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논의에 앞서
인도네시아는 400여 년 동안 식민지배를 받았다고 쉽게들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는 인도네시아의 역사를 크게 왜곡하고 식민주의란 개념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표현이다. 그 400여 년을 통틀어 네덜란드가 지금의 인도네시아를 구성하는 지역을 통치한 기간은 40년에 불과하며, 이 마지막 40년 동안에도 대다수 지역은 네덜란드인들의 영향권 밖에 놓여 있었다.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분할 경쟁이 가속화되어 네덜란드 정부가 그 지배영역을 외방도서와 내지로 확대하기 시작한 1870년대 이전에 네덜란드가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지역은 자바와 외방도서의 일부 항구도시에 불과했다. 그때까지 인도네시아 군도에는 크고 작은 200여 개의 정치체계들이 독립된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현재 인도네시아를 구성하는 지역은 식민통치 말기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경계를 갖게 되었으며, 인도네시아란 이름이 처음 등장한 때는 그보다도 뒤인 1920년대였다. 그 이전 네덜란드 식민지는, 18세기 이전에는 자바처럼 섬 또는 도시나 지역의 이름으로 불렸고, 네덜란드 식민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호칭되었다. 이 글에서 네덜란드가 통치한 지역을 편의상 인도네시아로 부르겠지만, 현대 인도네시아의 영토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식민통치란 개념에 대해서도 분석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포르투갈이 말라까해협(말레야 반도와 수마트라섬을 나누는 해협)으로부터 말루꾸제도에 이르는 항로를 장악하여 향로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던 16세기 초반 이후 서구 식민주의자들의 인도네시아 진출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그 이후 전개된 식민통치의 유형과 성격은 진출국에 따라 그리고 시기별로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포르투갈은 향로 생산과 무역 독점에만 집중하였지, 인도네시아나 그 일부를 정치적, 군사적으로 지배하는 것에는 결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유럽시장에서 엄청난 가격으로 거래되던 정향(clove)과 육두구(nutmeg)의 생산지였던 떠러나떼섬, 띠도르섬, 반다제도, 암본을 장악하는 정도에 그쳤다.
1619년 지금의 자까르따에 해당하는 자까뜨라(또는 순다껄라빠)에 바타비아라고 명명한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시작된 네덜란드의 식민주의는 시기에 따라 크게 2-3가지 유형의 통치방식을 보이며 전개된다. 1799년까지 자바지역을 지배한 것은 국가의 형태로서가 아니라 동인도회사(VOC)라고 하는 회사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국가의 기능을 상당정도 수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동기는 엄연히 이윤 추구의 극대화를 통하여 주주와 회사원에게 복무하는 것이었다.
재정난과 부패로 동인도회사가 파산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인도네시아를 직할하기에 이른다.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 1942년까지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령 동인도로서 네덜란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지만, 1870년대까지 직접적인 식민통치 하에 놓인 지역은 앞서 언급한대로 자바를 중심으로 한 극히 일부지역에 불과하였고, 전 지역에 대한 사실상의 통치권은 그 때부터 20세기 초반사이에 확대되었다. 또한 이 기간 중 네덜란드가 식민지를 통치한 구체적인 방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게 되는 데, 강제경작기, 자유주의기, 윤리정책기, 공황기로 나뉜다. 이 변화를 유형화하면 <표 1>과 같다.
마지막으로 인도네시아 식민지사를 논함에 있어, 그 쟁점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네덜란드의 식민통치가 현대 인도네시아의 경제발전의 토대를 닦았다거나 아니면 산업화에 일정 정도 기여하였다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를 둘러싸고 제기된 근대화론은 최소한 네덜란드의 식민통치에 대해서는 제기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명백히 해 둘 필요가 있다.
그 근거는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진출이 경제적 착취라는 단순하고 명백한 동기를 갖고 있었고, 인도네시아의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지하자원이 네덜란드에게 계속하여 잉여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 이후 식민지 정부는 도로 확충, 철도 건설, 항만시설 건축, 통신시설 개설 등 하부구조 건설을 시작하지만, 이는 농산물과 광물을 운반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지 산업화를 위한 진정한 하부구조 건설이 아니었다.
나아가 인도네시아가 실질적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1949년 당시, 네덜란드 식민통치가 신생 인도네시아에 넘겨 준 현대적 산업은, 그때까지 네덜란드인 수중에 있던 일부 서비스산업을 제외하고, 사실상 전무했다. 인도네시아 학자들은 물론이고 네덜란드 학자들 중 식민통치의 근대화 기여론을 감히 언급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다.
2. 서구 식민주의 제국들의 경쟁과 네덜란드의 패권 (1511 - 1619)
인도네시아 땅에 외세 개입의 오랜 역사가 시작된 것은 16세기 초반이었다. 13세기 말 두 차례에 걸친 몽고족의 자바 침공이 있었지만 폭풍과 풍토병 탓으로 무위로 끝났으며, 15세기 초엽에 명나라가 환관 쩡허(鄭和)를 해군제독으로 임명하고 30여 년에 걸쳐 수차례나 자바, 수마트라, 깔리만딴 등지에 막강한 함대와 군사를 파견한 적이 있었지만 식민통치가 그 목적은 아니었다. 동남아에 대한 중국의 군사적, 외교적 관심과 달리, 서구 식민주의자들의 인도네시아 진출은 시종일관 경제적 착취라는 의도를 명백히 하였다.
