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22. 사순 제1주일
♣ 최상훈 티모테오 주임신부님 강론 말씀 ♣
명절 때 너무 많이 드신 거 아니에요? 명절 잘 보내셨습니까?
그런데 명절 다음 날이 사순절이 시작되는 애쉬 웬즈데이, 재의 수요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명절의 영향으로 우리는 그냥 지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순절의 시작에 머리에 재를 바른다는 것은 이런 뜻이 있습니다.
‘나 바보야. 나는 바보로 살 거야’ 라는 뜻으로 머리에 재를 바르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첫날 오늘 1독서는 누구도 알 수 있는 그 유명한 아담과 하와의 최초의 범죄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좀 더 철학적으로 질문해 본다면 이런 게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불행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불안의 근원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라고 우리는 질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은 첫 번째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은 조심해야 될 것이 하느님과 똑같다는 말은 아닐 겁니다.
‘닮음’은 ‘다름’을 전제로 합니다.
인간이 하느님과 똑같아지리라는 뱀의 거짓은 하느님과 닮음조차도 빼앗기게 되고, 결국 서로가 서로를 볼 수 없는 지경에 빠뜨리게 되는 것이죠.
사람의 본래 모습은 하느님을 닮아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 보시기에 참 좋은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은 좋은 관계로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아닌 것, 사람의 본래 자리가 아닌 것, 사람의 위치를 뛰어넘는 것, 사람이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닌 것에 마음이 뺏겨버렸던 것이죠.
그래서 인간의 욕망, 인간의 욕구를 해결하려고 한마디로 얘기하면 인간은 자기 만족을 위해서 하느님을 배신한 결과입니다.
이러한 관계의 단절로 사람은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죠.
오늘 복음은 예수님 공생활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세주로서의 활동을 하시면서 아마도 자기의 죽음을 직감하셨을 겁니다.
이제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구원의 대장정,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지시는 그 과정으로 가기 위한 첫 번째 단계로 오늘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들어가십니다.
광야는 어떤 곳인가요?
성경을 바탕으로 보면은 광야는 요르단에서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후에 최초로 하신 일이 광야에서 기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고 하느님 백성으로 선택될 때도 광야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 백성으로 살겠다고 약속한 것도 광야였습니다.
그러니까 결론 삼아 말씀을 드리면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 더 크게 얘기하면 광야는 ‘하느님과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장소’라고 우리는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요. 광야는 이렇게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유혹의 장소입니다.
왜 유혹의 장소일까요? 그것은 광야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 자리로, 하필 예수님께서 광야로 들어가셨을까요?
영 마땅치 않은 곳입니다.
말씀드렸지만 광야는 한마디로 ‘없음’입니다. 사막입니다.
‘모자람’입니다. ‘결핍’이고 ‘비움’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으로서 이 광야를 바라보는 일은
불편합니다. 외면하고 싶은 그런 곳이 광야입니다. 바보스럽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이사야서 13장 21절에 보면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광야는 귀신, 악마들이 더 왕성한 활동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구원 사업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이 광야일까요?
그 답을 얻으려면 우리는 「사막에서의 편지」 라는 책을 쓰신 카를로 까레토 신부님의 그 여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게 됩니다.
카를로 까레토 신부님은 수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장상에게 부탁을 했다네요.
나의 수도 생활을 위해서 허락해 주십시오.
저는 사하라로 가고 싶습니다. 사하라에 움막 하나를 짓고 거기서 오로지 하나, 하느님의 빛과 영광을 따르겠습니다.
오랫동안 장상은 고민한 결과 그 신부님을 드디어 허락했습니다.
그리고요. 놀라지 마십시오. 나머지 여생 전체를 사하라 사막 그 척박한 곳에서 평생을 움막 하나에서 지냈던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책을 썼는데 그 책의 제목이 「사막에서의 편지」라는 책 입니다.
그 편지를 들여다보면은 이런 글이 있습니다.
