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고린도전서 47 고린도전서 16:1-12 / 2017.03.29 - http://lamp.kr/lamp-sermon/?p=10719
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서 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람이라 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9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11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고린도전서와 후서로 두개의 편지가 우리 성경에 들어있는데, 이 앞선 편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헌금에 관한 얘기가 나오는데,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운 형편을 돕기 위하여 각 교회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헌금을 모으라고 여기 오늘 본문에는 갈라디아교회에도 그렇게 말했고 고린도교회에도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은 로마서 15장 26장 이하에 있습니다.
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사귐으로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예루살렘에 가노니 26 이는마게도냐와아가야사람들이예루살렘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서바나로 가리라 29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이건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여기서도 예루살렘 구제헌금 얘기를 꺼내는데, 예루살렘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하층거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특별히 예루살렘교회의 어려움을 유대민족을 넘어서 로마제국 안으로 들어가 지금의 터키, 소아시아와 여기 등장하는 지금의 그리스인 북쪽 지방인 마게도냐, 남쪽 지방인 아가야,, 옛이름이죠. 그리고 이제 서반아로 갈려고 합니다. 로마를 지나 그리스를 지나 이탈리아를 지나 서반아 (그때 그곳이 땅끝인 스페인)까지 가고싶어 하고 그 일에 로마교회 보고도 자기를 도와달라 그러고, 고린도교회 보고도 자기를 도와달라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이 헌금과 구제문제는 그 교회의 중요한 신앙행위 중 하나이죠! 기본으로 헌금은 여기에 등장하는 것과 달리 본질적인 것은 예배에 자신의 제물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행위가 헌금이고, 지금 여기서 말하는 건 구제헌금입니다! 그 둘을 구분해서 그 이상의 헌금을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당연히 드려야할 예배의 예식과 신앙고백으로써의 헌금과 지금까지 구제를 위하여 더욱 내어놓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얘기하면 결국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이 일, 자기가 고백하는 일에 시간과 돈을 내지 못하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현실생활 속에서 결국 무슨 문제와 싸우게 되냐하면 여러분들이 어디에 돈을 제일 많이 쓰는가를 보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어디에다가 쓰는지 보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여러분을 닥달할려고 그러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다른 것도 못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알고 있어야 됩니다. 이렇게 집지않고 넘어가면 나중에 아무 감각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내서 남성성가대에도 들어오시고,, 음악성을 요구하지도 않고,, 얼마나 좋은가 생각해 보십시요. 가끔 이렇게 공연도 하고,,여러분들이 어디서든지 봉사를 하고 시간을 내어서 신앙행위를 교회에 와서 하시지않아도 좋으니까, 부디 일년에 몇번이라도 생각을 하셔셔 참여하시는 일을 꼭 하십시요. 구제하는 일은 우리에게는 바울이 고린도교회나 갈리디아교회나 로마교회에 예루살렘교회를 도우라고 한 것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복음이 이방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역사적 현실적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어떤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 마음에 들지않는,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속에서 일을하고 계시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한창 시끄러운데 틀을 바꾸는 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 아니라, 틀은 세상이 하게 놔두고 그 속으로 집어넣어십니다! 