이들의 주된 관심은 식민지에서 경제적 이윤을 극대화하는 데 있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식민통치는 (1)식민통치의 비용을 가장 줄일 수 있고 (2)잉여와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생산관계, 경제정책, 통치방식 및 국제관계를 형성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러한 효율성의 원칙을 견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식민통치의 역사는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15-6세기는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를 탄생시키고, 세계 특히 동아시아에 대한 서구의 우위를 점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나아가 자본주의의 성장과 산업혁명을 초래케 한 출발점이 된 점에서, 세계사를 바꾼 결정적인 시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 서양인들의 해외진출을 직접적으로 촉발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되던 향료였다. 15-6세기 서구 시장에서 금보다 훨씬 비싼 값으로 팔리던 정향(clove)과 육두구 열매(nutmeg)및 그 껍질(mace)이 나던 곳은 인도네시아의 말루꾸제도 밖에 없었고, 후추(pepper) 역시 인도네시아의 서부 자바와 수마뜨라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었다. 서양인들이 상상하던 인도는 실제로 인도네시아였던 셈이다.
포르투갈이 말라까를 점령한 1511년 이후 향로무역의 중요성이 사라진 18세기 후반까지, 특히 네덜란드가 서부자바의 이슬람왕국인 반떤을 굴복시키고 여기에 와 있던 영국인들을 몰아 낸 1682년까지, 인도네시아는 서구 식민주의들에게 최대 각축장이 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가 최종적인 지배권을 구축하게 되는 과정은 서구 식민사의 초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국면을 형성하게 된다.
해외 진출에서 100년 가량이나 앞섰던 포르투갈 및 스페인과 18세기 말 이후 무적의 제국으로 떠오르게 되는 영국을 누르고 신생 소국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서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포르투갈은 1511년 당시 동남아에서 교역과 이슬람 전파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말라까를 불과 17-8척의 전선과 1,200명의 병력으로 굴복시켰다. 몇 십 년 앞섰던 병기의 힘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지만, 포르투갈은 무어인들과의 오랜 전쟁 경험, 제노아 고용선원들의 항해술, 당시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이었던 선박 건조술, 지중해와 북구 상업도시들을 잇는 지리적 위치, 해양 탐험과 원정에 대한 국가 및 자본가들의 지원 등으로 경쟁 국가들을 누를 수 있었던 것이다.
말라까를 손아귀에 넣은 포르투갈 함대는 곧 이어 향로 생산지역인 말루꾸제도를 겨냥하였다. 말라까를 중개무역항으로 이용하던 자바상인들과 모슬렘상인들이 다른 곳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탓도 있었지만, 포르투갈인들은 생산자들과 직접 접촉하여 향료 구매를 독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불과 2년 뒤 포르투갈인들은 정향의 주 생산지인 떠러나떼섬과 띠도르섬에서 중개인을 거치지 않는 직접 구매에 처음으로 성공하고 그곳에 이를 전담하는 ‘현지상관’(現地商館: factory)을 설치하였다.
1521년에는 떠러나떼 술탄과 정향 구매 독점계약을 체결한 포르투갈인들은 향후 70년 동안 스페인의 군사적 위협과 영국 상인들의 경쟁을 뿌리치고 말루꾸 전 지역의 향로무역을 독점하게 된다. 포르투갈은 말라까-보르네오-동부자바-술라웨시-말루꾸제도에 이르는 무역로로부터 자바상인들을 몰아 내고, 해군력을 이용하여 인도네시아로부터 아라비아에 이르는 전 항로를 정기적으로 정찰하였다. 무역 독점과 수출 물량 제한을 통해 향료는 유럽시장에서 고가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 결과 포르투갈은 막대한 이윤을 취했으며 말라까는 향료집산지로서 계속 번영하였다.
그러나 16세기 말에 이르면서 포르투갈의 향로무역은 쇠퇴하게 되는 데, 이는 몇 가지 요인에 기인한다. 우선 포르투갈은 말라까 점령 직후부터 토착 국가들의 거센 저항과 도전에 직면하였다. 특히 서양의 진출에 때 맞춰 이슬람화한 동남아 토착 국가들은 포르투갈령 말라까를 고립시키기 위한 연합전선을 형성해 말라까와 포르투갈 선박을 수시로 공격하였다.
