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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인트에베소서 제 24 강 ‘하나, 그 세 번째 내용’
에베소서 4:4-6절
4-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4-There is one body and one Spirit--just as you were called to one hope when you were called--
5-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6-one God and Father of all, who is over all and through all and in all.
Point: 하나이신 하나님은 초월하시고 개입하시고 내재하십니다.
Introduction: 우리는 집에 삽니다. 오늘은 이 집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집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의 집입니다. House, home! 그렇게 부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두 가지 기구가 있는데 그 첫 번째는 사람의 집인 가정이요 두 번째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입니다.
먼저, 사람의 집인 가정을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여름향기’ 얘기를 했습니다. 저는 가을동화, 겨울연가에 힘입어 여름향기도 사람들이 많이 보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다시 보기로 그 내용을 보고 지난 주에 예화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제가 완전히 헛다리를 짚었습니다. 많이들 안 보더라구요. 그래서 이번엔 방향을 수정해 ‘옥탑방 고양이’를 보았습니다.
재미있었습니다. 마침 휴가 기간동안에 방영되어 꼼꼼히 보았습니다. 연기자들의 연기도 좋고 극의 전개나 스토리도 아주 탄탄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은 그런 환경에서 공부해도 검사가 되는 것을 보면 ‘검사 아무나 하나!’ 그런 생각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뭐 드라마니까 봐주자’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지나갈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물론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재미는 재미이고 분별한 것은 분별해야 합니다. 그것은 소위 ‘동거’에 대한 생각입니다. 우리 나라에 동거인구가 대략 80만쌍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거를 알선해 주는 인터넷싸이트가 십 여개 정도 된답니다. 이렇게 말하면 꼭 들어가 보더라구요. 알아서 하세요. 그리고 이 싸이트의 회원수가 10만명에 육박한다는 데이터를 본 전 적이 있습니다. 굉장한 증가추세입니다. 그리고 한 문화현상이 되어 가고 있는 듯 합니다.
우리 나라는 성인의 남녀가 되면 혼인신고를 할 자격이 있습니다. 이럼에도 동거인구가 느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이런 동거문화의 증가는 개방적인 성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결혼이 주는 부담감과 책임감에서 자유롭고 싶고 구속받기 싫어서 이런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다분히 편의주의적이고 ‘언젠가 헤어져도 괜찮다’는 전제가 깔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부분에서 명확하게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동거는 계약관계이고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는 언약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나님께서 창설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혹자는 이런 주장을 합니다. 결혼 후에 갈등이 생겨 이혼하는 것보다 한 번 살아보고 서로가 그 갈등을 피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이런 말을 합니다. 그 사람, 인간에 대해 전혀 모르는 무식한 사람입니다. 20-30년씩 모르던 사람이 같이 몸을 맞대고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난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어떻든 싸우고 갈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자기를 낮추고 서로를 존경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그 과정에서 한몸으로 사람을 부르신 하나님의 비밀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언약의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배우자를 신중하게 선택하기 위해 동거를 한다는 것은 신중한 선택이 아니라 편의주의적 선택입니다. 쉬운 만남은 쉬운 헤어짐을 선택합니다. 통계적으로도 동거 커플은 결혼한 부부보다 갈라설 확률이 서너배가 높습니다. 이것이 이혼율 증가의 징검다리역할을 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동거가 보편화된 서구사회의 높은 이혼율은 이 내용을 반영합니다.
