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태후는 여태후, 측천무후, 신정왕태후 황보씨, 서태후와 유사하다.
여태후는 유방과 혜제를 죽였다고 의심되며,
측천무후도 고종을 죽이고 자신의 아들을 폐위시켰다고 의심되며,
신정왕태후 황보씨는 왕건과 광종, 경종을 죽였다고 생각된다.
서태후는 함풍제의 후궁이며, 함풍제가 서태후를 죽이라는 말도 했다는데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인 동치제의 어머니여서 살아난 것같다.
그러나 함풍제나 동지체가 죽은 것에 대한 의문이 남으며
광서제도 독살당한 것으로 여겨지니...
함풍제나 동치제, 광서제 모두를 고의적으로 독살 또는 매독(동치제는 매독으로 죽었다고 한다)으로 죽인 것으로 여겨진다.
천강태후가 소수림왕과 광개토대왕, 탑태자까지 죽였으니 남편, 아들, 손자까지 죽인 셈이다.
천강태후는 여태후, 측천무후, 신정왕태후 황보씨, 서태후는 정말 유사하다.
이들의 명령을 받아 왕의 독살에 참여한 내시와 궁녀가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황궁이나 왕궁에서의 황제, 왕의 생활이 너무나 위험에 노출돼 있었던 것이다.
함풍제가 서태후를 죽이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서태후가 함풍제를 죽였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참으로 권력자나 재력가는 주위사람을 잘 만나야 할 것이다.
중국에서는 비서나 사장의 운전기사가 사장과 동급이란 말이 있다.
사장과 운전기사가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비서와 운전기사가 중요하기 때문인 것이다.
중국이 저정도인데도 황제가 독살당했다고 추정이 되니,
돈도 좋지만 사람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신정왕태후 황보씨가 광종의 어머니이며 경종의 할머니인데, 고려사열전에는 광종이 신명순성왕태후 유씨의 소생으로 기록해 놓았다고 판단된다. 정종과 광종은 친동생이 아니었던 것이다. 신정왕태후 황보씨는 남편 왕건과 아들 광종, 손자 경종을 독살한 여자인 것이다.
********************고려사 태조왕건 후비열전*******************************
3.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 유씨(劉氏)
신명순성왕태후 유씨는 충주(忠州 :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 사람으로 뒤에 태사(太師)·내사령(內史令)을 추증받은 유긍달(劉兢達)의 딸이다. 태자(太子)인 왕태(王泰)와 정종·광종 및 문원대왕(文元大王) 왕정(王貞), 증통국사(證通國師), 낙랑공주(樂浪公主), 흥방공주(興芳公主)를 낳았다. 죽은 후 시호를 신명순성태후라 하였다.
4. 신정왕태후(神靜王太后) 황보씨(皇甫氏)
신정왕태후 황보씨는 황주(黃州 : 지금의 황해북도 황주군) 사람이며 태위(太尉)·삼중대광(三重大匡)·충의공(忠義公) 황보제공(皇甫悌恭)15)의 딸로 대종(戴宗)과 대목왕후(大穆王后)를 낳았다. 애초 명복궁대부인(明福宮大夫人)으로 책봉되었다가 성종 2년(983) 7월에 죽었다. 성종은 어려서 친모인 선의태후(宣義太后)를 여의고 왕후 슬하에서 자랐으므로 크게 애통해 하며 모든 예를 차린 후 백관을 거느리고 빈전(嬪殿)에 나아가 신정대왕태후라는 시호를 올렸는데, 그 책문은 다음과 같다.
