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식의 결혼식을 알리지 마라"

[봉명제]

"내 자식의 결혼식을 알리지 마라"

입력시간 : 2011. 06.23. 00:00

오징어 탈을 쓴 함진아비가 친구들과 함께 '함 사세요'를 외치자 나와서 이들을 맞은 것은 손학규 민주당 대표였다. 느닷없는 거물의 출현에 당황한 신랑 친구들은 함 값 흥정도 못하고 신부 집으로 따라 들어갔다고 한다. 손 대표가 제1야당 총수가 된데 이어 예상을 깨고 분당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직후라 주가가 치솟을 때였다.

고위층들 자녀 혼사 '아무도 모르게'

지난달 14일 극비리에 치러진 손 대표의 차녀 원평 씨의 결혼식 후일담이 한때 화제가 됐다. 원평 씨는 신랑이 될 사람에게까지도 결혼 얼마 전까지 부친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함을 팔러 간 신랑 친구들은 당연히 몰랐을 터. 명동성당에서 치러진 결혼식에는 양가 친인척과 손 대표의 보좌진 등 극소수만 참석했다. 축하 화환도 눈에 띄지 않았고 축의금도 일절 받지 않았다. 손 대표는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기 미안하다'며 당 관계자들에게는 철저히 보안에 부쳤다.

최근 들어 정ㆍ관계 고위 인사들은 자녀의 결혼식을 비공개로 조용하게 치르고 있다. 일부 측근들조차 이 사실을 몰랐다가 뒤에 서운함을 토로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올봄에도 김무성 한나라당 당시 원내대표,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 김문수 경기도지사 등이 딸의 결혼식을 주위에 알리지 않고 은밀하게 마쳐 '뉴스'가 됐다. 고위층이나 재벌 자녀의 결혼식이 열리면 하객들의 차량으로 으레 주변 일대의 교통이 마비되던 과거의 모습과는 딴판이다.

우리 지방 고위층들도 예외가 아니다. 박준영 전남도지사는 지난달 7일 영국계 컨설팅 회사에 다니는 장녀 원희 씨의 결혼식을 가족과 친지만 불러 조촐하게 치렀다. 수행비서는 물론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박 지사는 일주일 뒤 광주를 찾은 이 여사에게 사과의 의미로 저녁을 대접했다. 송귀근 광주시 행정부시장과 송기진 광주은행장도 지난달 말 자녀 결혼식을 몰래 마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이들은 자녀의 신혼 아파트를 마련해 줄 수도 있는 거액의 축의금을 포기했다.

혼인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다. 남녀가 공식적으로 부부가 됐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의식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도 애써 키운 자식의 혼사를 주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축하받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누구나 어렵게 살던 옛날에는 혼사나 상사(喪事)가 닥치면 비용 조달에 애를 먹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부조(扶助)를 통해 이를 해결했다. 부조는 나를 도운 상대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되돌려 주는 '품앗이'로 미풍양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경조사가 변질돼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서민들은 봄 가을이면 주변 사람들의 경조사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특히 권력을 가진 고위층 인사들의 경조사는 치부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들의 힘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합법적(?)으로 로비를 하는 창구가 된다. 자녀를 결혼시키거나 부모상을 당한 후에 집 한 채를 더 장만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1970년대 초 광주의 한 명문 학교에 보결생을 집어넣기 위해 친분도 없는 교장 자녀의 혼사에 거액(지금으로 치면 천만 원쯤)을 부조하고 이를 미끼로 성사시켰다는 K씨의 무용담은 지금도 광주 사회에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온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계속돼야

아무리 고위층이라고 해도 죄 지은 것도 아닌데 곱게 키운 자식의 혼사를 주변에 알리지 않고 몰래 치르는 부모의 심경은 결코 편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남의 경조사에 축의금을 보내기만 하고 회수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는 권력자가 자녀의 결혼식을 널리 알리는 것은 그 자체가 지탄의 대상이 된다. 모든 것을 다 가지려고 해서는 곤란하다. 내 자식의 결혼식을 남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다. 이런 모습이 정착돼야 '공정 사회'가 된다. 사회 지도층이 자녀 결혼식을 비공개로 조용히 치르는 것이 더 이상 뉴스나 화제가 되지 않는 세상이 와야 한다.


박상수 논설위원 ss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