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대부분 인문학 강의로 채워져 있다면 저녁 이후 시간은 공연과 스스로 즐길 수 있는 페스티벌 위주로 꾸려져 있다.일렁이는 배로 인한 어질증과 낮의 타이트한 강좌 욕심 때문에 3일차까진 녹초가 되었다
4일차 클래식 공연은 야무지게 맘잡고 나서보았다 낮에 식당에서 만난 장사익씨는 구수한 충청 사투리로 '저녁에 봬유'하고 인사를 내놓는 것에 맘이 움직였기도 했다.
1부는 태너 김태오 무대였고 2부에서 그를 볼 수 있었다.그 연세에도 그를 따르는 이들이 있어 나름의 팬더믹이 있었다. 플랭카드며 불빛봉을 흔들어대는 5~60대 팬들이란!! 오늘 만큼은 누구나 소녀소년들이다.
'너흰 늙어봤나 우린 젊어봤다'는 문구가 문득 떠오른다.다들 격랑의 시대를 거쳐 겨우 안정기에 접어든 이들만이 지닐 수 있는 평온함이 이 자리로 이끌었을 것이다.
클래식과 대중 문화와의 하모니는 그리 오랜 것은 아니었다. 수십년 전이었을 것이다.
성악가 박인수가 이동원가수와 결합해 정지용 시'향수'를 노래한 일을 두고 성악가들이 대놓고 격 떨어지는 일이라고 생비난을 했던 적이 있었다.
소프라노 백남옥씨의 인터뷰 내용도 당시 화제에 올랐다.내가 중2-3때였으니 예술이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았다 그 이후 백남옥씨는 무대에서 퇴출되었고 박인수 노래는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얘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흐르고~~~"
시로 암송은 어렵지만 노랫말로는 누구나 흥얼거릴 수 있는 그 노래를 떠올리면서 오늘 무대를 즐겼다
그러다 문득 또다르게 예술을 재인식하게 계기가 떠올랐다.
뺑뺑이 2년차ᆢ엄마 표현대로라면 '손목 하나 까딱 잘못 놀려' 들어간 서여중!! 후에 개칭되었지만 입학 당시는 남녀공인 '충무중학교'였다. 새로 맞은 뺑뺑이 1년차 위에 아직 3학년 시커먼 남학생들이 득실거렸다.
아이도 어른도 아닌 애매한 시기 수컷들을대한하는 나로선 도무지 '시커멓다'란 기억뿐이다. 무리 지어 시커먼 교복 차림으로 우~우 거리며 몰려다닐 뿐 개개인의 독특한 개체로서의 이미지는 남겨져 있지 않았다.
이것도 훗날 생각해본 것이지만 사립학교가 주는 특성이 있었다. 좋게 보자면 학생들에게 무한한 자유를 제공한 것이고 교육적 차원에서 보면 놓아 먹이는 방목 스타일의 교육이었다.
그러니 우린 늘 시끄러웠다. 교실에서든 운동장에서든 교사들은 또 늘 열의에 차 있었다. 행사도 많아 수업보다는 학생 전원을 동원한 여러 이벤트에 노출돼 있었다.
예를 들자면 필요 이상의 단체 영화 관람이 많다든지 불필요한 잡상인들의 상업 활동도 단체로 경청하게 한다든지 하는 일이 빈번했다.
초등때와 사뭇 다른 이 진풍경이 중학생이기 때문에 달라진 환경 때문인가 싶었지만 진여중 친구들과 말을 섞어보면 굳이 그것도 아닌 듯 했다.
강당도 없어 실내 행사조차도 운동장 맨 바닥에서 행했다. 비가 오면 모를까 월요일 아침 조회며 목요일 5교시는 어김없이 운동장에 전교생이 집결되어야 했다.
번연히 재단이 있고 이사장이 당시 지역구 국회의원이었는데도 삼류 학교에 대한 투자는 인색했던지 교내 교육 환경은 그 지경이었다.
입학한지 옳게 한 두 달이나 됐을까..
초등 이후로 쭉 친한 친구인 민정이가 발레복과 토슈즈 차림으로 발레 공연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전날부터 이 친구 걱정은 태산이었다.
여직 준비된 무대에서만 서봤지 전교생 앞에서 그것도 운동장 맨 땅 공연은 처음이라 어찌해야 할지 난감한 모양이었다.
