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프롬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 끝부분만 정리해 봄
차경아 옮김. 까치 글방. 2024 2판 15쇄
그대의 존재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대의 삶을 덜 표출할수록, 그만큼 그대는 더 많이 소유하게 되고,
그만큼 그대의 소외된 삶은 더 커진다. - 카를 마르크스
속을 비우면 편안해 진다. - 많이 먹어 속이 불편한 누구나.^^
오늘날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해악은 연간수입의 최소치를 보장해줌으로써 제거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일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먹는 것과 거처할 곳에 대해서만은 무조건적인 권리를 가진다는 신념에 근거한다.
즉 인간은 사회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든 안하든 간에 생존에 대한 무제한적인 권리를 가진다는 규범이다.
연간 최소 수입보장제도는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의미한다.
개개인의 연간 최소 수입을 보장해 주는 비용은 현재 운용되고 있는 사회복지 분야의 지출보다 한결 적은 수치가 나오리라 추산된다.
위와 같은 생각은 ‘인간은 천성적으로 게으르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실현 불가능하고 위험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진부한 확신에는 이렇다 할 사실적 근거가 없다.
그것은 단지 무력한 약자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합리화하는 표어에 불과하다.
지금껏 인류의 역사에서 공허한 쾌락을 누리는 삶은 소수의 엘리트만의 몫이었다.
오늘날에는 경제적 및 정치적 권력도 가지고 있지 않고 책임도 떠맡지 않는 모든 중산층이 무의미한 소비생활에 자신을 떠맡기고 있다.
지금 서구세계의 대다수 사람들은 소비자로서 혜택을 누리고 있으면서 그 행운을 누리는 것만으로는 미흡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많이 소유하는 것이 곧 행복을 자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중산층적인 사치의 혜택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만, 이를테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극빈계층이나 ‘사회주의’국가의 대다수 주민들의 경우에만 이 낡은 환상이 그래도 살아 있다.
사실상 ‘소비를 통한 행복’에 대한 희망은 부르주아적 꿈을 실현시키지 못한 나라들에서만 강하게 살아 있을 뿐이다.
탐욕과 시기심은 ‘인간 본성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주장은 엄밀히 살펴보면 인간의 천성이라기보다 늑대들 틈에서 늑대가 되어야한다는 보편화된 압력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중세 후기 ‘신의 도시’라는 비전으로 문화가 번성했고, 근대사회는 진보의 ‘지상도시’라는 비전이 인간에게 활기를 주었다면,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과학적 사고와 개인주의의 발달의 합-무너지는 바벨 탑의 혼란에 맞서는 유일한 대안-
이 ‘존재의 도시’The city of being'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