다. 제방 북쪽 끝 대요리 해안 바로 위 북쪽 곶부리 너머에 상무지골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상무지골 곶(串)부리라고 불러줘도 괜찮겠지. 상무지골 곶부리는 78코스 탐방길에서 잿빛 비구름 풍경 속에서 위치를 확인하는 표지가 되었다.
지곡면 대요리 진충사길을 따라 가로림만 대요리 해안 언덕길을 따라간다. 상무지골 입구를 지나면 오른쪽 골짜기는 여우성골인 듯, 언덕을 넘으면 산불 피해를 입은 것 같은 언덕에 묘목들이 조림되어 있다. 이곳에서부터는 송전전압 154,000v가 흐르는 전선이 통과하는 송전탑들이 줄지어서 있다. 이제부터는 직선으로 이어지는 송전탑들을 따라 이리 꼬불 저리 꼬불 산길과 들길을 지나 대요리와 환성리로 이어간다.
진충사(振忠祠)는 국사봉 북쪽 골짜기 아뫼골에 자리하고, 정충신 묘소는 국사봉 남쪽에 자리한다. 진충사 입구에서 왼쪽에 자리한 금남군 충무공 정충신 사적비(錦南君忠武公鄭忠信事蹟碑)를 살피고 진충사 홍살문과 외삼문 앞으로 가서 설명안내판을 읽었다. 정충신(鄭忠信, 1576~1636)은 원래 전라남도 광주 일대에 세거하고 있었는데, 인조반정의 논공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 이괄(李适, 1587~1624)의 난을 진압하는 공을 세운 후, 이괄 가문의 땅이었던 이곳 대요리 일대를 사패지로 받게 되어 이곳에 거주하게 되고 유택도 이곳에 정했다고 한다. 진충사는 정충신을 제향하는사당(祠堂)으로, 1968년 복원한 후 개칭하여 진충사(振忠祠)라고 지었다고 한다. 진충사(振忠祠)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진충사 탐방은 다음을 기약하고 진충사를 떠난다.
진충사에서 아뫼골을 돌아 대요벗개길 언덕을 넘어 대요무쇠점길을 따라 내려가면 무쇠점골, 서해랑길은 무쇠점골 들녘 농로를 따라 가로림만 해안 방향으로 나간다. 드넓은 무쇠점골 들녘은 대요리 국사봉 자락과 환성리 절골 해안을 잇는 제방에 의해 조성된 간척농지이다. 서해랑길은 가로림만 해안으로 나가다가 무쇠점골 간척농지를 가로질러 지곡면 대요리에서 환성리로 들어간다. 가로림만 바다로 이어지는 수로가 대요리와 환성리의 경계가 되며, 수로 다리를 건너 환성절골길을 따라간다. 수로 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환성절골길 옆에 붉은 기운을 띈 산수유나무 조림지가 있다. 거친 껍질의 줄기 끝 가지들이 봄의 빛을 뿜어내는 것 같다. 머지않아 이곳에 노란 산수유꽃이 피어 가로림만 해안을 노랗게 물들일 것이다.
절골 마을에서 보면 송전전압 154,000v가 흐르는 전선이 통과하는 송전탑이 건너편 대요리 지역에서 줄을 맞추어 이곳으로 진행한다. 송전탑은 농가 바로옆을 통과한다. 고압 송전을 조심하고 송전탑 훼손을 경고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이 송전탑들이 농가 주민들에게 피해는 없는지 궁금하다. 오히려 길손의 마음이 불안해진다. 절골 고개를 넘는다. 큰골 들녘이 펼쳐지고 가야할 통개 해안과 언덕의 펜션촌이 보인다.
새로운 풍경이면서 낯익은 듯 정답고, 정겨운 듯하다가도 낯설게 느껴지는 탐방길은 예상과 배반을 되풀이한다. 저렇게 지나겠지,그러나 이렇게 돌아가고, 이쪽으로 직진하겠지, 그러나 저쪽으로 돌아가고, 별거 아니겠지, 그러나 특별한 것이 되고, 정말 멋지군,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평범한 것이 된다. 예상과 배반은 그러나 즐거운 탐방길을 부채질하며 세상의 모든 것은 예상대로 되는 것이 아니며 미의 감각은 취향이며 대상의 미는 그 자체로 고유함을 깨닫게 한다. 앞서가는 일행들이 큰골 들녘을 빙 돌아서 파란 지붕의 농가 앞을 거쳐 통개 들녘으로 나간다. 길손은 분명한 경로를 확인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큰골 들녘을 돌아 통개 들녘으로 나갔다. 지도에 환성낚시터라고 표시되어 있는 곳은 농지로 바뀌어 있고, 북쪽에 고라지골과 고라리 지역이 있다. 통개 들녘에서는 통개 제방 너머로 방금 걸어온 대요리 상무지골 곶부리와 도성리 선배골 마을의 도성리 포구가 어림된다. 가로림만 동북쪽을 돌아서 지금은 서남쪽으로 진행하고 있다.