예수께서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는 유대에 예수를 보내어 목수의 아들로, 그 직업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기대하지 않는 신분과 모양으로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지금 어떻게 되어야 되느냐? 그것은 정치적 문제이고 또 국민으로써의 책임이지만, 기독교인으로써는 이 문제를 갖고 언성을 높이시면 안됩니다. 여러분들의 개인 주장을 어떻게 하셔도 좋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보는 바와같이 폭력이 되고 증오가 되는 건 우리 딱 질색입니다. 무책임 해지고 도망간다는 말도 하시면 안됩니다. 그건 마음에 갖고 계시고, 기독교인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 여러분이 선교사라는 걸 잊지마십시요! 아프리카에 가야 선교사이고, 이슬람권에 가야 헌신이 아니라, 이 세상에 하나님이 하나님 모르는 세상에 여러분을 보내서 하나님이 일을 하신다! 라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여기 오늘 본문에서 얘기하는 예루살렘교회에 보내는 구제헌금 이야기입니다!. 생각할 것 많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우리가 지금 전서를 주욱 1장부터 15장까지 해오고 지금 16장 편지말미에 마루리 인사와 마루리로 사사로운 자기 소식들을 전하고 있는데, 이 전에는 고린도전서가 이렇게 긴 이유가 거기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일단 분파가 있었고 그리고 바울에 대한 적대적 오해 내지는 시험이 있었고, 또 음식 먹는 문제에 있어서 제사음식을 먹어도 되냐 먹으면 안되냐, 는 문제도 있었고, 결혼을 하는 게 낫냐 안해야 되느냐도 나왔고, 여러가지 문제가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교회에 일치, 한마음을 주시는 것은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정도입니다! 교회는 다 다릅니다! 그러나 그걸로 묶여있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 오늘 분문에 의하면 이렇게 말하는 것, 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서 마게도냐는 북부지방이고 고린도는 남쪽 아가야에 있습니다. 마게도냐를 지나서 이제 너희에게 가겠답니다. 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아까도 그 얘기가 있었죠. `로마교회에도 서반아까지 가야겠는데, 나를 너희가 보내줬으면 좋겠다, 지원을 해다오` 그런 뜻입니다. 그런 다만 재정적 지원의 의미를 넘어서서 교회가 가져야하는 선교적 사명에 관한 것입니다! 선교적 사명이란 우리가 이 큰 틀을 바꾸는 권력과 무슨 체제의 이념의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데에 있어서 예수를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짧은 생애 속에서, 그리고 제한된 국지적 지리적 속에서 전세계를 구원하는 역사를 이루어내고, 그것을차츰 이렇게 키워서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렇게 그 약속이 역사 속에서 진행되어 온 걸 우리가 보고있는 겁니다!! 우리가 그 열매 아닙니까? 그 약속의 이 내용에 속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신다는 걸 알고 있어야되는 그 문제에 대한 결론을 다시한번 강조하는 셈입니다!
그러면서 7절에, 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람이라 여기에 함께 머물기를 바라는 내용 속에는 고린도교회와 이렇게 편지로만 얘기해서는 안되는, 더 해야할 얘기들이 있는겁니다. 가장 중요하게 분파문제나 사도직에 대한 오해, 사도직에 관한 오해는 고리도후서에 가면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어서 나올텐제, 고린도교회가 고린도라는 이 그리스라는 지역이 우리 잘아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그 생산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들은 신이 당연히 초월자이고 신의 사자면 신과 인간의 중간쯤에 어떤 지위와 형체를 가져야되는데, 사도바울은 전혀 또 우리 기독교는 전혀 그런 권력을 갖고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이제 시비거리가 됐죠. 모든 진짜 신의 사자라 그러는데 왜 어줍잖은 신의 사자만도 못하냐! 이거죠!
