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내용은 2007년 12월에 쓴 것으로 지금 가만 읽어 보니 어색하고 어슬프기 그지 어없습니다. 그러니 너그럽게 읽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2013년 10월 31일 인도네시아 바탐에서
언제나 그리움이 많은 유처니가
우리 대중가요 <개여울>과 샹송 <내 어린 시절의 시냇물: Le ruisseau de mon enfance>의 비교 -
1. 시작하는 말
노래란 특별한 문학적 지식이 없어도 쉽게 이해될 수 있으며 공통된 정서를 유발하는 힘을 발휘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게 대부분이다. 또 가사의 내용과 음률과 장단이 어우러져 청자로 하여 아주 특별한 어떤 영상을 만들게 하고 기억하게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번 청자의 뇌리에 흔적을 남긴 노래라면 평소 가까이 하지 않더라도 어느 순간 같은 노래가 들려진다면 그 노래의 이미지는 항상 동일한 것으로부터 확대되어 나간다. 이것은 개개인이 가지는 특별한 귀향성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노래를 통하여 자신의 고유한 정서를 극대화시켜 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단 노래에 국한되는 말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고유한 영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각자의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다양한 기억 즉, 이미 습득된 내용에 의하여 본능적으로 만들어진 특정 단어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같은 노래에 특별한 해석을 가한다 하여도 자의성에 의하여 청자에 따라 특별한 영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성질을 가진 노래에 대하여 현대적인 노래의 발생과 변화과정을 우리나라와 서양으로 구분하여 간단히 언급하고 우리의 대중가요사를 요약하여 짚어보면서 1970년대를 전후하여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프랑스의 샹송과 우리의 대중가요 중 주제가 유사한 노래를 각 1개를 선정하여 청각적인 요소를 제외하고 단순히 가사의 내용을 비교하여 살펴보고 그 노래들이 가지고 있는 동질성이 어떤 것인가를 간략히 짚어보고자 한다.
2. 노래의 발생과 변천
노래가 생겨난 것은 인류가 집단생활을 시작한 고대의 원시사회로 볼 수 있으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체적으로 원시적 형태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시작되었다는 설, 집단노동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수단에서 발전했다는 설, 집단의 번영을 기원하는 제천의식에서 출발하였다는 설로 요약할 수 있다. 고대에 있어 동양은 무수한 종교의 영향을 받은 낭송법에 의한 노래가 주로 발전하였으며 서양은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및 히브리(유대) 민족이 그리스에 정복되고 로마에 정복됨으로서 그들의 노래문화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복자들에 의해 비교적 세련된 예술의 형태로 유럽에 전수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고대(상고)시대의 구비시가에 해당하는 노래(공무도하가, 구지가, 황조가, 도솔가, 물계자가) 가 있으며 후일 불교가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면서 중국이나 인도의 불교음악과 달리 우리 고유의 노래로 발전되었는데 예로서 신라시대의 향가와 조선시대에 씌어진 ‘사리영응기’에 전하는 세종대왕의 불가 등이 모두 이에 속한다.
