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명명
얼지 않은 항구…해군기지로서 중요한 역할
시내 어디든 100년 넘은 건축물 고스란히 남아
한인들의 항일독립운동 무장투쟁 중심 성지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의 주도이며, 옛 우리 한인들은 '해삼위'(海蔘威, 또는 海蔘)라고 불렀다.
1860년대 까지만 해도 청나라 영토였으나, 재정러시아가 슬며시 발톱을 내밀며 홀라당 삼킨 바람에, 조선은 녹둔도까지 빼앗긴 것도 모르고 있었다.
동해의 아무르만과 우수리만 사이로 뻗어 있는 반도 서쪽에, 졸로토이만을 감싸듯이 자리 잡고 있다. 1860년 러시아 군사기지로 세워져 '동방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블라디보스토크라고 명명했고, 러시아의 극동지방 남쪽 끝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얼지 않은 항구여서 해군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여 자연스럽게 항구가 됐다.
1922년 블라디보스토크의 반(反) 소비에트연방 혁명군이 점령해 해군 군사기지로 개발됐으며, 그 후 극동함대 사령부가 들어서면서 민간인과 선박 등을 통제구역으로 묶어 근 반세기 가량 정지된 상태로 블라디보스토크가 있어서 시내 어디를 가도 100년 넘은 건축물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철도 도시로서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동쪽 종점이며, 바로 옆에는 국제항이 있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역 건물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시발역인 야로슬라브스키 역과 비슷하게 17세기의 분위기로 지어졌다.
대합실 천장은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 양 도시의 상징물로 장식됐고, 내부의 예술적 감각의 디자인과 미술장식으로 그려진 그림은 미술관을 방불케 한다. 러시아 연방 극동지역의 교육·문화 중심지로서 극동과학센터와 극동공립대학교·의과대학·예술대학·공과대학·상과대학·선박공학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기관들이 있다. 문화시설로는 음악협회와 교향악단 및 극단, 지방 역사박물관과 태평양함대 역사박물관 및 수많은 도서관이 있으며, 유일하게 바다와 인접한 도시여서 여름휴가철에는 해수욕장은 러시아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의 일광욕 모습은 눈을 즐겁게 해준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우리 한인들의 항일독립운동의 무장투쟁 중심의 성지로 1904~1905년 러일전쟁 때는 이범윤의 충의대 고려인부대가 러시아군을 도와 적극 전투에 참가했으며,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 후 안중근 이상설 유인석 등 블라디보스토크 결집했다.
1910년 이범윤 유인석 홍범도 등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3도의군을 결성해 활동했으며, 1914년 교민수 6만3천명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이 건설되며, 1918년 4월 일본군은 ‘국제 간섭군’이라는 미명으로 연해주를 점령한다.
일본군과 러시아군간의 우수리스크지역의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킨 보복으로 1920년 4월4일 야간을 틈탄 일본군들은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등지에서 극동공화국 부대를 공격해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4월 5~6일에는 신한촌을 급습해 방화와 학살의 만행을 자행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 당시 신문사, 학교 등 문화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인데, 강제이주 등으로 중간의 큰 한 매듭이 중앙아시아로 넘어가는 바람에 재조명의 시각이 필요 하는 현장이다.
혁명광장 근처에는 바다와 경계에 있으며 어떤 날은 외국의 크루즈 선박이 도착해 고층빌딩처럼 한 순간에 생겼다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는 모습이 신기하게도 보인다.
이곳에는 해양공원이 조성돼 개선문, 잠수함 박물관, 제2차 세계대전 참전기념비, 태평양함대 사령부 등이 있어 군사문화에 익숙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바로 내 앞에 러시아 군함 수척이 떠 있으며, 등 뒤에는 하얀 파스텔톤의 태평양 함대 건물에서 경비를 선 해군수병이 사진을 찍고 구경을 하고 있는 필자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어 주눅이 들 정도다.