통개 들녘 환성절골길에서 환성고라리길로 나간다. 하늘에는 겨울 철새 기러기들이 행렬을 지어 날아간다. 너희들도 곧 북쪽으로 날아가겠지. 마음껏 가로림만 하늘을 날아라.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 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박목월 작시, 김성태 작곡의 가곡 '이별의 노래'를 홀로 불러본다. 길손 또한 환성리 통개 들녘과 이별하고, 그윽한 해송이 솟은 환성고라리길 언덕으로 올라간다. 오른쪽 언덕에는 펜션촌이 자리하고 있다. 서해랑길은 펜션촌 언덕으로 곧바로 올라가지 않고 언덕 아래로 내려가 오른쪽으로 빙 돌아서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이 길에서는 지곡면 도성리 선배골 해안의 도성리 포구와 닭섬, 지곡면 대요리 상무지골 곶(串)부리가 가늠된다. 방금 저곳에서 이곳을 가늠하며 궁금하였다. 이제는 이곳을 가늠한 저곳의 분명한 위치를 흐릿한 풍경 속에서 확인한다. 가로림만 해안을 돌아가는 탐방길의 묘미가 절로 솟구친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3.25km 중 7.63km
전체 소요 시간 : 2시간 59분 중 1시간 41분
도성3리 마을회관에는 도성3리 어업인회관&도성리 노인회관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에 속하는 법정리인 도성리(桃星里)는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시 도원리(桃源里)의 ‘도’자와 성동(星洞)의 ‘성’자를 따서 도성리(桃星里)가 되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돗다란리, 셩동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조선 시대에 저주리(猪走里)이던 마을이 1895년 성동과 도원리의 두 개 리로 분리되었다. 1914년 도원리와 성동리가 합쳐져 서산군 지곡면 도성리가 만들어졌다. 1995년 서산군과 서산시의 통합에 따라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가 되었다. 구릉성 산지와 곡간지(谷間地)로 이루어져 있으며, 곡간지는 가로림만에 의해 간석지가 발달하였던 지역으로 간척지가 많이 분포하고 있다. 3개의 행정리, 10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릉지 주변에 성동·안태·고잔·닭전·잔넘어·시드물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특산물은 낙지, 바지락, 굴, 맛 등 해산물이다. 2010년 7월에 칠지도 제작 야철지 기념비가 도성리 마을회관 앞에 건립되었다. 또한 2011년 7월 14일에 도성리 마을회관에 주민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칠지도 제작 도장(刀匠) 추모제가 열렸다. 동쪽은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와 화천리, 서쪽은 중왕리, 남쪽은 산성리, 북쪽은 가로림만에 접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에 서해랑길 78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나무 줄기에 매달려 있다.
도성3리 마을회관 앞에서 칠지도 제작 야철지 기념비(七支刀製作冶鐵址紀念碑)와 뒤쪽의 쇠풍리골을 바라보았다. 회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서해랑길 77·78코스 안내도가 있고, 왼쪽 뒤에 망미산, 중앙 뒤에 가로림만 중리포구가 가늠된다.
