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참방>
아득한 시간
손성선
미친 년, 아버지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어쩌면 나는 정말 미쳤는지도 모른다. 미치도록 사랑했고 빠졌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미치도록 아니 정말 미치고 싶었던 문학의 길을 접어야만 했다. 이제는 아련한 추억의 뒷곡목이 되어버린 문학이야기가 조금씩 꿈틀거린다. 칠년 전, 그해 겨울 나는 큰 가방하나를 들고 천안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친정집에는 사전에 연락을 드리지 않았다. 짧게 잘린 컷트머리에 두툼한 점퍼차림을 한 나로서는 세속의 이십대 여성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운동선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고생 옷차림도 아니었다. 어정쩡한 노숙자 모습과 비슷했다. 기차 안에서는 사람들이 무슨 할말이 그리 많은지 휴대폰을 귓가에서 잠시도 떼놓지 않았다. 침묵이라는 친구와 오년동안 함께 했기에 주변의 소음이 무척 낯설었다. 창 밖 너머 풍경은 건조하고 깡마른 조형물처럼 재빠르게 지나갔다. 그 찰라에 나는 묵주를 들었다. 선모송 3단을 바치며 침통한 마음을 내려놓고 싶었다.
검은 베일을 쓰고, 평생 주님만을 섬기겠다며 서원을 한 지가 엊그제 같다. 십자가와 수도복을 받고 정결, 청빈, 순명의 복음 삼덕을 지키겠다고 관구장 수녀님 앞에서 외쳤다. 그러나 나는 신을 섬기며 살아가기에는 허영과 욕심이 많은 영혼이었다. 성서를 통독하고 해석하며 성당 감실에 모셔져 있는 성체를 바라보며 신과 나, 그리고 이 세상 많은 영혼들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으나 정녕 나의 영혼조차 신과 한 몸이 되지 못했다. 그 즈음에 '시'가 내게로 왔다. 내 안의 작은 영혼은 매일 속살거렸다. 그 언어는 추상적이고, 불분명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언어들을 매일 기록하고 묵상하며 하루일과 중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으로 여겼다. 밤 9시가 넘어가면 수녀원은 대침묵이었다. 오로지 주님과 대화하고 키스하고 주님과 뜨거움을 나누는 밤이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시' 와 뜨거운 밤을 보냈다. 커튼처럼 어둠이 수녀원 방안에 젖혀지면 나는 시집을 들고 침대에 누워 외우고 또 외워야했다 그 길만이 내 외로운 영혼에 기쁨으로 채워졌다.
기도도 '시'다 장상 수녀님은 평소와 다르게 행동이 바뀌어가는 내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시' 가 기도가 되어야했다.
천정 아버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삼대 째 내려오는 신앙은 나도 비껴 갈 수는 없었다. 보수적인 교리교육, 원칙을 중요시하는 천주교 신앙은 솔직히 내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모두 성직자나 수도자가 되길 어릴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일러두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수도자가 되라고해서 수녀의 길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청소년기를 보내고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꿈꾸다가 수녀가 되고자했다. 사람들은 수녀원이 평생 갇혀지내는 곳인줄 알고 있으나, 근대에 수녀원은 청소년 교육전문 수도회였다. 그러나 나는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냈기에 가출과 성폭행으로 수녀원에 임시 거주하는 소녀들과 늘 함께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이해한다면서 정작 나 자신은 내 가족하나 사랑하지 않고 '나' 자신도 넓게 포용하지 못했다.
신은 모든 것을 용서했지만, 나는 세상으로 나가 '나' 자신을 찾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 탈출구는 오로지 '문학' 밖에 없었다. 종이에 글을 쓰고 다시 지우며 또 버렸다. 구겨진 종이들은 산더미처럼 쌓여갔지만, 내 가슴과 영혼 속에는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왔다. 묵주알을 굴리며 성모마리아의 헌신을 떠올리다가도 내가 표현하고픈 미적언어를 어떻게 나타낼까? 고민하였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글을 떠올리고 생각하는 그 시간은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가족들이 두 달에 한 번 면회를 왔다. 나는 밖에서 요즘 나오는 시집을 사달라고 동생에게 부탁했다. 수녀원 침실 한 귀퉁이는 이미 시집으로 높게 쌓여갔다. 읽고, 쓰고, 보고, 매일 밤 시와의 연애는 달콤했다. 그리고 나는 더이상 몰래 '시'와 연애하고 싶지 않았다.
친정집에 도착했다 찰싹, 날선 손하나가 내 얼굴을 스쳤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미쳤어, 미치지 않고 너가 그럴리 없어" 아버지는 무척 흥분했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지만, 나는 두눈을 꼭감고 침묵했다. 성녀 데레사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정말 나에게는 시간이 약이었다. 인내하고 견디면 모든 것은 다 지나가리라. 당장에 가족들에게 배척받는 기분은 꾹참을 수 있었다. 외롭거나 쓸쓸하지도 않았다. 내게는 문학 이라는 멋진 애인이 뒤에서 지켜주고 있었다.
파란은 끝이나고 나는 약간은 늦은 나이에 대학생이 되었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지원하여 맹렬하게 문학을 공부했다. 처음에는 환상이 컸다. 문예창작과를 나오면 시인이고 소설가가 되는 줄 알았다. 그것만큼 엄청난 일도 없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미련한 사고속에서도 '자유' 라는게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글쟁이라는 직업이 매력있어 보였으나, 현실에서는 경제적인 문제가 많았다. 생활과 창작 두 가지를 이어나가기가 솔로였던 나로서는 버거움이었다.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았다. 종교와 제도 이딴 틀에서도 나는 훨훨 내 자신을 마음껏 글로 표출시켰다. 돈은 없으나 잠시라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나간다는 것, 그것이 내가 대학시절 누렸던 '자유'다
함께 스터디를 하던 문우들과 미래에 유명작가가 되면 모른 척하지 말자며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에 서로의 이름을 썼다. 지금은 누구보다 문단에서 활약이 큰 김려령 동화작가가 한때 나와 술벗이 되고 글벗이었던 문우다. 현재 나는 잠시 펜을 놓고 있는 상태다. 그렇다고 완전히 절필한 상태는 아니다. 졸업과 함께 나에게도 사랑이 찾아오고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만들어졌다.
지금은 대학시절과 함께 한때 구도자의 기을 걸으려했던 나의 이십대를 아득한 시간이라고 부르련다. 나는 누구보다 당당하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법을 문학을 통해 깨닫고 이만큼 성숙시켰다는 걸 알고 있다. 추억은 누구에게나 그러타분 하거나 넋두리로 들릴 수 있으나 추억은 분명히 나에게 이야기가 되고 인간 삶의 근본을 더듬어보게 하는 다리같은 소중한 기억이라고 말하련다. 현실에서 지치거나 다소 한숨지을 때, 손거울을 보듯 꺼낼 수 있는 아득한 시간 그건 바로 젊은 날 나의 유년시절이라고.
첫댓글 곳 곳에 권샘의 흔적 감사 또 감사^^
쓰면서 감상하는 기분도 참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