현대적인 노래의 발생 즉, 악보가 만들어져 연주가 가능했던 시기를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재상이었던 왕산악이 현학금(거문고)으로 100여 곡을 창작하여 연주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3~4세기경으로 추정되며 서양은 그레고리오 성가의 영향을 받은 7세기 전후이다. 물론 그 이전에 악보가 없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음악은 노래가 발전된 것이며 노래는 고대로부터 모든 민족들은 종교, 제천의식, 농사의식 등 일상생활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고 의식의 종류에 따라 특정한 음률과 장단으로 집단의 공동체의식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기 때문에 어떤 형식으로든 기록에 의존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노래는 동서양의 구분 없이 고대시대의 노래는 주로 의식주와 노동과 제천의식에 관련된 집단행위의 일체화를 추구하는 가운데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풍속화되어 현재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잠시 나타나 사라져버린 특수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노래도 있다. 이런 노래는 대개 전쟁의 승리를 독려하거나 어떤 위인의 업적찬양, 계몽이나 개혁을 선도하는 등 주로 당대의 사회적 환경을 반영하는 것으로 그 내용은 주로 목적성에 귀착되고 있으며 이런 노래의 문학적 특징은 대개 직설적인 면이 강한 것과 암시적인 경향을 띄고 있다 하겠으며 대체적으로 문학사와 흐름과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노래의 특성은 인류의 역사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노래는 인류의 문화에서 가장 큰 부분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3. 우리나라의 대중가요사
민요·잡가·가곡·판소리와는 양식적으로 전혀 다른 것으로서 서양음악이 전해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우리의 민요가 그 힘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대중과 밀착한 대중가요는 가곡류와는 구별되는 대중성과 상업성을 강하게 띠는 음악 장르이이며 1920년 당시 경성방송국의 개설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당시 축음기와 라디오 같은 매체가 잘 보급되지 않아 가수들이 있는 유랑극단이나 약장수들이 축음기를 틀어놓은 장터, 또는 축음기나 라디오를 갖고 있는 부잣집 마당에서 듣는 노래의 형태로 보급되었으며 개신교의 찬송가가 불리어지면서 대중가요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무사할 수 없는 영향은 일본의 창가였다. 당시에 유행했던 대중가요는 신파극 <장한몽>에 불렸던 주제가인데 일본소설을 번안·각색하였고 일본 창가의 영향을 직접 받았기 때문이다. 그밖에 일본 창가의 영향을 받은 대중가요로는 <희망가> <카츄사> <시들은 방초> 등이 있다.
본격적인 한국 대중가요의 시작은 윤심덕(尹心德)이 최초의 대중가요 음반 <사(死)의 찬미>가 나온 시점으로 볼 수 있으며 일본에서 음반을 취입하고 돌아오는 길에 김우진과 현해탄에서 동반자살을 함으로서 더욱 유명해진 것이기도 하다. 이 노래는 가사에서 보여주듯이 대중가요가 슬픔·이별·죽음·절망 등의 개인감정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어 이후 대중가요 가사의 방향을 가늠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뒤 1927년 김영환은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 <낙화유수>를 발표했고 1932년 음반으로 나온 <황성옛터>는 전수린 작곡, 왕평 작사, 이애리수가 노래하여 큰 인기를 얻었지만 이 시기의 대중가요 역시 일본식 음 구조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당시의 대중가요는 일본식 가요와 서양음악의 정서를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으나 멜로디의 퇴영성과 가사의 절망적인 정서가 결합되어 대중들을 현혹하여 객관적인 현실 직시나 미래지향의 건전한 삶을 가질 수 없게 하는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8·15해방 후 미국문화의 압도적인 영향 속에서 한국의 대중가요는 일제강점기에 뿌리내린 왜색가요와 미국 대중음악을 모방한 서구색가요의 두 줄기를 형성하게 되었다. 특히 서구색가요는 한국에 주둔한 미군을 위해 공연하던 미8군 출신의 대중음악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두 흐름은 1970년대 말까지 가요계의 주도권을 번갈아 쥐며 한국 대중가요의 주된 흐름을 이루게 되다가 차츰 서구 모방의 대중가요가 주류를 이루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1980년대를 전후하여 청소년층이 대중가요의 주된 수용층으로 등장하면서 한국 대중가요는 청소년 취향 중심으로 변화하게 되었고 전반적으로 발라드풍 가요와 댄스 가요가 주류를 이루면서 최근에는 영상기기의 활발한 보급으로 대중가요는 노래 중심에서 가수의 용모와 율동을 중시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고 트롯 가요 역시 과거의 애상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경쾌한 댄스 리듬과 결합하는 양식을 보이게 되었다.
현재 우리의 대중가요는 전통적인 한국의 노래 와 맥이 닿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기는 하나 1960년대 이후 다행스럽게도 가끔 옛 우리의 노래에서 나타나는 대체적인 정서를 내포한 가요(개나리 처녀, 망부석, 개여울 등)가 발표되거나 민요(신 만고강산, 천안삼거리, 태평가, 한오백년 등)가 개사되어 불리어지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또 최근에는 방송매체의 발달에 힘입어 ‘신토불이’의 정신으로 국악가요라는 새로운 장르가 시도되고 있는 반가운 소식도 있다. 그러나 랩이 등장하여 평상적인 우리말의 정서가 파괴되는 등 심히 우려되는 현상도 발생하고 있다.
