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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추억☞ 흘러간 세월의 흔적 스크랩 인간 박정희의 일기
아릭스 추천 0 조회 31 06.02.28 00:3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977년 1월 12일

밤뉴스 시간에
어제 취임한 미국의 새 대통령의 의기양양하고 즐거워하는 표정과,
임기를 마치고 시골에 돌아와서 골프를 치며
유유자적하는 포드 전 대통령의 표정을 찍은 TV화면이 나왔다.

그러나 나의 눈에는 포드 전 대통령이 훨씬 행복하게 보이고
인생의 전유(全有)를 과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난 번 선거에서 패배한 것이 인생에서는 오히려 행복할런지도 모른다.
물론 본인들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1977넌 3월 7일 (월)

날씨가 완전히 풀려서 봄날씨다.
역시 경칩이 지나니 추위는 물러가는 모양.
밤 10시 10분 KBS에서 육영수 여사 전기 낭독을 침대에서 듣다.

1974년 5월 14일,
한국자연보호협회 회원들이 청와대에 찾아와서
아내에게 동 협회 총재를 맡아 달라고 청하던 날의 이야기가 나온다.

오후 4시경 식당에 회원들을 초대,
다과를 대접. 나의 집무실에 아내가 와서 잠깐 나와
회원들을 격려해 달라고 하여 따라나가 인사를 하고
잠시 동안 환담을 나누는 당시의 이야기다.
엊그제 같은 이야기다.

아내가 타계하기 꼭 3개월 전의 이야기다.
아내는 남달리 자연을 좋아하고 아꼈다.

"이 다음에 이 자리 그만두거든 시골에 가서 조그만 집 하나 짓고 살아요,
그리곤 그 뒷산에는 바위가 있고, 바위 밑에는 맑은 물이 나오는
그런 곳에서 살아요."

아내가 자주 하던 말이다.
아내는 그것이 소원이었다.
그 조그마한 소원을 이루지도 못하고 그이는 갔다.
지금도 지방에 다니다가 나무 있고 바위 있는 아담한 산이 있으면
나는 유심히 그 산을 보게 된다.
그이가 저런 곳에서 살기를 원했는데 하고.

그러나 이제는 누구와 같이 그런 곳에 가서 조용히 살까.
아내는 또 우리나라 재래식 한옥을 좋아하였다.
지방에 차로 같이 다니다가 재래식 기와집 반듯한 집을 보면
"저 집 참 좋지요? 저런 집 하나 짓고 살았으면 좋겠어요."하고
처녀시절 옥천 친정집에 살던 때 이야기도 자주 하였다.

대청마루에 돗자리 깔고 앉아서 달빛을 바라보던
시골의 풍경을 늘 그리워하였다.
그런 생활을 노후의 유일한 낙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이는 먼저 갔다. 




1977년 4월 13일 (수) 맑음

창원(昌原)공단 시찰.
1년 만에 둘러보는 창원공단의 발전된 모습은 장하기만 하다.

대우실업, 통일산업, 기아산업을 오전중에 시찰하고
한국종합특수강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 다시 한국특수강, 제일정밀, 대한중기를 시찰,
우리의 방위산업이 1년 동안에 놀라우리 만큼 발전되었고
기업인, 종업원들이 열성으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만족감을 금할 수 없다.

1978년까지 기간부문이 완료되고 양산체제(量産體制)에 들어갈 수 있다고
연초 기자회견에서 국민들에게 발표한 것을
예정보다도 훨씬 앞질러 달성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갖게 되었다.

모든 산업전사들의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이 거룩하게만 보였다.
그 땀진 얼굴, 기름진 작업복들이었지만
그다지도 값지고 거룩하게만 느껴져서 눈에서 사라지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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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4월 19일 (화) 맑음

오후 7시 30분경 영등포구에 있는 청소년 근로자 야간학교 수업상황을 시찰하다.
영등포 공업고등학교,
영등포 여자상업고등학교,
대방여자중학교, 32개교를 구로공단 최명헌 이사장의 안내로 둘러보았다.

