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동을 피하기 위해, 역사상의 촉한은 대다수 ‘촉한’이라 기술하였으며, 모전상의 촉은 ‘촉국’이라 기술하였음을 말씀드립니다.
0. 서언(序言)
촉한 연희 4년(241), 당대 촉한 최고 집정자였던 장완은 매우 획기적인 기책(奇策)을 마련하여 실행에 옮기려 한다.
[장완은 과거 제갈양이 진천(秦川)을 자주 엿보았으므로, 길이 험난하고 운반하기 어려워 결국에는 성공할 수 없으므로 물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곧 많은 배를 만들어 한수와 면수로부터 위흥(魏興)과 상용(上庸)을 습격하려고 했다. <정사 촉서 장완전 中>]
바로 한수를 탄 상용 일대 습격 작전으로, 출기불의(出期不意)하고도 공기무비(攻期無備)의 계책, 당시로서는 매우 놀랍고도 황당한 계책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서 그 반발이 매우 대단했다.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승리하지 못하면 돌아가는 길이 매우 험난하므로 훌륭한 계책이 못된다고 했다. <정사 촉서 장완전 中>]
그러나... 장완의 상용 일대 기습 작전은 당대의 논자들의 주장을 바탕으로 간단히 거부할 만한 계책은 아니었다. 제갈량 사후 그 때까지 거의 북벌을 감행하지 못한 촉한으로서는, 그 동안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한 번쯤 시도해 볼 만한 계책이었다. 더군다나, 중론은 그렇다 치더라도, 당시로서는 촉한은 그렇게 익주 하나만으로 만족하고 웅크리고 있을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어디론가 활로를 찾아 개척하여 물자와 인재를 확보하여야 국력이 유지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상용을 기습 공격하여, 무관을 통한 남양 습격까지 노렸던 장완의 계책은 전무후무한 당대 제일의 계책이었다고 평가받기까지 한다. 게다가 당시 오군과의 연계까지 가능했던 장완의 계책은 더욱이 병법에도 합치되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제 못 다한 이야기를 꺼내보자. 이번 글에서는 촉국에서 주장하는 여론의 반대에 대한 언급과 아울러 병법을 통해 살펴본 장완의 계책과 동오에서 내세운 계책까지 두루 살펴보기로 한다.
1. 여론의 반대? - 여론이라고 다 같은 여론이 아님
장완이 제안한 계책에 대하여, 반대하는 논자들은 대개 그 당시의 여론을 근거로 두고 있다.
[장완은 과거 제갈양이 진천(秦川)을 자주 엿보았으므로, 길이 험난하고 운반하기 어려워 결국에는 성공할 수 없으므로 물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곧 많은 배를 만들어 한수와 면수로부터 위흥(魏興)과 상용(上庸)을 습격하려고 했다. 마침 장완은 지병이 연속적으로 발작하여 제때에 행동하지 못했다. 그리고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승리하지 못하면 돌아가는 길이 매우 험난하므로 훌륭한 계책이 못된다고 했다. <정사 촉서 장완전 中>]
[촉한의 사람들은 모두 장완의 계책이 성공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회군하기도 쉽지 않아 양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치통감 정시 2년(241)조 기사 중(中)>]
물론 당시 국가 내부의 여론이 전적으로 반대하는 바였다면 그 또한 감안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일단 여론 자체가 전략을 거부한다면 군대를 동원하는 일도 반대에 부딪치고, 전략은 자연 성립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여론에도 나름대로 정당한 이유가 있었을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전략, 전술 면에 있어서 여론이 ‘촉국’에서 언급한 만큼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있는지, 필자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여론을 무시하고 원정에 나섰다가 패망한 사례도 적지 않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여론을 지지할 수만은 없다. 여론을 엎고 성공한 전술 사례 또한 적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지 정사 위서의 부분적인 기록만으로도 여론의 우위를 충분히 의심해볼 수 있다.
[조조는 직접 동쪽으로 가서 유비를 정벌하려고 했다. 부장들은 모두 이 일을 막으며 말했다.
“공과 천하를 다투는 자는 원소입니다. 지금 원소가 쳐들어오려 하고 공께서는 이를 내버려두고 동쪽으로 향하려 하시는데, 만일 원소가 뒤에서 우리들의 퇴로를 차단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조가 말했다.
“유비는 사람이 호걸이오. 지금 공격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뒷날 근심이 될 것이오. 원소는 큰 뜻이 있지만 형세 판단과 그에 대한 대응이 느리므로 틀림없이 군대를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곽가도 조조의 생각을 지지했다. 그래서 조조는 동쪽으로 가서 유비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그의 부장 하후박(夏侯博)을 사로잡았다. 유비는 원소에게로 도망갔고, 조조는 그의 처자를 포로로 잡았다. 유비의 부장 관우가 하비에 주둔해 있었는데, 조조가 다시 그를 공격하니 관우는 투항했다. <정사 위서 무제기 중(中)>]
만일 이 때 조조가 여론을 중시하고 유비를 정벌하지 않았다면, 당시 서주의 민심을 정악하고 있었던 유비가 더욱 세력을 키워 조조의 후방을 위협하는 세력이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조조 개인의 시의 적절한 판단으로 조기에 유비를 제압함으로써 원소를 더욱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여론보다 몇몇 소수의 합리적이고 적절한 판단이 더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사례는 무제기에서만도 결코 적지 않다. 게다가 다른 기록도 한 번 살펴보자.
[건안19년에 조구.윤봉 등이 마초 토벌을 계획하고 강서가 노성에서 병사를 일으켜 이에 호응했다. 조구 등은 마초를 속여서 성을 나와 강서를 공격하도록 하고는 뒤에서 마초의 처자를 모두 죽였다. 마초는 한중의 장로에게로 도망갔다가 그곳에서 병사들을 토벌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기산을 포위했다. 강서 등은 하후연에게 급히 구원을 요청하였고, 여러 장수들 중 의견을 말하는 자들은 모두 반드시 조조가 와서 법도에 따라 처리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하후연이 말했다.
"조공은 업성에 있으니, 우리들이 사람을 보내서 오고 가는데 4천여 리나 되오. 이 일을 위공에게 보고를 하게 되면 강서 등은 반드시 패할 것이니, 이것은 위급함을 구하는 좋은 계책이 아닐 것이오."
하후연은 곧장 원군을 출발시키기로 결정하고, 장합에게 보병과 기병 5천명을 이끌고 선봉에 서게 하여 진창의 좁은 길을 통해 진군하였으며, 자신은 병사의 군량을 감독해 위에서 진군하였다.
장합이 위수 가에 이르자, 마초는 저족. 강족 병사 수천을 이끌고 장합을 맞아 싸우러 왔다.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마초가 달아나니, 장합이 진군하여 마초군의 무기를 거둬들였다. 하후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여러 현이 항복하였다. 그때 한수는 현친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하후연이 습격하여 빼앗으려고 하자 달아났다. <정사 위서 하후연전 중(中)>]
이 때 만일 하후연이 여론을 들어 4천 여리나 떨어진 조조와 상의하고자 했다면, 농서 일대는 다시는 위나라 땅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전에 조예는 대신들과 상의하여 사마선왕을 파견해 공손연을 토벌하게 하고 병사 4만 명을 내주려고 했는데, 의론에 참여한 대신들은 모두 4만 명을 보내는 것은 너무 많으며 싸움에 소용되는 비용을 제공해주기가 어렵다고 주장하자, 조예가 말했다.