“왕태후의 덕은 황제(黃帝)의 모친인 부보(附寶)16)와 같고, 그 공적은 후직(后稷)의 모친인 강원(姜嫄)17)과 나란하니, 일찍부터 상서로운 손금을 지니셨고 태교(胎敎)18) 또한 밝고 신령스럽게 행하셨습니다. 태조께서 훌륭한 짝을 찾으시매 왕후[六宮]19)로 간택되시어 모든 정사에서 개국의 위업을 도우셨습니다. 지어미의 도리를 잘 닦음으로써 왕후로서의 의절(儀節)을 갖추셨고 절약과 검소의 기풍을 내전에서 행하심으로써 올바른 규범이 조정에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번희(樊姬)20)는 육식을 하지 않음으로써 사냥을 즐기는 초왕(楚王)의 잘못을 고쳤고, 위녀(衛女)21)는 음란한 음악을 듣지 않음으로써 제나라 환공(桓公)으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알게 했으니, 태후께서도 두 사람처럼 지아비를 깨우쳤습니다. 하물며 황제와 같은 수레에 오르기를 사양한 반첩여(班倢伃)와 같은 겸양22)과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지혜23)는 뭇사람들과 신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천하를 제패한 왕업의 흥기는 그 조심스러운 마음 때문이며, 큰 경륜이 융성한 것은 실로 그 현명한 계책 덕분입니다.
태조께서 붕어24)하신 이후 근 오십년[四紀25)]을 홀몸으로 계시면서 손자들을 돌보아 기르셨으니, 그 이름은 경종(景鐘)26)에 새겨졌고, 사적은 후비의 전기27)에 빛나나이다. 돌이켜 보건대 보잘 것 없는 이 몸은 일찍이 불행을 만났으니 겨우 일여덟 살 때 모친을 여의고 어린 나이에 엄친마저 잃어 조모님의 품안에서 양육되었지만 마치 부모의 슬하에 있는 것처럼 안온했습니다. 맛난 음식은 남겨 두었다가 저를 먹여 주셨으며[吐哺28)], 부드럽고 따뜻한 옷을 이 외로운 몸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그 정성스런 양육 덕분에 이 몸이 잘 자라 다행히 가문의 위업을 이어받고 외람되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선조의 덕에 보답하고, 손자의 효성을 바치려 하던 차에, 태후께서 이처럼 별세29)하시는 재난을 당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천년토록 장수30)를 누리시지 못하고, 난처럼 맑고 고운 분31)이 졸지에 별세하시니 당신께서 타셨던 수레는 적막하고 거처하시던 궁전32)은 텅 비어버렸습니다. 개국을 도운 분33)이 돌아가시니 백 명으로도 그 공을 대신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모든 왕족들[九族34)]은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고 온 백성들은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느끼나이다. 벌써 장례일[遠日35)]이 되었으니 영면하실 묘소도 완공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빈소를 마련해 염습의 의식을 빠짐없이 마련했으며 또한 묘소에서 행할 장례 절차도 준비할 것입니다. 예관(禮官)에게 특명을 내려 성대하고 아름다운 덕업(德業)을 밝히게 하면서, 과거의 아름다운 행적을 상고하여 휘호(徽號)로 표시하나이다. 이제 아무 관직에 있는 아무개를 보내 삼가 시호를 올려 신정대왕태후(神靜大王太后)라 하나이다.”
이어 수릉(壽陵)에 장사지냈다. 목종 5년(1002) 4월에 정헌(定憲)을, 현종 5년(1014) 3월에 의경(懿敬)을, 18년(1027) 4월에 다시 선덕(宣德)을 시호에 덧붙였다. 문종 10년(1056) 10월에는 자경(慈景)이라는 시호를 덧붙였는데, 그 책문은 다음과 같다.
“부부가 화락하고 아내가 덕을 갖추어야 왕실과 나라가 창성하는 법입니다. 태후께서는 안으로 힘써 임금을 내조하시고 왕가의 자손들을 보호하셨으며, 밖으로는 자애롭고 화목한 가르침을 펴시니 왕실 부인들의 기풍이 바로잡히고, 임금의 덕화가 이로 말미암아 널리 퍼졌나이다. 그런 까닭에 태후와 선왕을 존귀한 자리에 함께 모셔서 영원히 변치 않을 묘정에 봉안하였나이다. 저는 외람되게 왕실의 후손이 되어 효심을 다 기울여 여러 선조들을 함께 모시면서[合升36)], 보잘 것 없는 제물로 몸소 제사를 드리나이다. 또한 제사를 올리며 휘호(徽號)를 덧붙이고자 삼가 책문을 받들어 자경(慈景)이라는 존호를 올리나이다.”
인종 18년(1140) 4월에 유명(柔明)을, 고종 10년(1223) 10월에 정평(貞平)을 시호에 덧붙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태조(太祖) 후비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경인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