특히 수마뜨라 북부해안에 소재한 아쩨는 말라까를 대체하는 이슬람 무역국가로 부상하면서 포르투갈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였고 급기야 1558년에는 터키군의 도움으로 말라까를 1년간 점령하기도 하였다. 포르투갈은 인도네시아 진출 기간 내내 아쩨를 필두로 하여, 저빠라, 조호르, 반떤, 더막 등 이슬람 국가들의 끈질긴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국제관계의 도움을 크게 받은 나라는 다름 아닌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수산물 무역을 통해 축적한 대외 무역 경험과 선진적인 금융제도를 통해 축적한 풍부한 자본을 바탕으로 1590년대에 동남아 진출을 시작하였다. 리스본에서 경험을 쌓고 귀국한 네덜란드 상인 더 하우트만(Cornelius de Houtman)이 처음으로 네덜란드 상선을 이끌고 반떤에 도착한 1596년부터 동인도회사가 출범한 1602년까지 많은 네덜란드인들이 인도네시아 원정에 뛰어 들었고, 이들간의 경쟁은 향료 생산지 가격을 높이는 결과를 낳아 토착인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 진출한지 불과 10여 년만에 포르투갈과 경쟁에서 완전한 우위를 확보하게 된다.
또한 포르투갈과 오랫동안 전쟁을 벌이고 있던 토착국가들도 네덜란드인들을 환대하고 이들의 구매활동에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초기 식민주의자들이었던 포르투갈인들은 상인으로서 현지인들을 대한 게 아니라 정복자들처럼 횡포, 살인이나 해적질을 일삼아 평판이 매우 나빴다. 이들이 보인 야만적이고 잔인한 행동은 카톨릭을 전파하기 위해 1546년 말루꾸를 방문한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 자비에르(St. Francis Xavier)가 1년 반 동안의 포교 노력을 포기하고 돌아가 버릴 정도로 심한 것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은 향료 생산지역에서 포르투갈인들을 몰아내고 현지상관을 설립해 나갔으며 토착인 통치자들과 독점 무역권을 체결해 나갔다. 1602년에는 영국의 동인도회사 설립, 네덜란드 상인들의 과잉투자 등에 따른 과잉경쟁으로 인하여 현지 가격이 급등하자, 이에 놀란 네덜란드는 영국 동인도회사 자본금의 10배나 되는 막대한 투자 규모를 가진 자국의 동인도회사(VOC: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를 설치하였다. VOC의 눈부신 성공은 포르투갈과 이를 후원한 스페인으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았지만 이를 뿌리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네덜란드가 동남아로 진출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영국도 해로를 통한 향료무역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영국보다 한 걸음 앞섰던 네덜란드는 토착인 통치자들을 협박하여 영국과 교역을 방해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저가정책에 불만을 품은 토착인들이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영국인들과 거래를 원했지만 네덜란드의 보복이 두려워 감히 실행에 옮기질 못했으며, 1620년 이를 감행했던 반다제도의 론토르섬과 룬섬의 토착인들은 네덜란드 군인들에 의해 집단학살 당하는 비극을 맛보아야 했다.
영국의 도전은 끈질기고 드세었지만, VOC의 선점과 막강한 자본을 넘어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유럽에서 협조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양국은 1620년 협정체결을 통하여 영국의 향료무역 참여를 보장하였지만, VOC 총독 쿤(Jan Pieterszoon Coen, 1618-1623, 1627-1629)의 강력한 독점정책과 영국 상인들에 대한 무력탄압으로 동남아 현지에서 그 협정이 준수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영국은 VOC와 경쟁을 벌이고 있던 반떤 왕국에 거점을 마련했으나 소규모의 무역에 만족할 수밖에 없게 된다. 1682년 VOC에 반떤 왕국이 주권을 넘겨주자 영국 상인들은 수마트라의 주변부인 벙꿀루로 퇴각하게 되고, 이로써 영국은 인도네시아와의 향료무역에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 향료무역과 인도네시아 지배를 둘러싼 전쟁과 경쟁에서 네덜란드는 외교적 수완, 군사적 우위, 자본 집중, 강압적인 식민정책을 앞세워 경쟁세력들을 인도네시아로부터 몰아내었다. 또한 그 시기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영국의 패권이 막 형성되는 시점과 묘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3.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자바 침탈과 쇠퇴(1619 - 1799)
포르투갈의 저항과 영국의 도전을 물리친 네덜란드는 바타비아를 거점으로 하여 인도네시아에 대한 식민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경제사가들에 따르면, VOC라는 주식회사의 형태를 띤 이 식민체제는 피지배자인 인도네시아인들에게는 물론이고 그 주주인 네덜란드 본국의 정부와 자본가들, 종업원인 식민지 관료들, 나아가 회사 자체의 존립과 발전에도 기여하지 못한 실패한 프로젝트였다. 앞서 언급한 식민지 초과이윤의 극대화는 달성되지 못했다. 독점에 의해 유럽시장에서 막대한 이윤이 확실하게 보장되었던 향로무역이 네덜란드 본국과 네덜란드인들에게 아무런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VOC의 성격, 정책, 활동을 규명해 봄으로써 밝혀 낼 수 있다.
VOC의 법적 성격은 분명 회사라는 법인체였다. 네덜란드인들이 아시아에 진출한 초기에 ‘무분별한 원정’(wilde vaart)으로 명명될 정도로 과잉투자와 과잉경쟁을 벌여 생산지에서 향료 구입가격이 상승한 결과 이윤이 격감하게 되고, 후발국가 영국이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조직적인 진출을 꾀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자본가들을 설득하여 4개의 무역회사를 통합하여 VOC를 설립하게 된다.