도시 생활에서 우리가 그렇게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여러분, 그 사막에서 냉장고가 그렇게 필요할까요? 86인치 칼라 텔레비전이 그렇게 필요할까요? 우리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렇게 필요했던 것 우리가 그렇게 지키려고 했던 것이 놀랍게도 그곳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죄다 쓸모없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곳은 최소한의 것만 추구하는 곳, 삶이 간결해지는 곳, 모자라지만 단순한 것에서 기쁨을 맛보는 곳.
그러니까 그 신부님의 글을 읽어보면 이런 게 있어요.
그 뜨거운 대낮에 사막의 그 열기.
그런데 어디선가 작은 바람 하나가 불어오는 거예요.
그 바람 한 점에 너무나 마음이 행복해지고 기뻐지는 거예요.
이처럼 삶이 단순하고 기뻐지는 것, 척박하지만 자유가 숨쉬는 것, 단순한 것에서 기쁨을 얻게 되는 것. 이것이 광야에서 얘기하는 삶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우님들 혹시 사막을 여행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한 번, 사막에 들어간 건 아니지만 미국의 에리조나주를 창문을 열고 달리는데 가로등 하나 없어요. 피닉스라는 도시를 딱 떠나서 달렸습니다. 한참 달리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온전히 정막 가운데에요.
그런데 놀라운 게 있어요.
밤 하늘의 별이 왜 이렇게 많은지 아니 별은 똑같을 텐데 왜 그곳에서는 이렇게 별이 많아 보이는지 차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사막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어떤 느낌인지 아세요?
놀라운 체험입니다. 내가 손을 들면 별을 딸 것 같아.
그 이유는 우리와 두촌 여기와 똑같은 별이지만 왜 그럴까요?
주변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에요.
별이 쏟아지는데 감당하기 힘든 형언키 힘든 감동의 도가니에요.
그 별이 쏟아져 내리는데 내가 손을 들으면 별을 딸 수 있겠더라고요.
‘이 별을 따서 그녀에게 줄까?’ 그런 생각도 했어요. 이 별을 따라 그녀에게 선물로 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난 빛의 향연이 그 깜깜한 아무것도 없는 그 사막 한 가운데서 느꼈던 저의 감정.
이런 변화 그 이유는 단 하나.
최소한의 것. 단순한 것 그 가운데서 놀라운 신비와 기쁨이 우리에게 내려온다는 거예요.
저는 오늘 여러분의 삶을 비난하고 비판하고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거 아닙니다.
여러분 얼마나 힘드세요? 나가서 직장생활하고 가정 생활하면서 얼마나 부담스러웠어요.
그러나 그렇게 살면서 우리는 이 사순 시기가 우리에게 초대하는 곳이 있어요.
이 기간만이라도 광야로 돌아오라고요. 사막을 체험해 보라고 우리에게 초대하는 기간이 이 사순 기간이다 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우리의 일과를 잠깐 볼까요? 아침에 일어나고요. 출근하고 먹고 싸고 근무하고 퇴근하고 회식하고 게임하고 스마트폰 보고 잠자리에서까지 휴대폰을 들고 우리는 낄낄대며 웃다가 잠을 자요.
그 다음 날 또 일어나고 먹고 싸고 또 세수하고 출근하고... 무한 반복의 이 과정을 우리는 겪어 나갑니다. 거기다가 조금 더 높아지려고 다른 사람보다 명예를 얻으려고 학원 가고 영어 공부하고... 이 무한 궤도 이 무한 반복... 이 도시는 놀랍게도 나를 볼 수 없게 만듭니다.
도대체 나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니, 나 지금 행복을 꿈꾸고 있는지, 하루 일과 중에 기쁜 순간이 있는지, 돈 버는 걸 그렇게 무섭게 반복하며 우리는 달려가고 있습니다.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한 일과의 삶을 비난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거, 그렇게 살았다 라면 사순은 우리에게 초대하고 있습니다.
잠시 멈추라고요. 잠시 내려놓으라고요.
그리고 삶의 기쁨을 찾아야 돼요. 어디서요? 단순함에서.
단순함에서 삶의 기쁨을 찾아야 돼요.
제가 어릴 때 좋아했던 작가가 있는데 저는 고2 때 이 책을 읽었거든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내 삶의 밑바탕이 되는 책 중에 하나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라는 책입니다.