직장에 다니는 청소년들이었지만
여학생 남학생 다들 머리를 학생형으로 단정하게 다듬고
산뜻한 교복으로 앉아서 진지한 태도로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귀엽고 대견하다기보다는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금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그들에게는 가정이 빈곤하다는 죄 하나만으로
남과 같이 그렇게 원하던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직장을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친구들이 고등학교학생복으로 학교에 가는 것을 보고
어린 마음에 부럽다기보다 나는 왜 학교를 못가느냐 하고
자기 스스로의 처지를 원망도 하고 부모와 가정을 원망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렇게도 한스럽던 일이 이제 소원이 성취되었다.
야간이나 주간이나 자기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렸다.
가르치는 교사들도 그들의 열성에 감동하여
열과 성을 다하여 가르치고 또 보람을 느낀다고 하는 말을 듣고 흐뭇하기만 하다.

이 학생과 교사들을 위하여 무엇인가 도와주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돌아왔다.
이들의 앞날에 행복이 있기를 마음속에서 기원하였다.

+++++++++


1977년 4월 28일 (목) 흐린 후 맑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432주 탄신일이다.

11시 현충사 제례행사에 참석하다.
"국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굽어살피시사
이 조국 이 겨레의 앞날을 밝게 비춰 주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하고
장군의 영전에 머리 숙여 기원하다.

오후에는 예산군 신아면 용궁리를 방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선생의 고택 복원공사를 둘러보고
인근에서 모여든 주민들과 담화도 나누었다.

시골 할머니들이 나의 손을 잡고 "만수무강하십시오. 늙지 마세요." 하고
울먹이는 표정을 보고 순박하고도 가식 없는
시골사람들의 따뜻한 인정에 크게 감동을 느낀다.

이 착하고 어진 국민들을 위하여
내가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너무나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고온천에 들러서 온욕을 하고 일박.
연도의 농촌풍경이 퍽 아름답고 비닐하우스가
온 들을 덮고 있는 모습은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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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4월 29일 (금) 맑음

10시에 예산군 덕산 윤봉길 의사 45주기 의거일 제례에 참석.
윤 의사의 유족 장남 종씨를 만나서 유족들의 안부와 생계 형편을 물어 보았다.
윤 의사의 생가와 기념관을 둘러 보다.

약관(弱冠) 20여 세에 망국의 한을 품고 중국대륙에 건너가서
조국광복과 민족정기를 위하여 폭탄을 품고 사지에 뛰어 들어간 의기.
그 때가 1932년, 의사의 춘추 이제 겨우 25세.

안중근 의사와 더불어 나라가 망하고 민족의 정기가 사라져가고 있을 때에
겨레의 가슴속에 다시금 횃불을 켜준 의열의 쾌거를 강행하였으니
참으로 장하도다.

충의(忠義)는 천추(千秋)에 빛날 것이며
민족의 얼이 맥맥이 살아 길이 이 조국 이 겨레를 수호하리라.
재천(在天)의 영(靈)이 굽어살피시와
이 조국 이 겨레를 길이 빛나게 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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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6월 7일 (화) 맑음

6월 5일자 미국의 유력지 <뉴욕 타임즈>지에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군의 기자회견 내용이 보도,

보도내용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김은 10월 유신 후 73년 초에 가족과 같이 미국으로 떠났다.
떠난 후 얼마 지나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10월 유신 후 유정회 국회의원에서 탈락된 데
불만을 품고 떠났다고 알고 있다.
8대 국회때는 비례대표로 국회에 들어갔으나
임기 중 절반은 해외에 나가 있었다. 당의 승인도 허가도 없이 나다녔다.
1기 유정회에서 탈락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 후 방미하는 인편에 귀국할 것을 여러 번 종용했으나
출판관계 일이 끝나면 돌아온다고 연락을 해 왔다.
최근에도 귀국의 뜻을 간접적으로 전달해 왔으므로 돌아올 것을 종용한 바 있고
거의 귀국을 결심하고 있지 않았나 했으나
또다시 누군가의 유혹으로 변심한 듯하다.
김에게 6년이나 중앙정보부장이란 중책을 맡겼던 나의 부덕으로 돌릴 도리밖에 없다.