ꡒ4천 리 멀리 적군을 토벌하러 가는데, 비록 뛰어난 계책을 사용한다고 말하지만, 그 역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해야 마땅하니 전쟁 비용을 계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ꡓ
그리고는 4만 명을 출정시켰다. 사마선왕이 요동에 도착할 무렵, 폭우가 계속 쏟아져 즉시 공격할 수 없었으므로, 대신 가운데에는 사마선왕이 공손연을 빨리 격파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명령을 내려 사마선왕을 귀환시키도록 하자는 자가 있었으나, 조예는 말했다.
ꡒ사마선왕은 위기를 만나면 변화에 대응하여 대처할 수 있는 인물이니, 공손연을 사로잡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ꡓ<정사 위서 명제기 중(中)>]
만일 이 당시 명제가 여론을 중시하여 사마의에게 충분한 군마와 물자를 지급하지 않았다면, 공손연을 조기에 격파할 수 있었을까?
[예주자사 곽공이 병사 수만 명을 이끌고 성 아래에 도착하자, 그들도 여포와 공모하였다고 말하는 자가 있자 성안의 사람들은 매우 두려워하였다. 곽공은 순욱을 만나기를 원했고, 순욱은 나가서 만나려 했다. 이 때 하후돈 등이 말했다.
"당신은 주 전체의 우두머리이므로, 나가는 것은 틀림없이 위험합니다. 나가서는 안 됩니다."
순욱이 말했다.
"곽공과 장막 등은 본래부터 결탁한 것이 아니오. 지금 이렇게 빨리 왔다는 것은 그들의 계획도 틀림없이 확정되지 않은 것이오. 그들이 아직 정하지 않았을 때 그들을 설득하면 마침내 도모하지 않게 할 수 있으며, 그들로 하여금 중립을 지킬 수 있도록 할 수 있소. 만약에 먼저 그들을 의심하면 그들은 장차 화를 내며 계획을 성사시키려고 할 것이오."
곽공은 순욱이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고, 견성이 또 쉽게 공략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판단하고는 드디어 군대를 이끌고 떠났다. <정사 위서 순욱전 중(中)>]
이 때 순욱이 여러 사람의 만류를 들어 곽공을 설득하지 않았다면, 당시 여포에게 연주를 빼앗긴 조조의 세력이 결딴날 수도 있었다.
[이듬해(203)에 조조는 마침 유표를 토벌했고, 원담과 원상은 기주를 차지하려고 다투었다. 원담은 신비를 사자로 보내 항복을 구걸하며 구원을 요청하였으므로, 조조는 그것을 허락하려고 하면서 모든 신하들에게 물었다. 신하들은 대부분 유표가 강하므로 먼저 평정해야지, 원담과 원상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순유가 말했다.
ꡒ천하가 바야흐로 혼란하여 일이 생기려는데, 유표는 장강과 한수 일대를 앉아서 지키고 있으니, 그가 사방을 정복할 야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씨 일가는 네 주(기주, 청주, 유주, 병주)의 땅을 근거지로 하여 무장한 병사 10만 명을 거느리고 있으며, 원소는 관대하고 후하여 많은 사람을 얻었는데, 만일 두 아들이 화목하게 그 아버지가 이룩한 대업을 지키려 한다면 천하의 환란을 가라앉을 것입니다. 지금은 형제끼리 증오하고 있으니, 이는 들들의 세력이 둘 다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그 중의 하나가 합병되면 그들의 힘은 전일하게 되고, 힘이 전일하면 평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혼란을 틈타 공격하여 취하면 천하는 평정될 것입니다. 이 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ꡓ
조조가 말했다.
ꡒ좋소.ꡓ
조조는 원담과의 화친을 허락하고, 마침내 군대를 돌려서 원상을 격파했다. 이후에 원담이 다시 모반하자, 순유는 대군을 따라가 남피에서 원담을 참수했다. <정사 위서 순유전 중(中)>]
만일 이 때 조조가 순유의 제안을 가납하지 않고 좌중의 의견을 들었다면 하북을 평정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광현 사람 관승(管承)이 3천여 명의 대중을 모아 난폭하게 해를 미쳤다. 논의하는 사람들은 병사를 일으켜 그를 공격하려고 했는데, 하기가 말했다.
“관승 등은 태어나면서부터 혼란을 좋아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들은 혼란에 익숙해져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덕적인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선(善)으로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지금 병사들을 이용하여 그들을 핍박한다면, 그들은 전멸을 두려워하여 반드시 힘을 합쳐 싸울 것입니다. 그들을 공격하여 뿌리를 뽑는 것도 쉽지 않고, 비록 승리한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관리와 백성들이 다치게 될 것입니다. 서서히 은덕으로 깨우쳐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후회하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렇게 하면 병력을 움직이지 않고도 평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군의 승으로 있는 황진(黃珍)을 파견하여 그들에게 일이 성공하고 패했을 때의 득실을 설명하게 했는데, 관승 등은 모두 투항을 요청했다. <정사 위서 하기전 중(中)>]
이 때 하기의 말을 듣지 않고 여론대로 관승을 공격했다면, 유혈전투가 벌어지고 피해는 매우 막심했을 것이다.
[ 관우가 조인(曹仁)을 번성에서 포위하자, 손권은 사자를 파견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저는 군대를 서쪽 위로 보내어 몰래 관우를 습격하려고 합니다. 강릉(江陵)과 공안(公安)의 요충지는 겹겹이 이어져 있으므로, 관우는 두 성을 잃게 되면 반드시 멀리 달아나게 될 것이고, 번성의 귀군(貴軍)의 포위는 구원하지 않아도 스스로 해결될 것입니다. 이 일은 비밀을 구하니 장군께서는 누설하여 관우가 방비를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조조가 이 말을 듣고 모든 신하들에게 물어보니, 신하들은 한결같이 그것을 비밀에 부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그러나 동소는 말했다.
“군사(軍事)는 임기응변을 숭상하므로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합리적이고 마땅함을 기약해야 합니다. 마땅히 손권에게는 비밀로써 호응하면서 속으로는 그것을 누설해야 합니다. 관우가 손권이 서쪽으로 온다는 것을 듣고 군사를 돌려 스스로를 보호하게 된다면, 번성의 포위는 속히 제거될 것이므로, 우리 군은 곧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오나라와 촉나라 두 적이 서로 대치하게 하여 앉아서 피폐함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만일 비밀로 하고 누설하지 않으면 손권으로 하여금 뜻을 얻게 하는 것이 되니, 계책 중에서 상책(上策)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포위망 속에 있는 장수와 관리들은 구원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매일 같이 곡식의 양을 계산하면서 두려워할 것이며, 만일 다른 뜻을 품기라도 하면, 위험스럽게 되는 것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일은 누설하는 것이 이롭습니다. 게다가 관우는 사람됨이 비교적 정직하여, 스스로 두 성을 믿고 굳게 지킬 것이며, 재빨리 퇴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조가 말했다.
