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삼국지연의』에서 맹 획은 제갈 량에 대항하는 오랑캐 왕으로 나옵니다.
여기서 빨간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촉한이고 4개 도시가 바로 맹획 등의 인물들이 촉한에 대항해 싸우던 지역인 현대 중국의 운남성과 귀주성 지역입니다. 당시 촉한은 이 지역들을 막연하게 남쪽 오랑캐가 사는 지역이다 해서 남만이라 불렀지요. 어디까지나 중국의 다수민족인 한족의 일방적인 입장이기는 합니다만.
그러면 정식 역사서인 정사(正史)『삼국지』에서는 제갈 량의 운남성(당시 맹획의 세력권) 공격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지요.
제갈 량의 운남성-귀주성 공격에 관한 기록은 길지도 않으니 모두 인용해 보겠습니다.
① “225년 3월 제갈량은 남쪽의 네 군- 익주(益州)·영창(永昌)·장가(牂牁)·월수(越嶲) -을 정벌하여 모두 평정하였다. 익주군을 건녕군으로 바꾸고, 건녕군·영창군의 일부를 나누어 운남군(雲南郡)을 만들었고, 건녕군·장가군의 일부를 나누어 흥고군(興古郡)을 만들었다. 12월 제갈량은 성도로 돌아왔다."
(『삼국지』「촉서 : 후주전(후주는 유 비의 아들인 유 선입니다.)」)
② “225년 봄 제갈량은 군대를 이끌고 남쪽 정벌에 나서 같은 해 가을 전부 평정하였다. 군수물자가 새로 평정한 여러 군에서 나왔으므로 국가는 풍요해졌다(『삼국지』「촉서 : 제갈량전」).”
③ 선제(유비)의 명철함이 손상될까 두려워 (225년) 5월에 노수(瀘水)를 건너 황무지 깊숙이 들어갔습니다(『삼국지』「제갈량 전에 수록된 출사표」).
실제로 제갈량이 다녀온 기간은 불과 8, 9개월 정도입니다. 그리고 정사에는 맹 획에 대한 명확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 몇 줄의 기록으로 나관중 ‘삼국지’는 맹획이라는 실존 여부가 불분명한 인물로 거의 책 한 권을 만들고 있습니다. 참 대단합니다.
먼저 위의 지명들의 위치를 한번 살펴보도록 합니다.
익주(益州)는 현재의 운남성(雲南省) 진령(晋寧) 동쪽
영창(永昌)은 현재의 운남성(雲南省) 보산(保山) 북쪽
장가(牂牁)는 현재의 귀주(貴州) 황평(黃平) 서남쪽
월수(越嶲)는 현재의 사천성(四川省) 서창(西昌)
노수(瀘水)는 현재의 금사강(金沙江) : ‘후한서’ 라는 역사책에 남긴 이 현(李賢)이라는 사람의 주석(해설)에 의함
고우영 판 만화『삼국지』에는 이것이 무슨 베트남, 라오스 등 동남아 국가들을 뭉텅 집어삼킨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설명드리자면 맹 획의 영토는 운남성과 귀주성, 즉 위의 지도에서 보이는 미얀마(혹은 버마), 라오스의 북쪽 그리고 베트남 서북쪽에 있습니다.
당시 캄보디아는 부남(扶南)이라 했고, 남부 베트남은 임읍(林邑)이라고 합니다. 이들 나라들은 제갈 량과는 하등 상관이 없고 오히려 손 권의 오나라와 무역을 했지요. 관련 기록을 살펴봅니다.
(서기 243년 음력)12월, 부남왕(扶南王) 범전(范전)이 사자를 보내 예인(연예인?)과 그곳의 특산물을 바쳤다.
『정사삼국지』「오서 오주(손권) 전」
중국 특유의 표현이라 특산물을 '바쳤다'는 기록만 강조되어 있지 사실은 먹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대국의 체면이었으므로 말하자면 체면 무역이었던 셈이지요. 특산물을 받은 만큼 다른 물질로 보답하는 것이 당시 국제 관례였다고 합니다.
제가 앞에서 맹획에 대해 존재여부가 불명확한 인물로 말씀드렸는데, 중국에서는 맹획에 대해서 논란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맹 획에 대해 중국에서는 크게 ① 맹획이 있었고 칠종칠금도 있었다는 견해, ② 맹획도 없었고 칠종칠금도 없었다는 견해, ③ 맹 획은 있었지만 칠종칠금은 과장이라는 견해 등으로 나뉩니다. 대개 통설 즉 다수의 지지를 받는 학설은 세 번째 견해로 모아집니다.
여하간 나관중『삼국지연의』의 맹획에 대한 이야기는 ‘한진춘추(漢晋春秋)’라는 책에서 비롯됩니다. 정사(삼국지)에 대하여 2백여 년이 지난 후 배송지라는 학자가 『정사(正史)삼국지』에 달아 놓은 주석에 보면 맹획과 칠종칠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주석은 ‘한진춘추’에서 인용한 것인데, 이 ‘한진춘추’라는 책 자체가 동진이라는 시대에 나온 책치고는 특이하게도 촉한을 정통으로 보는 책입니다.