VOC는 주주와 이사들로 구성된 엄연한 회사였다. VOC는 6백5십만 길더의 자본금으로 설립되어 희망봉과 말젤란해협 사이의 모든 무역을 독점하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때까지 개별회사들에 의해 설치되었던 말루꾸제도, 반다제도, 반떤, 그레식, 빠따니, 조호르의 현지상관들은 VOC에 인수되었다. VOC는 설립 후 3년 동안 38척의 선박을 아시아로 보내게 되는 왕성한 활동을 시작한다. 바타비아를 건설하기 이전에는 선박 구입, 선원 고용, 항해 비용과 안전, 현지상관 활동에 필요한 경비만을 비용으로 지급하였으므로 막대한 이윤을 챙길 수 있었다.
그러나 회사의 중심이 바타비아로 옮겨지면서 VOC의 성격은 변하고 비용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늘어나게 된다. VOC는 정관에서 이미 사실상 국가가 가질 수 있는 주요 권한, 즉 무력사용권, 사법관할권, 조약체결권 등을 보장받고 있었다. 1610년에 VOC가 아시아 현지에서 총괄하는 총독의 직위를 신설하고, 1619년에 본부를 암본에서 바타비아로 옮기면서, 관료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현대 국가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관료제와 군사력을 겸비하게 된 것이다. 바타비아는 VOC의 ‘수도’로서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쿤 총독은 중국인들을 유치하여 도시의 골격을 갖추게 하였으며, 디먼(Anthony van Diemen, 1636-1645) 총독은 성곽을 쌓고 VOC 청사를 신축하였으며, 같은 시기에 네덜란드인들을 위한 학교와 교회가 생겨나고 네덜란드 풍의 주택들이 바타비아 거리에 들어섰다. 불과 20여 년만에 바타비아는 동남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변모하여 “동양의 여왕”이란 별칭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바타비아 밖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1620년 영국과의 협약을 마지막으로 향료무역을 둘러싼 유럽국가간의 경쟁은 거의 종식되었지만, 통치지역 내에서 토착인들의 반란과 이슬람 왕국들의 도전과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본국의 정부와 VOC 본사는 VOC의 활동을 향료 구입과 그 독점에 필요한 업무로 제한하려 하였지만, 현지 관료들은 무역독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토착 국가들에 대한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본국의 경제우선주의는 계속 바타비아의 팽창주의와 충돌하였다. VOC는 자의반 타의반 토착국가들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전쟁이나 반란과 이들 국가간의 전쟁에 끼어 들게 되었고, 그 결과는 영토 확장으로 나타났다.
VOC는 1799년 파산으로 해산하기까지 자바에서만 십 수 차례의 크고 작은 토착왕국의 내전과 전쟁에 개입하였다. 마따람 왕국에 대한 반란을 진압해 준 대가로 1677년 바타비아 남부지역과 중부자바 서마랑을 할양 받았으며, 반떤 왕국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갈등에 개입한 대가로 서부자바 찌레본을 얻고 반떤 왕국의 외교권과 무역권을 따내었다. 1705년부터 1757년까지 세 차례나 벌어진 마따람 왕국의 왕위 계승전쟁에 개입하였고, 1755년까지 동부자바의 일부를 제외한 자바 전 지역을 손아귀에 넣는 데 성공하였다.
토착국가들의 정치와 전쟁에 대한 지속적인 개입을 통해 VOC는 필적할 상대가 없는 지역세력으로 부상하였지만, 이것은 외관상의 강성함에 지나지 않았다. 향로무역의 집산지와 중개항으로서 바타비아는 번영과 풍요를 누렸지만, 이 역시 겉치레에 지나지 않았다. 전쟁이나 내전에서 승리한 통치자들이 VOC에 진 전쟁 빚을 제대로 변제한 경우는 없었고, 전후 이양 받은 영토도 당시로서는 별 소득 없이 통치비용만 치러야 하는 부담에 지나지 않았다. 이 통치비용은 결국 VOC의 재정 수입을 초과하게 되고, 그 결과 부채는 날이 갈수록 불어났다.
