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들의 죽음 가운데 그 죽음에 의문과 의혹이 이는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독살설은 당대에 왕의 죽음을 아쉬워하거나 백성들의 공분을 사는 신료에 대한 원망에서 나오거나 아예 현대의 일부 사람들이 왜곡하고 지어낸 것이 대부분으로, 소현세자나 고종을 제외하면 간단한 정황 증거조차 찾을 수 없는(오히려 독설로 볼 수 없는 증거가 많은) 음모론에 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조의 경우도 현대에 들어, 그 죽음에 대한 몇 가지 석연찮은 점을 들면서 노론 벽파의 거두 심환지와 정순왕후의 주도로 암살되었다는 주장이 많이 제기 됩니다.(소설, 드라마, 영화에서는 암살설을 기정 사실화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극적 재미를 위한 것으로 가려 이해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정조 암살설은 재미를 위한 음모론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 몇 가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 최근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들이 많이 공개 되었는데, 이를 보면 이들의 관계가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 가 아닌 점이 드러납니다.
- 왕을 폐위하고서도 곧 죽이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자연사 할 때까지 내버려 둘 수밖에 없는 왕조 시대의 풍토에서, 심환지나 정순왕후가 비교적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던 정조 를 암살하지 않으면 안 될 부득이한 상황이 당시 있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 정조의 아들 순조 시대에 심환지가 제거되는데, 이때에도 선왕 독살에 관한 사항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 여러 기록에 의하면 정조는 애연가에 주당에 식사도 불규칙하게 했고, 본인 스스로도 잦은 질병에 괴롭다는 탄식을 많이 했으며, 실제로 정조가 그리 단명한 사람이 아닙니다.(정조는 재위기간이나 나이에 있어 가장 평균적인 왕의 삶을 살다 간 인물)
- 독살 시점은 정조의 몸이 많이 쇠약해진 상태인데(급사), 죽이려면 진작 죽일 것이지 다 죽어가는 판에 손을 댄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정조 이후 수렴청정 으로 정권을 잡을 수밖에 없는 정순왕후가 막판에 굳이 무리할 이유가 없습니다. -----------
정조는 말년에 온 몸에 종기가 잠도 잘 수 없었고 음식도 먹지 못했습니다. 온갖 처방이 다 소용없었고 몇 되의 피고름을 쏟기 일쑤였습니다.
1800년 6월 28일, 정조는 무너진 기력을 회복하지 못한 채 의식을 잃었고 별다른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위 25년에 50세였습니다.
그리고 정조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 11세의 나이에 등극 하니 이가 조선 23대 왕 순조입니다.
담에 이어서~
<조선왕조실록(130)> 순조 1 - 천주교 박해
순조가 등극했으나 나이가 어린 관계로 궁궐의 어른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순왕후는 왕의 즉위를 공포하는 글에서 '척사'를 표방 했는데, 이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예고하는 것 이었습니다. - 지금 듣건대 사학{邪學, 천주교, 서학(西學)이라고도 함} 이 불길처럼 번지고 있다. - 수령들은 오가작통법을 닦아 밝혀 사학을 하는 자를 진멸 함으로써 남는 무리가 없도록 하라.
정순왕후의 말대로 이즈음 천주교는 더욱 확산되고 있었는데,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들어오는 등 교세는 더욱 팽창되어 전국에 신도가 1만을 헤아렸습니다.
정조 시절에는 노론 벽파가 여러차례 천주교를 엄히 다스릴 것을 요구했으나, 정조는 한결 같았습니다. - 정학이 바로 서면 서학은 힘을 못 쓰게 될것인 고로 정학 에 힘쓰는 것이 해답이다.
대비(정순왕후)의 하교는 정조의 대책이 실패한 것임을 천명한 것으로, 이들의 천주교 박해는 아래와 같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 천주교는 군신간의 상하 관계를 중시하는 조선의 지배 윤리인 유교 윤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 천주교를 공부하거나 믿는 사람 중에 벽파의 반대파인 시파나 남인들이 많았으므로 정적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형조와 지방관아에서는 곧 동시다발적으로 천주교 신자 들의 검거에 나섰고, 최초의 신부 이승훈, 정약용의 동생 정약종, 중국 신부 주문모 등 리더들과 일반 백성 등 수백 명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때 정약종의 사위 황사영이 중국으로 도망가다 붙잡혔는데, 북경의 주교에게 보낸 그이 빽빽한 문서 한장 이 조정을 경악케 했습니다.(이른바 ‘황사영 백서’) - 청 황제를 통해 서양의 큰 배 수백척에 군사 5-6만을 보내 조선을 압박하거나 또는 조선을 직접 통치하여 서학을 자유로이 신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위와 같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 는 더욱 가혹해졌고, 추가로 수백 명이 처형되었습니다.
정조를 이후로 내리막길의 조선....
이동훈
박근혜를 이후로 내리막길 한국....
요즘 심각한 지표들이 우리를 당황케 한다.ㅠㅠ
어쨌든 단단히 각오하고 풍파를 잘 넘어보자.^^
나종덕 국운에 기대해봐야겠지..
이동훈
그러게.
아무래도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을 잘 못 만난 것 같다.^^
나종덕 국민이 그녀를 잘못만난게 아니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