“좋소.”
즉시 칙령을 내려 번성을 구할 장수 서황(徐皇)에게 손권의 서신을 포위된 번성과 관우가 주둔해 있는 가운데로 쏘게 하였다. 포위된 조군(曹軍)은 이 소식을 듣고는 사기가 백배가 되었다. 관우는 과연 마음속으로 주저주저하면서 퇴각하지 않았다. <정사 위서 동소전 중(中)>]
조조가 이 당시 여론을 듣지 않고 동소의 의견을 들음으로써 비로소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손권이 관우를 주살한 후에 문제는 조칙을 내려 모든 신하들에게 물어 유비가 관우를 위하여 오나라에 보복하려는지 않으려는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모두들 논의함에 있어서 한결같이 말했다.
“촉나라는 작은 나라일 뿐이며, 뛰어난 장수로는 오직 관우만 있었습니다. 관우가 죽고 군대는 무너졌으며, 나라 안은 근심하고 두려워하는데, 다시 출동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유엽만은 혼자 이렇게 말했다.
“촉나라가 비록 국토가 좁고 세력도 약하지만, 유비는 권모로는 위엄과 무략으로써 스스로를 강하게 하고 있으며, 세력은 반드시 병력을 이용하여 그들에게 넉넉한 것이 있음을 보여주려고 할 것입니다. 또한 관우와 유비는 도의상으로는 군신(君臣) 관계지만, 은혜는 마치 부자(父子)의 관계입니다. 관우가 죽었는데 군사를 일으켜 적에게 복수하지 않는다면 두 사람 사이의 평생의 정분(情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유비는 과연 군대를 일으켜 오나라를 공격했다. <정사 위서 유엽전 중(中)>]
이 당시도 논의하는 모든 사람들보다 유엽의 혜안이 더욱 돋보인다.
[조인은 장수들을 모아서 상의했는데, 모두 이렇게 말했다.
“지금 관우는 위기에 처해 있으니, 쫓아가면 반드시 체포할 수 있습니다.”
조엄이 말했다.
“손권은 관우의 연이은 싸움의 어려움을 틈타서 그 배후를 습격하려고 했지만, 관우가 구원병을 이끌고 돌아올 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 군대가 양쪽 군대가 피로해진 틈을 타서 공격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순종하는 말로 봉공(奉公)을 원하고 나와서는 틈을 타고 변화를 이용하여 우리 군사력을 관찰하려고 할 뿐입니다. 지금 관우는 이미 고립되어 달아났지만, 또 그가 손권의 심복이 될 걱정거리는 여전히 있습니다. 만일 패하여 달아난 자를 깊숙이 추격한다면, 손권은 관우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우리에게 재앙을 일으킬 것입니다. 왕께서는 반드시 이 점을 깊이 헤아리셔야만 합니다.”
조인은 그래서 전투태세를 풀었다. 조조는 관우가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수들이 추격할 것을 걱정하여 과연 긴급히 조인에게 칙령을 보냈다. 그것은 조엄의 계책과 같았다. <정사 위서 조엄전 중(中)>]
이 때 조인이 조엄의 말을 듣지 않고 좌중의 말을 들었다면 매우 피해가 컸을 것이고, 왕명을 거역하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여론보다 한 사람의 계책이 당시 전황을 유리하게 이끈 사례는 삼국시대만으로도 무려 몇 십 페이지나 되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지금 필자도 사실 엄청나게 많은 사료들을 나열했다가 핵심논지를 벗어날까 저어하여 그나마 줄인 것이 상기의 기록이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저서 디스코시스(Discourses) 에서 (..중략) 현자는 결코 여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근대적 의미에서 여론(public opinion)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한국언론재단/선거와 여론 조사 보도]
물론 상기와 같이 여론은 결코 무시할 것이 못된다. 하지만 이는 통치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민중의 의견을 취합하여야 도의 있는 군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 언제, 어느 때나 여론의 말을 중시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여행을 산으로 가고자 하는데, 두 갈래의 길이 나오게 되어 다수결로 어느 길로 갈지를 정했더니 그 길로 가자 산이 아닌 바다로 갔더라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그리스 민주정을 통치문제마저도 투표제로 해결하려고 한 결과 통치자의 현우(賢愚)를 도외시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실례가 바로 ‘소크라테스의 독배’였다. 플라톤이 <공화국>에서 투표제에 의한 대현(大賢)의 독살을 질타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민주정을 ‘중우정(衆愚政)’으로 규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중략) 현자(賢者) 한 사람의 생각이 우부(愚夫) 만 명의 생각보다 낫다. <삼국지 통치학 중(中)>]
특히 전략, 전술을 논함에 있어서, 한 사람의 뛰어난 참모의 말을 듣는 것이 좌중의 경험이 부족한 수많은 장수들의 생각을 듣는 것보다 효험이 있는 것이다.
2. 여론 수렴을 무시하고 기습 작전을 감행해야 하는 이유 - 당시 촉한의 상황은 웅크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촉한의 사람들이 제시한 반론의 주장은 어찌 보면 합당한 주장으로 보인다. ‘계책이 성공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회군하기도 쉽지 않아...’ 하지만 만일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제갈량의 북벌 또한 의미 없는 전쟁이었고, 촉한은 구석진 익주에서 웅크려 지내는 것이 더 합당하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이것은 전형적인 촉인들의 성향이었다.
