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02. 12:29 한국학연구원, 규장각 원문 추기, 영월문화원 해역본 추기
淸虛樓重建記 청허루중건기 洪象漢 撰
江原道 原州郡 酒泉에 있는 淸虛樓 重建記의 拓本帖이다.
원래 淸虛樓는 1723년(景宗 3)에 화재로 불타 없어졌던 것을 1758년(英祖 34) 原州牧使 任𪜇이 重建하게 되자 禮曹判書인 洪象漢이 記를 지어 板刻하여 걸었던 것이다. 洪象漢(1701·1769)의 자는 雲章, 본관은 豊山, 魚有鳳의 門人이다.
1728년 進士試에 합격. 1735년 增廣文科에 丙科로 及第, 이후 大司諫, 大司憲을 역임.
1754년 禮曹判書로 趙憲의 文集을 간행하였고, 彰節, 愍民의 두 書院을 重修, 1759년 判義禁府事로서 世孫 師傅를 역임했다.
내용을 보면 "原州의 酒泉에 있는 淸虛樓는 경치로 이름이 있는 곳이었는데 1720년(肅宗 46) 沈廷輔가 原州 牧使로 있을 때에 肅宗이 이의 경치가 뛰어나다는 소식을 듣고 七言律詩 1편을 지어 下賜(하사)하였으므로 板에 刻하여 걸고 많은 사람이 모여 宴會(연회)를 벌렸으므로 淸虛樓의 이름이 더욱 떨쳤었다.
1723년에 불행히도 화재가 나서 불에 타서 없어졌다. 그 후 1758년 任𪜇이 原州에 牧使로 와서 重建하고 다시 肅宗의 遺詩(유시)를 請하는 글을 올려 英祖께서 친필로 써서 내려 보내고 牧使에게도 文皮를 내려 嘉尙(가상)하였다"는 내용과 또한 淸虛樓의 勝景 등을 찬양하는 글로 되어 있다. 卷尾(권미)에 洪象漢의 刊記가 있다.
본문
洪象漢(1701-1769)이 1758年(英祖 34) 11월에 강원도 원주 酒泉에 있는 淸虛樓 중건 사실에 대하여 적은 기문의 拓本帖이다. 청허루는 1720年(肅宗 46)에 세워져 숙종의 御製詩를 하사받았는데 1723年(景宗 3)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758년에 중건되었다.
홍상한의 자는 雲章(운장)‚ 본관은 豊山으로 魚有鳳(어유봉)의 문인이다. 1758년 가을 莊陵에 갔다가 청허루가 중건된 것을 보고 돌아와 이 글을 지었는데 탁본 연대는 미상이다.
청허루는 1720년 원주목사 沈廷輔(심정보)가 세운 누각으로 주변의 경관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숙종이 하사한 칠언율시 1편이 걸려 있어 문인들이 즐겨 찾아 詩會를 열기도 하였다.
그러나 1723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지나는 사람들이 늘 이를 애석하게 여겼는데‚ 그 후 任𪜇(임𪜇)이 원주목사로 부임하여 1758년에 청허루를 중수하였다.
홍상한은 이해 가을에 莊陵에 갔다가 酒泉에 들러 청허루가 중수된 것을 보고 조정에 돌아와 숙종의 어제시를 청하는 글을 올렸으며‚ 영조가 숙종의 어제시를 친필로 써서 내려 보내고 목사에게도 文皮를 내려 그 공을 치하하였다고 한다.
말미에는 청허루는 경관이 아름답고 임금의 題詠詩(제영시)가 있으므로 그 이름이 더욱 떨치게 될 것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淸虛樓重建記 청허루중건기
曹判書兼知 經筵春秋館事洪象漢記
간행년대 [刊年未詳] 간년미상
책권수 1帖(4折 8面) 권수 0001
사이즈 36.2×24.6cm 판본사항 拓本 (척본/탁본)
卷末:崇禎紀元後三戊寅(1758)…洪象漢記
권말:숭정기원후삼무인(1758)…홍상한기
자료소개 江原道 原州郡 酒泉에 있는 淸虛樓 重建記의 拓本帖(탁본첩)
기사 제목 淸虛樓重建記
原州之酒泉有淸虛樓以江山名焉往在
庚子春沈公廷輔牧是州我
肅考聞 淸虛之勝 特賜七律一篇仍 宣法醞
公敬奉 寵命刻掲於樓大集賓僚以侈
恩光於是樓之名益彰焉歲癸酉樓不
幸大災蕩爲灰燼之塲而流峙雲烟之趣
殆無所管領焉譬如三千珠履失原嘗風
流世間不復知有淸虛樓冠盖之由是路
者莫不指點遺墟而咨嗟焉及今年秋余
以宗伯祗役于
莊陵路出酒泉有樓
翼然于淸讌堂之右卽所謂淸虛樓也盖
牧使任侯慨然興感捐廩鳩材而新之
將以重奉
肅廟遺什也余歸奏于朝
聖上泫然
下敎曰斯詩也予嘗覩
于 侍湯時也仍 親書以下繼之以
小識以寓 追慕之聖孝 命銀臺之臣
奉往以掲之特 賜牧使文皮嘉尙其重
建之誠猗歟盛哉嗚呼雖有江山非樓觀
之美則無以發揮光景雖有樓觀非題詠
之盛則無以流傳形勝此江山所以必待
樓臺也樓臺所以必貴題詠也關以東樓
臺江山之勝指不勝屈而若三陟之竹西
樓春川之昭陽亭扞城之淸澗亭獨最著
者不特境區之淸秀耳誠以鴻匠巨手題
詠之照人耳目也然若論題詠之播萬口
而垂百代則豈有如
奎章之璀璨輝
暎於斯樓者哉然四海之廣樓臺之衆亦
豈無帝王之遺蹟而 先王之什
今 王之筆又豈有如斯樓者哉然則今日之
淸虛樓非特昔日之淸虛樓而已也侯之
所以重建者亦可謂知所重已矣侯累書
請記其事故書此以歸且願侯書掲重奎
軒三字於楣間以表其實也時
崇禎紀元後三戊寅復月崇政大夫行禮
曹判書兼知 經筵春秋館事洪象漢記
淸虛樓重建記 洪象漢 撰(청허루중건기 홍상한 찬)
원주의 주천에는 청허루가 있는데 강산으로 이름 지은 것이다.