4. 우리나라와 샹송
샹송은 음유시인들에 의하여 중세의 기사가요(Les chanson de geste)부터 시작되었으나 현대의 샹송은 1900년 전후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당시 예술가의 집합장소인 <샤느와르(검은 고양이)>라는 카바레를 중심으로 예전과 달리 하층계급 사람들의 애정을 묘사하여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 샹송이 처음 소개된 시기는 1930년대 중반에 프랑스영화 <파리의 지붕 밑> <파리제> 등이 들어온 뒤 그 주제가에 의해서였다. 이 노래들은 당시 전문학교 이상 학생들의 인기를 모았을 뿐 대중화되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일본이 중일전쟁을 더욱 확대시키면서 이들 노래를 적성국의 것이라 하여 금지했기 때문이다. 또한 50년대 중반에 <고엽>이 크게 유행한 일이 있고 60년대 중반에는 그레코의 내한 공연을 계기로 한때 샹송 붐이 이는 듯했으나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그 이후 살바토레 아다모의 <눈이 내리네(Tombe La Neige)>가 샹송에서 거의 유일하게 번안되어 불러지게 되었으며 나나무스꾸리의 <사랑의 기쁨(Plaisir d‘amour)> 등으로 다시 샹송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아다모는 이탈리아, 나나무스꾸리는 그리스 출신이다.
5. 우리의 대중가요 <개여울>과 샹송 <내 어린 시절의 시냇물: Le ruisseau de mon enfance>의 감상
노래는 청각에 호소하는 측면이 강하기에 단순히 내용만을 가지고 노래를 비교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외국의 노래 중 어떤 하나를 골라서 주제가 유사한 우리의 노래와 비교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며 상당한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은 뻔하며 또 심도 있는 결과를 도출해 낸다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가사만으로 이루어진 가치 없는 단순한 비교라 할지라도 우리의 모습을 그들과 함께 비추어본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자 한다.
비교할 노래로 소재와 주제가 비슷한 우리나라의 <개여울>과 프랑스의 <내 어린 시절의 시냇물: Le ruisseau de mon enfance>을 선정하였다. 선정의 이유는 <개여울>은 비록 대중가요로 불리어지고 있기는 하나 전통적인 한의 정서를 여성적 정조로서 민요적 율조와 민중적 정감을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표출한 우리나라의 대표적 서정시인이자 민요시인으로 유명한 김소월 시인의 작품이기에 우리의 정서를 대표할 수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며 샹송 중에서 <내 어린 시절의 시냇물>을 선정한 것은 <개여울>이라는 언어적 이미지와 가사의 내용이 풍기는 애절함이 아주 유사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김소월의 <개여울>은 아마도 자신의 고향인 평북 구성에 있는 대령강의 지류인 천방강으로 보이며 그의 어린 시절의 어떤 추억이 이 시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 생각된다. <내 어린 시절의 시냇물>은 작사자인 동시에 작곡자이며 가수인 아다모의 노래로서 그는 지금도 프랑스를 대표할 수 있는 샹송가수라는 것과 가사 내용이 역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노래하고 있으며 우리가 흔히 그려볼 수 있는 시골의 시냇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며 왜 이 노래가 우리나라에서 널리 알려져질 수 있었던가 파악해 보고자 함이 이 두 개의 노래를 선택하게 된 다른 또 하나의 이유이다.
먼저 김소월의 시에 이희묵이 작곡하여 1966년 가수 김정희가 불렸으나 1972년 가수 정미조가 리메이크하여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개여울>의 전문을 읽어보자.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 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이 봄바람에 해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런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입니다
이 가사를 찬찬히 살펴보면 원문과 딱 한 곳이 개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맨 마지막의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입니다>가 시의 원문에서는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이다. 이 몇 자 때문에 전체적인 분위기가 이상하게 흐트러져버렸다. 시가 가지는 원래의 영상을 그대로 두고는 노래로 부를 수 없어 개사를 한다는 것은 자칫 아주 큰 훼손을 가져올 수 있는 행위이다. 아무튼 여기서는 시를 비평하고자하는 것은 아니니 노래로서만 감상해 보기로 하자.
