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율, 살아있는 언어의 질서
│ 나태주(시인)
자유시에서 있어서 더구나, 오늘날 현대시에 있어서 운율을 이야기함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 쉽습니다. 일정한 언어의 틀을 계속해서 부수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현대시의 전형인양 되어가고 있는 판에 운율을 이야기 하는 건 전근대적 문제라 치부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허지만 운율의 문제를 보다 큰 안목으로, 범위를 확대해서 볼 때 꼭 그렇지 만은 않은 문제입니다.
운율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우선 운율은 형식적인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수율과 음보音步입니다. 우리네 시조와 민요에서 나타나는 4·4조의 기본 틀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삼음보三音步가 또한 그렇습니다. 일찍이 김소월과 김영랑의 시는 형식적 운율에 보다 충실한 시였고, 박목월이나 서정주, 박용래의 경우는 그것을 발전적으로 재해석하고 재활용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운율 스타일을 개발해낸 케이스입니다. 심지어 신동엽의 시 「산에 언덕에」,「너에게」나 신경림의 시 「목계장터」에서도 강한 운율은 느껴지는 바입니다.
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
두고 가진 못할
차마 소중한 사람
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
묵은 순터
새순 돋듯
허구 많은 自然 中
너는 이 근처에 와 살아라.
― 신동엽, 「너에게」 전문
그 다음으로 내용적인 운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용적인 운율은 반복이나 병치竝置 같은 기법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내재율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같은 시가 반복 병치법을 잘 살린 경우이고 박두진의 「묘지송墓地頌」 같은 시가 내재율을 활용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든
머언 먼 젊음의 뒤안 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필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서정주, 「국화 옆에서」 전문
北邙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만 무덤들 외롭지 않어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 박두진, 「墓地頌」 전문
그러나 시에서 운율은 결국 언어의 본질 문제로 돌아갑니다. 언어는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인간의 도구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구상(실재, 현실)을 추상(생각, 느낌)으로 바꾸고 다시 그 추상을 구체화(언어) 해나가는 과정이 언어입니다. 언어는 결코 박제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그 무엇, 생명체입니다. 살아서 숨 쉬고 변화하는 존재입니다. 무릇 생명체에는 질서가 있게 마련입니다. 아닙니다. 살아서 숨 쉬고 변화한다는 것 자체가 질서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연스러움을 말함입니다. 가까운 예를 들어보면 인간의 호흡, 맥박, 자연세계의 밤과 낮, 사계, 생과 사, 바다의 썰물과 밀물, 바람과 비, 나무나 풀의 자람, 꽃의 피고 짐 등등. 그것들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하나의 어길 수 없는 질서(순서)가 있고 놀라운 변화가 숨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현상이고 리듬이고 자연스러움 그 자체이고, 질서라고 봅니다.
마찬가지로 언어에도 자연현상에서와 같이 어길 수없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걸 저는 우선 언어의 자력磁力이라는 말로 풀이하고 싶습니다. 전기나 자석에서 같은 극끼리는 밀어내고 다른 극끼리는 당기는 작용이나 힘 말입니다. 언어에도 놀라운 비밀이 있어서 서로 끌리거나 필요로 하는 언어끼리는 끌어당기고 그렇지 않은 언어끼리는 밀어내는 기운이 있다고 봅니다. 그걸 언어의 자력으로 보는데 이 언어의 자력에 의해 잘 어울리도록 언어조합이 이루어진 시가 자연스런 시이고 또 좋은 시라고 봅니다. 그러할 때 시의 운율 또한 살아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더 나아가 시의 운율은 문장의 어조語調로까지 이어집니다. 어조란 “말의 가락”혹은 “말투”로 풀이되는 단어입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정형시인 시조나 민요가 4·4조를 기본 틀로 함도 우리 국어의 가락이나 말투가 4·4조에 맞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변해가는 시대, 현대시에서 고전적인 어투를 고집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언어, 그것도 아름다운 국어에 뿌리내려 시를 창작할 때 당연히 자연스럽게 국어의 가락과 말투에 주의해서 써야 할 줄로 압니다.
오늘날 우리 시에서 운율이 새삼스럽게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시의 어조에 문제가 있다는 말에 다름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젊은 시인들의 시를 읽어보면 너무나 언어가 거칠고 생경합니다. 생뚱맞습니다. 정제되었다거나 정선된 언어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또 그들의 어조(또는 문장)는 너무나 비틀려 있습니다. 오히려 비틀려 있어야 특색 있는 시, 개성적인 시로 인식될 정도니 굳이 그 심한 정도를 강조할 필요가 없겠지 않나 싶습니다. 또한 그들의 시는 일방통행이 너무나 심합니다. 대화가 없습니다. 문장이란 대화란 것을, 또 상호작용이요 쌍방통행이란 것을 먼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음악이나 미술에서 충분히 배워 올 필요가 있습니다.)
마땅히 가지런한 어조를 회복해야 할 일입니다. 바르고 아름다운 언어를 골라서 시를 써야 합니다. 허풍을 떨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되이 아는 척, 깨달은 척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어조를 비틀지 않고서도 충분히 특색 있고 개성적인 시를 쓸 수 있어야 합니다. 돌아다보면 좋은 시, 아름다운 시, 감동적인 시, 생명이 긴 시들은 우리말의 어조를 자기 나름대로 잘 살려서 쓴 시들입니다. 결코 어렵거나 비틀린 문장으로 이룩된 시들이 아닙니다. (그런 시들은 이상李箱의 시들을 제외하고는 하도 많아서 일일이 거론하기조차 힘든 정도입니다.)
좋은 시, 끝까지 남는 시는 언어조합이 평이한 시들입니다. 읽기에 편안한 시들이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시들입니다.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시들입니다. 회자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읽혀지고 쉽게 이해되고 그러면서도 감동을 주고 오래 잊히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시를 쓰기 위해서는 인생의 경험(체험, 내용)과 함께 명상의 과정(철학, 방법)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 나름대로 인생의 일면을 발견하고 그 감격을 시로 써내야 합니다. 이러할 때 우리가 이 땅의 한 사람 시인으로서의 몫을 다한다 할 것입니다. (2008. 5. 20)
첫댓글 현대 한국 시단은 무슨 연유로 절은 기름에 튀긴 꽈배기 시를 수준 높은 시로 보는 것일까요? 역겨운 냄새에 소화도 못 할 시가 신선하다고 생각하나 보지요? 님의 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