도성리 야철터(桃星里冶鐵址)는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 쇠팽이에 있는 야철 터.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는 지곡면 중에서도 가장 서북단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높이 70m 이하의 낮은 구릉성 산지가 가로림만과 맞닿아 있는데, 이 구릉성 산지를 중심으로 주변에 마을들이 펼쳐져 있다. 특히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 쇠풍리골[쇠팽이]과 음불이골[은부리]은 남북 방향의 낮은 고개를 중심으로 좌우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주변을 중심으로 철 슬래그편들이 다량으로 확인되고 있다. 도성리 야철 터는 아직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사례가 없으며, 『문화유적분포지도』에 간략한 정황이 서술되어 있다. 주민들의 전언에 따르면 은부리마을에서 최근까지 철광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 일대가 철 생산지 혹은 철 수공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 마을 입구 마을 회관에는 2010년에 세워진 칠지도제작야철지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도성리 야철 터가 백제 왕이 369년에 일본 왕을 위해 만든 칠지도(七支刀)의 제작지라는 전언에 따라 지역 주민들이 건립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도성리 야철 터가 백제 시대 이후의 유적임을 입증할 만한 학술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양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지곡면 도성리 도성국사봉길에 서해랑길 77·78코스 안내도가 세워져 있고, 왼쪽은 쇠풍리골 들녘이다.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에 속하는 법정리 도성리(桃星里)는1914년 행정 구역 개편 시 도원리(桃源里)의 ‘도’자와 성동(星洞)의 ‘성’자를 따서 도성리(桃星里)가 되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돗다란리, 셩동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조선 시대에 저주리(猪走里)이던 마을이 1895년 성동과 도원리의 두 개 리로 분리되었다. 1914년 도원리와 성동리가 합쳐져 서산군 지곡면 도성리가 만들어졌다. 1995년 서산군과 서산시의 통합에 따라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가 되었다. 구릉성 산지와 곡간지(谷間地)로 이루어져 있으며, 곡간지는 가로림만에 의해 간석지가 발달하였던 지역으로 간척지가 많이 분포하고 있다. 3개의 행정리, 10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릉지 주변에 성동·안태·고잔·닭전·잔넘어·시드물 등의 자연 마을이 있다. 특산물은 낙지, 바지락, 굴, 맛 등 해산물이다. 2010년 7월에 칠지도 제작 야철지 기념비가 도성리 마을회관 앞에 건립되었다. 또한 2011년 7월 14일에 도성리 마을회관에 주민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칠지도 제작 도장(刀匠) 추모제가 열렸다. 동쪽은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와 화천리, 서쪽은 중왕리, 남쪽은 산성리, 북쪽은 가로림만에 접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 78코스는 거리 13km, 소요시간 4시간, 난도 쉬움이라고 적혀 있다. 지도 위아래가 바꾸어 었다.
왼쪽은 서해랑길 77코스 탐방길인 도성국사봉길이고, 서해랑길 78코스는 도성1길을 따라 직진한다.
도성1길에 서해랑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지곡면 도성리 704 지역, 진충사 3.8km, 대산 버스터미널 13km 지점이다.
왼쪽 뒤에 도성3리 마을회관, 그 앞에 칠지도 제작 야철지 기념비(七支刀製作冶鐵址紀念碑), 도성국사봉길과 도성1길 갈림목인 삼거리에 서해랑길 77·78코스 안내도와 서해랑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오른쪽길은 도성1길 간선도로이고 왼쪽길은 도성1길 지선으로 고지기골로 이어진다. 서해랑길을 단축하고자 하면 간선도로를 따라가면 되고, 서해랑길은 지선을 따라가 고지기골을 거쳐 다시 간선도로와 만난다.
서해랑길 77코스 탐방길 방향을 조망한다. 중앙에 벌담들과 방조제, 왼쪽 뒤에 망미산, 오른쪽 뒤에 중리포구가 가늠된다.
도성1길 지선을 따라 고지기골 언덕으로 올라간다. 오른쪽 앞에 스카이로켓향나무 묘목들이 자라고 있다.
고지기골 언덕에서 걸어온 도성1길 지선을 돌아본다. 왼쪽은 쇠풍리들, 오른쪽은 벌담들이다.
도성1길 지선이 헤어진 도성1길 간선도로와 만난다. 서해랑길은 왼쪽 방향으로 도성1길을 따라간다.
오른쪽 도성1길 지선의 고지기골 언덕을 넘어 왼쪽 도성1길 간선도로와 재회하였다.
왼쪽 길은 도성계사길, 서해랑길은 오른쪽 도성1길을 따라 직진한다.
왼쪽은 고잔골, 고잔은 곶(串)의 안쪽을 이르니 바깥고잔은 고잔 바깥 지역이라는 뜻일 것이다.
왼쪽은 고잔골이다. 가리림만 바다로 돌출한 곶(串)부리가 오른쪽에 있다.
앞쪽의 안고잔골 방향으로 벚나무 가로수가 조성된 도성1길을 따라간다. 바다에는 닭섬이 있다.
오른쪽에 닭섬이 있다. 웅도, 고파도, 태안군 이원반도가 보여야 하는데 운무에 덮인 바다는 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안고잔골 마을 입구에 안고잔 버스정류장이 있다. 서해랑길은 도성1길을 따라 언덕을 넘는다.