또한 재정 수입에 큰 타격을 준 것은 VOC관료(직원)들의 부패와 횡령이었다. 18세기로 넘어 가면서 재정상태가 악화된 VOC는 생계비 이하의 형편없는 수준의 봉급을 관료들에게 지급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관료들사이에 향료를 빼돌려 밀무역과 사무역을 하는 행위가 만연하게 되었다. 1722년 VOC는 절도와 밀무역의 죄를 물어 26명의 목을 하루만에 치는 엄중한 조치를 취했지만, 관료들의 부패는 VOC가 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재정수입 감소와 통치비용 증대로 인해 VOC는 빚을 얻을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VOC 부채는 1700년에 천2백만 길더를 넘어섰다. VOC 말기인 1789년에는 한해 예산적자만도 7천4백만 길더, 불과 2년 뒤인 1791년에는 9천6백만 길더에 달하게 되었다. 신용도가 밑바닥에 달한 VOC는 더 이상 금융시장에서 돈을 빌릴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동인도회사 지배기 동안 자바인들이 당한 피해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가장 큰 요인은 17세기 초반부터 시작되어 150여 년간이나 계속된 전쟁과 반란이었다. 그리고 VOC는 거의 대부분의 전쟁에 개입했다. 특히 중동부자바에서 1601년 마따람 왕국을 창건한 세노빠띠가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개시된 전쟁은 1757년 왕국이 세 개의 술타네이트로 분열, 축소될 때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네덜란드인들이 개입한 전쟁은 그 성격에서 전통적인 전쟁과 달랐다. 새로운 무기의 사용도 그 파괴력을 높였지만, 서구적 전쟁 유형은 인명살상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남아 전통사회의 전쟁이 부족한 인력을 보충하고 추종자들의 수를 늘이는 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대량 살상을 하지 않았던 것과 크게 대비되는 것이었다. 1740년 바타비아에서 터진 중국인 대학살은 네덜란드인들의 잔학상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바타비아의 분노”(紅溪慘案)이라고 불린 이 참극은 바타비아 거주 중국인의 75%에 해당하는 10,000여 명이 일주일 사이에 학살된 끔직한 사건이었다. 또한 마따람 왕국은 세 차례의 자바전쟁을 치르면서 VOC에 진 빚을 갚기 위해 그 부담을 지방통치자들에게 떠 맡겼는데, 최종적인 부담은 자연히 대다수 자바 농민들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었다.
향료 생산지인 말루꾸제도의 주민들의 운명도 별반 나을 게 없었다. 네덜란드의 구매독점으로 인해 생산지 가격은 과거의 2분의 1 가격으로 하락하였고, 생산량 제한을 통해 고가 유지를 꾀하던 VOC는 필요에 따라 농민들이 심은 향로나무를 자르도록 강제하였다. 또한 VOC는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정향과 육두구 산지를 암본섬과 반다제도로 집중시키는 정책을 취하게 되는 데, 그 결과 정향 원생산지로 풍요로움을 구가하던 떠러나떼와 띠도레는 황폐화되었다.
그 결과 말루꾸 주위 바다와 해안지역에서는 해적행위가 급증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향료생산의 중심지인 암본과 반다의 주민들의 생활이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VOC의 엄격한 생산통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식량도 네덜란드인들만을 통해서 높은 가격으로 구입하도록 강요받았다.
재정 적자와 부채에 시달리던 VOC는 1784년 파리조약이 향로무역독점체제의 종식을 결정하면서 회생이 불가능하게 된다. 정향도 1770년대가 되면서 유럽시장에서 그 가치를 잃게 된다. 네덜란드의 국력 또한 새로운 해상 패권국가로 부상한 영국과 대륙의 강대국으로 떠오른 프랑스의 틈바구니에서 쇠잔하고 있었다. 1795년 프랑스가 홀란드를 점령하고 친프랑스 정부인 바타비아 공화국을 선포하자, 국왕 윌리암 5세는 영국으로 탈출, 망명하여 해외 식민지의 통치권을 일시적으로 영국 정부에게 위임하였다. 1799년 12월 31일 VOC는 1억3천4백만 길더의 빚을 국가에 떠넘기고 종식을 고했다.
요약컨대, VOC를 통해 인도네시아를 통치한 네덜란드 식민주의자들은 그 통치기구인 ‘회사’가 의미하듯이 경제적 이윤의 극대화 외에는 어떠한 이념이나 대의도 내세우지 않았다. 그들에겐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이 내걸었던 복음화나 영국이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문명화 따위의 명분조차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오로지 수탈과 착취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4.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식민지배 유형의 변화 (1800 - 1942)
인도네시아에 대한 네덜란드의 직접통치는 공식적으로는 VOC의 해산과 함께 시작되었지만, 실질적인 직접통치는 1830년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그 사이 30년간 자바는 극심한 혼란에 시달렸다.
우선 대외적으로 인도네시아의 통치권을 가진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를 알 수 없었다. 친프랑스계 바타비아공화국, 영국에 망명 중이던 윌리엄 5세, 그리고 영국 정부는 제각기 인도네시아 통치권을 주장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었다. 실제로 이 기간은 이 세 국가가 임명한 총독들이 인도네시아 통치를 시기별로 분담하였다.
둘째로, VOC로부터 네덜란드령 동인도(Nederlands Oost-Indie)로 이행하는 과정은 극심한 제도적, 정책적 변화를 수반하였다. 특히 다엔덜스(Herman W. Daendels, 1808-1811)와 영국동인도회사의 부총독 라플즈(Thomas Stamford Raffles, 1811-1816)가 통치한 시기에는 거의 혁명적인 정책변화가 시도되었다.
셋째, 이 시기에는 마따람 왕국이 분열되어 생겨난 세 왕국 간에 지속되던 갈등과 반목이 급기야는 네덜란드 군대에 대한 반란으로 비화되어 식민통치기 전기간을 통하여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낳게 된다.
