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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백과 회개
자백과 회개는 같은 말일까요? 다른 말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둘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릅니다.
그러면 자백과 회개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를까요? 성경에 보면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3:2) 라고 전파했습니다. 요한의 설교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이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마3:5-6)
이로 보건대 자백은 회개의 일부분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잠언 28:13절에도 나타납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이와같이 처음에 자백은 회개의 한 부분으로서 회개에 포함되어 존재합니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 (고후7:10)가 영혼 속에 이루어지면 그 때부터는 자백과 회개가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본문에서의 자백은 바로 이 두번째 종류의 자백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 두번째 종류의 자백을 설명해 나가면서 구원받은 영혼도 버림받을수 있다는 것과 우리가 버림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왜 자백을 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그것도 날마다 자백해야합니다. 29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지만 성자다운 삶을 살아간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은 " 우리는 죄를 범하는 바로 그 순간 지체하지말고 죄를 고백해야 한다. 회사에서 일을 하는중이거나, 공부를 하는 중이거나, 심지어 설교하는 중이라 할지라도 죄는 바로 고백되어져야만한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이처럼 죄를 고백해야합니까? 거기에는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것이요" (요한일서 1:9)
(1) 자백을 해야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우리 죄를 사하시며"
구원파에서 나온 이단인 박옥수 목사는 "주님께서 우리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셨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 순간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모두 용서받는다" 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이렇게 믿고있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요한은 자백해야 우리의 죄가 사해진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고 주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과거와 현재의 죄를 용서받고 의롭게 됩니다.
그러나 미래의 죄까지 용서받은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난 이후에 짓게되는 죄들은 계속 자백을 함으로써 용서를 받게 되어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를 자백은 신앙 생활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백을 발을 씻는 것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3:8~10)
(2) 자백을 해야 불의에서 깨끗케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많은 이들이 '죄사함'과 '불의에서 깨끗케 되는 것'이 같은 것인줄 압니다. 저도 한 때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 둘의 의미는 서로 다릅니다. 본문의 '죄를 사하시며'에서 '사하시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는 '빚의 탕감' '허물의 제거' '책임의 해제'등 죄 용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깨끗케 하실'로 번역된 헬라어 '카다리세'는 죄로 오염된 상태를 정화시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것을 다윗의 유명한 회개시인 시편 51편은 말씀과 비교하여 설명해보겠습니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시편 51:9)
이것은 '우리 죄를 사하시며'와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 (시편 51:10)
이것은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자백을 하면 단순히 죄사함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회복이라고 부를수 있는 영적 정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일은 항상 같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자백을 했는데도 영혼이 정화되지 않으면 그 자백은 올바른 자백이 아니라는 뜻이고, 따라서 죄 용서 역시 받지 못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습관적인 자백을 하지말고 성경이 요구하는 올바른 자백을 해야합니다.
2. 성경이 요구하는 자백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죄 용서를 간청한다고 다 자백이 아닙니다. 그것이 성경이 요구하는 자백과 무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참된 자백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2장 1절 말씀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하려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이 말씀에 보면 참된 자백의 두 가지 특성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1) 죄를 범치 않기위한 목적으로 하는 자백이라야 참된 자백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죄를 범치 않게 하려함이라"
금세기 최고의 복음 전도자로 손꼽히는 라인하르트 본케는 '보혈의 능력'이라는 소책자에서 "주님의 보혈은 죄에 대한 면허장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말을 자백에 대하여 할 수 있습니다. 자백은 죄에 대한 면허장이 아닙니다. 자백은 비유컨대 배의 구명대와도 같습니다. 항해하는 모든 배에는 구명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모든 배들은 항상 폭풍우를 만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배라도 파선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구명대는 바로 이와같은 배의 파손이나 충돌에 대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선장이 이렇게 생각한다고 상상해봅시다. "우리 배에는 안전을 위한 충분한 구명대가 있다. 그러니 암초에 부딪혀도 문제없어. 어디 한 번 암초를 들이받아볼까?"