이 노래의 분위기를 인간의 희노애락 중에서 선택한다면 아마 슬픔(哀)에 가까울 것이다. 가려는 <당신>을 잡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게 베여있기 때문이다. 가려는 사람은 갔지만 화자의 마음은 헤어지지 않으려고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개여울>이라는 제목이 가지는 풍경은 골짜기나 평범한 시골마을의 얕고 물살이 빠른 작은 개울이다. 그런 곳에 당신과 영원한 이별을 예감하는 풍경 속에 한 연인이 함께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라. 작은 물살이 빠르게 지나가는 만큼 아픔을 빨리 잊어버리고 싶을 것이다. 더구나 초봄의 햇살을 받은 새싹이 파릇함을 더할 때 살랑이는 물결은 아마도 당신에게 화해하라는 말을 던져줄 것이다. 그런 자연의 아름다움은 헤어진 당사자에게도 많은 생각과 망설임을 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저앉았다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는 풍경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포기하였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편히 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노래의 전반에 풍겨지는 것은 털썩 주저앉았다는 표현은 강한 결심을 내포하고 있다. 이 노래속의 주인공인 화자는 이별을 하였지만 잊혀 지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적극적으로 잡지는 못하고 있다. 상대의 돌아옴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은근한 자기고백이다. 화자의 입에서 맴돌고 있던 자신에게 중얼거리는 독백인 것이다. 직설적이고 적극적이지 못하였던 과거의 회상이다. 그러면서 간절한 그리움 끝에 매달려있는 자신을 현재의 시간에서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풍경으로 본다면 죽은 자에 대한 회상일 수 있다. 언제나 함께 할 것 같았던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이별하고 그를 그리워하며 추모하는 모습이다. 봄바람에 잔물결 살랑이며 새싹 돋아나는 개여울에 털썩 주저앉아 함께하던 시간을 회상하며 언젠가 자신도 이 세상을 떠난다면 그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염원과 함께 결코 잊지 못하노라고 다짐하는 풍경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청자에 따라 다양한 풍경을 그려낼 수 있겠지만 이 두 가지의 풍경만을 놓고 본다면 아마도 이 노래를 듣거나 부르는 대중들이 생각하는 풍경은 전자에 가까우리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대중가요라는 특성 즉, 대중가요는 복잡한 연상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대중가요의 가사를 시로 보는 경향도 있지만 만약 청자에게 문학적인 지식을 요구하는 대중가요라면 그 노래는 만든 자들만의 것이 되고 만다. 대중가요를 창작하는 사람들 전부를 직업작가로 볼 수는 없지만 대부분 상업성을 전제로 하는 수익활동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노래의 가사는 원작이 비록 서정시이기는 하나 -극히 일부분이기는 하나- 원작을 개작하고 대중가요로 등장한 시점부터 원작의 시와 관계없이 대중적인 영상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잊지 못하는 그리움을 전형적인 시골을 매개로 하여 평화로운 풍경에 담아낸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 노래를 들으며 원래 소월의 시를 연상한다면 당시 일제의 억압에 짓눌린 우리나라의 암담했던 현실을 탄식하며 잃어버린 조국의 광복을 기원하는 내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은 살바토레 아다모(Salvatore Adamo)가 부른 샹송 <내 어린 시절의 시냇물: Le ruisseau de mon enfance>을 감상해 보기로 하자. 이에 앞서 아다모의 이력을 잠시 살펴보면 그는 1943년 11월 1일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 코미조에서 태어난 남성가수 겸 작사 작곡가이다. 4세 때 일가와 함께 벨기에로 이주하였으며 12세 무렵은 교회의 성가대에서 노래 부르고 15세 때부터 가사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조부한테 받은 기타를 치면서 그것에 곡을 붙여 혼자 즐기고 있었는데 학교 친구들이 권해 콘테스트를 받게 되었지만 몇번 실패한 뒤 어떤 콘테스트에서 우승하고 레코드 회사와 계약하여 1962년 부른 쌍 뚜와 마미 (Sans Toi Ma Mie)의 대성공과 1965년 파리의 올렝삐아극장에 출연 대성공을 거두면서 세계적인 유명가수가 되었다. 그 후에도 잇따라 뛰어난 작품을 쓰고 스스로 노래 부르기도 했다. <내 어린 시절의 시냇물: Le ruisseau de mon enfance>도 그 중의 한 곡이다. 다음은 이 노래의 번역문과 원문의 전문이다.