아직 꽃샘 추위도 가시지 않은 초봄 훤한 대낮에 조명도 없이 노출 심한 발레복 차림이라니.. 그 사위스러움은 우리도 아찔하게 만드는데 그 시커먼 무리들 앞에서라니 말이다.
왜 내가 나서게 되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옇든 발레를 그렇게 선보인다는 것이 모욕적인것 같고 늘 고상해야 할 친구를 학교가 싸구려 취급하는 것 같아 울컥한 맘이 날 분연히 나서게 했던 것일까?
"말이 안됩니다. 발레를 운동장에서 하다니요?
민정이가 어떨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담임 선생님 그 특유의 큰 소리는 치지만
악의는 없는 빙글거리는 표정으로 ''마~~~가!!!''를 연발하셨다. 굴하지 않고 나서기를 반복하자 생활부장 선생님이 길다란 작대기를 휘휘 저으며 나를 당신 쪽으로 몰아세우시는 것이었다. 내심 죽었다 싶었다.
교무실 통틀어 가장 무서운 분이었기 때문이었다. 1학년 우릴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벌써 선배들로부터 그 악명은 익히 들은 터였다.
"니가 하는 말 내ᆢ 들었다. 니는 예술이 뭐라 생각하노? 문화란 것이 뭐라 생각하노 말이다. 니가 보기엔 저 오빠야들이 다 불량스러버 보이제? 그래 보일끼다 아마도!!
에..나는 이래 생각한다. 저노마들이 언제 발레 공연을 한 번 봤것노? 언제 차이콥스키 호두까기 인형곡을 들어봤것노? 지금 저래 보이도 쟈들이 난중에 어떤 삶을 살란고 우리가 우찌 알것노? 설사 형편 없이 어디 뒷구석에서 힘들게 산다케도 쓱 지나가다가 음악회 무용 발표회 같은 포스터를 함 볼 거 아이것나~~
그럴 때 글마들도 한 번은 생각 안해 보것나!!
아! 옛날 그 때 내 앞에서 다리를 치켜 들고 춤을 추던 이쁜 후배 ..그 발레하던 여학생!!"
카고 말이다. 그라믄 그 아 맘이 한 때 훅 불고 지나가던 바람이었다 카더라도 맘 한 편이 따땃 안하것나? 예술은 그런거거든!
문화는 바로 그런거거든!!!"
그 일장 훈시를 듣는 내내 대드느라 앙 다물었던 양 어금니에서 연신 신물이 괴오르고 있었다. 말이 주는 감동이란 그런 것이었다. 무섭고 서슬퍼런 선생님도 한거풀만 벗겨 들어가보면 저런 보드라운 휴머니즘이 깔쭉한 과즙처럼 배여 있는 것을!
나는 초등때 당치 않게 피아노며 첼로들을 하면서 각종 무대에도 서고 트이지 않은 귀로 음악도 듣고 자라긴 했다.
진고 뒤 돌산에 살았던 울 옆지기는 중학교 처음 들어가서야 진중 기악부가 있다는 것도 알았고 모자란 좌석 채우기용으로 강제 동원된 중앙 극장에 앉아서 클래식이란 것을 첨 들었다 한다.
그 때 감동을 여지껏 간직하면서 클래식 듣기를 즐긴다. 나이 지긋해지면서부터는 혼자 즐기기 아까웠는지 처음엔 흑백다방에서 기타리스트를 초빙하는 무대를 만들었다.
그 다음 해 두번째 무대는 좀 너른 곳으로 옮겨 진행해 보고 3년 되던 해에는 더 욕심 내 구민회관에서 개최했다. 자비와 몇 몇 친구들 후원으로 몇 년에 걸쳐 그런 행사를 진행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몇 번이 씨드가 됐는지 술 마시는 비용 조금씩줄이면 뜻깊고 좋겠다면서 제법 동참하는 고향 친구들이 늘어간다고 여간 즐거워하지 않았다.했다.그 다음 해부터는 이제 개최 비용 부담도 줄게 됐으니 나부터도 반대할 이유 없다고웃었다.
올해는 코로나 사태로 무산됐지만 시절이 좋은 때 흑백에서든 구민 회관에서든 챔버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섭외해 공연을 개최하는 날 우리 같이 발길해 보자.
예술이, 문화가 별스런 것이 아니고 우리 지척에 있는 삶의 일부인 것을..그래서 흑백이 있었던 고향 언덕이 예향으로 거듭나 어디서든 아름다운 선율에 잠긴 곳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