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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삶을 위해 지장보살 정근,
편안한 죽음을 위해 아미타불 정근!
굉각(일각, 대둔산 지장암 주지)
1) 분당 약사암에서 관정 큰스님과의 첫 번째 만남
나는 나이 40이 넘어 늦게 출가하였다. 세상 모든 일이 뜻대로 되어가지 않았고 몸도 많이 아파 수양하기 위해 대둔산에 들어갔는데, 그 길로 출가하게 되었다. 출가한 뒤 5년 동안 여기저기 행각을 하며 열심히 기도하러 다니다가 1991년 현재 있는 지장암에 머무르게 되었다. 당시는 초막만 지은 상태였는데 1992년 함께 기도하던 스님이 떠나면서 나 홀로 그곳을 지키며 현재의 지장암을 일으켜 25년을 지키고 있다.
이곳은 옛날부터 지장계곡이라고 불러왔는데 오랜 고찰이 임진왜란 때 불타고, 해방 이후에야 작은 토굴이 생겼는데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허가나지 않은 모든 사찰을 소개시키면서 빈터가 되었다. 그리고 1991년 이후 내가 이곳에 지장 도량을 세운 것이다.
지장암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조계종 안심사가 있다. 천년 고찰인데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것을 최근에야 복원이 된 절이다. 이 안심사에 명오 스님이 1995년 부임하여 10년 남짓 열심히 불사를 하였다. 바로 옆에 있는 절이기 때문에 나는 명오 스님과 교류하면서 힘이 닫는 대로 열심히 돕고, 또 나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2000년 초여름 어느 날 명오 스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일각 스님, 경기도 분당 약사암에서 6월 13일 극락을 다녀온 중국 스님이 오셔서 법회를 하시는데 참가하시지 않겠습니까?”
“극락을 다녀오신 스님이요? 그렇다면 가봐야죠!”
불법을 믿는 사람은 마지막 죽어서 극락에 가는 것이 목적인데 극락 다녀오신 분 법회라니 아니 갈 수가 없지 않는가!
6월 13일 초여름이지만 아주 여름처럼 더운 날이었다. 분당 약사암은 아주 작은 포교당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스님들도 꽤 여러분이 오셨다. 극락을 다녀오신 이야기를 하시고 정토선 염불을 들려주셨는데 당시 나는 지장보살 정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염불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법회가 끝나고 마정수기를 받았다. 극락을 가지 위해 열심히 수행하라는 격려의 수기라고 생각하고 받았다. 내 생전 처음으로 받는 마정수기라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법회가 끝나고 부천에 있는 은사 스님에게 들려 인사를 드리고 하룻밤 묵고 돌아왔다. 은사이신 일도 스님은 부천에서 포교당을 운영하고 계셨다. 내가 은사 스님에게 관정 스님 법문을 듣고 왔다고 말씀 드리자, 은사 스님은 이미 알고 계셨고, 관정 스님이 주신 관세음보살도도 가지고 계셨다.
약사암에 갔을 때 만덕 스님을 알게 되어 함께 일본 교토의 고려사(일본에서는 ‘고마데라’ 라고 한다)까지 다녀온 일이 생각난다. 일본 조계종의 총본산인 고려사에서는 매년 남북한과 일본의 미래지향적 교류를 위해 순교자 위령제와 세계평화기원대제를 지내는데 한국에서는 태연 스님이 대표이시다. 백양사 서옹 스님의 상좌이신 태연 스님에게 나는 건당제자이기 때문에 스승님을 모시기 위해 매년 일본 가는 행사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만덕 스님도 함께 가신 것이다.
2) 대둔산 안심사에서 관정 큰스님과의 두 번째 만남
그해 가을 나는 관정 큰스님을 두 번째 만날 기회가 생겼다. 바로 우리 절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안심사에서 법회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법회는 당시 안심사 주지를 맡고 있었던 명오 스님이 주선해서 주최하신 것이다. 나는 바로 옆에 있는 절로 평소에도 많이 도왔기 때문에 이날도 힘이 닿는 데까지 행사를 도왔다.