내 어린 시절의 시냇물
노래: 살바토레 아다모
나의 어린 시절을 말해다오, 내 정든 시냇물아.
어느 땐가 물결 따라 흘러가버린 나의 기회를
내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기쁨을 말해주오.
결코 시들지 않을 수레국화가 만발하였다고
내 꿈들로 만든 종이배를 네게 맡기려 수줍게 왔던
그런 일요일들에 대하여 말해다오
말해다오, 내 첫사랑은 내 생각처럼
지극히 순결하였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렇겠지?
나의 어린 시절을 말해다오, 내 정든 시냇물아.
어느 땐가 물결 따라 흘러가버린 나의 기회를
나의 어린 시절은 추억 따라 흐르고 흐르는
붙잡기도 전에 사라져버린 즐거운 놀이
어느 날 무관심의 바람으로 손을 놓아버렸기에
나는 공허한 침묵으로 울었고 너는 흐르는 눈물이 되었지
장미 숲과 산딸기 숲을 가로질러 왔다오
소식을 듣고자 찾아 왔오, 나로 상처 입은 당신에 대하여
나의 어린 시절을 말해다오, 내 정든 시냇물아.
어느 땐가 물결 따라 흘러가버린 나의 기회를
난 꿈속에서 얼굴을 떨구었오, 그건 시냇물에게 잘못한 것이라고
난 꿈속에서 상처 입은 사랑을 다시 일으켰다오, 그건 시냇물에게 잘못한 것이라고 !
- 번역 송유천 -
Le ruisseau de mon enfance
Salvatore Adamo
Parle-moi de mon enfance, mon vieux ruisseau
Du temps où coulait ma chance au fil de ton eau
Parle-moi des doux délires de mes tendres années
Les bleuets qui les fleurirent sont-ils a jamais fanés
Parle-moi de ces dimanches où je venais te confier
En timide voile blanche, mes rêves de papier
Parle-moi tant que j'y pense de mon premier amour
Il était tout innocence, a-t-il duré toujours ?
Parle-moi de mon enfance, mon vieux ruisseau
Du temps où coulait ma chance au fil de ton eau
Coule coule mon enfance au fil du souvenir
C'est un jeu perdu d'avance que de la retenir
Car le vent de l'insouciance un jour lâcha ma main
Je vains pleurer en silence et larmes tu devins
Champs de roses champs de ronces que j'avais traversés
Je viens chercher réponse, qui de vous m'a blessé ?
Parle-moi de mon enfance, mon vieux ruisseau
Du temps où coulait ma chance au fil de ton eau
Je suis tombé le nez dans un rêve, c'est la faute au ruisseau
Cœur meurtri je m'en relève, c'est la faute à son eau !
이 노래의 번역은 직역으로 가능한 원래의 가사가 가지는 이미지를 살려보려고 노력하였지만 미비한 점이 많다. 아무튼 이 노래 역시 청자에 따라 많은 영상을 쏟아지게 하지만 첫 번째 이미지를 간단히 정리해 보면 수레국화가 만발한 고향의 시냇가에서 종이배를 띄우며 즐겁게 놀던 너무나 천진난만한 소꿉동무인 첫사랑을 많은 시간이 지난 후 문득 잊어버린 것을 깨닫고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 돌아와 이별의 아픔으로 상처 입었을 그 사랑에 대하여 용서를 구한다는 내용이다. 함께 할 기회가 있었지만 자신의 무관심으로 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에 대하여 꿈속에서나마 용서를 구하는 이 노래의 마지막 연의 시냇물(le ruisseau, son eau)은 흐르는 시냇물 자체가 아니라 첫사랑을 말하는 것 같다.
이 노래의 두 번째 이미지를 간단히 정리해 보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온갖 추억이 머물고 있으며 그 중에 가지 못하였던 꿈들에 대한 아쉬움과 그 추억이 언제나 아름답게 새겨져 있기에 항상 어린 시절의 자신을 돌아보며 어린 시절과 같은 순진하고 티 없는 꿈을 이루지 못한 회한을 고향의 시냇가에서 풀어내며 스스로 용서를 구하는 노래이다. 이렇게 볼 때 이 노래의 마지막 연은 시냇물(le ruisseau, son eau)은 흐르는 시냇물 자체가 그립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변함없는 고향이 그립다는 것일 것이다.