매번 강조하지만 말씀따라 사는 것이 행복이며 그것이 축복입니다. 말씀이 제시하는 틀안에 있는 것이 복된 삶입니다. 다 내 맘대로하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말씀따라 가정을 꾸며가는 것, 그곳에 행복이 있고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깃들고 그 가정에 참된 만족과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정의 의미를 믿음으로 깨달아 가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며 즐거움임을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Point 1: 하나, 그 세 번째 내용
그 다음으로 이제 하나님의 집, 오이코스라고 불리워지는 교회를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의 6절을 보시면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렇게 나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통해 보이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는 사교단체가 아닙니다. 교양을 얻기 위해서 오는 곳도 아닙니다. 또 연애사업을 하러 오는 곳도 아닙니다. 물론 다니다 보면 연애사업도 하게 됩니다. 저는 그것을 절대로 말리지 않습니다. 할 만하면 하시고 능력 있으면 많이 하세요. ‘목사님 눈치 봤는데 그러면 이제 어디 한번!’ 이러는 늑대의 눈빛이 보이는 듯하네요. 그러나 연애하러만 온다면 좀 주의를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의 기능과 역할은 간단합니다. 하나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제대로 드러내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집, 오이코스, 교회가 맡은 사명입니다. 교회의 이 본체적 내용을 우리가 깊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곳이다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이신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드러내야 합니까? 이것이 너무도 중요하므로 본문을 세 번이나 다루면서 이제 마지막으로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본문 6절은 그 내용의 세 가지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먼저 교회는 하나이신 하나님의 만유 위에 계시는 성품을 드러냅니다. who is over all! over, 혹은 above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말은 위에 계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교회가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초월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다릅니다. 하나님은 만유, 다시 말해 세상의 있는 그 어떤 것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많은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나 지혜를 드러내기는 하지만 세상 그 어느 것도 하나님과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의 어떤 것을 하나님처럼 여기는 것이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사 그 어떤 것과도 같지 않으십니다. 또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합치거나 혹은 발전시킨다고 해도 하나님이 되거나 그와 동등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을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하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잊으면 우리가 어느 틈엔가 우리가 가진 것들, 혹은 가지려고 좇아가는 것들을 하나님같은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멸망의 씨앗을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사사기 9장으로 가 봅시다. 여기에 요담의 비유가 나옵니다. 요담의 시기에 아비멜렉이라는 자칭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사 기드온의 의붓아들입니다. 기드온의 첩의 자식입니다. 기드온이 말년에 교만하게 되어 말씀을 떠나가고 그 이후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억지 않게 됩니다. 이 과정에 아비멜렉이 나타납니다. 그는 이제 자기가 추구하고 야망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님같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것을 가지면 하나님처럼 위에 above 있을 줄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세겜의 사람들과 결탁하여 자기 형제 70여명을 학살합니다. 그리고 자칭 왕이 되어 모든 사람들 위에 있으려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간신히 도망한 요담은 이 아비멜렉을 가시나무에 비유하는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하나님처럼 위에 있는 듯 행세하나 그 어리석은 종말을 예견합니다. 그리고 이 아비멜렉은 얼마 후에 한 여인이 던진 맷돌짝에 머리가 깨어진 후 자결해서 죽게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같질 않습니다. 사람을 하나님같이 생각하는 것이 교만이며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위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말할 수 없이 지혜로우시고 거룩하시며 능력이 많으십니다. God is above all!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라 철학이라는 사실입니다. 원숭이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추론하면 도달하는 결론점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무한히 계발하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진화론은 철학입니다. 하나님처럼 사람이 되면 사라지는 것은 심판입니다. 심판이 사라지면 인간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됩니다. 그것 자체가 혼란이며 또 종말입니다. 사람은 근원적으로 욕심을 좇고 죄를 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이 사는 길은 위에 계신 분의 생각이 어떠한가를 아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말씀을 강조하는 것은 이 말씀이 그 분의 생각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따르는 것이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이제 두 번째 하나님의 성품이 나옵니다. ‘만유를 통일하시고’ 6절의 이 말씀이 하나님의 집인 교회가 드러내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through all! 원어로 ‘디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말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하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이신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우리 인생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만들어놓으시고는 그 안에 들어오지도 않고 주위만 맴도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만유를 통일하시는’ 이 하나님의 성품과는 정반대되는 것을 얘기하는 철학이 소위 이신론, deism이라는 것입니다. 이 철학의 주장은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는 하셨으나 스스로 운행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 주장이 결국 의미하는 하나님은 사랑을 나타내시지도 또 심판하시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내비둬!’ 이런 인생철학인 것입니다.
