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인 전력이 약한 팀에게 붙는 표현 가운데 '언더독(underdog)'이 있다. '패배자' 혹은 '열등한 쪽' 정도로 바꿔 표현할 수 있는 이 단어는 스포츠에서 주로 쓰이는데 이 표현이 붙은 팀들이 호성적을 거두는 경우에는 보통 '다크호스'라는 수식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올 시즌 EPL은 그 어느 때보다 순위 경쟁이 치열하다. 특히, 오랫동안 흔들리지 않던 이른바 '빅4'의 아성이 흔들리는 것은 축구팬들의 관전을 더욱 즐겁게 하는 요소다. 맨유-첼시-아스널-리버풀로 대표되는 상위 4개팀과 중위권 팀들과의 격차가 비교적 컸던 최근 EPL의 역사를 감안하면 올 시즌 경합의 원인은 전통적 중상위권 강자이자 'BIG4' 진입에 관해서는 언제나 '언더독'이었던 애스턴 빌라와 에버턴의 약진이다. 또한, 하위권으로 분류되던 위건, 웨스트햄, 헐 시티, 풀럼의 강세도 중위권 혼전을 더욱 강화하는 변수로 등장해 팬들을 즐겁게 만든다. 오늘은 '언더독 반란'을 주도하는 이 팀들의 숨은 주역들을 살펴보려 한다.
애스턴 빌라 (1월 28일 현재 리그 3위, 14승 5무 4패)
매년 'BIG4'를 위협할 제1후보로 꼽혔지만 늘 막판에 주저앉곤 했다. 하지만 올 시즌은 다르다. 질 것 같은 경기를 무승부로 만들거나 비기나 싶던 경기를 극적인 승리로 뒤집으면서 단숨에 4강에 진입했다. 첼시-리버풀과 함께 맨유의 뒤를 좇는 빌라의 기세는 시즌 초반 잠시 주춤했던 아스널을 제쳐두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어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가레스 배리 (Gareth BARRY) : 필드 플레이어 중에서는 올 시즌 최고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 중인 아그본라허(9골 3도움)와 함께 '유이한' 전 경기 출전 선수다. 전 경기 선발 출전했고 부상으로 중도에 교체아웃된 1경기를 제외하면 모든 경기를 풀타임 출전했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 리버풀 이적설이 대두됐지만 팀의 설득 끝에 잔류를 선택했고 빌라의 중원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왼쪽 수비수/미드필더 출신이지만 중앙으로 보직을 변경한 뒤 더욱 좋은 활약을 펼치는 중인데 정교한 왼발에서 뿜어져 나오는 슛과 패스는 빌라 공격의 시발점이다. 애실리 영, 아그본라허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슈팅 숫자(32)에서 보듯 공격 가담 빈도수도 매우 높은 편이다. 무엇보다 1998년 빌라 소속으로 성인 무대 데뷔전을 치른 이래 줄곧 팀내 터줏대감으로 군림해온 선수답게 비교적 어린 공격수들을 잘 이끈다는 점에서 빌라 전진의 주역으로 꼽을만하다.
애버턴 (1월 28일 현재 리그 6위, 10승 6무 6패)
기복이 심한 성적을 보이던 팀이지만 올 시즌은 시즌이 진행될수록 점점 더 강한 모습을 보이며 상위권 턱밑까지 치고 올라왔다. 챔피언스리그 진출 가능권인 4위와의 승점 차가 9점으로 크지만 최근의 상승세를 감안하면 이변도 가능하다. 모예스 감독의 명석한 지휘와 개별 선수들의 역량이 절묘하게 엮이면서 만만찮은 팀으로 거듭났다.