헤르만 헤세가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단 1분도 헛되이 흘러가지 않는다. 서두르면서 바쁘게 움직여 살고자 한다.
그런데 이 상황이 우리의 기쁨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점이다.
무엇이든 가능한 많이 빨리 무엇인가를 해결하고자 한다.
여기서 생기는 것은 만족이다. 그러나 작아지는 기쁨이다.
만족과 기쁨은 항상 비례하지 않는다.
헤르만 헤세의 이 말에 여러분 어느 정도 공감하십니까?
우리가 그렇게 추구했던 것, 우리가 그렇게 애달아 했던 것.
그것이 나의 기쁨을 담보하지 못할 수 있다는 거예요.
참된 기쁨. 사순절은 지금껏 내 만족을 위해 살았다면 이제 좀 기쁘기 위해서 살아볼 때입니다.
무엇을 하면서 만족했다면 이 시기는 안 하면서 기쁨을 찾을 때입니다.
이 기쁨은 제가 명명했습니다. 「단순한 기쁨」이라고.
여기 계신 어르신들은 정말 공감하실 거예요.
지금 우리 대한민국, 아니 우리나라가 존재하는 5천년 역사상 우리는 지금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어릴 때 생각해 보세요.
뭘 입었습니까? 뭘 신었습니까? 뭘 먹었습니까? 그냥 풀떼죽 먹었어요.
그런데 불과 몇십 년 만이에요. 지금 이렇게 잘 살고 풍요로운 시대를 맞이했어요.
우리는 원하는 것은 다 얻을 수 있지 않아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마음대로 소비할 수 있어요. 스마트폰 하나면 원하는 음식을 내 식탁 위에 딱 배달시켜줘요.
무한정 소비할 수 있고 무한정 먹을 수 있어요. 내 위장에 꽉꽉 채워서 먹을 수 있어요.
원하는 영상을 무한정 소비할 수 있어요.
내 손 안에서 모든 여행과 모든 콘텐츠가 내 손 안에 있습니다.
무한정 소비할 수 있어요.
그런데 신기하죠.
그리고 그렇게 하면 할수록 많이 빼먹으면 먹을수록 저녁 잠자리에 들어서 이불을 덮을 때 왜 이렇게 외롭죠? 왜 이렇게 내 마음이 황량하죠?
참 신기합니다. 이렇게 풍요를 누리고 있으면서 내 가슴 한 켠은 왜 이렇게 아리고 외롭고 슬프죠?
제가 너무 과장한 건가요? 우리는 세상을 그러고 살고 있어요.
저녁 잠자리의 이 공허함을 어딧다가 채울 수가 없어요.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가장 공허하고 가장 불안하고 가장 외로운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 분들에게 이런 진단을 내리고 싶어요.
그렇게 외로움이 든다면 이런 분은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했기 때문이에요.
즐거움과 쾌락은 기쁨과 다른 개념이에요.
쾌락과 기쁨은 다른 개념이에요. 기쁨은 수고로움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요즘 들어 마음이 예를 들어서 기도하기가 점점 귀찮아진다, 미사 오는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 아니 눌러 앉아버릴까? 벌써 마음 안에서 내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있다. 내 이웃을 생각하는 게 거북해진다. 아이 귀찮아! 번거로워. 내 이웃, 내 사촌, 내 친척 귀찮아. 라는 생각이 들어가면은 그것은 쾌락에 집중한 사람이에요.
그것에 집중한 사람, 하느님과 관련된 일이 부담스럽다면 나는 지금 이쪽(쾌락)에서 뭔가를 얻고자 하는 사람이에요.
끝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우리에게 사순절에 광야로 초대하는 것은 기뻐하라는 겁니다.
단순함에서 기쁨을 얻으라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우리 이 기간을 보다 은혜롭고 보다 단순하면서 간결한 삶을 통해서 무언가 절제의 생활 속에서 더 충만하고 더 감사하고 더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이 길에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이 초대에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예.
감사합니다.
아멘.
** 주임 신부님의 강론 내용과 조금 다르게 표현되었을 수 있습니다. 양지하시고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