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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의 근원(契字의 根源)
사람은 부모가 있어 태어 났고
나무는 뿌리가 있어 꽃이 피고
발음도 이유가 있어 말을 하고
글자도 유래가 있어 생겨 났다.
우리 말의 어원이 '산스크리트어'라는 것은 훈민정음과 동국정운에서 알 수 있다.
또 우리 말의 뿌리인 지방 사투리나 발음을 따라가면
한문(漢文)이 바로 한문(韓文)이고 한글(韓契)이다.
중국의 한문이 곧 우리 민족인 동이족이 만들었음을 알게 된다.
[단 동이족은 단일민족이 아님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금문(金文)을 통해본 고대의 사회, 역사.
1) 갑골문보다 오래된 금문
갑골문은 고대의 점사(占辭)를 적어넣은 기록이다.
갑골문은 이처럼 거북껍질에 새기어진 글자이다.
2) 낙빈기(駱賓基)의 금문신고
“금문신고”는 중국인 문자학자 낙빈기(駱賓基: 1917-1994)가
1988년 중국에서 출간된 책으로 중국의 학계가 신화, 전설이라고 단정한
4500년 전 삼황오제시대인 bc 2517년부터 ~ 2298년까지 220년간을
고대 청동기의 금문(金文)을 철저한 “문자인류학적 해석”을 통해
확실한 역사시대라고 논증한 논문이다.
😊 이 금문신고는 크게 4개의 부분으로 나어어져 있다.
가) 전적집(典籍集): 중국의 고대에서 현대까지 역사서를 통해
삼황오제 시대가 실제 시대라고 논증.
나) 화폐집(貨幣集): 이 시대가 청동으로 만들어진 화폐가
실제 시장에서 유통되었음을 논증.
다) 병명집(兵銘集): 무기, 농기구, 제기 등 청동기에 새겨진
글자로 사용된 기물(器物)을 통해 사회상을 조명.
라) 인물집(人物集): 신화나 상서(尙書)의 간접자료가 아니고,
청동기에 새겨진 직접자료를 통해 신농, 황제, 전욱 고양, 제곡고신,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의 실제 사적(事績)을 규명.
3) 한국에 전래 경위와 한국 재야 학계에서 주목(注目)
중국 당국에 의해 800권의 출간 허락을 받고, 중국 학자들의 냉담한 반응에서
4- 5 권이 서울에 들어와 소남자 김재섭, 청암 김대성 등의 재야학계에서 주목한다.
한국 재야학계가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이 낙빈기의 저술을 숨긴채,
주요 일간지에 “하(夏)왕조 개국은 서기전 2070년”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대서 특필되고
5년간 200여명의 학자를 동원해 지금까지 서기전 1600년에 개국한 은상(殷商)이 중국 건국의 시초라고 단정한 중국 학계가
하(夏) 나라의 건국을 서기전 2070년 이라고 공식 선언을 하였기 때문이다.
학술을 정치적 이해하면 안되는 관점,
또 중국이 낙빈기가 밝힌 자료를 근거로,
당시 고조선이라 칭해진 우리나라에 패권주의적 사관(史觀)을
사실화 하려는 경향에 대해 우려가 근간이었다.
4) 낙빈기가 해명한 실제 역사
① 최초의 군주 신농이 bc 2517년부터 43년간 제위에 있다가
② 서기전 2474년 소호김천(少昊金天)씨에게 물려 주고,
또 소호김천은 7년간의 짧은 재위를 마치고
③ 전욱고양(顓頊高陽)에게 재위를 넘긴다.
전욱고양은 47년간의 재위를 마치고
④ 서기전 2420년에 사위인 제곡고신(帝?高辛)에게 넘기고
55년간 통치하던 고신씨는
⑤ 자기 아들인 지(摯)에게 서기전 2365년에 재위를 넘긴다.
⑥ 요임금(요(堯): 서기전 2357-2321)
⑦ 순임금 (순(舜):서기전 2320-2312)
⑧ 우임금(우(禹) 서기전 2357-2321)
⑨ 그리고 삼황오제 시대 마지막 임금인 백익(伯益)이 6년 만에 우임금의 아들인
계(啓)에게 도륙을 당하고 계가 아버지인 우임금을 시조로 세운 나라가 하나라이며,
하의 건국은 서기전 2297년이라고 이미 못박아 놓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확한 연대 또한 청동기에 새겨진 글자에서 하나하나 찾아내
중국의 고대사를 완벽하게 재구성해 놓았다.