6. <개여울>과 <내 어린 시절의 시냇물>의 전체 분위기 비교
이 두 노래를 선택한 이유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주된 소재가 거의 같다는 것이다. <개여울>은 작은 시내이며 물살이 조금 빠른 곳으로 여겨지는 장소라는 점은 시냇물이라는 것과 차이는 있으나 동반하는 풍경은 거의 유사하며 이 두 노래의 내용으로 보아 어떤 이별을 회상한다는 점과 또 이별의 정을 평화로운 풍경으로 담아내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이별에 대한 아픈 마음을 스스로 위로한다는 점도 같다. 그러나 풍기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많이 다르다. 이미 떠난 상대의 말을 빌어 역설적으로 이별의 상대를 잊지 않겠다는 <개여울>의 이별, <내 어린 시절의 시냇물>은 이미 이별한 대상을 스스로 찾아가 어느 순간의 잘못에 대하여 상대에게 용서를 구하며 이별에 대한 회상을 하고 있다는 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여울>은 전체적으로 슬픔을 억누르는 어두운 그늘을 불러오고 있다고 보아지며 <내 어린 시절의 시냇물>은 가능하다면 새롭게 다시 출발하겠다는 밝은 면을 갖고 있다고 보아진다.
이러한 공통점과 미묘한 차이를 가진 이 두 노래가 우리나라에서 불러진 시기는 별과 몇 년의 차이이므로 거의 동일시기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노랫말이 만들어진 시기는 거의 반세기라는 차이를 갖고 있다. 1922년 김소월이 <개여울>을 발표하였던 시기는 삼일운동이 있었던 3년 후로 매우 암담했던 일제강점기였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7. 맺음말
우리나라와 프랑스는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예부터 닮은 점은 거의 없다. 우리와 프랑스가 서로 마주하게 된 것은 1866년 프랑스가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강화도를 침범하여 대량의 서적,· 무기,· 금은괴 등 문화재를 약탈해 간 아주 불행한 사건인 병인양요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은 정서적 동질감에서 비롯되므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아무리 좋은 노래라 평을 받는다하여도 특별한 지식이 있어야 이해할 정도의 노래라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일으킬 수가 없다. 또 아무리 대중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노래라 할지라도 특수한 목적성을 띤 노래라면 필요한 시기가 지나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두 노래는 사랑과 이별이라는 인간 모두의 본성을 아주 평화롭게 두드리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할 수 있는 훌륭한 노랫말이다. 더구나 <내 어린 시절의 시냇물>은 샹송이라 하지만 이 노래가 청자에게 주는 풍경은 우리의 시골이라는 고향의 풍경과 별반 다른 곳이 없다. 비록 장미의 숲이라는 일부 이국적인 풍경이 없는 것은 아니나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꽃이 되어버린 것이 장미이며 우리에게서도 이미 장미의 숲을 그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더 이상 이국적이지도 않는 우리의 풍경이 되어 그대로 녹아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이 두 노래는 동시대에서 출발하여 지금도 여전히 즐겨 부르고 즐겨 듣는 우리의 노래가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어느 나라에서 생겨나던 대중적인 공감을 가진 노래라면 어느 곳에서나 사랑받을 수 있는 노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8. 덧붙이는 말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맺음말이 여기서는 옳지 않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내 어린 시절의 시냇물>이라는 이 노래가 많이 알려진 이유를 살피면서 아주 엉뚱한 사실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이것과 더불어 <개여울>이라는 노래에 대하여 아쉬움을 토로하고자 한다.
<내 어린 시절의 시냇물>이 얼마나 많이 알려져 있는가를 인터넷에서 조사한 결과 약 150여개의 카페 혹은 블로그에서 <그리운 시냇가>라는 제목으로 이 노래를 찾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 많이 불러지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곡의 특성이 우리의 감성과 잘 어울리는 것을 하나로, 두 번째는 살바토레 아다모의 세계적인 명성에 의한 무조건적 동경에 기인한다고 보아진다. 왜냐하면 가사는 우리말로 번역되어 인터넷에 알려져 있는 이 노래의 대부분이 단순한 오역이 아니라 원래의 내용과 상반되는 부분이 있고 심지어 무슨 말인지도 모를 것들도 버젓이 나돌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마지막 연의 마지막 행인 “c'est la faute à son eau !”를 “시냇물 너의 책임이야” 혹은 “시냇물 너의 잘못이야”로 번역한 것 등이다. 전체의 내용이 순식간에 바뀌어버리고 만 것이다.