1808년 네덜란드를 지배하게 된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가 임명한 다엔덜스가 바타비아에 부임하였는데, 그는 혁명주의자답게 봉건 관료귀족들을 근대적 관료제로 편입시키는 행정개혁을 단행하였으며, 윌리암 5세의 위임에 의해 부임한 영국인 라플즈는 토지세를 부과하고 토지임대제도를 도입하여 세원을 마련하려 했고 18세기 중반 도입되었던 쁘리앙안지역을 제외하고 강제수매제도를 폐지하였다. 1816년 이후에도 라플즈의 자유경제정책은 지속되었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결국 1830년대에 이르러 강제경작라는 더욱 강력한 개입정책으로 발전하였다.
30년의 이행기의 역사는 디뽀너고로의 자바전쟁에 의해 압도된다. 족자카르타 왕국의 왕자였던 디뽀네고로는 1825년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의 횡포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왕족, 지방통치자, 농민, 이슬람교도들의 광범한 지지를 받고 무려 5년 동안 네덜란드 군대와 대규모 전쟁을 벌였다. 디뽀너고로는 이 전쟁에서 결국 패배하고 마까사르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이 전쟁의 피해는 엄청나 만 명 이상의 양측 군인들이 전사하고 2십만 명 이상의 양민들이 희생되었다.
명실상부한 식민통치는 1830년에 시작되었다. 판 던 보스(J. Count van den Bosch) 총독은 강제경작(Cultuurstelsel)이라고 불리는 억압적인 제도를 도입하였는데, 향후 40년간 지속된 이 제도의 효과와 충격은 심대하였다. 농민들로 하여금 토지세를 대신하여 5분의 1 경작지에다 식민정부가 요구하는 환금작물을 재배하거나 국가소유 플랜테이션에서 연간 66일간의 노동을 제공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 제도는 18세기 중반에 이미 도입되었던 강제수매제도를 강화한 것으로서 농민들로 하여금 커피, 설탕, 인디고 등을 강제로 경작케 하여 이를 거둬들여 유럽시장에다 내다 팔아 네덜란드 정부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이 제도는 특히 커피생산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는 등 기대를 훨씬 넘어서는 효과를 거두었는데, 강제경작제도를 통한 수익은 1850년대를 통하여 네덜란드 재정수입의 30% 이상을 차지하여, 본국의 부채를 갚고 도로와 운하를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제도의 부작용 또한 커서 그 충격은 자바 농촌사회를 질곡으로 몰아 넣었다.
강제경작제도는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여 인구증가를 촉발시켰다. 이 제도가 시행된 40년 동안 자바 인구는 2배 이상으로 급증하였다. 반면 환금작물로의 전환으로 쌀 경작지와 생산은 크게 줄었다. 인구증가와 식량생산감소는 자바 농민들을 1840년대에 이미 고질적인 식량부족과 기근에 시달리게 하였다. 같은 시기에 몇 차례 자연재해까지 겹쳐 흉작을 기록하는 불운까지 맞게 되자, 곳곳에 폭동과 반란이 일어나고 농민들은 도주하여 쌀 생산의 감소를 부채질하였다.
그 결과 기어츠(Clifford Geerz)가 말하는 “가난의 공유”(shared poverty)가 문화현상의 하나로 고착되었다. 강제경작제도의 참혹한 결과가 소설과 보고서의 형태로 네덜란드에 전해지면서 이 제도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고, 결국 품목과 지역에 따라 1864년부터 점차 완하되기 시작하여 1870년이 되면 커피와 설탕을 제외한 모든 품목에 대한 강제경작이 폐지되고 자유주의적 경제정책에 의해 대체된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급속한 발전은 1870년부터 시작된 자유정책(Liberal Policy) 시기에 이룩되었다. 자유정책은 1870년 새로운 토지법의 시행을 통해 개인과 민간기업에게 자바의 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민간부문의 경제활동이 급속히 늘어나 1885년이 되면 이들의 수출액이 정부 수출액의 2배를 넘어 선다. 농촌부문은 시장경제에 의해 깊숙이 침투 당한다. 식민지의 경제발전은 1869년 수에즈운하의 개통과 곧 이어 발명된 대형 증기선의 등장으로 한층 가속화되었다.
산업혁명을 더욱 촉진시킨 소위 교통혁명의 성공으로 동서간의 교역은 급속히 확대되었다. 서구 상품에 대한 시장의 필요성은 동남아에 진출한 식민주의자들의 영토확장 욕구를 증대시켰는데, 네덜란드인들에게도 역시 영향을 미쳤다. 식민정부는 자바섬과 말루꾸 그리고 외방도서의 일부 해안도시에 제한되어 있던 통치지역을 전 도서지역으로 그리고 그 내지로 확대해 간다.
그때까지 독립을 유지하고 있던 아쩨, 서부수마트라, 플로레스, 술라웨시, 롬복, 발리 지역의 크고 작은 국가들을 잇달아 점령하여, 1920년이 되면 현재 인도네시아를 구성하는 전 지역에서 네덜란드의 통치권은 확립되게 된다.
자유주의 시기의 급속한 경제발전은 광공업의 발달과 하부구조의 성장을 동반하였다. 1850년에 이미 발견되어 시작된 광산 개발은 1870년대가 되어 더욱 확대되어 보르네오와 수마트라에서 금광, 주석광산, 석탄광산 개발이 활발해져, 많은 중국인들을 유입시켰다. 1883년에는 첫 유전개발권이 왕립네덜란드회사에게 부여되어 수마트라, 자바, 보르네오에서 시추가 시작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생산이 증대되었다.