언덕을 넘어 도성1길을 내려오면 도성리 포구 입구에 지곡면 도성1리 버스정류장과 그 아래에 도성1리 절골이 있다.
안쪽 골짜기는 선배골, 마을은 선배골 마을, 그 오른쪽에 도성리 포구의 선착장이 있다.
도성리 포구는 도성항으로도 불리며, 마을 사람들도 언제부터 포구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는 조선 시대 지곡면 저주리로 32호 79명이 살았으며 오래전부터 어선 몇 척으로 주변 지역에서 어로 행위를 했다고 한다. 2011년 현재 비지정 소규모 어항으로 어선 31척, 총 톤수 54.35톤에 평균 톤수는 1.75톤이며 계류 시설로는 510m의 선착장이 있다. 도성리 포구는 지형적으로 살펴보면 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으며, 산자락 밑에 위치하고 있어 포구로서는 발전하기 힘든 조건을 가지고 있다. 현재 포구 입구 쪽 도로의 확장과 포장, 시설 정비 등이 필요한 실정이다. 이러한 이유로 서산시에서는 도성리 포구를 어촌의 생활 근거지가 되는 소규모 어항인 어촌 정주 어항으로 지정하기 위하여 2011년에 사전 환경성 영향 평가를 실시할 계획이다. 또한 폐유와 폐어구 등에 의한 해안가 환경 오염을 예방하기 위하여 가로 2m, 세로 1m, 높이 1m, 용량 2.1톤의 간이 폐유 저장 시설을 설치하였다. 선착장 주변은 우럭, 망둥이, 붕장어 등 바다 낚시로 유명하며, 포구 안쪽은 낙지와 맛, 조개 등을 채취할 수 있어서 갯벌 체험지로 각광받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어구적치장 왼쪽 뒤는 지곡면 환성리 가로림만 해안일 것이다.
건너편에 지곡면 환성리 해안이 이어지고 그 앞에 도둑적섬이 가늠된다.
도로명이 도성1길에서 진충사길로 바뀌고, 앞에 보이는 배수문에서 행정구역이 지곡면 도성리에서 대요리로 넘어간다.
충남 서산시 지곡면에 속하는 법정리인 대요리(大要里)는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시 수동[古水洞], 요동(要洞), 대조리(大鳥里)가 합해지면서 대조리에서 ‘대’자와 요동리에서 ‘요’자를 따서 대요리(大要里)가 되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지와 요[要洞]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대요리 지역은 원래 지곡면 고수철리와 대조곶리(大鳥串里)였으며, 1895년 대조곶리에서 요동리가 분리되어 3개 리가 되었다. 1914년 수동, 요동, 대조리 3개 리가 합병되면서 대요리가 되었다. 1995년 서산군과 서산시의 통합에 따라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가 되었다. 가야산 줄기인 망미산맥이 대산 쪽으로 이어지는 산지로, 국사봉과 같은 낮은 구릉성 산지가 분포하고 있다. 동쪽으로 원천이 흐르며 지곡저수지가 있다. 2개의 행정리, 8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릉지의 계곡 주변에 한우물·무수점·반계 등의 자연 마을과 농경지가 분포하고 있다. 특산물로는 서산 캡오이가 있다. 대요리에는 조선 시대의 무장인 정충신(鄭忠信)의 사당과 묘가 있다. 정충신 사당[진충사]은 국사봉 중턱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정충신 묘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10호로 지정되었다. 국도 29호선이 대요리의 중앙부를 관통하고 있다. 동쪽은 대호지호를 경계로 당진군 대호지면 출포리, 남쪽은 서산시 음암면 부장리와 지곡면 화천리, 남서쪽은 지곡면 도성리, 북쪽은 지곡면 환성리와 접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지곡면 도성리와 대요리를 잇는 방조제가 길게 이어진다. 배수문 오른쪽 뒤 언덕에 맑은품팬션이 자리하고 있다.
지곡면 도성리와 대요리를 잇는 제방이 이어지고 가로림만 해안은 대요리를 빙 돌아 왼쪽 지곡면 환성리로 이어진다.
가로림만 중앙에 위치한 웅도가 보여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은 지곡면 환성리 검은뿌리곶(串), 왼쪽은 지곡면 도성리 선배골마을과 도성리 포구이다.