문제는 삼황오제시대의 주역이 바로 동이(東夷)족이라는 점이
특히 우리들의 주목을 끄는 점이 아닐수 없다.
순(舜)임금의 첫 번째 이름 호(護), 이는 한(韓)이란 글자의 시원(始原)이 된다.
그리고 공자를 비롯한 유생(儒生)들에 의해 이상적인 정치를 펼친 것으로 되어있는
요순(堯舜)시대는 칼로써 정권을 뺏고 뺏기는 전제군주 정치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 명백히 금문(金文)으로써 밝혀지고 있다.
이같은 역사 왜곡은 서구인들에게 정확한 동양고대사의 입문서로 유명한 사마천(司馬遷: 서기전 145-86?)이 쓴 “사기(史記)”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
5) 신화적 종교적 권위에서 벗어나,
인류학(人類學)적 분석이 가능해지게 된 “고대 아시아사”
낙빈기로 시작된 “오제(五帝)- 금문(金文)” 은
유학(儒學)이라는 종교적 권위 혹은 정형화(定型化)된 신화(神話)라는 권위 아래
당연시 여겨온 고대 아시아의 역사 및 사회상에 내재된 패러다임(paradyme)을
전혀 다른 인류학적 시각으로 재조명하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중요하다.
😊 그 일례(一例)를 몆가지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문자의 시작은 지금 중국 산동성 곡부에서 나라를 열고,
그 문자를 만든 신농(神農 : 재위 서기전 2517-2475)의 이름 글자인
[ㅡ] [○] [ㅣ] 로부터 시작되고 있고,
한자가 단순한 상형(象形)문자로 발달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제자(制字) 원리에 의해서, 만들어졌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또 이 시대 주역들의 이름과 관직의 명칭, 통치하는 봉읍(封邑)등이
이런 제자(制字) 원리에 의한다.
실제 그러한 이름과 관직 등이 어떤 사회적 기능과 의미가 있었는지를
인류학적 관점에서 다양하게 음미할수 있는 시각을 던져 주고 있다.
이런 사실은 한자(漢字)의 품위를 높이는 쾌거였다.
왜냐하면, 이집트의 신성(神聖)문자,
또 마야의 문자도 단순한 상형(象形)이 아니라,
고도로 체계화된 제자(制字)원리를 포함하고 있음이 밝혀져,
지금까지 한자(漢字) 만이 상형(象形) 문자로 낙후(落後)된 문자라는
오명(汚名)을 씻게 한 큰 공로가 있다.
「오제 금문」에 보이는 손 수(手)의 방향 :
이는 한자(漢字)가 독특한 제자(制字)원리가 있고, 낙빈기는 이를 해명하였다.
② 이 시대는 푸나루아(punalua)라는 모계제(母系制) 시대였음이 밝혀졌다.
두 사람의 남편과 두 사람의 부인이 한 가정을 이루는 시대로
재위는 사위에게 넘겨주던 때였다.
즉 아들이라고 알려진 자(子)는 “사위”라는 뜻이며,
우리가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에 남(男)으로 불리워졌다는 것이다.
또, 서양의 “트로이 전쟁”에 비견할 수 있는
“탁록대전”의 발단인 신농(神農)과 황제(黃帝)의 전쟁도 기실,
서로 누비 결혼을 이루는 당시 중국의 양대세력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었음이 들어난다.
즉 결혼은 양대세력인 신농과 황제계열이 서로 누비 사돈이 되었고,
재위는 신농계와 황제계가 서로 바톤을 주고 받던 때였음이 들어난다.
이런 사실이 중요한 것은 역사의 시작을 철저하게 이(夷)와 하(夏)로 분리한
시각 자체가 후대 사가들에 의해서 조작임이 들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夷)와 하(夏)의 개념 규정 자체도, 하(夏)가 중국 정통이고,
이(夷)가 주변 세력이라는 동양 고대사의 고정관념도 잘못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③ 우리가 쓰고 있는 한자(漢字) = 한자(韓字)의 근원은 신농계의 언어인
“우리의 말(한국어)로써만 그때의 글자를 풀 수 있는 열쇠다.”
중국 고대 언어연구의 방법론이 도출된다는 점이다.
즉 문법(文法)은 중국어와 한국어가 다르지만,
그 발음(發蔭)과 개념(槪念)은 한국어에서 많이 투영되어 있고,
이는 그 시대에 한국인이 오제(五帝) 시대의 중국에 실제 핵심세력으로써
동거했음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됨을 여실히 들어내고 있다.
④ 이미 한자(漢字)가 단순한 상형(象形)에서 발달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제자(制字) 원리에 의해서 구성되어진 문자다.