[같은 양자강 유역이지만 상류에서 촉나라가 건국된 사정은 하류의 오나라와는 약간 경우가 다르다. 촉나라는 한 왕실의 일족이란 일컬어지는 유비가 중원에서 조조와 패권을 다투다 패한 뒤 부하를 이끌고 떠돌다가 촉 지역을 점령하여 수립했기 때문에 말하자면 유랑정권이다. 유비는 어디까지나 유씨에 의한 중국통일을 염원하고 스스로 중국 정통의 주권자로서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계속 주장하였다. 그가 촉이라는 지방 정권으로 얽매여 있었던 것은 결코 그의 본의가 아니며 조조가 지배하는 중원에서도 자기에게 편드는 동조자가 당연히 있을 것이라 예상하였다. 따라서 통일은 곧 한나라이며, 한이 곧 통일이라는 정식을 다시 실현시키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다만 현실적으로 이 지방 정권 역시 촉 지방 호족의 지원 아래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촉 지방의 호족들은 유비 정권의 수립에 의해 지방적 호족의 지위에서 조정의 귀족으로 승격한 것에 만족하였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유씨 등 유랑 귀족이 중원회복을 꿈꾸고 위험한 대외 전쟁에 종사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구품관인법의 연구 중(中)>]
촉인들은 유비를 위시하여 새로 영입된 형주파들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진취적인 성향에는 동조할 수 없었다. 대표적인 예가 제갈량의 후임인 장완과 비의의 차이이다. 장완은 비록 잦은 질병이 있어 출병하지는 못했으나, 지금 논하는 급류계책을 제안할 정도로 진취적이었고, 강유를 양주자사로 삼아 양주 일대를 교란하려는 등 전략적으로도 위나라를 제압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보이나, 비의는 수비 위주의 출병 이외에는 출병하지 않았고, 도리어 강유의 출병을 저지했다. 이렇게 형주인사로서 제갈량의 후임이 된 장완은 진취적 성향을 보이는 반면, 익주의 인사인 비의는 수세적 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장완이 집권할 무렵에는 형주의 주요 인사였던 방통, 마량, 윤묵, 진진, 마량, 황충, 장완, 마속, 요립, 위연 등 중 대부분이 숙청 혹은 병사하였고, 장완을 따라 한중으로 간 장수들 이외의 조정의 인사들은 대부분이 익주의 인사들이었다. 익주의 인사들은 유언, 유장으로부터 이어온 수세적, 방관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특히 제갈량과 같은 유능한 명재상이 병사한 직후 위나라를 토벌하는 일에 두려움을 표출하게 된다. 장완에서부터 강유의 북벌에 이르기까지, 조정의 반대에 부딪치지 않은 정벌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촉한이 수세적 입장으로 방관해도 괜찮은 상황이었나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익주는 유언, 유장 부자의 통치 하에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던 땅이다. 게다가 익주는 중원의 전란에 비해 꾸준한 인구수의 증가를 보이며, 그 노동력을 이용하여 성도 분지를 중심으로 한 농업 생산을 중심으로 한 경제력을 착실히 키워왔다. 제갈량의 융중대에서도 익주를 가리켜 “비옥한 들판이 천리에 펼쳐지는 천부지토”라고 한 바도 있었고, 진(秦)나라와 한 고조 유방 또한 익주를 바탕으로 제업(帝業)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래서 자급자족이 가능한 땅일뿐더러, 익주 자체가 매우 험한 산지이기 때문에 ‘거대한 요새’로도 불렸다. 하지만 이 상황은 유비의 형주 일파가 유입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촉나라 정권의 중핵을 이루고 있던 사람들은 원래 대개가 촉의 사람들이 아니고, 선주 유비를 따라 익주에 들어온 소위 외성인(外省人)이다...(중략) 유비 정권의 중추 간부 중 3분의 2가 익주 바깥에서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당시 호족이나 권문은 “부곡(部曲)”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사병 집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보통 부곡민은 그 가족을 이끌고 호족 문하에 몸을 의탁해 온다. 위나라의 이전(李典)은 부곡 3천여 호 1만 3천 명을 거느렸고...(중략)그러한 권문 호족이 촉나라로 가면, 그들 부곡민은 가족들을 대동하고 주인을 따라서 이동하게 된다. 그 때문에 익주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부곡의 증가는 생산력의 향상이나 국가의 세수 증대로는 연결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 부곡민은 유력자의 사병이고 사노비였기 때문에, 국가에 대해서 납세의 의무가 없고 또한 생산에도 종사하지 않았다.
당연히 외성인으로 이루어진 촉나라의 정권이 커지면 커질수록 노동하지 않는 인구가 증가하게 되고, 익주 경제가 압박 받게 되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되는 일이다. 형주를 잃은 것을 계기로 하여 그토록 부와 풍요를 자랑하던 익주도 먹을 것을 비롯한 물자의 만성적인 부족 상태가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중략)
제갈공명은 자신이 범한 오산에서 생기는 국가적 손실을 냉정히 계산하고, 그것을 보전할 새로운 국가 전략을 구상했음에 틀림없다...(중략) 공명이 새롭게 채택한 촉나라의 국가 전략은 “이공위수(以攻爲守)”이었다. <사상으로 읽는 삼국지 중(中)>]
제갈량의 남정과 북벌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헤아려보아야 한다. 만일 촉한 자체의 경제력이 자급할만한 수준이었다면 사실 촉한 내부에서 반발이 일어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는 또 다른 풍요로운 물자의 공급지를 찾아 나서지 않는다면 물자가 바닥나 경제가 파탄이 나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촉한이 40년간 버티다가 끝내 염흥 원년(263) 위나라에 항복했을 때, 후주 유선의 항복문서를 살펴보면 촉나라의 궁핍을 알 수 있다.
[후주 유선이 위나라에 보낸 항복 문서에 의하면, 당시 촉나라는 인구 94만 명, 호구 수 28만 호, 장병 10만 2천 명, 관리 4만 명, 쌀 40만 석, 금은 각 2천 근, 견직물 등 각 20만 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청나라의 학자 하작은 이 기사에 대해 “촉나라의 궁핍이 이렇게까지 진행되었으니 국가를 지탱해 나갈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라고 논평을 붙이고 있다. <사상으로 읽는 삼국지 중(中)>]
공명이 남정과 북벌을 행한 이유도 바로 ‘풍요로운 또 다른 땅’을 취하기 위해서이다. 남정의 경우는 “염전, 사냥, 고기잡이의 풍요함과 금, 은, 축산의 부유함”으로 칭송되었던 익주군, “금은보화의 땅”으로 불렸던 영창군 등을 빼앗아 그 곳 물자를 수탈하기 위해서였고, 북벌의 경우는 뛰어난 군마와 인재, 그리고 진(秦)나라 때 개간되었던 거대한 평야로 인한 풍요한 곡창지대 등을 가진 양주를 확보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이다.
무턱대고 ‘계책이 성공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회군하기도 쉽지 않아...’라는 조정의 반대를 이유로 장완의 계책을 수용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당시 촉한으로서도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촉한의 조정 인사들이 다만 출병보다는 내부 안정을 더 원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해야 할 따름이지, 당시의 정세에 맞는 발언은 아니었다고 보인다.
게다가 만일 장완의 계책이 그토록 정세에 어긋났더라면, 후주의 윤허가 떨어졌겠는가.
[그러자 장완이 상소하여 말했다.
“지금 위나라는 9주를 차지하여 그 뿌리가 더욱 뻗어가니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만일 오나라와 합심해 앞뒤로 호응하면 비록 일거에 뜻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응당 위지를 쪼개 점차 잠식할 수 있으니 우선 위나라의 변경을 훼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오나라가 세 번 접촉에 두 번 합동 작전키로 약정하고도 출병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신이 비의등과 상의한 결과 양주(凉州)는 호인들이 사는 중요한 관새(關塞)이므로 진퇴의 거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강족과 호인은 지금 모두 한나라를 애타게 생각하고 있으니 응당 강유를 양주자사로 임명해야 합니다. 만일 강유가 출정해 황하 이서를 견제하면 신 역시 응당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강유의 뒤를 이어 진주할 것입니다.
지금 부현(涪縣)의 수륙 양쪽으로 사통팔달하니 긴급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능히 대응할 수 있습니다. 만일 오나라와 싸우게 될지라도 여기서 출발하여 접응하면 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대군영을 부현으로 옮겨 주둔토록 허락해 줄 것을 청합니다.”
한주가 이를 좇았다. <자치통감 정시 2년(241)조 기사 중(中)>]
후주가 이 상주문을 가납했다는 것은 기습전으로 시도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상주문에도 반론의 여지가 있었다면 여론이 거세게 반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언급은 없고, 다만 ‘후주가 이를 좇았다’. 이는 장완의 계책이 상주문을 통해 조정의 인사들을 설복시켰다는 뜻이 된다.