수로 위쪽에 있는 지곡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이 저류지(貯留池)를 형성하고 있다. 왼쪽 뒤의 산봉이 진충사와 정충신 묘소가 있는 국사봉이 맞을까?
제방길에서 내려와 지곡면 대요리 진충사길을 따라간다. 오른쪽 언덕에 '맑은품팬션'이 자리한다.
진충사길을 따라오다가 다시 제방길로 올라왔다. 제방 끝 왼쪽에 지곡면 도성리 절골마을, 오른쪽은 도성리 선배골이다.
중앙에 지곡면 도성리 선배골마을, 그 오른쪽에 도성리 포구가 있고, 그 오른쪽 뒤에 지곡리 닭섬이 있다.
맨 오른쪽은 지곡면 대요리 국사봉 해안, 중앙은 지곡면 환성리 통개 해안, 그 왼쪽은 환성리 덕적골 해안, 그 왼쪽에 도둑적섬이 흐릿하게 보인다. 맨 왼쪽에는 검은뿌리곶(串)이 있을 것이다. 경계 훈련 중인 병사가 오른쪽 숲에 있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진충사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간다. 앞쪽의 곶(串)부리 뒤는 상무지골이라 이르는 것 같다.
오른쪽 지곡면 대요리에서 중앙 왼쪽 환성리로 가로림만이 동북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진다. 오른쪽은 상무지골 곶(串)부리, 그 뒤 오른쪽에 진충사, 중앙에 국사봉과 절골 방조제, 그 뒤쪽에 무쇠섬골을 가늠한다.
오른쪽 뒤에 지곡면 도성리 포구, 맨 왼쪽 뒤에 도성리 절골, 중앙에 도성리-대요리 방조제, 진충사길을 따라오고 있다.
건너편은 오른쪽 환성리 절골 해안에서 왼쪽 환성리 검은뿌리곶(串) 해안으로 가로림만이 이어진다. 왼쪽의 섬은 도둑적섬이다.
진충사길을 따라 언덕으로 오르다가 뒤돌아본다. 중앙 뒤에 닭섬과 그 왼쪽에 도성리 포구와 선배골마을이 보인다.
진충사길을 따라 언덕을 넘는다.
언덕을 넘어 내려오면 왼쪽에 상무지골로 내려가는 길이 있고, 오른쪽 구릉 뒤쪽은 여우성골인 것 같다.
여우성골을 지나 언덕을 넘어 내려오면 언덕에 묘목들을 조림한 곳이 나온다.
묘목 조림지 언덕을 지나면 송전전압 154,000v 송전탑이 통과하고 있으며 왼쪽에는 태양광발전소가 조성되어 있다.
지곡면 대요리 해안 간척지에 태양광발전소가 드넓게 조성되어 있다. 건너편은 지곡면 환성리 절골 해안이다.
서해랑길은 진충사길을 따라 오른쪽 국사봉 자락에 위치한 건너편 중앙의 아뫼골 진충사 앞으로 이어간다.
아뫼골 진충사 앞에서 오른쪽 언덕에서 중앙의 연기 피어나는 농가를 지나 왼쪽 파란 지붕의 농가가 있는 언덕으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농가와 축사 앞을 지나 진충사길을 따라 왼쪽으로 이어간다. 국사봉이 중앙 뒤에 있고, 그 남쪽 아래에 진충사, 그 북쪽 아래에 정충신 묘소가 있는 것 같다.
오른쪽 뒤에 드넓은 태양광발전소가 있고, 서해랑길은 진충사길을 따라 왼쪽 농가와 축사 앞을 거쳐 왔다.
오른쪽에 아뫼골의 진충사가 있으며 서해랑길은 중앙의 언덕에서 왼쪽으로 이어간다.
진충사(振忠祠) 홍살문과 외삼문이 앞에 보인다. 국사봉 뒤쪽에 정충신 묘소가 있다고 한다.