-마루안 펠라이니 (Marouane FELLAINI): 새로운 파트릭 비에라가 등장했다! 비에라(현 인터밀란, 전 아스널 미드필더)는 로이 킨(전 맨유 미드필더)과 함께 오랫동안 EPL을 대표하는 '박스투박스(Box-to-Box)' 미드필더였다. 넓을 활동 범위와 공수에 걸친 높은 기여도를 앞세운 현대 축구 '맞춤형' 미드필더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유형의 미드필더들은 소속팀의 역량을 크게 끌어올리는 '펌프'로 기능한다. 최근 은퇴를 선언한 토마스 그라브센(전 에버턴, 셀틱 미드필더) 이후 중앙 미드필더 자원의 부침이 심했던 에버턴은 올 시즌 팀 사상 최고액인 1,500만 파운드를 들여 데려온 벨기에 국가대표 펠라이니의 등장으로 상위팀과의 경합에도 밀리지 않는 허리를 구축했다. 194cm의 신장까지 비에라와 똑같은 펠라이니는 (이 역시 비에이라처럼) 카드를 많이 받는다는 단점을 제외하면 나무랄 데가 없는 선수다. 어느새 에버턴의 중추가 된 펠라이니의 존재는 팀 순위를 더욱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위건 애슬레틱 (1월 28일 현재 리그 7위, 9승 4무 9패)
시즌 전, 강등권 탈출이 현실적 목표로 보이던 팀이 리그에서 일곱번째로 빨리 승점 30점 고지를돌파했다. 아므르 자키의 초반 골 폭풍에 힘입어 강등권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위건은 10월 한달 간 벌어진 4경기에서 승점을 전혀 추가하지 못하며 흔들리나 싶더니 11월 이후 두달 동안 5차례의 1점차 승리를 비롯 총 6승을 추가하며 단숨에 7위까지 치솟았다.
-리 캐터몰 (Lee CATTERMOLE) : 미들즈브러에서 중원과 측면 미드필더를 오가며 주가를 높이던 유망주 캐터몰은 위건으로 이적한 뒤 중앙 미드필더로 완벽하게 자리를 잡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캐터몰의 변신에 힘입은 위건은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며 기분 좋은 순위 상승을 맛보는 중이다. 위건에서 팔라시오스와 함께 중원을 지키기 시작한 캐터몰은 놀라운 투지와 적극적 맨마킹으로 상대 공격의 맥을 끊는 역할을 모자람없이 수행하며 올 시즌의 새로운 발견으로 평가받고 있다. 캐터몰이 지금 같은 추세를 이어간다면 그의 잠재력을 완벽하게 끄집어낸 스티브 브루스 감독의 역량도 더 높은 평가를 받게 될 것 같다.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1월 28일 현재 리그 8위, 8승 5무 9패)
여름 이적 시장에서 주력 선수들을 대거 이적시킨 팀 정책에 반발해 사임한 커비실리 감독의 빈 자리는 커 보였다. 졸라 감독이 뒤를 이었지만 이탈자가 많았던 웨스트햄이 지도자 경험이 부족한 감독의 지휘 아래 중위권 위로 치고 올라오긴 어렵다는 게 중론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커비실리 감독 사임 당시 5위까지 치고 올라갔던 웨스트햄은 10월 한달간 4연패를 기록하며 10위권 바깥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힘겨운 연말을 어렵사리 버틴 웨스트햄은 크리스마스 이후 열린 4경기에서 3승 1무의 호성적을 거두며 10위권 안쪽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4경기 연속골을 터뜨린 이 남자가 있었다.
-칼튼 콜 (Carlton COLE) : 첼시의 유망주였지만 아브라모비치 시대와 함께 당도한 수 많은 스타 공격수들에 밀려 임대 생활을 전전하던 칼튼 콜. 2006년 웨스트햄 이적 후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하던 그가 올 시즌 드디어 잠재력을 만개하기 시작했다. 주전 공격수 딘 애시턴의 부상과 함께 본격적인 기회를 잡기 시작한 그는 졸라 감독이 부임한 이래 모두 7골(리그 6골)을 터뜨리며 웨스트햄 부활의 선봉에 나섰다. 190cm의 거대한 신장과 그 어떤 거대한 수비수와의 몸싸움에서도 밀리지 않는 힘은 여러 유명 팀들이 칼튼 콜 영입을 노린다는 보도가 쏟아지게 만들 정도로 매력적인 장점이다. 좋은 콤비를 이루던 크렉 벨라미가 팀을 떠나기는 했지만 스콧 파커, 디 미켈레, 일룽가 등 미드필드와 수비수들의 공격 지원이 여전히 든든해 부상만 없다면 올 시즌 두 자리 숫자 골은 무리없을 것으로 보인다.