자백을 하면 용서해주실 것이니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구명대는 파선을 대비한 것입니다.결코 구명대를 믿고 파선하라고 준비된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자백 역시 만일의 범죄에 대비한 것이지 안심하고 범죄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백은 다시는 범죄치 않게 하기위해 존재합니다. 이에 관하여 요한은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함이라"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백이 안심하고 죄를 지으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죄를 범치 않게 하려고 존재한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줄곧 주님의 말씀대로 잘 순종해 오다가 어느날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자백이 없다면 "나는 이왕 버린 몸이다. 에라 될대로 되라" 하고 자포자기하여 더 큰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자백이 있는 까닭에 '내가 비록 범죄했지만 자백하면 주님께서 내 죄를 용서해 주실거야. 나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어. 주님앞에 내 죄를 자백하고 다시 출발하자' 이렇게 마음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시편 130:3~4)
이와 같이 주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이유는 다시금 주를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기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죄 용서를 받기 위해서 하는 자백이라면 그것은 참된 자백이 아닙니다. 죄를 청산하고 새 삶을 살기위한 결심으로 하는 자백이라야 참된 자백입니다.
(2) 주님께 순종하는 가운데 우발적인 범죄에 대하여 주님께 아뢰는 것이 참된 자백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집에 가서 죄짓고 교회에 와서 자백하고, 집에 가서 죄짓고 교회에 와서 자백하고 하는 생활'을 계속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명한 전도자 D.L 무디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계속 범죄한다면 그것은 의미 없는 고백이다. 그것은 배에 난 구멍을 막지 않고 계속 물을 펌프로 퍼내는 것과 같다. 자백은 계속되는 범죄 속에서는 효과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참된 자백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자백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요한이 말하고 있는 자백은 거듭난 신자가 주님께 순종하는 생활을 하는 가운데 때로 유혹을 받아 우발적으로 지은 죄를 주님께 아뢰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본문의 문맥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로 아노라" (2:3~5)
여기서 '저를 안다' '진리가 그 속에 있다' '저 안에 있다'는 것은 모두 구원받은 상태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들은 곧 주님의 계명 혹은 말씀을 지키는 자입니다. 주님의 자녀들은 주님의 말씀을 지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삶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운류과 기조입니다. 그런데 그들도 때때로 유혹에 의해 우발적으로 죄를 범하고 주님 앞에 나아와 용서를 빌어야 알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때하는 것이 바로 자백입니다. 자백의 대상은 고의적이고 습관적인 죄가 아닙니다. 우발적이고 일시적인 죄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2장 1절에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이라는 표현에 의해서도 입증됩니다. "만일"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발성'입니다. 그러므로 습관적이고 고의적인 죄를 자백하는 것은 회개의 한 부분으로서의 자백일수는 있지만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자백은 아닙니다.
