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큰 인물은 하늘이 낸다고 했다. 대성 공자를 하늘이 내리셨고, 그 뒤를 이은 주자도 하늘이 내셨다. 주자의 학문을 송자가 이었으니, 송자가 아니었으면 주자의 도가 이 땅에 없었으리라.
공부자와 주부자와 송부자의 도는 천지 사이에 날과 씨와 같고, 우주의 기둥과 대들보처럼 우뚝하니 이 세 어른 중 한 분만 아니 계서도 안 된다.
홍수가 범람하여 산허리를 싸돌고 언덕까지 넘쳐 오르는 긴박하고 무질서한 세상이 되었으니, 어찌 부지런히 애써서 세 부자의 도학을 취하지 않겠는가?”
라는 글을 남겼다. 공자와 주자는 귀에 익인 이름인데 송자는 누구인지 자못 궁금하다. 사전을 찾아보니 송시열이다.
1689년 7월 19일 ‘송자宋子’ 송시열이 향년 82세에 세상을 떠났다. 공자, 맹자, 순자, 노자, 장자, 묵자, 한비자처럼 ‘자’가 들어가는 별칭 ‘송자’를 얻은 것과, 정조의 극찬을 받은 사실로 미루어볼 때 송시열이 이룬 학문적 업적은 일반인이 상상하는 이상의 대단한 경지인 듯하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유학 또는 성리학을 이야기할 때 (‘자’가 붙은 별칭을 얻지 못한) 이황, 이이, 기대승, 조식 등은 떠올려도 송시열은 떠올리지 않는 것일까?
《두산백과》는 송시열을 “조선 후기 문신 겸 학자, 노론의 영수. 주자학의 대가로서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중략) 예론에도 밝았다. 주요 저서에는 《송자대전》 등이 있다”면서 “조선 중기 가장 영향력이 높았던 정치가, 학자로 평가된다”라고 소개한다. ‘송자’라는 별명이 아주 허황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송시열은 장희빈의 100일도 안 된 아들을 원자元子(태자로 책봉되지 않은 맏아들)로 삼으려 하는 숙종의 방침에 반대하다가 사약을 받았다.
연화도가 굽어보이는 위치의 당포성. 송병선이 연화도를 방문했다면 반드시 이곳 당포성에도 들렀을 것이다.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 송병선宋秉璿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강탈된 데 분개해 1906년 1월 24일 황제 ‧ 국민 ‧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유서에서 송병선은 을사오적 처형과 을사늑약 파기를 주장하고, 국민적 궐기로 국권을 되찾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송병선이 자결하자 노비 공임恭任이 뒤따라 자결해 세간에서 의비義婢로 칭송하였다.
송병선이 경남 충무 당포진 앞 연화도蓮花島에 들렀던 감회를 읊은 시 〈연화도〉를 읽어본다.
“蒸炎六月向南來 [증염유월향남래]
유월 무더위에 남쪽으로 와서 보니
蓮嶼瘴雲鬱未開 [연서장운울미개]
연화도 독한 구름 아직 개지 않았네
孤店殘燈添客緖 [고점잔등첨객서]
흐린 등불 쓸쓸한 주막 첫 손님이 되었지만
海天一雨過黃梅 [해천일우과황매]
바다 하늘 한번 비에 장마가 지나가네”
서정시인 것은 분명하지만 우국충정이 짙게 배어있어 읽는 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하와이도 섬인데, 이승만은 어땠을까?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불법으로 영구 독재를 추진하다가 시민혁명에 쫓겨 하와이로 도피했던 이승만은 그곳에서 1965년 7월 19일 운명했다. 90세의 자연사였다. 그는 조국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나고 싶어 했지만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입국을 불허했다.(아래 '미주' 참조)
그리스 고대 철학자 에피쿠로스(기원전 341∼271)는 “우리가 존재할 때에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고, 죽음이 찾아오면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산 자와도 무관하고 죽은 자와도 무관하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에피쿠로스는 지속적이고 정신적인 쾌락을 누릴 수 있어야 행복해진다고 했다.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면 점점 더 독한 것을 찾게 되기 때문에 ‘쾌락의 역설’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했다.
송시열, 그의 9세손 송병선, 이승만은 각각 다른 죽음을 보여준다. 세 경우 앞에서 나는 에피쿠로스처럼 철학적 사유에 젖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바람직한 죽음은 어떤 형태일까?’라는 의문부터 먼저 일으킨다. 자연의 섭리인 죽음이야 인간이 벗어날 수 있는 영역이 아닌즉 궁리해본들 어떤 진리도 깨달을 것이 없다고 여기는 ‘개똥철학’ 탓이다. 다만, 천국의 존재를 독실하게 믿는다는 기독교 신자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우스꽝스러운 행태를 일삼는 것을 보면 진시황의 사례는 오히려 인간답다는 생각은 든다.
그저, 어떤 죽음을 맞이해야 인간답게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송시열은 절명하는 순간 제자에게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바탕으로 삼고, 사업은 효종께서 하고자 하시던 뜻(북벌론)을 주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겼다는데 ….
(미주) 〈WorldKorean〉 2021.08.17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36] : “(전략) 이승만대통령은 살아생전 하와이에서 여러 차례 귀국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거부 때문이었다. 결국 1965년 7월19일 90세로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하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