헐 시티 (1월 28일 현재 리그 9위, 7승 6무 9패)
이들이야말로 제대로 된 '언더독'이 아닐까. 챔피언십리그(2부리그)에서, 그것도 힘겨운 플레이오프를 치른 뒤에 간신히 프리미어리그에 합류할 때만해도, 모두들 헐 시티를 가장 유력한 '꼴찌' 후보로 꼽았다. 하지만 시즌 초 무서운 돌풍을 몰아친 헐 시티는 한 때 리그 3위까지 치고 올라가는 이변을 일으켰고 지난 한달간 리그 5연패를 당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10위권을 벗어나지 않고 잘 버티는 중이다. 헐 시티 돌풍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은 것은 브라운 감독과 미드필더 제오바니지만 이 모든 이변의 핵심에는 4부 리그 시절부터 헐 시티를 이끌어왔던 터줏대감들이다.
-보아즈 마이힐 (Boaz MYHILL) : 터줏대감 가운데 올 시즌 공헌도가 높은 선수를 꼽으라면 골키퍼 마이힐을 빼놓을 수 없다. 헐 시티가 아직 4부 리그에 있던 2003년에 입단한 마이힐은 애시비, 도슨 등과 함께 팀이 프리미어리그까지 오르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올 시즌에도 무려 60개가 넘는 선방을 기록하며 헐 시티의 초반 돌풍을 이끌고 있다. 간혹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공중볼 다툼에 능하고 수비수들과 호흡을 잘 맞춘다는 평가 속에 주전 골키퍼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풀럼 (1월 28일 현재 리그 10위, 6승 8무 7패)
자. 10위 밖에 안되는 팀을 왜 집어넣었느냐고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이 계실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해해주시라. '풀럼' 아닌가! 지난 시즌 강등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프리미어리그 잔류에 성공했던 바로 그 풀럼 말이다. 사실, 풀럼의 올 시즌 기록은 보잘 것 없다. 현재 리그에서 20골도 넣지 못한 팀은 미들즈브러(18득점)와 풀럼(19득점) 뿐이다. 하지만 풀럼은 그보다 더 적은 실점(18골)을 기록하며 리그에서 네 번째(맨유-첼시-리버풀만이 풀럼보다 적은 실점을 기록 중이다)로 수비가 탄탄한 팀으로 불린다.
-브레데 한겔란트 (Brede HANGELAND) : 팀내 득점 1위가 4골에 불과한 풀럼에게 탄탄한 수비력은 든든한 '믿을 구석'이다. 그 중심에는 단연 마크 슈워처 골키퍼가 있다. 8차례의 무실점 경기를 이끌어낸 슈워처는 골이다 싶은 슛을 막아내며 팀에 올 시즌 6차례의 1골차 승리를 안겼다. 하지만, 한겔란트의 공을 빼놓을 수는 없다. 지금으로부터 꼭 1년 전에 풀럼 유니폼을 입은 이 노르웨이 거인(195cm)은 올 시즌 팬들이 뽑은 '이 달의 풀럼 선수'에 벌써 두 번이나 선정되며 높은 팀 기여도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상대팀의 장신 공격수들을 꽁꽁 묶는 대인 방어 능력이 돋보이는데 풀럼이 아스널과 위건, 토트넘 등을 꺾고, 리버풀이나 첼시, 애스턴 빌라 같은 강호들을 상대로 무실점 경기를 이끌어낸 데에는 그의 공이 절대적이었다는 게 중론이다. 공격 가담시 선보이는 헤딩력도 위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