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마 21:12-17 (막 11:15-19; 눅 19:45-48) 두 번째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다 찬송: 490, 483장
이제 예수님 공생애의 날이 4일밖에 남지 않은 월요일이 되었다. 베다니에서 아침에 출발하신 후. 길가에서 잎사귀가 무성한 한 무화과나무를 만나 열매를 찾으셨지만 찾지 못하셨기 때문에 저주를 하신 후에 예루살렘 성전에 다시 들어오셨다. 어제는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찬송을 들으셨지만, 이제는 당국자들로부터 더욱 미움을 받으시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며 그들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앞에 두고 성전에 들어오셔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은 예수님 공생애 시작 후 만나는 첫 유월절로, A.D. 28년에 있었던 일이다. 이때는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로 성전을 예수님의 몸과 동일시하는 가르침을 주셨다. 이 사건은 오직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두 번째 성전 청결 사건인 본문의 사건은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이때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예수님의 사역이 4일 남은 시점에서 그 시대의 특성과 성전을 연결하여 그들을 비판하고 있음을 배울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 오셨는데, 그들은 결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부분이 본문을 통해서 드러난다.
성전은 무엇인가? 성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로, 이스라엘 백성의 왕이 되심과 그들을 주관하시고 보호하시는 모든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장소이다. 사실 하나님의 임재는 어디에 국한될 수 없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전에만 계신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시며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심을 소개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마땅히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으며, 그 나아옴은 성전을 향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며 경배하는 마음으로 나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이런 용도로 쓰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일과 동전을 바꾸어주는 일이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2장의 성전 청결 사건을 살펴볼 때 말한 바이지만, 원래 이스라엘 백성은 집에서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여행할 때에는 그가 하나님 앞에 드릴 예물을 돈으로 바꾸어 예루살렘 현지에 와서 흠 없고 정결한 짐승을 구입한 후(신 14:24-27) 그 제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성전 부근에는 제물을 파는 장사꾼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의 상황은 이와 달랐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인데, 그는 이전 제사장이었던 안나스의 사위이다. 안나스는 A.D. 7년부터 대제사장으로 있다가, 로마 당국에 의해 A.D. 15년에 폐위되었고 다른 사람으로 대치되었다. 하지만 A.D. 18년, 안나스는 많은 돈을 들여서 대제사장직을 사 그의 사위 가야바를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게 한다. 이때 많은 돈이 들었기 때문에 안나스와 가야바는 성전 주변의 장사꾼들에게 돈을 받고 성전 가까이 올 수 있도록 허락하였고, 또 성전 안의 제사장들이 대제사장의 명령을 받아 이들에게 산 제물만 정결하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가져온 제물은 그들의 제사에 사용할 수 없도록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성전 주변의 장사꾼들에게 제물을 사야만 했으며, 우리의 통용 화폐 가치로 생각해 보면, 약 5천원 하는 제물을 3~4만원에 강매하는 관행이 이들에게 가득했다. 사람들은 이러한 강매를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그들의 제물을 사야만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성전세가 있었는데, 그 세금을 내기 위해서는 성전에서 통용하는 돈인 세겔로 바꾸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 당시 통용되던 화폐를 가지고 와서 성전의 화폐로 바꾸어주는 환전상들도 성전 주변에 가득했었다.
이런 모든 일은 대제사장이 허락함으로써, 그들은 이익을 취하게 되었고, 이 이득의 얼마를 대제사장이 또 받아가는 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이런 구조가 커지다 보니 성전 바깥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수요가 늘어 이제는 성전 바깥 뜰인 이방인의 뜰까지 잠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성전 바깥에 있는 이방인의 뜰을 가득 메우고 있는 장사꾼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익을 위해 움직이기 때문에 그러한 장사꾼들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이 성전 청결의 문제점은 장사꾼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된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렇게 자행되는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신다는 데에 있다. 왜 그런가? 이러한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들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제사를 이미 시작부터 더럽게 하고 있는데, 어찌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사실 경건한 백성들은 자기가 드릴 예물을 친히 준비할 수도 있고, 또 충분한 돈을 들여 성전 주위에서 파는 제물을 사서 하나님께 제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제사를 주도하는 제사장들과 일 년에 한 번씩 지성소에 들어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하는 속죄 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이 레위인이 아니기도 하며, 제물을 파는 자들을 허용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손해를 메꾸고자 하는 악독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은 이들의 제사를 결코 받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제사장들과 대제사장들은 어떠한가? 그들 스스로도 알고 있다. 이 제사가 결코 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제사는 계속되어야 하고, 그 제사에 백성들로 참여하게 만들기 위하여 제물을 사라고 강매하였으며, 성전에서 제사가 계속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제사를 통하여 먹고 살았던 것이다. 종교를 빙자하여 그들의 안위와 삶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제사는 결코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모두 그들의 삶의 방편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바로 그러한 제사는 하나님께서 버리시는 제사란 것이다.