10월 18일 대전 관음사에서 법회를 마치고 명호 스님이 직접 운전하여 대둔산으로 모셨다. 이날 행사는 분당 약사암에서 한 법회와 같은 식으로 진행되었다. 비록 산속 깊은 곳에서 한 법회지만 명오 스님이 미리 준비를 잘 하여 많은 불자들이 참석하였고, 내 기억으로는 스님들만 해서 15명 이상 참석하였다. 법회가 끝나고 스님들만 따로 만나 기념품도 받고 법명도 받았다. 이 자리에서 나는 굉각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아울러 비단 위에 관세음보살을 잘 그린 그림인데 그 그림에 ‘宏覺 徒弟 惠存’이라 쓰고 왼쪽에 釋寬淨 贈이라고 쓰신 뒤 낙관을 찍어 주셨다.
이렇게 두 번 친견을 한 뒤 마지막으로 2003년 가을 대전 불광사에서 다시 관정 큰스님이 법회를 한다고 해서 참석하였다. 대전 불광사 법회는 규모가 대단했다. 합동 천도재를 지내는데 법당은 좁기 때문에 마당에 위패를 모셨는데 큰 탑에 가득하였다. 법회 때 큰스님 법문이 끝난 뒤 당시 오송암 등정 스님이 큰스님이 극락에서 배워 오셨다는 정토선에 대해서 간추려 설명해 주셨다. 통역할 때보다 간명하게 이해할 수가 있었다.
이때부터 등정 스님과 교분을 가졌으며, 그 뒤 2004년 두 번 더 한국을 방문을 하셨는데 오실 때마다 등정 스님이 연락을 해 주셨지만 참석하지 못했다. 2007년 등정 스님을 통해 큰스님이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2010년 2월 등정 스님이 앞으로 관정 큰스님의 정토선을 펴는 밑돌을 만들기 위해 정토선종을 만들자는 제안이 있어 적극 참여하였다. 그 해 10월 17일에는 정토선종 총무원이 있는 고성 서방사에 사리탑을 세울 때도 동참하여 비록 초창기라 큰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열심히 서로 돕고 있다.
2011년 2월 21일 내가 머물고 있는 토굴이 누전으로 타버렸다. 여러분들이 도와주어 다시 건물을 지었는데, 기왕에 지으면서 옛날 토굴보다는 조금 낫게 지어 4월 23일 점안 법회를 가졌다. 이때 등정 스님이 직접 오셔서 주재를 해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다.
비록 지금은 시작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더 노력하면 작은 시작이 큰 밑거름이 되어 정토선종이 크게 성장하고 정토선도 널리 퍼지리라고 믿는다. 나는 거의 25년 동안 지장기도로 일관하였다. 그 덕분인지 그렇게 병약하고 업이 많던 내가 76살까지 장수하고 아직도 건강하게 기도하고 있다. 76년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문제였다면 이제부터는 어떻게 갈 것인가가 중요하다. 바로 죽음의 문제인 것이다. 삶의 문제를 지장보살이 해결해 주시고 지켜주셨다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은 아미타불 밖에 없으시다.
2011년 불이 날 때 관정 큰스님이 내려주신 관세음보살 그림도 함께 불이타버려 참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은사 스님인 일도 큰스님에게 갔더니 스님도 관정 스님으로부터 똑같은 그림을 받으셔서 간직하고 계셨다. 그래서 말씀드렸다.
“저도 그런 그림을 받아 액자에 넣어 모시고 있었는데 화재로 잃어버렸습니다. 큰스님 그 그림을 저에게 주십시오.”
80살이 넘으신 은사 스님은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하시는 마음이셨기 때문에 때를 쓰는 제자를 위해 그 그림을 선뜻 넘겨주셨다. 나는 그 그림을 가지고와서 소중하게 방에 모시고 있다. 그리고 등정 스님으로부터 관정 스님 정토선 염불 테이프를 가져다 듣고 염불을 시작하였다. 25년간 지장보살 기도를 했으니 지장보살께서는 이제 내가 아미타불 품에 안길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고, 정토선 염불이 잘 되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이제 가는 날까지 25년 기도의 내공을 이용하여 열심히 정토선 염불을 하여 극락에 가서 관정 큰스님을 뵈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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