정충신 사당(鄭忠信祠堂) 진충사(振忠祠)는 정충신(鄭忠信, 1576~1636)을 제향하고 있는 사우로 1636년(인조 14) 왕명에 의해 건립되었다. 위패를 도난당하는 등 어려움이 있자 후손 정세오(鄭世奧)가 사당을 지었다가 1897년(고종 34) 9세손 정세칠(鄭世七)이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구 사당은 현재 정충신 사당으로부터 북쪽 300m 지점에 있었다. 1968년 사우를 복원한 후 진충사로 개칭하였다. 최근에도 몇 차례의 중수와 개축이 이루어졌다. 정충신 사당은 조선 후기 서산 지역 무인 가문의 사우 건립과 인물의 추숭 활동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다. 특히 정충신의 증시교지(贈諡敎旨)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들이 전하고 있어 당시의 국가적인 사건과 지역의 실정을 파악하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정충신(鄭忠信)[1576~1636]은 원래 전라남도 광주 일대에 세거하고 있었는데, 1633년(인조 11) 당진에 유배된 이후 서산 대산에서 은거하다가 지곡면 대요리의 지세를 살펴보고 자신의 묘소를 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일대는 인조반정의 논공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 이괄(李适)[1587~1624] 가문의 땅이었다고 하는데, 정충신이 이괄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후 대요리 일대를 사패지로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금성 정씨(錦城鄭氏)들이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일대에 정착하여 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충신은 사후 29년 만인 1685년(숙종 11)에 충무공(忠武公) 시호를 받았으며, 영정과 위패는 종손이 보관하면서 제향을 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정충신 사당(鄭忠信祠堂) 진충사(振忠祠) 문화재자료 제206호. 이 사당은 충무공 정충신(鄭忠信) 장군의 신위(神位)와 영정(影幀)을 모신 곳이다. 금성 정씨(錦城 鄭氏)인 공(公)은 고려말(高麗末) 명장 경렬공(景烈公) 지(地)의 9대 손으로 금천군(錦川君) 윤(倫)과 정경부인 영천 이씨(永川 李氏) 사이의 둘째 아들로 1575년 12월 29일(선조 8년) 전라남도 광주 향교동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천문, 지리, 의술, 시문 등 다방면에 정통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 광주목사 권율(權慄) 밑에서 종군(從軍)하던 공은 17세의 어린 나이로서 홀몸으로 장계(狀啓, 전황보고서)를 평안도 의주(義州)에 계신 선조(宣祖) 임금께 전달하여 조정의 만주(滿洲) 망명(亡命)을 막았다. 공은 그 해(1592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창주첨사, 만포진첨사, 평안도병마좌우후, 안주목사 겸 방어사로서 우리 나라의 최북단에서 국토방위에 전력하였고, 명(明), 청(淸), 일본국(日本國)을 방문하여 동북아시아 정세를 달관하는 등 군사 외교가로 활약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전부대장(前部大將)이 되어 서울 안현(鞍峴, 길마재) 전투에서 반란군을 토벌, 난을 평정하고 공을 논하는 자리에서 대수장군(大樹將軍)의 풍모를 보이시며 공을 사양하였다. 그러나 인조(仁祖)께서는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 훈호와 금남군(錦南君)을 봉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에는 팔도부원수(八道副元帥)로 활약, 청군(清軍) 3만을 외교적으로 철수시켜 서북지방을 회복하였으며 1630년 명(明)나라 장수 유흥치(劉興治)가 일으킨 난에는 주사원수(舟師元帥)로 참전하여 난을 수습하였다. 공은 평안도, 경상도 병마절도사, 포도대장, 오위도총관 등을 역임하면서 청렴결백하게 조국과 겨레를 위해 충절을 바쳤다. 1636년 5월 4일 숙환이 악화되어 61세로 별세하니 임금이 크게 슬퍼하시며 어의(御衣)를 벗어 수의(壽衣)로 하사하고 예장(禮葬)을 명하였다. 숙종(肅宗) 11년(1685.8.11)에 충무(忠武) 시호(諡號)을 주어 공의 업적을 후세에 전하도록 하였다. 이곳 마힐산(摩詰山)은 인조가 하사한 봉토(封土)로써 공이 생전에 정한 유택(幽宅)에 모셨다. 1966년 후손과 지방 유지들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1970년 진충사를 건립하게 되었고 매년 4월 25일 제향을 올리고 있다.
언덕에 서해랑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지곡면 대요리 669-5 지역, 환성3리 마을회관 4.7km, 서해랑길 78코스 종점 9.1km 지점이다. 서해랑길은 왼쪽 진충사길로 올라간다.
왼쪽 뒤에 지곡면 대요리 상무지골 곶(串)부리, 중앙 앞에는 태양광발전소, 오른쪽 뒤는 대요리 국사봉, 그 뒤쪽은 환성리 절골 해안, 건너편은 환성리 통개 해안일 것이라 가늠한다.
맨 오른쪽에 태양광발전소, 그 왼쪽 진충사길을 따라 농가와 축사, 용수골 입구를 거쳐 진충사 입구로 이어왔다.