1873년 중부자바의 서마랑과 수라까르따간에 첫 철도가 개통되고 같은 해에 바타비아와 바위턴조르흐(현재의 보고르)를 잇는 노선도 개통되었다. 1875년에는 설탕 운반을 위해 수라바야-말랑 선이 개통되고, 아쩨에도 철도가 놓여졌다. 1890년부터 1900년 사이 철로 건설이 가장 활발하여 동인도 전역에 깔린 철도의 총 연장길이가 1,600km에서 3,500km로 늘어났다.
철도는 1913년에 4,540km, 1920년에는 5,016km로 늘어나게 된다. 일찍이 1856년에는 전보서비스, 1866년에는 우편서비스가 시작되었고, 1882년에는 첫 전화회사가 개국하였다. 증기선의 발명에 따라 1870년에 첫 증기선회사가 설립된 후 도서간 해운을 독점하였고, 1873년 바타비아를 위시하여 주요 항구의 항만시설이 증·개축되었다.
자유주의 정책의 최대 수혜자는 새롭게 이주해 온 네덜란드인 트레커들(trekkers)과 신객(新客) 중국인들이었다. 트레커들과 신객화인들은 기존의 정착민들(blijvers)이나 토생화인(土生華人)들과 달리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식민지 사회에 새로운 종족갈등의 불씨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기존의 유럽인-중국인-토착인으로 3분되는 복합사회(plural society)의 구조를 더욱 분화시켜 복잡한 종족, 계층구조를 만들어 내었다. 이 시기에는 토착인 사회 내부에도 어느 정도 계층화가 진행된 것으로 보여진다. 19세기의 식민통치의 심화가 기존의 세습귀족을 식민정부의 관료집단으로 변형시키는 것에 그쳤지만, 자유주의 시기를 지나면서 일부 도시 거주자들 사이에서 이슬람 상인집단이 출현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이들의 정체성과 민족의식은 20세기에 들어서 윤리정책이 등장하면서 한층 강화된다.
윤리정책(Ethical Policy)은 19세기 중반부터 네덜란드 지식인들 사이에 일기 시작했던 인도주의적 자유주의의 기운이, 강제경작제도로 인한 자바 농민들의 고통과 자유주의정책의 시행으로 야기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여러 경로를 통해 네덜란드사회에 고발되면서, 더욱 강화된 결과로서 나타났다. 윤리정책은 네덜란드 여왕이 1901년 자바의 복리 증진에 관한 새로운 정책을 공포하면서 등장하였다. 윤리정책은 토착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도서간 이주(transmigration)를 권장함으로써 자바섬의 빈곤을 완화하고, 관개사업의 확대를 통하여 식량부족현상을 해결한다는 것이 골자를 이루고 있었다. 이 중 특히 교육기회의 증대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자유주의 시기에 이미 소수의 직업학교와 교원양성소가 생겨나긴 했으나, 교육기관이 급속도로 증가한 것은 바로 이 윤리정책 시기였다. 1900년에는 공무원양성소, 의과전문대학 등 고등교육기관이 문을 열고, 1914년에는 네덜란드인, 중국인, 인도네시아인들의 공학인 초등학교가 생겨나 유럽식 교육의 기회가 인도네시아 상류층 자녀에게도 주어졌다. 같은 해 이들을 위해 중등학교가 생겨 났으며, 1919년과 1920년에는 고등학교와 대학교가 문을 열었다.
대중교육은 1907년 판 회츠(J. B. van Heutsz, 1904-1909) 총독이 초등학교 3년 과정의 자생적인 학교의 설립을 권장하고 얼마간의 재정보조를 하면서 생겨났다. 이 학교는 토착인들을 상대로 지방어로 교육했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최초의 대중교육기관이라 볼 수 있다. 그 수는 1930년에 이르면 10,000여 개에 육박했다. 1930년대 공황이 밀어닥치면서 윤리정책의 각종 프로그램은 중단되거나 축소되었지만, 교육기관의 수적 증가는 멈추지 않았다.