50대를 전후한 20여명과 노래 <개여울>을 소재로 대화를 나눈 결과,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된 이유로 작곡자의 몫도 기여를 하였겠지만 우선적으로 <김소월>이라는 뛰어난 시인의 이름이 작용하였으며, <개여울>이 대중가요로 세상에 나왔을 때 많은 통기타 가수의 활동으로 대중가요가 그야말로 낭만적인 분위기로 대중을 요동치게 만들었던 시기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고, 당시의 수많은 대중가요의 내용은 기성세대들이 천박하게 여겼던 남녀를 주제로 한 사랑을 다루었던 것과 같은 범주로 남녀의 만남과 이별을 노래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급격한 우리나라의 산업화에 따라 객지로 나간 젊은이들의 향수들과 맞물려 상충작용을 불러일으킨 결과 중 하나일 것으로 보인다. 널리 불리어진 것은 좋지만 아쉬운 일은 원작의 의미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로 인하여 손상되었다는 것은 어쨌든 불행한 것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노래를 부른다거나 좋아한다는 것은 집단 혹은 개인의 내면을 드러내는 일종의 행위와 다름없다. 그 중 하나에 불과한 대중가요는 가사만으로 만들어지는 작품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의 이러한 비교가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중가요는 가사의 내용과 곡이 어우러진 것이지만 이 중 하나인 곡을 선택하여 좋아한다고 큰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위로하는 것은 소리에 대한 지식이 없는 필자의 무지에서 비롯되었으나 이 두 노래가 (필자를 포함하여) 모두 원문의 뜻이 크게 훼손된 체로 널리 알려졌다는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다.
읽으면서 10년도 더 전에 송샘의 글을 몇편 읽었던 적이 생각이 납니다 그때 생각하기를 시도 아니고 수필도 아니고 논문이라 보기에도 좀 그렇고 그런데 상당히 논리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기록을 해놓았다고 여겼거든요 하여튼 명석하십니다 요즈음에 태어났으면 서울대는 거뜬히 들어갔을...^^
현학 샌님, 이건 그냥 관심을 가졌던 노래가 (제게서만 그런지는 모르지만) 이상하게 알려져 있어 그것을 간략히 정리해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창하게 격려를 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생각을 정리해 본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지금 읽어 보니 어떤 부분은 궤변 같기도 하고 지금의 제 생각과 차이도 많고 그러내요. 그렇지만 그 때는 6년 전이기도 하고 당시는 당시이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올렸습니다.
첫댓글 논문입니까? ^^
이젠 정말 인터넷의 긴 글 읽는 것은 상당한 집중력을 요한 일, 그야말로 일입니다 ㅎ
글쓴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도 작정하고 다 읽어 내려 갔습니다 ㅋ
그리운 시냇물 노래도 찾아 들어 보면서...
저의 읽는 집중력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송샘의 연구집중력을 칭찬하려고 댓글을 달아야 되는데 돋보기 끼고 한참을 들여다 보고 나니 다른분들도 마찬가지 아니겠다 싶고 그래서 댓글 달기가 쉽지는 않으시겠구나 싶습니다
읽으면서 10년도 더 전에 송샘의 글을 몇편 읽었던 적이 생각이 납니다
그때 생각하기를 시도 아니고 수필도 아니고 논문이라 보기에도 좀 그렇고 그런데 상당히 논리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기록을 해놓았다고 여겼거든요
하여튼 명석하십니다
요즈음에 태어났으면 서울대는 거뜬히 들어갔을...^^
현학 샌님, 이건 그냥 관심을 가졌던 노래가 (제게서만 그런지는 모르지만) 이상하게 알려져 있어 그것을 간략히 정리해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창하게 격려를 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생각을 정리해 본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지금 읽어 보니 어떤 부분은 궤변 같기도 하고 지금의 제 생각과 차이도 많고 그러내요.
그렇지만 그 때는 6년 전이기도 하고 당시는 당시이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올렸습니다.
고맙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