우리가 막연히 쓰는 조선(朝鮮)이란 용어가 전욱고양(顓頊高陽)이란 임금의 이름에서,
어떤 개념이 투영되었지,
또 한(韓)이란 이름이 바로 순(舜) 임금의 이름, 위(韋)에서 나왔음이 밝혀져,
이런 제자(制字) 원리에 함축되어 있는 개념으로부터,
고대의 조선(朝鮮) 및 한(韓)의 사회상(社會相)을 음미할수 있는 길이 열렸다.
다시말하면, 지금까지 고조선 및 한(韓)의 문제에서 최대의 인류학적 문제는
오늘날의 국가의 개념을 원시시대로 퇴화(退化)시켜 한반도 내에 국한시키는
오류(誤謬)를 범한 것이다.
주권, 영역, 국민이 국가의 삼요소인데,
과연 상고시대에도 국가의 영역이 상호 배타적이었는가?
중국 안에 조선이 있을 수 있고, 또 조선 안에 중국이 있을 수 없는가? 하는
국가의 기본개념을 검토하지 않은 채,
영토분쟁(領土紛爭)을 고대사에 투영해 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온 것이 사실인데,
이런 명칭이 주어지는 과정(process)를 통해, 재음미할 계기가 주어졌던 것이다.
좌(左)의 첫글자는 해돋을 간, 솟대 사이 해(일(日) 3개로 삼신을 표시하고 있고,
진시황 이후 문자통일 이후 등장한 우(右) 두글자는 유난히 배(선(船))를 강조하고 있다.
중국이란 영토 속의 조선의 개념을 음미케 하는 중요한 문화-코드이다.
⑤ 또 신주(神主)라는 글자, 제사의 제(祭)와 사(祀)가 어떻게 만들어진 글자미며,
입만 벙긋하면 들먹이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예(禮)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축하(祝賀)의 축(祝)이 내포한 의미, 차(茶)란 글자의 내력 등 수많은 글자의
생성과정을 밝혀주고 있다.
⑥ 중국인들이 멸시해 부르는 오랑캐 이(夷)가
한족(漢族)의 시조인 우(禹)임금의 이름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 글자가 바로 신농계에서 발음하고 있는 사람 인(人),
임금이라는 임(任)이 변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⑦ 이처럼, 오제금문은 문자(文字)- 인류학(人類學)의 보고
인류학이 당연히 여기는 차원 -
기존의 인식체계를 윤리적 차원에서 선입관점을 가지고 조사하는 “에틱(etic)” 적 차원을 철저하게 배제하게 할 수 있게 한 중요한 학적 콘텐츠(contents)의 보고(寶庫)인 것이다.
즉 지금까지는 “고대 중국이 이렇다.”는 고정관념을 완전히 버리고,
오히려 한국인이 중국 문자의 개념과 발음에 영향을 많이 주었다는 객관적 사실로부터,
이미 퇴행(退行)되어 그 원형을 잘 알수 없는 “솟대”며, 세발달린 “삼족오(三足烏)”,
여자들이 시집갈 때 이마와 뺨에 찍는 “연지 곤지”
베일 속에 가려져 있는 “난생(卵生) 설화”의 비밀 등,
저 고대로부터 냉동(冷凍)되어 있는
“오제(五帝) 금문(金文)” 으로부터 신선하게 재음미할수 있는 것이다.
오제금문(五帝金文)이 중요한 것은
기존의 인식체계의 대전환을 할수 있는 합리적인 근거를 제공해주기 때문인 것이다.
이룰 성(成) 글짜에 솟대와 깃발이 있다.
이는 고대 동북아인에게 “이룬다”는 개념에 솟대와 깃발이 함축되어 있음을 뜻한다
축(祝)자는 제상(祭床) 앞에서 축을 읽는 제주(祭主)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6) 문명(文明)의 원형(原型)은 미래(未來)- 기억(記憶)
오제금문(五帝金文)은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시대를, 근본적으로 다시 보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고대사(古代史)는 하나의 문명의 원형(原型)을 품고 있고,
이는 단순히 지나간 과거사(過去事)가 아니라, 미래를 꿈꾸는 패러다임으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미래-기억(記憶)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오제금문(五帝金文)의 의의(意義)는
“미래(未來)의 기억(記憶)”에 대한 혁명(革命)이라고 할수 있다.
역사(歷史)에 발전법칙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미래의 비젼(vision) 의 토대는 분명
과거를 성찰(省察)하는 시각에서 연원(淵源)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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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