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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도 운명을 바꾸려면 본성이나 지성으로 살아서는 안 되고
영성을 터득해야만 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자연적인 신관으로
영성을 계발한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사기(?)를 치고 영혼을 사고팔고
하는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기독인들 중에도 그 방법을 쫓고 있는
이들이 상당수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에 대한 원리를 알고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는지 그리고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아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2절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천사가 말한 말씀이 견고하게 되었다, 확정되었다는 것은 율법에 대한
말씀입니다. 율법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만 법적인 말씀입니다. 반면에
아들의 말씀은 레에마로서 영과 생명으로(요6:63) 스며드는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반 율법주의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 말로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다는 겁니다. 골2:14절의 말씀을 근거로 ‘율법을 제하여 버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율법의 반대편으로 옮기시므로 율법이
건드리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일 뿐 율법을 없애 버렸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율법은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무튼 이 사람들은 간이 큰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신학적으로 말해서 반 율법주의자라 합니다. 율법은 그대로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로마서7:14절에 율법도 신령한 것이라 말했습니다.
율법이 아니면 아무도 죄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죄를 깨달을 수 없으면 예수그리스도께로
갈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율법은 여전히 죄인을 두들겨 팹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라고
말입니다. 몽학선생이란 말은 두들겨 패서 학교로 보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율법에 대해서 우리가 죽었습니다(갈2:19)
하나님은 존재하시는 말씀이신 동시에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체가 말씀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하신 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사람이신 예수님으로 나타나셨고 또 진리의 성령으로도 우리 안에 나타나십니다.
모세에게 나타내시고 말씀하셨지만 엘리 제사장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은 법으로 군림하고 죽이는 자들을 더욱 귀하게 여기고,
살리는 직분을 무시합니다. 사도바울은 죽이는 직분이 아니고 살리는 직분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가 사도바울을 아주 우습게 본 것입니다. 갈라디아교회도 바울을
율법을 내세우지 않으므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본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열 받은 것입니다. 만약 천사라도 내가 전하는 복음 말고 다른 복음을 증거 한다면
저주를 받을지니(갈1:9) 하는 막말을 합니다. 지성적인 경건을 따라 교육학으로 입에
기름을 친 것 같은 수사학으로 잘 가르치는 것으로 수십 년 목회를 하는 목사에게
바울의 심정으로 당신 지금 죽으면 불 못이라는 말을 해 주고 싶으나 꾹 참고 있습니다.
바울은 참 대단합니다. 천사라도 아들의 복음을 증거 하지 않으면 울리는
꽹과리라고 말합니다(고전13:1) 아들의 음성이 아니면 안 된다 이게 사도바울의
배짱입니다. 이 마지막 날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아들의 영만 하나님의 아들들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천사라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제가 처음 이 말씀을 읽을 때 사도바울이 술에 취한 줄로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왜냐하면 천사라면 어느 정도의 경외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도바울의
확신에 찬 진술은 천사를 비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천사쯤은 아들 곧 구원받을 후사의
부리는 영이라는 신분이라는 말입니다. 천사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의 구원을 돕는
역할일 뿐 생명자체는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깨달은 바울이라는 말입니다.
언제나 우리가 되새기는 말씀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3절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
이 같이 큰 구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말씀이신 ‘호 로고스’ 입니다.
등한히 여긴다 이 말은 뒷전으로 흘러버린다는 뜻입니다. 이 큰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임하신다는 새 언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로써 무소부재 하신
분이지만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하는 핵심이 바로 이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아담 안에 죽었던 우리가 다시 살아난 겁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십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이 하나(연합)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멸망치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핵심입니다. 큰 구원의 약속입니다. 그 다음부턴 이 분을 우리 안에서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그 키가 커감에 따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대접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큰 구원입니다. 내 안에 임하신 그리스도가 바로 큰 구원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시지 아니하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13:5)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그냥 귓전으로 흘러 버립니다. 그 분이 나의
보화란 사실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처음에는 겨자씨처럼
너무 작게 들어오시니까 그렇습니다. 인내로 씨가 형체가 되고 영광이 되는
과정을 이루지 못하고 속성과정을 찾아 장대높이뛰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은 유대인의 왕이지만 이 세상에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들어오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말단 기초단체장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 분 앞에서
천사도 경배를 드리고 동방박사들도 예물과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 분은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
앞에 나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거룩한 나라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나는 모든 것을 가졌고, 남들이
그를 볼 때는 무명한 자 같으나 나는 유명한 자라고 외쳤습니다(고후6:9-10)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우편에 앉았고(엡2:6)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성소안의 은혜의 보좌
앞에 긍휼과 은혜를 얻기 위해 담대히 나아 갈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들입니다(히4:16)
그러나 율법으로는 이런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므로 자칭 유대인 곧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인 이면적 유대인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육적인 이스라엘 왕이 되고자 함이 아니라 진리로 말미암아
영적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은 희한합니다. 나라 이름은
이스라엘이고, 민족은 유다 민족입니다. 성경에 나온 이름은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로마서 9장은 온 이스라엘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이
합쳐서 온 이스라엘이 됩니다. 우리가 바로 참 이스라엘입니다. 지파로 따지면
유다지파입니다. 실제로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은 육적 유대인이 아니라
유다 지파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진짜 이면적 유대인(롬2:29)의 왕인 겁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고 하니까 저쪽 동네의 유대인만 말씀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도 영적인 유대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지파이므로 나도 유다지파인 거지요.