이로써 당시 여론을 통해 장완의 계책을 비판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3. 병법과도 합치되는 장완의 기습전략
물론 장완이 세운 계책은 정공(正攻)의 방법이 아닌 기공(奇攻)으로 효과를 톡톡히 보자는 것으로, 가히 위연의 자오도 계책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성공하면 가히 열세를 극복할 수 있으며, 실패하면 크나큰 손실이 예상되는 이른바 도박이었음은 어느 정도 수긍하는 바이다. 하지만 이 계책이 단지 기습전에 불과하다고 사료하여 거부될 만한 책략인가.
거의 도박에 가까운 기습전을 감행하여 실패한 사례도 없지 않지만 성공한 사례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조조의 오소 급습이다.
[순유가 조조에게 말했다.
"원소의 식량 운반용 수레가 조만간에 이를 것인데, 그것을 통솔하는 장수 한명은 날쌔지만 적을 경시하는 인물이니, 습격하면 격파시킬 수 있습니다."
조조가 말했다.
"누구를 보내야 하오?"
순유가 말했다.
"서황이면 됩니다."
조조는 곧 서황과 사환을 보내 습격하여 달아나게 하고 치중을 불태웠다. <정사 위서 순유전 중(中)>]
[허유가 항복해 와서, 원소는 순우경 등에게 병사 1만여 명을 이끌고 식량을 운반하는 것을 영접하도록 하였지만, 장수는 교만하고 병사들은 나태하므로 가히 공격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조의 모사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의심을 품었으나, 오직 순유와 가후만은 조조에게 허유의 계책을 받아들이라고 권했다. 조조는 곧 순유와 조홍을 남겨 본부 진영을 지키게 하였다. 조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여 순우경 등을 모두 베어버렸다. 원소의 장수 장합과 고람이 망루를 공격하여 태워버리고 투항하자, 원소는 마침내 군대를 버리고 도주했다. <정사 위서 순유전 중(中)>]
[ 겨울 10월 원소는 또 수송용 수레를 내어 곡물을 운반하고, 순우경 등 다섯 사람에게 1만여 명의 병사를 주어 호송하였는데, 그들은 원소 진영에서 북서쪽으로 10리 쯤 되는 곳에 묵었다. 원소의 모사 허유(許攸)는 재화를 탐했는데, 원소가 그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으므로 조조에게 투항했다. 이때 그는 순우경 등의 공격을 조조에게 진언했다. 좌우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말을 의심했지만, 순유와 가후(賈詡)는 조조에게 ‘의심하지 말 것’을 권하였다. 조조는 조홍에게 남아 지키게 하고, 직접 5천 명의 보병과 기병을 지휘하여 한밤중에 출발하여 날이 샐 무렵에 도달했다. 순우경 등은 조조의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궁문 밖으로 나와 진을 쳤다. 조조가 급히 그들을 공격하니, 순우경은 후퇴하여 진영을 지켰지만, 조조는 또 공격했다. 원소가 기병을 보내어 순우경을 구하도록 원조했다. 조조의 측근에서 이렇게 진언하는 자가 있었다.
“적의 기병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병사를 분산시켜 그들을 감당하도록 하십시오.”
이 말을 듣고 조조는 노하여 말했다.
“적이 배후에 도착하면 다시 보고하라!”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걸고 싸워 순우경 등을 크게 무찌르고, 그들을 모두 죽였다. 원소는 조조가 순우경 등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큰 아들 원담에게 말했다.
“그가 순우경 등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내가 그의 진영을 공격하면, 그는 정말로 돌아갈 곳이 없을 것이다.”
원소는 장합과 고람을 파견하여 조홍을 공격했다. 장합 등은 순우경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조조에게 투항했다. 원소의 군세는 크게 무너졌으며, 원소와 원담은 군대를 버리고 도주하여 황하를 건넜다. <정사 위서 무제기 중(中)>]
원소의 조조의, 중원을 걸고 싸운 관도대전이 삼국지에서 갖는 비중을 논자들은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라 본다. 특히 상기의, 허유가 진언한 조조의 군량 기습으로 인해 전세가 뒤집어지고 관도전의 승자가 뒤바뀌었다는 것 또한 잘 알 것이다. 전쟁에서 기습전술로 인해 국면을 순식간에 바꾼 사례는 결코 적지 않다.
이처럼 기습 전술이라는 것은 위험성을 고려해서 그렇게 간단히 거부할 만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병법에서도 기습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전투란, 먼저 정공법으로 적군과 부딪쳐서 주력 부대를 멈춘 다음, 기습 전술로 옆이나 등 뒤에서 적의 약점을 습격하여 승리를 결정짓는다. 그러므로 기습 전술에 뛰어난 장수의 전법은 변화가 하늘과 땅의 움직임처럼 무궁무진하고, 강과 바다의 흐름처럼 넘쳐나도 끊이지 않는 지혜다. <손자병법 병세편 중(中)>]
[정공법으로 정면에서 부딪치면 적군도 온 힘을 기울여 맞선다. 그러면 옆이나 등 뒤의 주의는 흐트러지게 된다. 이런 기회를 노려서 기습 부대를 매복해 두고 적군이 미처 대비하지 못한 곳을 생각지도 못할 때 습격한다. 하늘과 땅처럼 거침없고 끝나지 않는 자유로움의 경지란 병법에서 정공법과 기습 전술을 무한히 뒤섞어 응용할 수 있음을 비유해서 설명한 것이다. <손자병법 병세편 조조의 주석 중(中)>]
[먼저 정공법으로 주력 부대와 맞서 싸우고, 기습 전술에 따라 움직이는 유격 부대로 승리를 결정짓는다. <풍후/악기경 중(中)>]
위연의 자오곡 계책을 논하는 논자들은 상기와 같은 병법상의 이유 때문에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제갈량이 정공을 하고, 아울러 위연의 기계(奇計)를 쓴다면 실제로 성공가능성이 매우 높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실제로 제갈량의 군략적 재능이 폄하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쟁이란 정공법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군이 예기치 못한 곳을 습격하여 혼란을 야기하는 것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요인이 된다.
그럼 장완의 계책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그러자 장완이 상소하여 말했다.
“지금 위나라는 9주를 차지하여 그 뿌리가 더욱 뻗어가니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만일 오나라와 합심해 앞뒤로 호응하면 비록 일거에 뜻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응당 위지를 쪼개 점차 잠식할 수 있으니 우선 위나라의 변경을 훼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오나라가 세 번 접촉에 두 번 합동 작전키로 약정하고도 출병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신이 비의등과 상의한 결과 양주(凉州)는 호인들이 사는 중요한 관새(關塞)이므로 진퇴의 거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강족과 호인은 지금 모두 한나라를 애타게 생각하고 있으니 응당 강유를 양주자사로 임명해야 합니다. 만일 강유가 출정해 황하 이서를 견제하면 신 역시 응당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강유의 뒤를 이어 진주할 것입니다.
지금 부현(涪縣)의 수륙 양쪽으로 사통팔달하니 긴급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능히 대응할 수 있습니다. 만일 오나라와 싸우게 될지라도 여기서 출발하여 접응하면 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대군영을 부현으로 옮겨 주둔토록 허락해 줄 것을 청합니다.”