진충사가 있는 산봉은 예전에 마힐봉이라 불리다가 현재는 국사봉으로 불린다고 한다. 진충사 입구에서 언덕으로 올라왔다.
서해랑길은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농가 옆 진충사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돌아서 중앙 뒤 농가가 있는 언덕으로 오른다.
아뫼골 언덕에서 굴뚝 연기 피어 오르는 파란 지붕의 농가 앞을 거쳐 언덕으로 오르고 있다. 오른쪽 뒤에 농가와 축사, 중앙 뒤에 용수골 넘어가는 언덕이 보인다. 저 언덕 너머에 지곡저수지가 있을 것이다.
왼쪽의 파란 지붕의 농가 앞을 거쳐 대요벗개길 언덕으로 올라간다.
지곡면 대요리 635-3, 환성3리 마을회관 4.3km, 78코스 종점 8.7km 지점이다. 언덕에서 대요벗개길을 왼쪽으로 따라간다.
왼쪽 소나무 줄기 뒤에 진충사가 있는 국사봉이 가늠된다. 오른쪽 파란 지붕의 농가가 위치 확인의 표시가 되어 주었다.
잠시 언덕 오른쪽으로 와서 진행 방향의 대요벗개길을 바라본다.
언덕의 대요벗개길을 따라오다가 서해랑길 이정목이 있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대요무쇠점길을 따라 내려간다.
대요무쇠점길을 따라 내려오면 무쇠점골의 넓은 들녘이 펼쳐진다.
오른쪽 갈림길에서 무쇠점길은 오른쪽으로 이어지고 서해랑길은 왼쪽 농로를 따라간다. 마늘들이 푸르게 자라고 있다.
서해랑길은 가로림만 해안 방향으로 수로 옆 농로를 따라 이어간다. 환성3리 마을회관 3.9km 지점이다.
지곡면 대요리 무쇠점골 들녘 건너편 중앙 뒤는 지곡면 환성리 절골, 왼쪽 뒤는 지곡면 환성리 통개와 불거머리골 해안인 듯.
왼쪽은 대요리 국사봉 부리, 오른쪽은 환성리 절골, 그 사이로 제방이 조성되어 있고, 중앙은 불거머리골 해안, 그 앞은 도둑적섬인 듯. 건너편은 지곡면 도성리 선배골 해안과 도성리 포구일 것이라 추정한다.
수로 다리를 건너 지곡면 대요리에서 환성리로 넘어간다. 앞쪽에 산수유나무 육림지가 있는데 붉은 빛을 띠고 있다.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에 속하는 법정리인 환성리(環城里) 지역은 마을 모습이 문고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골환이[谷環里]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시 문곶리(門串里)와 지곡면 대요리(大要里) 사이에 동서로 쌓은 토성(土城)인 나성(羅城)이 있었으므로 골환이의 ‘환’자와 토성의 ‘성’자를 따서 환성리가 되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 서산군 대산면(大山面)에 탑골[塔洞] 등 관련 지명이 보인다. 환성리는 조선 시대에 대산면의 문곶리와 탑동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문곶리와 탑동의 일부분을 합쳐 환성리라 하고 서산군 지곡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서산군과 서산시의 통합에 따라 서산시 지곡면 환성리가 되었다. 대호지만과 가로림만은 리아스식 해안이 발달했던 지역이지만, 대호지만은 간척이 완료된 이후 농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서부의 가로림만은 소규모로 간척되었다. 차별 침식을 받아 광범위하게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고 있다. 3개의 행정리, 9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밤골·절골·목재·토성골·문꼬지·헌터울 등의 자연 마을이 있다. 헌터울 동북쪽에 물새들이 많이 살았던 새섬이 있다. 특산물로는 간척지와 구릉지에서 재배하는 쌀, 생강, 고추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 뒤에 무쇠점골에서 농로를 따라 무쇠점골 들녘을 가로질렀다.
왼쪽 앞은 대요리 국사봉 자락, 중앙 앞의 방조제가 오른쪽 환성리 절골 해안으로 이어진다. 왼쪽 뒤는 대요리 상무지골 곶(串)부리이며, 중앙 송전탑 뒤의 섬은 도둑적섬, 그 오른쪽은 환성리 불거머리골 곶(串)부리인 듯.
지곡면 대요리에서 환성리로 넘어와 환성절골길을 따라간다. 왼쪽 뒤에 절골이 보이고 오른쪽에 산수유나무 조림지가 있다.