3. 자백을 해도 효과가 없는 이유
웨슬리 듀엘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바로는 자신의 죄를 자백했지만 그 마음을 강퍅하게 먹었고(출9:27,34), 발람은 자신의 죄를 고백했지만 (민22:34) 자신의 고집대로 행했다. 그래서 발람은 그가 바라던바 의인으로서의 죽음을 갖지 못하고 (민23:10) 악인으로써 죽음을 맞았다 (민 31:8)
아간과 (수7:20) 사울 (왕상 15:24)과 유다 (마27:4) 모두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지만, 이들 중에 온전히 회개하여 용서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백을 하는 이유는 죄 용서를 받고 영적으로 새로워지기 위해서 입니다 (요일1:9) 그런데 방금 언급한 사람들은 자백을 했지만 그 누구도 죄 용서를 받거나 영적으로 새로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와같은 일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부단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실제로 매 주마다 신자들이 교회에 와서 자기의 죄를 자백합니다. 그런데 그 자백이 과연 효과가 있습니까? 과연 자백하는 사람들이 사죄의 확신과 새로워진 영을 가지고 기쁨으로 교회를 떠나갑니까? 그러면 왜 그럴까요? 그것을 이해하려면 '범죄'와 '타락'의 차이를 구별해야합니다. 범죄와 타락은 다릅니다. '범죄'는 순종하던 중 우발적으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타락'은 그 죄가 습관이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타락이 범죄보다 더 크고 심각합니다. 이와같이 범죄와 타락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해결책도 서로 다릅니다. 범죄한 경우에는 자백만으로도 해결됩니다. 한 번 그런가 안 그런가 여러분 자신의 경험을 회상해보십시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고 있던 중 때때로 우발적으로 죄를 범했을 때는 죄를 자백하자마자 사죄의 확신이 옵니다. 그리고 자기의 영이 흐려졌다가 곧 깨끗해지고 회복되는 것을 느낄 수있습니다. 이와같이 범죄의 경우에는 단순히 자백만으로도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나 타락의 경우에는 다릅니다. 타락했을 때에는 자백이 아니라 회개를 해야합니다. 범죄보다 더 큰 것이 타락이고 자백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타락에는 회개로 대처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회개는 주님을 처음 믿을 때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다시 회개할 필요가 있을까요? "라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물론 단순히 범죄했을 땐 자백만 하면 됩니다.
이미 회개가 된 상태이기 때문에 회개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타락을 했을 땐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타락을 통해 그가 회개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히브리서 6장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1~2)
보십시오. 회개는 기독교의 첫걸음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회개한 사람은 "...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라는 말씀대로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말씀을 계속 보세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한 번 비침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3~6)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라는 부분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사람들은 타락했으므로 회개를 해야 되는데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순히 타락한 것이 아니라 이 책의 서론에서 말했듯이
1. 한 번 비췸을 얻고, 2.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3.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4.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했으며 더욱이 그들은 단순히 도덕적으로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타락한 사람들은 다시는 회개할 수없습니다. 그들은 영락없이 지옥행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4가지를 다 체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타락했거나 설사 4가지 과정을 다 경험했더라도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고 단순히 유혹에 못 이겨 도덕적으로만 타락한 자들은 아무리 깊이 타락했더라도 회개가 가능합니다. 그들은 다시 회개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왜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자백을 하는데도 죄사함과 깨끗케 함을 받지 못하고 답답하고 정죄받은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생기는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자백이 아니라 회개를 해야합니다 회개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자백도 시급하지만 회개는 더 시급합니다. 범죄한 자가 자백을 한 두 가지 안 했다고 지옥에 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자는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사람들은 서둘러 회개해야합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자백한 뒤엔 용서받은 것을 믿으라" 고 가르칩니다. "요한 일서 1장 9절 말씀을 기억하고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말씀에 굳게 서라" 고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열납 하실만한 올바른 자백을 하고도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 고통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참소하는 영의 공격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런 메시지가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메시지는 자칫하면 영혼을 우롱하여 멸망으로 이끄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백을 해도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중의 하나는 그가 단순히 범죄한 것이 아니라 타락했기 때문이며 그럴 경우 유일한 해결책은 자백이나 죄사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네 손이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않고 불도 꺼지지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치듯함을 받으리라" (막9:43~49)
이것은 제가 설교 도중 가장 많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 중의 하나입니다. 최근에 저는 이 성경구절이 불신자들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증거로 이 말씀의 바로 전에 보면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니라"(42)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후 바로 이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들이 눈으로, 손으로, 발로 짓는 다양한 죄가 다른 영혼들을 실족케 할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이같은 사실은 그 뒤에 나오는 말씀으로도 입증됩니다. 이 말씀 바로 뒤에 있는 구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50)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그런데 맛 잃은 소금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바꾸어말해서 눈으로,손으로, 발로 범죄하는 이들이 바로 맛 잃은 소금입니다. 즉 변질되고 타락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무서운 경고의 대상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리스도인들 중 습관적인 죄에 빠져서 죄를 끊는 회개를 하지않고 멸망받을 위험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경고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5)
구원에 이르는 회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린도후서 7:10)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대부분 이 질문에 '오직 믿음!'이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온전한 대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구원의 조건으로 믿음뿐 아니라 회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복음1:15)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행20:2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히브리서 6:1)
토마스 왓슨은 영국의 청교도운동의 대표적 지도자이며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소요리 문답을 작성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는 "회개"라는 책 첫머리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생에서 성도에게 절대 필요한 두 가지 은혜가 있다면 그것은 회개와 믿음이다. 이 둘은 성도가 하늘나라로 날아가는 데 필요한 두 날개이다"
한 날개를 가지고 새가 공중을 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회개나 믿음 둘 중의 하나만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므로, 천국에 가려면 반드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합니다.