나 개인에 대한 배신은 좋으나 조국에 배신과 반역을 하다니
괘씸하다기보다 참으로 측은하고 불쌍한 생각이 앞선다.
이 땅에 태어나서 이 땅에 살다가 이 땅에 묻혀서
이 땅의 흙이 되겠다는 생각이 없는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났더라도
이 땅의 주인은 될 수 없고 우리와 같은 겨레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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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0월 17일 (월)

10월 유신 5주년
5년 전, 1972년 10월 17일 역사적인 10월 유신이 내외에 선포되고
새로운 역사의 장이 시작되었다.
급변하는 국제정치 환경 속에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면서,
안정과 번영을 추구해 나가면서,
평화적인 통일의 기반을 조성해 나가겠다는 민족의 결단이었다.

5년간에 많은 도전과 시련을 겪으면서
자주, 자립, 자위라는 정신적 기조 위에 근면, 자조, 협동을 행동강령으로,
불사조와 같이 고난을 극복하면서 우리는 위대한 업적을 거양할 수 있었다.
남들은 이것을 기적이니 한국의 신화니 하고 찬양을 하지만
이것은 결코 기적도 신화도 아니다.

겨레의 피와 땀으로써 이룩된 결정(結晶)이요
대가(代價)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제 아시아의 강국으로 곧 등장하게 될 것이다.
5천년 역사에 빛나는 영광의 세대를 창조하고야 말 것이다.

동포들이여!
내일의 이 영광을 쟁취하기 위하여
조금도 늦추지 말고 더욱 분발하고 매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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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0월 28일 (금) 맑음
강화도 내 전적지 보수 정화사업이 완공되어
금일 14시 강화교 입구에 이는 갑곳돈대에서 테이프를 끊으면서 준공식을 올렸다.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용두돈대, 강화읍 내에 있는
서문, 구연무장 북문, 삼랑성문, 고려궁지 등이 보수 또는 중건되어
옛 조상들의 호국의 거룩한 얼을 기리며 성대히 준공을 보았다.

작년 3월 1일 강화도를 방문,
옛 사적지 보존이 지극히 부실함을 보고 보수를 지시,
작년 8월에 착공, 만 1년 2개월 만에 완공되었다.
이곳은 우리의 후세에게 호국정신을 가르치는 도장으로서
이곳의 유적지를 잘 관리보존하기 위하여 22억원의 예산으로 공사가 끝났다.

금일 강화도민들은 완전히 축제분위기다.
김포ㆍ강화의 들에는 추수한 볏단이 온 들에 쌓여 있어 풍요하게만 보였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내 나라를 지키는 데는
내 힘이 있어야만 지킬 수 있다는 교훈을 명심해서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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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2월 22일 (목)
음력 11월 12일 동지(冬至), 백 억불 수출의 날. 백 억불 수출목표 달성 기념행사 거행,
오전 10시 장충체육관에서 각계인사 7천여 명이 참석, 성대한 행사를 거행하였다.
1962년 제 1차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던 해 연간 수출액이 5천여만 불이었다.
그후 1964년 11월말에 1억불이 달성되었고 거국적인 축제가 있었고
11월 30일을 <수출의 날>로 정했다.

1970년에는 10억불, 7년 후인 금년에 드디어 백 억불 목표를 달성했다.
그 동안 정부와 우리 국민들이 피땀 어린 노력과 의지의 결정이요 승리다.
서독은 1961년에,
일본과 프랑스는 1967년에,
네덜란드는 1970년에 백 억불을 돌파했다고 한다.

그러나 10억불에서 백 억불이 되는데
서독은 11년, 일본은 16년(1951-1967)이 걸렸다.
우리 한국은 불과 7년이 걸렸다.
모든 여건이 우리가 더 불리한 여건 속에 이룩한 성과라는 데서
우리는 크게 자부를 느낀다.