잠수함 박물관. 세계 2차 전쟁과 냉전시대와 C-56 잠수함은 현역으로 활동하다가 붉은 군대 태평양함대가 박물관을 만들어 육지에서 일반인에게 전시하고 있다. 제2차 전쟁당시 태평양 함대소속으로 독일군함 12척을 침몰시킨 전과를 가지고 있으며, 당시 전쟁승리를 기념하며, 그 시대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사진도 전시돼 있다.
그곳에는 해군 참전기념비가 함께 있어 2차 세계대전의 전사자 명단과 함께 꺼지지 않는 횃불과 함께 해군 전함에서 사용하던 함포도 함께 전시하고 있고, 개선문 옆에는 금빛으로 호화롭게 지어진 러시아 정교가 함께 있고, 혁명광장 건너편은 블라디보스토크 최고의 패션타운으로 걸어 다녀도 볼만하다.
인근에는 박물관과 무료입장의 향토박물관이 있는데, 아료쓰카야 거리와 스베트란사카야 거리가 맞닿는 곳에 있는 붉은 벽돌건물이다. 연해주 지방의 지리, 생물, 광물, 역사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시베리아 소수민족의 옷이나 일용품, 맘모스 이빨, 곰과 호랑이의 박제, 각종 광물들이 전시돼 있다.
또 시베리아철도 개통 당시 기관차에 사용했던 전조등, 건설할 때 죄수들이 신었던 족쇄 같은 것도 볼 수 있다. 특히 발해인의 생활에 대한 것도 전시돼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전 지역을 관망할 수 있는 독수리 전망대에는 러시아어의 창제자 동상이 있다. 키릴과 메포지 신부(神父) 두 사람의 동상, 서기 988년 무렵 그리스어 소문자를 가지고 키릴문자를 만든 두 사람의 신부가 시퍼런 태평양과 부서지는 파도와 눈부신 햇살을 마주하며 서 있다. 그리고 인근에는 극동공과대학도 있는데, 그곳에는 '러시아의 위대한 국민 시인 푸시킨의 커다란 흉상이 마치 러시아 정신의 완전한 표현하듯 있다. 그의 시에는 러시아의 자연, 러시아의 넋, 러시아의 언어, 러시아 성격 등이 맑고 깨끗한 언어들로 완벽하게 담겨져 있다. 푸시킨은 극동대학에서 2년간 있었다고 한다.
시장 뒤편 페르바야 레치카에 자리 잡고 있으며, 지금은 고급아파트 단지와 상가로 변해 있다. 갑작스런 블라디보스토크의 발전에 지금의 신한촌 기념비 주변이 어리둥절해진다.
이곳 개척리(開拓里)에 한인촌을 만든 것은 1874년이었다. 한인들은 1911년 형성된 신한촌과 구별해 구개척리라고 불렀고 신한촌을 신개척리라고 불렀다. 개척리는 한옥식 초가집 5채에 불과한 작은 거주지였으나, 점차 확대되어 1911년 폐쇄될 당시에는 400∼500채에 달하는 큰 마을이 됐다.
러시아 당국은 1911년 3월, 페스트 방지 같은 위생상 이유로 한인 거주지 개척리를 폐쇄하고 새로이 조성될 신한촌으로 이전할 것을 명령했다. 곧이어 형성된 신한촌은 순전한 러시아식의 건물들이 즐비해 구개척리와 크게 대비됐는데, 1914년 5월 당시 신한촌에 300채에 집과 3천명 남짓 거주하는 대규모 한인 집단이었으며,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땅할 때까지 러시아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상징이였다.
러시아에는 간판이고 안내문이고 영어가 없다. 러시아 키릴어를 알지 못하면 힘들다. 여행에서 듣지도, 말하지도, 쓰지도, 읽지도 못하니 어느 곳 하나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해변공원이 있다. 요트 수십 척이 떠있고, 해변의 공원매점에서는 러시아대게, 스노우크랩, 킹크랩을 파는데 가격은 엄청 싸다. 한번 삶아 냉동으로 판매 되므로 맛이 별로다.
박재완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