이것을 반박하시며 하나님의 역사성, 즉 인생의 개입하시고 간섭하시는 그 성품을 예수님은 딱 두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새를 보라, 백합화를 보라’ Look at the birds! See the lilies! 좀 썰렁하겠지만 참고로 제 아내 영어 이름이 릴리입니다. 저는 매일 매일 저를 간섭하시며 저를 관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성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백합화를 보라’ 이 말씀에 저는 늘 순종하며 릴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위의 자연을 보면서도 그 분의 섭리와 그 간섭하심을 넉넉히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까 이신론 얘기를 좀 더 하겠습니다. 그러면 왜 이신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하나님을 아웃사이더로 여기나? 그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갖은 불가해한 일들, 참혹하고 비참한 일들을 볼 때 그 일들이 도저히 하나님이 개입하셨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공감이 되며 터치가 있는 휴머니스틱한 접근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하나님을 ‘아웃사이더’로 간주하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한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개입하심, 그 역사성을 기억할 때 우리는 흑돼지 또는 똥돼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제주도산 흑돼지, 똥돼지! 이 돼지를 잡아먹을 때까지는 절대로 돼지에게 스트레스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고기 맛이 떨어집니다. 잘 먹여 주어야 합니다. 녹차도 먹이고 한약재도 먹이고 황토도 먹이고 좀 더티하지만 질좋은 거시기도 먹이고 이것 저것 잘 먹여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적정한 시기에 한 방에 보내야 합니다. 그래야 최우수 품질의 돼지가 식탁에 오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다루실 때도 그냥 두실 때가 있습니다. 함부로 다루면 다치지 않아도 될 영역까지 다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정기간 내버려 두십니다. 그러나 영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한 방에 보내십니다. 세상의 많은 교만과 악과 죄를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루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간섭과 개입과 역사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개입하심의 목적이 파괴와 심판 그 자체는 아닙니다. 파괴되는 것은 파괴될 수 밖에 없는 내부적 이유를 가지고 있어서 파괴의 자리에 도달합니다.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회복과 사랑과 구원에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롯이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 소돔으로 나아가지만 이것으로 해서 소돔성에 돌아설 마지막 기회를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가롯 유다의 욕심의 충동을 너무나 깊이 아셨음에도 지극한 사랑의 표현으로 떡을 소스에 찍어 그에게 주면서 마지막 기회를 허락하시는 것이 주님의 인생에 대한 간섭이자 관심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자 하는 것이 만유를 통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하나님의 성품을 교회는 알아야 하고 또 마땅히 그것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집, 교회의 사명인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교회가 드러내는 하나님의 성품은 ‘만유 가운데 계시는’ 그 성품입니다. 그 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와 충만하게 함께 계십니다. God is in all! 하나님이 만유 안에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계시고 또 특히 믿는 자들 가운데 충만히 계십니다. 믿는 자들 안에서 하나님의 충만한 신성과 살아 계심을 부족함 없이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의 역사하심, 혹은 충만한 하나님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역사,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도대체 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자주 ‘뿅가는 역사’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뿅가는 역사는 자이언트루프에서 더 빨리 나타납니다. ‘뒤집어지게’ 뿅갑니다. 또 번지드롭에 가면 간이나 쓸개가 배밖에 나올 정도로 뿅갑니다. 그것도 아니면 스페인해적선을 타거나 후렌티레볼루션을 타세요. 정말 뿅갑니다. 아래 위로 총제적으로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제 말을 멀뚱이 쳐다보는 사람은 롯데월드를 안 가보신 촌닭입니다. 한 번 가보세요. 개인적으로 저는 왜 이런 것을 돈주고 타는지 늘 궁금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그렇게 뿅가는 것이 아닙니다. 만유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 가운데서 우리를 아주 조금씩 변화시키는 그 역사입니다. 변하기는 하는데 아주 천천히 조금씩 변합니다. 옆 사람을 보세요. 변합니까? 변했습니까? 안 변했지요. 그대로입니다. 더 악화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얼굴 없는 순례자가 되지요. 그러나 변합니다. 만유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 천천히 서서히 변합니다. 그래서 의심을 쪼금 덜 합니다. 교만이 조금 사라집니다. 심령이 조금 온순해지고 겸손해 집니다. 그렇게 성령의 내주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말씀이 슬쩍 우리의 심령 깊은 곳을 건드립니다. 아주 슬쩍 건드리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쨘하게 울려요. 아립니다. 점점 아프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그 심령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내주하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God is in us all! 이 사람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한 번 두 번 거부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굳어집니다. 점 점 딱딱해 집니다. 어느 틈엔가 불화살 맞은 양심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곧 악한 마귀의 마음이며 사탄의 마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우리가 가롯 유다에게서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주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우리의 심령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심령의 상태를 명확히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책임 못지는 그 심령의 고통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냥 맡기세요. 우리 안에 계시는 그 분께 우리 안의 모든 것을 맡기세요. 혼자 끙끙대지 마시고 그 심령을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거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Conclusion: 사랑하는 갈보리청년 여러분, 가장 귀한 축복과 가장 놀라운 행복은 두 집에 있습니다. 말씀에 기초를 놓은 우리의 가정에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들이 드러나는 교회에 참된 축복이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가정을 꾸며 나가는 것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말씀 아닌 것들을 버리고 가정을 가꾸어 나가십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위에 계시며 개입하고 역사하시며 거하시는 하나님을 사모하며 교회를 중심에 놓으십시오. 그것이 축복입니다. 이 두 집이 여러분에게 가장 귀한 것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Prayer: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는 내 위에 계십니다. 또 나를 간섭하시고 나에게 개입하십니다. 그리고 내 가운데 거하십니다. 그런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겸손히 믿음으로 살고자 합니다.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