우리가 흔히 서진-동진할 때의 진나라는 사마 의의 자손들이 세운 나라인데 이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자기네 조상들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촉한보다는 위나라를 정통으로 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뜨렸으니 파격이라 할 밖에요.
이 책은 ‘제촉구위론(帝蜀寇魏論)' 즉 다시 말해서 촉이 정통이고, 위나라는 정권을 찬탈한 도적으로 보는 설을 처음으로 제시하였는데, 주 희(주자)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은 이 설을 계승한 것이죠.
그런데 이 책은 오래 전에 사라지고 없어져서 일부만 겨우 전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한진춘추의 내용 가운데 맹 획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갈량이 남만정벌을 갔을 때 가는 곳마다 승전을 하였다. 맹 획이 오랑캐와 한인 (漢人)들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듣고 현상금을 걸어 사로잡았다. 그런데 맹 획이 자신은 허실(虛實)을 몰랐으니 한 번 더 하면 능히 이길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제갈량은 맹획을 7번 사로잡고 7번 풀어주었다.
그러자 맹 획은 돌아가지 않고 “그대는 하늘의 위공을 가졌습니다. 우리 남인들은 두 번 다시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七縱七禽 而亮猶遣獲 獲止不去 曰公天威也 南人不復反矣)”라고 하였다.
물론 이 책에는 왜곡된 부분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 촉한이 망할 때 초주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지요.
“남쪽(오늘날의 운남성-귀주성)은 거리도 멀고 오랑캐들이 살고 있는 땅이라 평상시 조정에 세금을 바친 일도 없고 오히려 여러 번 모반하였습니다(南方遠夷之地 平常無所供爲 猶數反叛).
그들은 승상 제갈 량이 군대로 핍박하여 어쩔 수 없이 귀순하였습니다(自丞相亮南征 兵勢偪之, 窮乃幸從).
이후 남만은 세금을 납부했으며 이것이 군대유지비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남만인들은 우리 조정을 원수(怨讐)로 보고 있습니다(是後供出官賦 取以給兵 以爲愁怨 此患國之人也).
지금 조정이 남만 땅에 의지한다면 이들은 다시 모반을 일으킬 것입니다.(今以窮迫 欲往依恃, 恐必復反叛 )”
『삼국지』「촉서 초주 열전」
이것만 보아도 몇 가지 사실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일단 운남성 토박이인 맹획이라는 소수종족의 지도자가 제갈 량이 이끄는 촉한 군대의 힘에 굴복하여 어쩔 수 없이 항복했지다는 점입니다.
둘째로 '연의'에서처럼 맹획 한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촉한에 대한 운남성 소수 종족의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나저나 일단 한 교수님과 저의 관심사로 돌아가보지요. 과연 맹획은 '장군'이었는가 아니면 '왕'이었는가? 아니면 또 다른 벼슬이 있었는가?
『화양국지』라는 책의 기록에 따르면, 맹 획은 익주 건녕 사람으로 어사중승이라는 벼슬을 맡았다고 합니다.
즉 이 설을 따르면 맹획은 운남성 소수종족이 아니라 한족 태생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당시 국적이라는 것이 따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마음 먹은 대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었던 시대니만큼 큰 의미는 없을 것입니다. 마치 진 시황 시대의 조타나 손권과 이웃해있던 북 베트남의 사섭 같은 경우처럼요.
그러면 어사중승이라는 벼슬은 무엇인가? 어사중승은 감찰의 임무를 맡아보던 관직이라고 합니다. 최소한도 장군과는 거리가 먼 직책이지요.
아마도 맹 획은 운남성의 유력한 족장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스스로 왕을 칭하거나 아니면 촉한에 의해 왕의 벼슬을 제공받을만큼 막강한 실력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맹획에 대한 기록 자체가 적어서 맹획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일단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맹획 '족장'이라는 호칭입니다(혹은 작은 나라의 우두머리라는 뜻의 군장 혹은 거수라는 명칭도 좋겠군요).
사실 맹획은 왕이라 불리기에는 실제 세력이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 같고, 장군이라 불리기에는 촉한이 제공해 준 관직이나 아니면 자칭한 관직에 대한 기록도 없기 때문이지요.
실제 한국에서도 스스로 '장군'을 칭한 사례가 있습니다. 후고구려를 세우는 김궁예의 경우가 그러한데(드라마 태조 왕 건에서 나옴) 그는 왕이 되기 전에 자칭 장군이라 한 사실이 있으니까요.
내용과 지도는 김운회 교수의 삼국지 바로 읽기에서 인용했습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첫댓글 후후후..감사합니다...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