한편, 성 어거스틴은 "회개는 많은 사람을 정죄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거짓 회개가 많기 때문입니다.
조셉 얼라인은 "마귀는 많은 사람을 가짜로 회개시켜 놓고 이것 저것으로 많은 사람을 속이고 있다" 고 했습니다 그리고 찰스 피니는 "언제든지 죄인에게 회개하라고 할 때에는 회개의 의미도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이에 관하여는 거짓된 교리와 원리 등 너무도 많은 신비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죄인들에게 회개의 의미뿐 아니라 한발 더 나아가 회개가 아닌 것도 알려주어야 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에 대해서 바로 알고 참된 회개를 해야합니다. 그럼 어떤 것이 진정한 회개일까요?
토마슨 왓슨은 "회개"라는 책에서 참다운 회개의 성격을 다음 여섯 가지로 소개했습니다.
1.죄의 발견, 2.죄를 슬퍼함, 3. 죄의 고백, 4.죄를 부끄러워함, 5. 죄를 미워함, 6.죄에서 돌이킴.
그는 만약 이 중에 하나라도 빠진다면 회개의 효력을 잃어버리게된다고 말했습니다. 거짓 회개는 회개의 요소를 일부만 갖춘 것이고 진정한 회개는 회개의 요소를 전부 갖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참된 회개의 여러가지 요소들에 대하여 소개해드리고자합니다.
1. 죄에 대한 깨달음 (지면 관계상 내용 생략)
2.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 (내용 생략)
3. 죄에 대한 감정의 변화 (내용 생략)
4. 죄에 대한 고백 (내용 생략)
5. 피해에 대한 보상
" 배상이 없으면 용서도 없다" - 어거스틴
"너희가 만일 부당하게 얻은 재산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너희는 지옥에서 기침하여 토해낼 것이다" -라티머
누구든지 어떤 형태로든 남에게 재산상의 피해를 끼쳤으면 양심적으로 보상해야합니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찌니라....
도적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 도적질한 것이 살아 그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무론하고 갑절을 배상할찌니라" (출애굽기22:1~4)
이와같이 도적질한 짐승을 잡거나 팔았을 경우엔 소는 5배, 양은 4배로 배상해야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동에 계획적인 악의가 드러났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배상할 능력이 없을 경우엔 종이 되어서라도 배상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보존하고 있을 경우엔 두 배로 배상하면 되었습니다. 다윗이 나단의 비유를 듣고 노하여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사무엘상 12:6)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치 못하여 범죄하되 곧 남의 물건을 맡거나 전당잡거나 강도질하거나 늑봉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의 잃은 물건을 얻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에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이는 죄를 범하였고 죄가 있는 자니 그 빼앗은 것이나 늑봉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얻은 유실물이나 무릇 그 거짓 맹세한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물에 오분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그는 또 그 속건제를 여호와께 가져올지니 곧 너의 지정한 가치대로 떼 중 흠없는 수양을 속건 제물을 위하여 제사장에게로 끌어 올것이요.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얻으리라" (레위기 6:1~7)
여기서 주목할 것은 5절의 "돌려보낼 것이니"라는 부분인데 이는 속건제의 보상 혹은 벌금을 의미합니다. 이와같이 먼저 사람들 사이에 보상이 있어야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보상이 있은후 ,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당연히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결코 배상의 의무에 대한 면죄부가 아닙니다.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지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얻었던 그 본 주인에게 돌려줄 것이요" (민수가 5:7)
그러므로 죄를 자백한다고 다가 아닙니다. 반드시 보상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누가복음 19:8~9절에 보면, 삭개오가 예수님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것은 구약시대의 관행이요,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않았고 그 대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피해 보상을 해야 합니다. 이제, 피해 보상을 하고자 할때 발생할 수 있는 몇 가지 의문에 대해 답해드리겠습니다. 먼저, 보상을 하고 싶지만 피해자가 죽은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럴 경우에는 그 가족들이나 친지들에게 대신 보상해야합니다. 다음으로, 가족이나 친지도 없는 경우, 그리고 피해자가 살아 있지만 찾을수 없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럴 경우에는 대신 하나님께 예물로 드려야합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남자나 여자나 사람들이 범하는 죄를 범하여 여호와께 패역하여 그 몸에 죄를 얻거든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지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얻었던 그 본주에게 돌려줄 것이요. 만일 죄값을 받을 만한 친족이 없거든 그 죄값을 여호와께 드려 제사장에게로 돌릴 것이니 이는 그를 위하여 속죄할 속죄의 수양 외에 돌릴 것이니라." (민수기 5:5~8)