1981년에 가면 2백 억불을 훨씬 넘을 것이다.
1986년경에 가면 5-6백 억불이 될 것이다.
우리 민족의 무서운 저력이 이제야 폭발적으로 발산될 때가 왔다.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고 분발해야 한다.
오늘 이 날은 우리 한국경제사상 길이 기록될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민족중흥의 역사적 과업수행에 있어서도
길이 부각될 이정표가 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백 억불, 이것은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자.
새로운 각오와 의욕과 자신을 가지고 힘차게 새 전진을 굳게 다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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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월 18일 (수) 눈

1978년도 연두기자 회견을 10시 정각 중앙청 회의실에서 가졌다.
목감기가 아직 완전 회복되지 않아서
음성이 약간 탁하고 맑지 못하였으나 강행을 하다.
2시간 50분이 걸렸다.

희망과 자신과 의욕에 가득 찬 새해다.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그날이 눈앞에 다가선 것 같다.
국제정치의 격랑속에서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이 긴박한 한반도 정세.

나날이 각박해 가는 세계경제의 추세.
외교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고 하는 속담처럼
제각기 자국의 국가이익을 위해서는
의리도 신의고 없는 냉혹한 작금의 국제정세.

오직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힘뿐이다.
힘, 힘이 없고 힘을 기르는 데 힘쓰지 않는 민족은
살아남을 땅이 없다.
이것은 진리다.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내 곁에 있다.

먼 곳에서 구하려 하지 말자.
오천년 동안 이 땅을 지키며 살아온 겨레.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민족의 이상을 간직하고 착하고 어질게 살려고 자자손손 가꾸어 왔는데,
한 번도 남을 해치거나 악하게 하지도 않았는데,
항시 외적의 침입을 받고 어깨 펴고 살지도 못했거늘
가난과 침체와 무기력과 쇠잔의 역사를 걸어왔건만.

이제 우리에게도 어두운, 지루한 밤은 가고
밝은 새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밝아온 새 아침에 지금 살고 있다.
이 밝은 새날은 우리가 역사상 처음으로 대웅비를 기약 받은 새 역사의 출발점이다.
금년은 그 중의 한 해다.

물질문명의 풍요와 발맞추어서 정신문화에도 꽃을 피우기 위하여,
전통문화도 꽃을 피우기 위하여 전통문화 속에
조상들의 얼과 슬기가 맥박치는 문화적인 자주성도 정립해 나가야 하겠다.

풍요하면서도 균형을 유지하고
모든 혜택이 균점이 되게끔 정책방향을 지향해 나가야 하겠고
도의(道義)와 인정이 충만한 사회를 건설해 나가야 하겠다.

이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복지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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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넌 4월 10일 일기

화창한 봄날이다.
후정의 목련이 활짝 피었다.
봄이 오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저 청초한 흰 꽃송이 그윽한 향기도 예와 다름없다.

저꽃이 피면 "어쩌면 저렇게도 희고 깨끗하고 아름다울까" 하고
좋아하던 아내의 활짝 웃는 얼굴이 불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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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4월 21일 (금) 맑음

서울 파리간을 취항하는 대한항공기(707호기)가
21일 파리 오를리 공항을 떠나 서울로 운행하던 중
소련령 무르만스크 부근에서
야간 동토(凍土) 호수 위에 불시착을 했다는 소식이
미국 방공망 레이다에 포착되어 통보되어 왔다.

아직까지는 사고의 원인도 알 수 없고
승무원과 승객들의 안부도 알 수 없다.
소련과는 국교가 없는 관계로 미국 등 우방국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밖에는 정보를 입수하는 방법이 없어
초조한 마음으로 외신 등 그 밖의 정보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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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4월 24일 (월) 맑음

18시경 KAL기가 사고난 KAL기의 승객 승무원을 태우고 김포에 착륙했다.
사망자 1명의 유해가 먼저 내리고
부상자와 일반승객이 가족 친지 기타 모든 국민들의 영접을 받으며 귀국하다.

