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회] 안공근의 혁혁한 항일운동
[16장] 안중근 의사의 유족 그 이후 2008/09/02 08:00 김삼웅안공근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서도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1926년 5월 경 조직된 독립운동촉성회 회장, 1926년 조카 안원생 등 청년들과 결사대 8인단 결성, 1927년 4월 한국유일독립당 집행위원, 1930년 1월 안창호, 김구 등 민족주의자 28명과 함께 한국독립당 창당, 1931년 11월 김구가 한인애국단을 창단할 때 핵심적인 역할 등을 하였다.
"한인애국단의 본부는 안공근의 집에 설치되었고, 따라서 한인 애국단의 중요한 일들은 안공근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1931년 12월 13일 이봉창의사의 선서식이 안공근의 집에서 거행되었고, 또 단원들의 통신 연락처도 안공근의 집이었다. 윤봉길의사가 출정에 앞서 태극기를 들고 찍은 사진은 안공근의 제2남 안낙생이 자기집에서 쵤영한 것이다. 안공근의 집은 프랑스조계 구를로 신천상리 20호였는데, 각지로 파견된 단원들이 이곳에서 통신연락을 하였다."(주석 9)
안공근의 독립운동은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김구의 최측근으로 한인애국단의 실질적인 운영자가 되었다. 윤봉길의거 뒤 김구가 가흥으로 피신할 때에 동행한 것을 비롯하여 그 이후 항주, 남경을 오가면서 김구와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중국 장개석정부와 연락관계의 역할을 도맡았다.
1933년 8월에 제약회사를 경영하면서 일제와 내통한 밀정 옥관빈을 처단한 사건을 주도하고, 1934년 12월 한인특별반의 후신인 한국특무대독립군의 관리와 운영의 책임을 맡았다.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보다 외곽에서 특무조직을 관리, 운영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1937년 7월에 한국국민당의 전위조직인 한국국민당청년당과 한국청년전위단을 조직하여 운영하였다. 전위단은 김구의 아들 김인과 자신의 장남 안우생 등이 실무조직책임을 맡아 수행하였다.
안공근이 독립운동 무대에서 퇴장한 것은 1937년 7월 이후 김구의 신임을 잃게 되면서였다.
'김구의 신뢰상실'을 두고는 견해가 엇갈린다. 중국정부로부터 독립운동기금의 창구역할을 해온 안공근이 이 독립자금 사용에 '전횡불륜(專橫不倫)'이 있었다는 것과, 중ㆍ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안중근의 가족을 상해에서 탈출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안공근과 김구가 갈라선 이유에 대해 중일전쟁 이후 안공근이 큰형의 가족을 상해에서 탈출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널리 퍼져 있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1937년 10월 일본군이 상해를 공격해 오자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을 제쳐두고 김구 모친 곽낙원만을 모시고 남경으로 나왔다. 당시 곽낙원은 안공근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보다 곽낙원의 안위를 중시한 셈이었다. 이로 보아 안공근의 김구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이후 김구는 다시 안공근에게 상해로 들어가 그의 가솔과 안중근의사의 부인을 모셔오도록 거듭 당부했으나 안공근은 자기 가솔만을 데리고 나왔다.(주석 10)
김구는 안공근이 안의사의 부인을 적지에 두고 나온데 대하여 호된 꾸지람을 하였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神主)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백범일지>)라고 질책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김구와 안공근의 고매한 인격을 만날 수 있다. 김구는 저기 어머니를 모셔온 안공근에게 안의사의 부인을 먼저 모셔오지 않았다는 꾸지람이고, 안공근은 자기 가솔보다 민족의 지도자의 모친을 먼저 모시고 전쟁터를 빠져나온 것이다. 보통 사람들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큰형의 가족을 데려오지 못하면 온갖 비난이 쏟아질 것임은 누구보다도 안공근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큰형의 가족을 피신시키지 못한 것은 이미 일제의 수중에 떨어진 상해의 현지 상황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만 명분과 도덕과 의리를 중시하는 김구는 이러한 상황을 고려치 않고 원칙론에 입각하여 안공근의 부도덕성만을 일방적으로 꾸짖는 말을 <백범일지>에 남겼다."(주석 11)
주석
9 - 오영섭, 앞의 책, 290쪽.