마지막으로, 보상을 하고 싶으나 형편이 안 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럴 경우에는 일단 힘 닿는 데까지 일부라도 보상하고 앞으로 형편이 되면 전부 보상할 것을 신실하게 약속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6. 모든 죄에서 돌이킴
어느 주일 잔디위에서 천로역정의 저자 존번연이 운동을 하고 있을 때, 문득 그의 마음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너는 죄와 함께 지옥에 가겠는가? 아니면 죄들을 버리고 하늘나라로 가겠는가?" 이 질문에 그는 죽도록 고민했습니다. 고민하다가 결국 그는 죄를 버리기로 결단했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죄를 버리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에스겔 18:30~31절 말씀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국문할찌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찌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돌이키고 살지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회개에 관한 중대한 두 가지 교훈을 발견할수있습니다. 먼저, 회개는 죄에서 돌이키는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 28:13)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이사야 55:7)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태복음 3:8,9)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행26:20)
많은 사람들이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용서받을 줄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착각입니다. 죄에서 돌이키지않는 한 누구도 용서를 받을수 없습니다. 찰스 스펄전은 "반역 활동을 계속하는 한 어떤 반역자도 왕이 용서해주리라는 기대를 가질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죄를 버리기를 거절하는 데도 이 세상의 심판자가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리라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고 말했습니다.
또한 조셉 얼라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그들의 소망의 바탕으로 삼으려하지만, 분명히 말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회개치 않고 계속 죄 가운데 있는 완고한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죄악을 붙들고 있는 그대를 그리스도께서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구세주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일이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악한 사람들과 지옥에 있는 마귀가 그렇게 했거나 그럴 수 있었던 것보다 더 하나님의 위엄을 떨어뜨리는 것이 된다. 그런데도 그 대의 참람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찰스하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돌아서는 것이다. 두려움과 양심의 거리낌 때문에 죄에서 도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악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알고 진정한 뉘우침과 겸손, 그리고 고백과 함께 그 죄를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것이다." 그리므로 우리는 반드시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다음으로, 회개는 모든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토마스 왓슨은 "참다운 회개는 보류하는 것도 동거자도 없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어떤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틀림없이 하나님은 "모든 죄에서!!!" 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가장 작은 하나의 죄라도, 또 나쁜 한 가지 생각이라도 우리의 희망을 멸하며 하늘나라 밖에 있게 하기에 충분하다" -썬다 싱
"사람이 계속 한가지의 죄 속에서 생활하며 그 죄를 버리지않는 한 , 결코 참 회개는 있을수 없다" -찰스피니
"죄중에 하나라도 보류시킨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용납치 않으실 것이다. 그대의 죄들을 송두리째 죽여야 한다. 그렇지않으면 그대가 대신 죽어야한다" -조셉 얼라인
"만일 죄가 한 가지라도 있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소유가 아니다 -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가 방자하게 또 고의적으로 한 가지 악이라도 품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가 아니다" -찰스 스펄전
그러므로 "다 버렸는데 한 가지 정도야" 라고 말하지마십시오. 그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다른것도 다 포기했는데 이 한 가지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헛되게 할 수는 없지"라고 생각하고 과감하게 한 가지 남은 죄마저 버리십시오.