한주가 이를 좇았다. <자치통감 정시 2년(241)조 기사 중(中)>]
오군의 접응은 이미 앞서 설명한 바 있으니 접어두고, 다음을 계속 보자. 앞서 필자는 제갈량의 북벌은 ‘양주(凉州)’를 공략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는 실제로 위나라도 잘 아는 바여서, 촉한이 병탄당하기까지 양주, 옹주를 맡은 자사들은 실로 당시 그 명성이 자자한 명장들이었다. 위방진년표(魏方鎭年表)에는 각 시대별로 당시 각 주를 담당한 자사들의 이름이 나와 있는데, 정시 2년의 기록을 살펴보면 옹주(雍州)에는 당시 조엄(趙儼)이라는 인물이 배치되어 있다.
생소한 이름인 듯 하지만, 정사 위서 화상양두조배전에서 그의 활약상을 엿볼 수 있으며, 실제 정사 위서 조엄전에도 ‘제왕(齊王)이 즉위하자 조엄을 감옹량제군사(監雍涼諸軍事), 가절로 삼았으며, 정촉장군으로 전임하였고, 또 정서장군, 도독옹양제군사(都督雍涼諸軍事)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위방진년표에는 정시 2년 양주의 기록이 없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 옹양 일대는 조엄이 담당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위서 조엄전에는 조엄의 여러 공적이 기술되어 있으며, 특히 양주 지역에서의 공이 컸으며, 훗날 표기장군, 사공까지 되는 인물이다. 당대뿐만 아니라 옹, 양주는 장기, 서막, 곽회 등 당시에 양주 일대를 안정시킨, 혁혁한 공이 있는 명장들이 연이어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위나라에서는 촉한이 양주로 진출할 것을 경계하여 명장을 배치하여 수비하게 했다.
장완의 상소를 보면, 강유를 양주자사로 보내 호인(胡人)들과 호응케 한 대목이 있다. 이것은 이루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앞서 필자는 저족과 강족이 촉한에 이미 협력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술했거니와, 강유는 당시 양주에서 민심을 얻고 있었다고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전한 말기부터 있었지만, 후한 말기가 되면 천하 도처에 군의 명가를 나타내는 순위표가 완성된 듯 하다.『삼국위지』권 13 왕숙전 주에서 인용한『위략』설하전을 보자.
‘천수군에 옛 강, 염, 임, 조 네 성이 있다. 항상 군에서 추천받았다.’ <구품관인법의 연구 중(中)>]
이렇게 강유는 당시 양주 일대의 명족이었고, 실제로 제갈량이 강유를 조정에 천거하면서 "강백약(姜伯約)은 그 시대의 일을 충성스럽고 근면하게 하며 사려가 정밀하며, 그가 갖고 있는 재능을 살펴보면, 영남 및 계상 등의 사람들도 그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양주에서 최고의 인물입니다." 라는 말을 한 것은 당시 양주의 민심을 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양주의 대표적인 명족 강유를 높이 평가함으로써 방금 제갈량에게 점령당한 양주 일대의 민심이 촉한으로 넘어오게끔 유도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아도 강유가 양주 일대에 행사할 수 있었던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자, 그럼 필자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강유를 중심으로 호인들과 연계해서, 한중으로부터 양주로 나아가 위나라를 교란시키는 것이 바로 제갈량이 이전에 북벌을 감행하면서 썼던 정공(正攻)의 루트와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 강유의 공격을 정공(正攻)으로 가장하고 장완이 부현에서부터 출발하여 부관을 거쳐 한수를 타고 내려와 상용 일대를 급습하는 기공(奇攻)을 감행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병법에서 언급하는, 군사 전략의 핵심을 찌르는 기가 막힌 전법이었다는 것이다.
4. 계책의 성공을 확신한 장완, 그 이유
무관과 문관은 직책상 수행하는 일도 다르고, 그에 따라 입장도 판이하게 다르며 사고방식 또한 다르다. 여기에 지위까지 감안하게 된다면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볼 수 있다. 장완은 당시 제갈량의 후계자로, 대장군, 녹상서사로서 촉한 신권주의의 중심이었다. 제갈량이 수행해야 할 책무를 그대로 떠안았다는 것이며, 이것은 곧 국방을 수호함과 더불어 국정을 안정하게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장완은 당시 정치의 최고 결정권을 가지면서 동시에 군 최고 통수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것도 야전사령관이라기보다는 정치가에 가까운 장완은 통상 계책을 세울 때 보급과 병력의 손실문제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제갈량이 위연의 자오도 계책을 위험하다고 여기고 거부한 건 이와 같은 신중함에서 비롯된다. 이와는 달리, 최고 통수권을 가지지 않은 부장들은 이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어디까지나 그들은 진언자일 뿐, 최고 결정권은 통수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들 부장들은 대개 손실을 감안하지 않고 승리방안을 모색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강유가 중원을 아홉 번 무리하게 정벌을 감행했던 것도, 정치 분야에 있어서는 중앙 정권에 완전히 일임하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롬멜이 상관에게 병력을 요구했을 때. 상관이 무리한 작전임을 지적하면서, 물자와 병력의 손실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반문하자. 롬멜은 이것은 정치가가 해야 할 일이지 자신의 임무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장완이 이번 논쟁의 논점이 되는, 급류를 탄 상용 급습 계책을 진언한 것은 갑자기 장완의 사고방식 자체가 뒤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장완이 이러한 기습작전을 구상하게 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작전을 완벽하게 이끌어낼 것을 구상했기 때문이다. 당시 비의와 강유와도 상의하여 이 작전을 신중하게 이끌어냈고, 상소를 올려 주상의 윤허를 받아낼 정도로 이 계책은 신중하고 치밀한 전략이었다. 실제로 조정 중론이 이를 반대한 것은 장완의 구상을 너무 막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이고, 장완의 상소가 올라오자 구체적인 계책을 살핀 조정 중론은 이를 승인했던 것이다.
어째서 장완은 승리를 장담했을까? 장완의 공격 노선은 기습이었고, 기습은 적이 모르게 행하는 기공법이다. 이는 상기에 기술한 손자병법에서도 중요하게 부각시킨 전술이고, 당시로서도 충분히 승산이 있는 전술이었다. 전일 필자는 여러 가지의 전례를 살펴보았을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전술이라고 언급한 바가 있다.
[건안 24년(219)에 맹달에게 명하여 자귀( 歸)로부터 북쪽으로 방릉(房陵)을 공격하도록 했다. 방릉태수 괴기( 祺)가 맹달의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맹달이 장차 진군하여 상용(上庸)을 공격하려고 하자, 유비는 맹달이 독자적으로는 승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은근히 걱정했다. 유비는 곧 유봉을 보내 한중으로부터 면수를 따라 내려가 맹달의 군대를 통솔하도록 하여 맹달과 함께 상용에서 결합하도록 했다. 상용태수 신탐(申眈)은 사람들을 인솔하여 투항하고 처자와 종족 사람들을 성도로 보내 인사하도록 했다. 유비는 신탐에게 정북장군의 지위를 주고, 상용태수 원향후(員鄕侯)를 이전처럼 겸임시켰으며, 신탐의 동생 신의(申儀)를 건신장군(建信將軍)서성태수(西城太守)로 임명하고, 유봉을 부군장군으로 승진시켰다. <정사 촉서 유봉전 중(中)>]
이와 같이 상용을 (기습은 아니지만) 한중을 정벌한 기세로, 방릉의 맹달과 한중의 유봉이 함께 협공하여 상용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낸 전례가 있다. 기습도 아닌 공격에서 받아낸 항복일진대, 하물며 강을 타고 습격한 장완군에 혹시 모를 오군의 협공이 가해진다면, 당시 동오와의 싸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던 위나라로서는 상용과 위흥 일대를 미처 돌볼 틈이 없을 것으로 예상되므로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기록도 있다.