옛날 경자년(1720년 숙종46년) 봄, 심정보 공이 원주를 다스릴 때
우리 숙종대왕께서 청허루의 경치를 듣고
특별히 칠언율시와 술을 내리시고
삼가 명을 받들어 청허루에 새겨서 걸게 하시니
신하들이 많이 모여 임금님의 은혜를 받으니
이때에 청허루의 명성이 더욱 빛났다.
계유년(1753, 영조 29년) 청허루가 불행히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고
산천과 구름의 경치를 다스릴 수가 없었다.
비유컨대 삼천개의 구슬로 된 신발이 근본을 잃은 것이니
일찍이 풍류를 즐기는 세간에서
청허루가 있다는 것을 다시 모를까 하여
벼슬하러 이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청허루 터를 가리키며
탄식하지 않음이 없었다.
올해 가을 내가 예조판서로 장릉에 일을 보러 가는데
주천으로 나가는 길에
청연당의 오른쪽에 좌우가 넓은 루가 있었으니 청허루였다.
원주목사 임집이 개탄하여 녹봉의 일부로 재목을 사서 새로 짓고
숙종께서 남기신 시를 다시 받들려고 하였다.
내가 돌아가 조정에 아뢰니
임금님(영조)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하교하시기를
“이 시는 내가 일직이 아버님의 병간호를 할 때 본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숙종대왕의 시 아래에 이어서 짧은 글을 쓰시고
아버님을 추모하는 임금님의 효성을 보이셨다.
승정원의 신하에게 명하여 청허루에 가서 걸게 하시고
원주목사에게 호랑이 가죽을 특별히 내려주셔서
청허루를 다시 세운 것을 칭찬하셨으니
아름답고 성대하구나.
아
비록 강산이 있어도 누각의 아름다움이 아니면
풍경이 펼쳐질 수 없고
비록 누각이 있어도 시가 있지 않으면
경치를 전할 수 없다.
이것이
강산이 반드시 누각을 기다리는 이유이고
누각이 반드시 시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이다.
동쪽의 누각을 보면
강산의 아름다움이 손으로 셀 수 없는데
삼척의 죽서루, 춘천의 소양정, 간성의 청간정 만이 가장 드러나는 것은
단지 그 지역의 자연이 빼어난 것만이 아니라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시를 지어
사람들의 이목을 밝혀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시가 여러 사람에게 퍼져서 오랫동안 전해지는 것을 논한다면
어찌 임금님의 글이 이 청허루에서 빛나는 것과 같겠는가.
사해가 넓고 누각이 많으니 또한 어찌 제왕의 유적이 없겠는가.
숙종대왕의 시와 임금님의 글이 있으니
다시 어찌 이 청허루와 같겠는가.
그러한즉 오늘날의 청허루는 단지 옛날의 청허루 일뿐이 아니다.
원주목사가 청허루를 다시 세운 것도
중요한 바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원주목사가 여러번 그 일을 기록해줄 것을 청하는 편지를 보내니
이것을 써서 돌려보낸다.
또한 원컨대 원주목사께서 ‘중규헌’ 3글자를 기둥 사이에 걸어서
그 사실을 알려주기를 바란다.
숭정 기원후 3무인(영조34년 1758년) 복월(음력 11월)
숭정대부 행 예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 홍상한 이 기문을 짓다.
[참고인용문헌]
『영월의 다시 찾은 문화재』 영월문화원 엄흥용 편저 2020.12. -영조실록 권92 영조34년 10월4일 기사, 홍상한 <청허루중건기>탁본첩, 규장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