사망자와 그 유가족에 대하여 심심한 애도의 뜻과 조의를 표하며
다시는 이러한 불상사가 나지 않도록 기원할 뿐이다.
승객들이 김포 비행장에 내리자 위급한 상황에서
우리 승무원들의 침착하고도 여유 있는 긴급조치와
한국인 승객들이 일사불란하면서도 침착하게 승무원들의 지시에 따라
질서 있는 행동을 한데 대한 칭찬의 소리가 대단하다.

역시 그 동안 소리 없이 심어진 한국인이라는
높은 긍지와 총화의 힘으로 다져진 단결심이
시시각각 생명의 위험이 다가오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각자가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교양과 훈련이 쌓아진 데서
우러난 결과가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특히 그 비행기는 태극기가 붙어 있는 우리 대한민국의 여객기이고
그 비행기를 조종하는 조종사와 승무원들이
전원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데서
더욱더 자제심과 책임감이 생긴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영국인 승객 한 사람은 호수 위에 불시착을 하는데
활주로에 내리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뒤에 동체로써 착륙했다는 것을 알고
신기에 가까운 조종기술에 감탄했다고 술회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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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4월 25일 (화) 맑음

불시착을 했던 대한항공기가 돌아와서
어젯밤부터 승무원들과 승객들의 체험담을 종합해 본 결과
사고의 원인은 역시 계기의 고장이 틀림없는 듯하다.

기계라는 것은 언제가 고장이 나는 것인데
고장이 났을 때의 대비책이 마련되어 있는지가 문제다.
앞으로 조사위원회의 조사와 억류되어 있는 승무원들이
송환 후의 더욱 구체적인 조사결과를 기다려 봐야만 판명이 될 것 같다.

원인 여하튼 1백여 명의 승객이 타고 있는 여객기에 대하여
소련공군의 총격행위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인도적인 견지에서 마땅히 규탄을 받아야 할 것이다.

천수백년 전 우리 나라의 신라시대에 우리의 조상들은
인명존중을 최대의 가치로 규정하고
살생은 필히 유택(有擇)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이 문명사회의 가치관이다.
인명을 경시하는 문명은 진정한 문명이라고 할 수 없으며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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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5월 16일 (화) 맑음

5.16혁명 제17주년이다.
오전 10시 반 민족상 수상자 12명에 대한 수상식이 있었다.
오후 6시 반부터는 5.16민족상 이사 42명과 같이 만찬을 들면서
지나간 17년간의 회고담을 나누었다.

돌이켜 보면 지나 17년간 우리 사회는 너무나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숙명처럼 생각하며
체념 속에 살아 온 가난한 이 나라를 어떻게 하면 이 굴레를 벗어버리고
우리도 남들처럼 잘 살아 볼 수는 없는 것인지,
이것이 우리의 소원이었는데 이제 잘 살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고
얼마 안 가서 남부럽지 않은 잘사는 나라가 될 자신이 생겼다.

그 동안 많은 비판의 소리도 들었고 비난의 소리도 수없이 들었다.
시행착오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정부의 시책에 협조해 주었고 지지해 주었다.
특히 제 2 의 5.16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10월 유신은
능력의 극대화와 국력의 조직화를 가장 효율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제도였다고 확신한다.

10월 유신 이후 지난 6년 동안 우리 국력의 신장은 참으로 괄목할 만하다.
이대로 추진된다면 1980년대 중반에 우리는 대국이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아직도 이 체재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고 반대하는 인사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가탄불기(可歎不起)

다만 결과를 가지고 후세에 평가를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을 것이다.

중단하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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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9월 23일 (토)

오후에 도봉산 입구에 가서 자연보호운동(自然保護運動)을 하다.
주민들과 같이 어울려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에 들어가
쓰레기를 주우면서 주민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참 재미있고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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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2월 22일 (금)

오후 1시 의령읍에서
충익공 곽재우(郭再祐)장군 유적 정화 준공식을 거행.
임진왜란시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켜 신출귀몰,
도처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국난극복에 헌신한 구국의 영웅을
오늘 그 사우를 건립하고 영령을 모셔
그 분의 애국충성을 기리게 되었으니 감회무량하다.

오후에 귀경해 개각단행 발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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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5월 16일

5.16혁명 제 18 회 기념일이다.