[ 아울러 하후상의 이전의 공적을 모두 기록하여 평릉정후에 봉했고 산기상시를 제수했으며, 중령군으로 승진시켰다. 문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하후상은 다시 평릉향후에 책봉되었고, 정남장군으로 승진했으며, 형주자사를 통솔하고, 가절도독남방제군사가 되었다. 하후상이 상주했다.
- 유비의 별동대가 상용에 있는데 산길이 험난하고, 그들은 우리 군대에 대해 준비가 없으므로, 만일 기습부대를 몰래 파견하여 적이 주의하지 않는데 출동시키면 일방적으로 승리를 얻는 형세입니다.
그래서 하후상은 여러 군대를 지휘하여 상용을 격파하고, 주변의 삼군과 구현을 평정하여, 정남대장군으로 승진하였다. <정사 위서 하후상전 中>]
이 때는 비록 맹달과 유봉의 불화로 맹달이 항복하는 시점이지만, 상용의 방어가 허술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으로 급습 작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욱이 궁금한 것은 맹달의 배반으로 인해 다시 상용 땅에서 접전이 벌어지고, 이후 사마의가 위흥태수 신의가 함부로 벼슬을 남발하였다는 이유로 낙양으로 압송케 한 대목 외에는 더 이상 상용 땅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나 상용은 그 군현이 자주 바뀌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으므로 자연히 수비가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건안 24년(219)> 위문제 조비는 맹달의 자태와 재능을 칭찬하며 산기상시, 건무장군으로 임명하고 평양정후(平陽亭侯)로 봉했다. 방릉, 상용, 서성 세 군을 합쳐 신성군(新城郡)이라 하고, 맹달에게 신성태수를 맡겼다. <정사 촉서 유봉전 中>]
[태화 2년(228) 봄 정월 사마선왕은 신성을 공격하여 토벌하고, 맹달을 참수하여 그의 머리를 보내왔다. 본래 신성군에 속했던 상용(上庸),무릉(武陵),무현(巫縣)을 떼어 내어 새로 상용군을 설치하고, 석현(錫縣)을 새로 석군이라 했다. <정사 위서 명제기 中>]
[<태화 4년(230)> 봄 2월 19일 상용군을 군에서 없앴다. <정사 위서 명제기 中>]
[경초 원년(237) 6월 12일 수도에 지진이 있었다. 3일, 상서령 진교(陳矯)를 사도로, 상서우박사 위진(衛臻)을 사공으로 삼았다. 11일, 위흥군(魏興郡)에서 위양현(魏陽縣)을, 석군(錫郡)에서 안부현(安富縣)ㆍ상용현(上庸縣)을 분할하여 상용군(上庸郡)이라고 했다. 석군을 없애고 석현을 위흥군에 귀속시켰다. <정사 위서 명제기 中>]
게다가 전일 필자는 장완의 계책이 승리할 수 있는 이유로 또 한 가지, 생각지도 못한 수군으로의 기습을 논한 적이 있다. 그 때까지 촉군은 거의 수군을 이용해서 공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갈량의 북벌군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오나라와 이릉전을 벌인 유비 또한 수군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전일 언급한 바 있다.
[한주 유비가 자귀에서 진격하여 오를 치려 하자 치중종사 황권(黃權)이 간하여 말했다.
“오나라 사람들은 강한(强悍)하여 싸움을 잘 하나 우리 수군은 물을 따라 내려가기 때문에 진군은 용이하나 퇴각이 어렵습니다. 신은 청컨대 선봉이 되어 진격하려고 하니 폐하는 응당 후진(後鎭)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한주가 듣지 않고 황권을 진북장군에 임명하여 강북의 모든 군사를 통수케 한 뒤 자신은 제장들을 이끌고 강남에서 숱한 산과 고개를 넘어 이도현의 효정으로 진군했다. <자치통감 황초 3년(222)조 기사 중(中)>]
이 기사만으로 유비가 수군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추정할 수 없다면, 아래의 대목을 인용하겠다.
[청나라의 학자 전진굉(餞振鍠)은 촉나라 군의 패배 원인(이릉전)을 유비의 용병술이 서툰 점에서 찾고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수군을 이용하는 경우, 장강의 흐름을 타고 상류에서 진군하여 공격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일단 전투가 불리하게 전개되면 되면 강 상류로 퇴각하기가 어려워진다. 단지 이 점을 두려워한 나머지 유비가 일부러 유리한 수군을 버리고, 삼협의 험준한 산길로 먼 길을 행군하여 쓸데없이 병사를 피로하게 만든 것이 패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사상으로 읽는 삼국지 중(中)>]
여기서도 역류의 위험성을 말하고 있지만, 상기의 학자 전진굉(餞振鍠)이 이를 언급하면서 더 중시한 것은 전술의 요체이다. 당최 유비는 수군의 위험성만을 생각하고 우회하여 병가에서 꺼리는 오랜 진군을 감행함으로써 병사들을 지치게 만들어, 결국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선례(先例)를 장완은 매우 신중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상기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미 한수의 급류를 이용하는 것은 회군이 어렵다는 것을 촉군이 안다면, 위나라는 어찌 모르겠나. 그러므로 이 쪽으로 기습할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고, 맹달의 반란 이후 근 20년 동안 상용이 기습당한 적이 없으니, 당시 가뜩이나 동오와의 싸움으로 지쳐있던 위나라에게 상용, 위흥이라는 곳은 촉군의 기습이라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 땅이었다.
위연의 자오도 계책도, 위나라 또한 자오도의 험난함을 알고 있어서 그 길을 통한 장안급습은 있을 수 없다는 위나라 군의 생각을 읽고 내세운 계책이다. 이른 바 출기불의 공기무비(出期不意 攻期無備)이다. 자오도 계책은 장안이라는 거성을 불과 5천 명의 정병으로 함락할 수 있을지 의문시되지만, 학계에서는 일부 이를 지지하고 있다. 자오도 계책 전반(全般)의 성공은 어렵겠지만, 적어도 장안은 탈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하물며 상용 땅은 그 지역 자체가 매우 자주 바뀌어서 방위체제에도 허점이 생긴 데다, 한수를 타고 기습하는 것 또한 ‘촉군은 수군을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과 ‘퇴각이 곤란한 한수를 이용하겠는가’라는 통념을 동시에 깨버리는 기발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5. 오국과의 연계 가능성 - 현명지사 은례의 상주문
어제는 오국의 은례의 상주문을 단지 촉한과의 결맹이 탄탄하다는 증거로만 인용하였지만, 오늘은 그 세부전략을 한 번 상세히 살펴보자.