환상절골길에서 뒤돌아서 국사봉 자락과 이어지는 절골 방조제와 건너편의 대요리 상무지골 해안을 바라본다.
서해랑길은 환성절골길을 따라 왼쪽 위 절골 고개를 넘어 큰골로 내려간다.
환성절골길을 따라 절골 들녘 가장자리를 돌아 언덕으로 올라오다가 뒤돌아본다. 중앙 뒤에 보이는 대요리 국사봉 자락에서 오른쪽 뒤 절골로 이어지는 방조제가 있다. 송전전압 154,000v의 송전탑이 들녘을 가로지른다.
환성절골길을 따라 절골 고개를 넘어 큰골로 내려간다.
절골 고개를 넘어 지곡면 환성리 큰골 지역을 내려본다. 중앙 뒤에 보이는 산봉은 망뫼산인 듯.
서해랑길은 오른쪽 큰골을 돌아 파란 지붕의 농가 앞을 거쳐 중앙 왼쪽 뒤 고라지골 앞으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환성절골길을 따라 왼쪽의 파란 지붕의 농가 앞을 거쳐 왼쪽으로 돌아나간다.
서해랑길은 환성절골길을 따라 오른쪽에서 왼쪽 통개 들녘을 돌아 중앙의 농가를 거쳐 오른쪽 고라지골 입구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환성절골길을 따라 파란 지붕 농가 앞을 거쳐 돌아간다.
파란 지붕 농가 입구의 서해랑길 이정목을 거쳐 파란 지붕 농가 앞을 거쳐 돌아간다. 78코스 시종점 6.5km 지점이다.
절골고개를 넘어 큰골로 내려와 환성절골길을 따라 큰골마을을 지나 파란 지붕 농가 앞으로 왔다.
서해랑길은 환성절골길을 따라 중앙의 비닐하우스 채소재배지를 돌아간다. 건너편은 대요리 상무지골 해안일 것이다.
건너편은 지곡면 대요리 상무지골 해안일 것이다.
통개 들녘에 푸른 마늘밭이 펼쳐져 있다. 오른쪽 뒤가 고라지골, 그 오른쪽 지역에 고라리가 있는 듯.
중앙 앞은 지곡면 환성리 통개 해안, 중앙 뒤는 대요리 상무지골 곶(串)부리, 그 오른쪽 뒤는 지곡면 도성리 선배골 해안인 듯.
통개 들녘을 가로질러 중앙의 고라지골 입구로 진행한다. 왼쪽에 있다는 환성낚시터는 농지로 변하였다.
환송절골길을 따라 큰골 들녘을 위쪽에 왼쪽으로 돌아 오른쪽으로 나와 통개 들녘을 가로질러 이곳으로 왔다.
왼쪽 뒤는 절골 해안, 중앙 앞은 통개 해안, 중앙 뒤는 대요리 국사봉, 오른쪽은 통개 곶(串)부리, 건너편은 대요리 해안이다.
환성절골길에서 환성고라리길로 나간다.
환성고라리길 입구에서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왼쪽 뒤 절골 고개를 넘어 큰골로 내려와 오른쪽 통개 들녘을 돌아왔다.
환성고라리길 언덕으로 올라간다. 오른쪽 언덕에 있는 건물은 노을이야기 펜션이다.
기러기 행렬이 지곡면 환성리 환성고라리골 언덕 펜션단지 하늘을 날아간다.
지곡면 환성리 환성고라리길 언덕에 펜션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서해랑길을 단축하고자 하면 오른쪽 길을 따라 앞에 보이는 노을이야기 페션으로 직진하면 된다.
서해랑길은 환성고라리길을 따라 펜션단지를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건너편은 지곡면 도성리 선배골 도성리 포구이다.
건너편 왼쪽 뒤에 도성리 포구와 닭섬이 가늠된다. 지금 서해랑길은 환성고라리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서해랑길은 왼쪽 환성고라리길을 따라 건너편 언덕의 펜션단지 앞을 거쳐 맨 오른쪽 노을이야기 펜션을 왼쪽으로 돌아간다.
펜션단지로 돌아가는 환성고라리길에서 가로림만 해안의 위치를 확인한다. 왼쪽 바다 앞 곶부리는 지곡면 대요리 상무지골 곶(串)부리, 오른쪽 건너편 뒤는 지곡면 도성리 선배골 해안과 도성리 포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