이 원인은 무엇인가? 제사를 주관하는 자들의 타락과 대제사장을 인정하는 또 다른 그룹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이익을 위하여 진실을 은폐하고 쉬쉬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를 용인한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이 모든 무리는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사람들을 유혹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이들의 비호 아래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은 헛된 예배에 사람들이 돈을 쓰도록 만들었고, 백성들은 순진하여 경건함으로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 나아오지만, 그들의 제사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이 얼마나 악한 행위를 자행하는 종교 지도자들이란 말인가! 이러한 시대의 문제점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모든 자들을 쫓아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인용하여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마 21:13)라고 말씀하신다. 지금 두 구절을 인용하고 계시는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는 구절은 사 56:7을 인용하였고, “강도의 소굴”은 렘 7:11을 인용한 말씀이다. 마가는 기도하는 집 앞에 “만민이”라는 말을 삽입하였으며, 이는 십자가 이후의 성령 하나님의 강림하심과 좌정하심으로 모든 성도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할 수 있는 귀한 존재로 바뀌게 됨을 의미한다. 지금 예수님께서 두 구절을 인용하여 말씀하시는 바는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성전을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강한 책망이다.
이렇게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후에 예수님은 찾아온 맹인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셨다. 하지만 당국자들은 그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예수를 향하여 노를 발하면서, 자기들을 저주한 예수님과 논쟁하고 예수님을 공격하였지만, 예수님은 믿지 않는 그들을 향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요 12:32, 34)는 말씀을 주셨고, 이 논쟁은 요 12:20-50에 기록되어 있다. 이 논쟁으로 인해 당국자들은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막 11:18)를 의논하였다. 하지만 백성들의 함성으로 말미암아 죽일 수 없었으며, 기회를 엿볼 뿐이었다. 이후 예수님은 성전을 떠나 예루살렘 밖의 베다니에 가셔 저녁을 지내셨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이 본문의 내용이요, 예수님 당시의 시대상이었다.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했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속이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것이 종교가 타락하면 나타나는 가장 첫 번째 현상이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지 아니하시는 상황에서도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예물을 갈취하는 데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시대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무조건 용서해야 하는가? 3년 전에 예수님은 한 번 더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지만, 그 이후 변화된 모습은 전혀 없었다. 하나님의 심판의 유보가 이제 한계에 달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 가지를 시행할 것이다. 하나는 요 2:19에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신 예언을 이루시는 것이다. 이 예언은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선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물리적인 성전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요, 그래서 마지막에는 파괴될 것이라는 예언이 이 말씀 가운데 담겨 있다. 그리고 이제 그 때가 되었다. 이제는 자숙의 시대, 회개의 시대가 아니라 심판의 시대가 된 것이다. 당국자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예수님 승천 후 40년이 지났을 때인 A.D.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가 와서 성전을 완전히 무너뜨려버렸고,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으며, 타락한 종교로 그들의 삶을 연명하던 그들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모습을 오늘 우리의 교회에 적용할 수 있을까? 이 시대의 교회는 어떤 모습인가? 과연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종교 지도자들처럼 자신의 신앙을 자신하고 있는가, 아니면 일반 백성들처럼 순수함으로 정결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가? 상식과 표준을 벗어나면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처럼 되며, 그렇게 되면 자비는 잃어버리게 되고, 심판을 받는 일만 남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내 시대에는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처럼 거짓 종교를 갖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 없을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살전 5: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이것이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받은 심판이었다.
살전 5: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이 말씀은 성도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 하여 상식적으로 생각하라. 이 상식이 무너진 시대라 할지라도 우리 성도는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