1961년 5월 16일 누란의 위기에 직면한
조국을 구하려, 아니 구하겠다는 생각보다는 가만히 좌시만을 할 수 없다는
우국의 일념으로 젊은 군인들이 궐기한 것이 5.16이다.

뚜렷한 경륜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난마와 같이 헝클어지고 부패부정 무질서 부조리 정체 무기력
이러한 단어들이 5.16 당시 우리 사회의 일면을 단적으로 표시한 표현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사회악과 부조리를 과감하게 척결하고
우리 사회에 새로운 신풍을 흡입하기 위해서도 5.16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혁명을 단행하고 구 정치인들로부터 정권을 인수한 혁명정부는
너무나 막중한 과제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무능하고 부패한 민간정부를 전복하고,
구악에 물든 대표적인 인사들을 구속하며
쾌도처럼 산적된 일들을 처리해 나가는 혁명정부에 대하여
다수 국민들은 쾌재를 부르고 박수를 보내주기도 했으나
구정치세력들의 반발과 저항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들은 외세를 빌려서 혁명정부를 빨리 종식시키고
다시 자기들이 정권을 장악하겠다는 집념에 차 있었다.
혁명정부의 과감한 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
혁명주체세력 내부에도 다소의 내분이 없지 않아서
고민을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1963년 12월 17일 민정이양을 위한 선거로써
제 5 대 민선 대통령으로 당선된 나의 취임식이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되고 군정은 완전히 민정으로 이양되었다.

5.16혁명 18주년을 맞이하여 지나온 18년간을 회고하니 감회가 무량하다.
조국근대화 과업도 이제 결실기에 들어섰다.
1,2,3차 5개년 계획이 대체로 순조로이 진행되어
우리의 국력도 괄목하리 만큼 크게 신장되었고
공업화도 착착 추진되어 5.16 당시와는 비교하기 어려우리 만큼
나라의 모습이 변모하였다.

남들은 한국의 기적이니 한강이 기적이니 하고
우리가 걸어온 도정과 결과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고 있다.

우리 국민들도 이제 민족적이니 긍지와 자주정신, 그리고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들이
과거 어느 때 보다도 고조되어 있다.
자신들의 스스로의 피땀으로 이룩한 성과에 대하여
보람과 자랑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1970년대 초에 시작된 새마을운동과 1972년 가을에 단행된 10월 유신은
우리의 과업을 촉진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과거 작업이 열매를 맺으려면 아직도 요원하다.
더욱 분발하고 총화로써 정진하여야 할 것이다.
이 과업수행 도중에 나의 인생의 반려인 내자를 잃게 된
비운을 겪어야만 했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손실이요 불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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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5월 12일 (토) 맑음

전 미 국무장관 키신저 박사가 내방하여 장시간 환담하고 오찬을 같이하다.
키신저 박사의 국제정세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통찰력은
오늘의 세계에서 최고 수준급의 인사라는 것을 실감케 하였다.
특히 한반도 정세에 관한 깊은 이해와 대단한 판단 및 평가에도 감명을 받았다.

5월 7일자 <로스엔젤레스 타임스>지 보도에 한국기사,
조지어 앤 게이어 씨가 쓴 칼럼에
"한국의 현 정치체제는 켄센서스 소사이어티로 급속히 발전해 가고 있다.
정치발전 속에서 개발도상국에서는 가장 소득분배가 잘된 나라다.
직접적인 정치분야를 빼고는 모든 분야에 자유가 만개한 나라" 운운.

미국 언론인 중에도 이제 사물을 제대로 보는 사람이 생기는구나 하고
혼자 고소(苦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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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17일


7년 전을 회고하니 감회가 깊으나 지나간 7년간은
우리나라 역사에 기록될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일부 반체제 인사들은 현 체제에 대하여 집요하게 반발을 하지만
모든 것은 후세에 사가(史家)들이 공정히 평가하기를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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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일기가 박대통령의 생애 마지막 일기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마치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 듯 마지막 일기에서 자신에 대한 평가를 역사에 맡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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