자유주의 시기의 경제발전은 이 시기에도 지속되었다. 특히 외방도서에서의 광물 및 농산물 생산 및 수출 증가는 눈부셨다. 1925년에 외방도서는 전체 수출의 55.3%를 차지하였다. 유전 개발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붐을 이루어 1920년대까지 모두 50개의 회사가 난립할 정도였다. 고무생산 또한 호황을 맞아 급속도로 성장하여 1930년에 이르면 전체 플랜테이션 면적에서 고무 플랜테이션이 44%를 차지하게 되었다. 외방도서의 플랜테이션에는 네덜란드 자본 외에도 다양한 유럽자본이 투자되었다. 그 결과 일부 주요 농산물은 과잉생산되어 수출품가격이 하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윤리정책 시기의 교육기회의 확대와 농업경제의 성장은 20세기 초반에도 지속된 인구증가에 압도되었다. 자바와 마두라의 토착인 인구는 1900년에 2,840만 명이던 것이 1930년에는 4,090만 명으로 늘어 났고, 외방도서에서는 1905년의 730만 명에서 1930년 1,820만 명으로 두 배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식량문제는 갈수록 심각한 고민거리가 되었다. 윤리정책으로 교육, 보건, 사회복지 등 예산이 크게 증액되었지만 급속한 인구증가 앞에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고, 그나마 대공황을 맞으면서 축소되거나 중단되었다. 교육의 확대는 경이로울 정도였으나, 이 역시 인구와 대비시켜 볼 때 보잘 것 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1930년 당시 통계를 보면, 총인구 대비 재학생 비율이 초등학교는 2.8%, 중등과정 및 직업학교는 0.14%에 불과했고, 대학교에 재학중인 학생은 고작 178명으로 인구 3백만 명 당 1명 꼴이었다.
5. 수탈론과 근대화론 논쟁에 붙여
서론에서 언급하였듯이 네덜란드의 식민통치가 인도네시아 근대화를 위한 토대를 쌓았다고 보는 주장은 근거가 약하다. 미미하나마 자유정책 시기에 도로, 철도, 항만, 통신망 등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한 점과 윤리정책 시기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인적 자원 개발에 일정 정도 기여한 사실을 그 근거로 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 인과관계를 밝힘에 있어 결과에 선행한 모든 사실을 그 요인으로 인정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관일 수 없다. 역사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평가기준을 필요로 하고 평가기준은 비교적 시각을 요구한다.
모든 식민지들은 서구 식민주의자들로부터 어떤 유산이든 넘겨받았다. 최소한 자신들의 경제적 착취에 필요한 하부구조를 식민지에 건설했던 것은 공통점이다. 아프리카의 프랑스령 식민지나 포르투갈령 식민지 중에서 교육의 기회를 식민주의자들로 제공받지 못한 곳도 있지만, 인도네시아인들이 향유한 식민지 교육의 혜택도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더 정당한 비교는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해 보아야 한다.
동남아 국가들이 2차대전 후 신생국으로 독립을 쟁취했을 당시, 인도네시아는 가장 저발전된 국가의 하나였다. 식민지 경험이 전혀 없는 태국은 인도네시아가 필적할 수 없는 수준의 발전의 기반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독립 당시 동남아에서 경제가 가장 발전된 국가였고 민주주의를 구가하고 있었다. 비슷한 종족적 배경을 가진 말레이시아도 인도네시아보다 앞서 있었다. 도서부 동남아 국가들 중 인도네시아는 도로, 철도, 항만, 통신망, 교육수준 모든 면에서 뒤져 있었다. 특히 인도네시아가 이들 국가 중 가장 자원이 풍부한 나라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인도네시아가 가장 뒤떨어진 것은 네덜란드 식민주의에 그 책임이 어느 정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네덜란드의 식민통치가 인도네시아의 발전을 저해하였거나, 상대적으로 발전에 기여한 바가 적다는 사실은 식민체제의 성격과 정책에서 확인된다. 17세기 초반부터 200년간 인도네시아의 상품경제를 장악한 동인도회사는 말 그대로 회사였다. 회사는 주주와 종업원을 위해 이윤의 극대화를 도모한다. 동인도회사의 이윤은 식민지에서 실현되었고, 이윤은 생산지인 인도네시아에서 가격을 최소한으로 낮춤으로써 극대화될 수 있었다. 실제로 동인도회사는 독점무역을 통해 가격을 통제했다. 그런데도 동인도회사는 과다한 전쟁비용과 직원들의 부패로 파산하였다.
이어 등장한 네덜란드령 동인도 식민정부는 인도네시아인들에게 환금작물을 심게 하고 이를 서구 시장에 팔아 수익을 실현하고자 했다. 1830년부터 1870년까지 이 전략은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여기서 마련한 자금은 본국이 빚을 갚고, 자국민의 세금을 낮추고, 자국의 도로와 운하를 건설하는 데 사용했다. 식민지를 위해 투자한 것은 수출 농작물 수송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도로를 닦은 게 고작이었다.
1870년부터 1900년까지 지속된 자유정책은 인도네시아에서의 상업활동을 크게 촉진하였지만, 이는 산업혁명과 교통혁명의 부수적 결과였으며 식민정부는 네덜란드는 새로운 상품시장을 찾기 위해 외방도서의 토착 국가들과 전쟁에 골몰했다. 또한 그 정책의 수혜자는 네덜란드의 제조업자, 무역상, 동인도에 정착한 자유시민들과 중국인들이었지 인도네시아인들이 아니었다.
네덜란드의 식민주의가 인도네시아에 대해 수탈을 그 유일한 목표로 하고 있었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설사 식민정책의 부수적 결과로서 어느 정도 근대화의 기초가 마련되었다할지라도 네덜란드인들이 통치한 350년 동안 인도네시아인들과 벌인 전쟁에서 빼앗아 간 셀 수 없는 수의 인명들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기여라고 볼 수 있다. 네덜란드 식민통치의 근대화 기여론은 어불성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