한편, 어떤 사람들은 회개에 대한 이런 말씀을 듣고 나면 절망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런 회개가 어디 있으며 어떻게 그런 회개가 가능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한 마디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회개는 죄를 떠나고 모든 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전혀 안 짓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찰스 피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따금 강력한 유혹을 받아 죄를 짓고 나서는 회개하고 당분간 그것을 버렸다가 다시 유혹에 굴복하여 그 죄를 범한다면 그가 죄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고의적이고 상습적이며 고집스럽게 이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며 항상 그 죄를 버리려고 하며 그것에 저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유혹이 그를 덮쳐 지배한다는 의미에서 볼 때에 그것은 우발적인 범죄라고 볼 수있기 때문이다."
회개는 신앙의 완성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표현해보면 회개는 성화가 아닙니다. 따라서 저는 다음에 소개하는 조셉 얼라인의 말이 회개한 자가 어떤 자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적합한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회개하면 그는 죄와 영원히 원수가 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죄들을 가리키지만 무엇보다도 자기가 짓는 죄들을 가리키며 특히 자기 가슴속에 있는 죄들을 원수시 하게된다... 온전히 회심한 자들은 마음속으로부터 죄를 대적하게 된다. 그는 죄와 몸부림치고 싸운다. 자주 실패하긴 하지만 호흡이 붙어있는 한 신조를 굽히지않고 무기를 내려놓지 않는다. 그는 화해하지 않고 사정없이 공격한다. 그는 다른 적들은 용서할 수 있으며 화해할 수도 있으나 죄에 대해서는 엄격하며 추호도 용납하지 않는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의 목사님 중에 박용규 라는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장로교 합동측의 목사로 성남 제일교회를 개척하여 45000명 이상 모이는 대교회로 성장시키신 분입니다. 또 송림 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우리 나라에서 최연소 교장과 이사장이 되었고, 책도 영화화 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외에 57권이나 썼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하나님의 징계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지옥의 크기가 너무 컸습니다. 지옥의 크기에 깜짝 놀란 목사님은 천사에게 "천사님, 지옥의 인구는 얼마나 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믿기 힘든 말입니다만 어쨌든 천사가 하는 말이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과 지옥에 들어가는 사람의 비율이 1000 :1 이니라"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목사님이 또 이렇게 물었습니다. "천사님, 지옥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천사의 대답이 중요합니다. "지옥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예수를 믿지않은 사람들이다. 세상에서 예수를 믿지않은 사람들은 100% 지옥에 온다. 또 하나는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인데 회개하지 않고 죽은 사람은 모두 지옥에 온다" (누가복음 16:30절, 베드로후서 3:8,9절 참조)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죄를 회개해야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한가지를 기억하십시오. 13세기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은 그에게 회개할 내일도 주시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잠언 27:1 , 야고보서 4:14 참조)
토마스 왓슨은 "우리가 또 하루를 더 살 것이라는 무슨 보증이라도 있는가? 우리는 빠르게 세상 밖으로 행진하고 있으며, 무대에서 사라지고 있다. 우리의 생명은 곧 꺼져버리는 작은 초 토막이며 인간의 생명은 풀보다 더 빨리 시드는 들의 꽃에 비유된다 (시103:5) 인간의 생명은 다만 날아가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늦기 전에 곧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회개합니다. 주님~~~그리고 날마다 자백하게 하소서...회개의 신앙으로 주 앞에 더욱 가까이 나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