계시록 4장에서 하늘 문이 열리고, 5장에서 책의 인봉이 떨어집니다.
6장은 환란이고, 7장에는 인침이 있습니다. 이 인을 받은 사람들이 이제 14장의
시온 산에 선 십사만 사천과 흰 옷 입은 수많은 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계시록 21장에 새 예루살렘과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7장과
14장, 21장에 내가 들어 있으면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런 식으로 차례로 풀립니다.
요한복음이 풀리고, 히브리서가 풀리고 그 다음 요한 1,2,3서가 풀리면 자동으로
계시록 7장에 들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계시록은 선거로 치면 개표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생명은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보니 계시록 14장에 내가 있는 겁니다.
또 계시록 21장에도 내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 속에 있으면 아무도 쫓아 내지 못합니다.
따라서 성경 속에 내가 심겨져 있어야 합니다. 성경책이 바로 생명책입니다. 생명책이란
족보 책이라고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경 안에서 믿음의 선진과
같은 믿음의 족보를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천부께서 심지 아니한 자는 뽑힐 것이라
말씀했는데 우리의 천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으셨는데 감히 누가
뽑겠느냐는 겁니다. 뽑다가는 큰일 나지요. 생명책에 내 이름이 녹명되었다는
말은 성경의 족보에 내가 들어가 있다 그 말입니다.
이 큰 구원 곧 ‘말씀을 들은 자’들과 ‘우리’는 연결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 직접 말씀을 들었으면 참 좋겠지만 주님은 오늘도 사역자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곧 내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받은 자들을 업신여기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겁니다.
4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 하셨느니라.”
말씀의 사역자들을 하나님이 증거로 엄호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무엇으로? 표적과 기사와 여러 가지 능력 등입니다. 구원의 복음 곧 진리를
증거하면 반드시 여러 가지 표적이 따르는 걸 봅니다. 그건 전류가 흐르면
전기자장이 저절로 발생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생명의 말씀이 증거 되면
성령이 나눠 주신 은사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영적인 현상을 절대로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주의 종들에게
이와 같은 은사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바깥에
나타나는 은사나 표적보다 우리 안에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더 존귀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영이 바로 우리의 생명과 존재와 인격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하나님의 영,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 합니다. 이 성령님은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도 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생명이 됩니다. 그러나 그 분의 임재를
드러내실 때에는 사역의 영으로 나타나십니다. 사역의 영으로 사용하실 때는
능력과 표적과 기사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표적이나 기사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 생명은
안 됩니다. 다 성령의 역사지만 성령이 사역의 영으로만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사역의 영의 역사는 그 순간 일을 하다가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시는 생명의 영은 영원하십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구분하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역의 영만 경험해 본 사람이 있어요. 구약의 사울 같은 사람,
세례 요한도 사실은 사역의 영만 받았어요. 그러나 바울은 생명의 영도 받았고,
사역의 영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의 성령도
모시고, 주의 일을 할 때에 사역의 영도 같이 나타나시기를 원해야 합니다.
마가복음16장 20절은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 했다고 말씀합니다. 말씀을
확증하기 위해서 사역의 영도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의 정도가 점점
깊어 갈수록 이 사역의 영은 점점 쇠하여 갑니다. 사랑이 많아질수록 사역의 영이
적어집니다(고전13장) 초보적인 믿음이 크게 역사 할 때는 사역의 영도 크게
역사하다가 속에서 온전한 것이 쌓여져 갈수록 부분적인 것은 약해집니다(고전13:10)
그러므로 성령 충만이란 우리가 기뻐 뛰는 것만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성령의 역사는 첫째는 감화 감동입니다. 그 다음은 내주하십니다.
그 다음에 내적인 역사가 있습니다. 역사는 화끈하게 일하는 것만 역사가 아니라
우리 속에 오셔서 끊임없이 마음과 생각의 체계를 바꾸시는 내주하는 역사입니다.
이 역사가 계속 되면 충만이 됩니다. 에베소서도 그렇습니다. ‘충만케 하려 함이라
성령 충만 하라’ 에베소서는 충만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성령이 충만해지면
그 다음에는 권능이 나타납니다. 권능은 반드시 밖으로 나타나는 능력만이 아닙니다.
권능은 사랑 할 수 있는 능력도 권능입니다. 부끄러움을 참을 수 있는
인격도 권능입니다. 그 다음 마지막 단계는 인도 입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성령 충만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그래서 진짜 성령 충만은 다른 사람에게 요란스럽지 않습니다.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우리가 어리니까 기도를 하는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지만, 기도는 하면 할수록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삶으로
그 대답을 하는 거지요.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 항상 내 마음을 열어 놓는
것입니다. 무시로 기도한다는 것도 항상 그 분께 채널을 맞추어 놓는 일입니다.
대단한 비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건과 순간을 만날 때마다 성령에
의해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AI 기능이 달린 로봇이 상황에 따라
척척 대처하듯 성령에 의한 영적인 센스가 끊임없이 작동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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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께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