[봄, 오나라가 위나라를 치려고 하자 영릉태수 은례(殷禮)가 오주에게 간하여 말했다.
“지금 하늘이 조씨를 버려 상주(喪誅)로써 그 징조를 드러내고 있으니 맹호가 상쟁하는 와중에 위나라는 어린애(조방)가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폐하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혼란스런 적국을 취하면 이는 수치이니 응당 형주와 양주 일대를 깨끗이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선 병사들을 가려 강건한 자에게는 무기를 들게 하고 약한 자에게는 운량을 담당케 해야 합니다. 서쪽의 익주에 명해 농우(隴右)로 진출케 하고, 제갈근과 주연에게는 대군을 주어 곧바로 양양(襄陽)으로 가게하고, 육손과 주환에게는 별도로 수춘을 정벌케 하고, 대가(大駕)는 회양(淮陽)으로 진입하여 청주와 서주를 차례로 제압해 나가야 합니다.
양양과 수춘이 포위되어 곤궁하게 되고 장안 이서(以西)가 촉군과 싸우느라 여념이 없게 되면 허창과 낙양의 군사가 반드시 동서 양쪽으로 나뉘게 될 것이니 이 때 아군이 기각지세(掎角之勢)를 만들어 병진하면 중원의 백성들이 반드시 내응할 것입니다.
촉한과 위나라의 장수가 대진하다가 어느 한쪽이 혹 실수라도 하여 패하게 되면 전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아군이 말마지거(秣馬脂車 : 배불리 먹은 말과 충분히 장비를 갖춘 전차)로 성읍을 공략해 도망가는 적을 추격하면 화하를 능히 평정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나라의 전 병력을 동원치 않고 이전과 같이 소수병력만을 출동시키면 대전과를 얻기가 힘들고 누차 패하기 쉽습니다. 그리되면 백성을 지치게 하고 국위를 손상케 하여 시간은 자꾸 가는데 국력을 소진하는 결과를 낳게 되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자치통감 정시 2년(241)조 기사 중(中)>]
이 계책은 오나라가 지금 솔병(率兵)하여 위나라로 진군해야 할 명분을 밝힘과 동시에 상세한 전략을 진술하고 있다. 이 전략은 어제는 잠깐 동맹의 조건으로 짚고 넘어갔지만,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전략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부분적으로 이행된 전략이고, 만일 장완이 같이 진공할 것을 권유했다면 매우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일단 상기에서 기술한 전략을 개략적으로 살펴본다면, 촉한은 농우로 나아가고, 제갈근과 주연은 양양으로 진군하며, 육손과 주환은 수춘을 정벌하고, 손권은 회양으로 진입하여 청주와 서주를 제압하는 것이다. 이것은 촉한은 제갈량 당시의 원래의 북벌로를 고수하고, 동오의 경우는 나아갈 수 있는 모든 국경 경로를 한꺼번에 밀어붙인다는 것이다. 주연은 여몽이 사망 전에 손권에게 천거한 후임이고, 육손도 이릉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여몽의 후임이 된 만큼 이 계책은 동오가 삼로(三路)로 진군하여 촉한과 함께 위나라 전 국경지대를 위협하는 책략이다. 만일 촉한과 동오가 위나라를 협공한다면 마땅히 세워야 할 책략으로, 은례의 진언처럼 이 경우 위나라는 병력이 4분되면서 동시에 서로를 구원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게 된다. 한 마디로 동오와 촉한의 기각지세에 의해 위나라가 머리와 꼬리를 돌볼 수 없는 지경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책략이 가능했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가능했다.’ 이 계책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언급할 가치가 없으나, 실제로 손권은 은례의 계책대로 솔병하여 출전했다. 다만 촉한과의 연합작전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4년(241) 봄 정월, 대설이 내려 평지에도 3척이나 쌓였고, 날짐승과 들짐승 중에서 태반이 죽었다. 여름 4월, 위장군 전종을 파견하여 회남을 공략하도록 하고 작파(芍?)를 무너뜨리고 안성(安城)의 곡식창고를 불태우고 그곳의 백성들을 거둬들였다. 위북장군 제갈각이 육안(六安)을 공격했다. 종과 위나라 장수 왕릉(王?)이 작파에서 전쟁을 했는데, 중랑장 진황(秦晃) 등 10여 명이 전사했다. 거기장군 주연이 번성을 포위하고, 대장군 제갈근이 사중(?中)을 취했다. 5월, 태자 손등이 죽었다. 이 달, 위나라 태부 사마선왕이 번성을 구원했다. 6월, 군대가 돌아왔다. <정사 오서 오주전 중(中)>]
은례의 계책대로 주연과 제갈근은 양양 일대로 나아갔고, 다만 회남을 공략하는 군대가 전종으로 수정되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제갈각도 육안을 공격하는 등 은례의 진언대로 위나라 국경 거의 전 지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이 때 마침 장완이 올린 책략은 강유로 하여금 양주를 교란시키면서 상용을 급습하는 책략이었다. 상용은 번성과 매우 가까운 곳으로, 만일 장완과 동오의 연계작전이 성공했다면 강유가 농우 일대로 나아가 위나라를 공략하면서, 장완이 상용을 기습하면서 동오의 주연 등과 연계하여 상용을 취할 수 있었다. 만일 상용을 취한다면 당시의 정세로서는 무관으로 진군하여 남양을 취하고, 낙양을 노리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6. 결어(結語)
장완의 공격 노선은 기습이었고, 기습은 적이 모르게 행하는 기공법이다. 이는 상기에 기술한 손자병법에서도 중요하게 부각시킨 전술이고, 당시로서도 충분히 승산이 있는 전술이었다.
[청나라의 학자 전진굉(餞振鍠)은 촉나라 군의 패배 원인(이릉전)을 유비의 용병술이 서툰 점에서 찾고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수군을 이용하는 경우, 장강의 흐름을 타고 상류에서 진군하여 공격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일단 전투가 불리하게 전개되면 되면 강 상류로 퇴각하기가 어려워진다. 단지 이 점을 두려워한 나머지 유비가 일부러 유리한 수군을 버리고, 삼협의 험준한 산길로 먼 길을 행군하여 쓸데없이 병사를 피로하게 만든 것이 패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사상으로 읽는 삼국지 중(中)>]
전쟁에서 패배할 것을 두려워해서 기습전을 쓰지 않는 것, 그리고 상기의 유비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병가에서 매우 금기시한다는 것을 잘 알아두기 바란다. 북벌에서 정공으로 부딪쳐 매번 식량이 떨어져 돌아오는 제갈량의 북벌보다, 그리고 퇴로를 두려워하여 수군을 이용하지 않은 유비보다, 장완의 전략은 매우 획기적이고 합리적이며 효과적인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첫댓글 혹 성도전쟁인가요? ㅋ
예 ㅋ 성도전에서 바쁘게 뛰고 있습니다 ㅋㅋ
와~ 다각도로 자신의 주장을 증거하는 것이 놀랍네요. 잘 읽었어요...
역시 -_-ㅋ 난 언제 따라갈 수 있으려나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