10 - 오영섭, 앞의 책, 300쪽.
11 - 앞의 책, 301쪽.
"한인애국단의 본부는 안공근의 집에 설치되었고, 따라서 한인 애국단의 중요한 일들은 안공근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1931년 12월 13일 이봉창의사의 선서식이 안공근의 집에서 거행되었고, 또 단원들의 통신 연락처도 안공근의 집이었다. 윤봉길의사가 출정에 앞서 태극기를 들고 찍은 사진은 안공근의 제2남 안낙생이 자기집에서 쵤영한 것이다. 안공근의 집은 프랑스조계 구를로 신천상리 20호였는데, 각지로 파견된 단원들이 이곳에서 통신연락을 하였다."(주석 9)
안공근의 독립운동은 줄기차게 전개되었다. 김구의 최측근으로 한인애국단의 실질적인 운영자가 되었다. 윤봉길의거 뒤 김구가 가흥으로 피신할 때에 동행한 것을 비롯하여 그 이후 항주, 남경을 오가면서 김구와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중국 장개석정부와 연락관계의 역할을 도맡았다.
1933년 8월에 제약회사를 경영하면서 일제와 내통한 밀정 옥관빈을 처단한 사건을 주도하고, 1934년 12월 한인특별반의 후신인 한국특무대독립군의 관리와 운영의 책임을 맡았다.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보다 외곽에서 특무조직을 관리, 운영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1937년 7월에 한국국민당의 전위조직인 한국국민당청년당과 한국청년전위단을 조직하여 운영하였다. 전위단은 김구의 아들 김인과 자신의 장남 안우생 등이 실무조직책임을 맡아 수행하였다.
안공근이 독립운동 무대에서 퇴장한 것은 1937년 7월 이후 김구의 신임을 잃게 되면서였다.
'김구의 신뢰상실'을 두고는 견해가 엇갈린다. 중국정부로부터 독립운동기금의 창구역할을 해온 안공근이 이 독립자금 사용에 '전횡불륜(專橫不倫)'이 있었다는 것과, 중ㆍ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안중근의 가족을 상해에서 탈출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안공근과 김구가 갈라선 이유에 대해 중일전쟁 이후 안공근이 큰형의 가족을 상해에서 탈출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널리 퍼져 있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1937년 10월 일본군이 상해를 공격해 오자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을 제쳐두고 김구 모친 곽낙원만을 모시고 남경으로 나왔다. 당시 곽낙원은 안공근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보다 곽낙원의 안위를 중시한 셈이었다. 이로 보아 안공근의 김구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이후 김구는 다시 안공근에게 상해로 들어가 그의 가솔과 안중근의사의 부인을 모셔오도록 거듭 당부했으나 안공근은 자기 가솔만을 데리고 나왔다.(주석 10)
김구는 안공근이 안의사의 부인을 적지에 두고 나온데 대하여 호된 꾸지람을 하였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神主)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백범일지>)라고 질책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김구와 안공근의 고매한 인격을 만날 수 있다. 김구는 저기 어머니를 모셔온 안공근에게 안의사의 부인을 먼저 모셔오지 않았다는 꾸지람이고, 안공근은 자기 가솔보다 민족의 지도자의 모친을 먼저 모시고 전쟁터를 빠져나온 것이다. 보통 사람들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큰형의 가족을 데려오지 못하면 온갖 비난이 쏟아질 것임은 누구보다도 안공근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큰형의 가족을 피신시키지 못한 것은 이미 일제의 수중에 떨어진 상해의 현지 상황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만 명분과 도덕과 의리를 중시하는 김구는 이러한 상황을 고려치 않고 원칙론에 입각하여 안공근의 부도덕성만을 일방적으로 꾸짖는 말을 <백범일지>에 남겼다."(주석 11)
주석
9 - 오영섭, 앞의 책, 290쪽.
10 - 오영섭, 앞의 책, 300쪽.
11 - 앞의 책, 3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