그 계룡산에 가서 용하다는데 들어가면요 다 맞추어요! 이름도 맞추고 어디에 살다가 무슨 문제로 왔는지, 그런데 교회에 오면 목사들은 모르더라고요. ^^ 이런걸 우린 아주 심각한 문제이죠. 그런데 그들이 우리를 놀래키고 나서 그 다음으로 인도할 길이 없다는 걸 알아야 돼요. 그들을 공포 속에 묶어놓죠! 그래서 다 벌벌 떨죠. 날짜 받아야 되고, 뭐 언제나 그것 봐야되잖아요! 결혼할 때 이빨 수 세어오라 그러고,, ^^ 우린 그렇게는 아니죠. 우린 시작은 정말 어떡하다 시작했는지 알 수 없는데, 들어오면 넓고 크고 깊고 행복스럽고 변화되고 얼마든지 열려있죠.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문제에 있어서 사도바울이 이런 문제에 `너희 그러면 안된다, 그러면 안된다,,` 분파문제도 왜 자꾸 강조를 하게되느냐하면, 고린도전서 3장,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육의사람이 아니리요 5 그런즉아볼로는 무엇이며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바울이 하고싶은 얘기는 분파의 약점은 그 보이는 수준 하나에 매여있게 된다는 거죠! 누구를 선호하고 그 뒤에 가서 줄을 섬으로써 기독교신앙이 한 인간에게서 맺은 열매에 국한 된다는 거죠!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누가 도움을 주는 거죠.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의 동역자였다는 거죠. 그가 물을 주고 심고 했을지 모르지만,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입니다! 바울과 아볼로의 잡혀있지 마라! 더 커라!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 그 도움 그걸 받아야지, 그 도움을 받지않고 줄을 서서 누가 더 낫냐, 는 어떤 주도권, 어떤 허여심 때문에 싸움으로써, 신앙이 정말 자라나야할 곳에서 자라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번에 가면 지나가는 듯이 들러지않고, 이번엔 좀 앉아서 너희들을 제대로 이번엔 한번 깊이 이야기를 나누고, 기독교 신앙이 뭔지, 내가 뭘 전했는지, 너희가 어디까지 왔는지, 서로 좀 얘기를 좀 하자! 이렇게 된 겁니다! 좋죠? 이게 옳고, 저게 옳고, 법조문 같고, 다그치듯이 누구를 심판하고 벌주기 위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자식을 기르는 목회심정의 서신인 겁니다!
서신! 어떤 법령, 무슨 교훈, 정답,, 이 아니고, 여러분 각각이 자신을 위해서 이 성경을 읽어야되는데, 우린 신앙을 자기를 위해서 이렇게 따뜻한 사랑과 격려와 그런 진심들로의 은혜가 없으니까, 어떤 정답들을 나열하는 정도로 멈추어 버려서 제가 종종 화를 냈던 기억이 납니다. 자기를 키우는 일에 성경이 쓰여지지않고, 심사하는 일에 쓰이는 일들은 하지 마십시요! 그건 만일 그런 일이 생기면 그건 하나님께 맡기십시요! 거기에 매달려서 여러분이 자라나지 못하는 것이 제일 안타깝습니다! 자라십시요! 시험 잘 봐서 일등하지 마시고, 개구장이라도 좋으니까 자라십시요! 커십시요! 그것이 성경이 어디서나 하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시간이고 현실입니다! 현실은 우리를 괴롭히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한 정황입니다!! 그러니 겁을 내지 마십시요!
우리 모두에게 이 세상이 겁을 주는 것밖에 없고, 이 세상엔 해답이 없고, 만족을 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뿐입니다. 그럼 그런 고통과 불안한 현실이 왜 필요하냐? 거기서 하나님이 우리를 중요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게 뭐죠? 우리의 소원 보다 큰 하나님의 개입과 의도와 실제적인 변화가 있다! 회복이 있고, 나아감이 있다! 그런 것이 없다면, 기독교가 이천년을 이어올 수 없습니다! 어느 한시대 잠깐 그때의 어떤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거짓말하다가 속고 속이다가 없어지고 말죠! 모든 이단은 대를 잇지못합니다. 이건 이천년의 시간동안, 아니 사천년의 시간동안 구약까지 합쳐서 인류 모든 인생의 그 시대의 시험과 의혹과 도전 앞에 답이 되어와서, 우리에게 까지 아직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라고 고백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굉장하죠! 그러니 여러분도 그 이름에 여러분이 끝에 붙도록 그 나열에 들어가도록 하여야 됩니다! 그래서 이 일은 고린도전서 4장에 와서는, 이렇게 얘기했었죠.
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사도바울이 많은 스승이 있을지라도 아비가 아비역을 맡은 자는 흔치않다, 나는 너희에게는 아버지같은 사람이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작은 아버지입니다.^^ 목사의 정당안 결말은 그렇습니다! 시작은 진리와 또 분명한 어떤 진전과 그런 것으로 시작했을지라도, 마지막에 우리의 본질적 명예는 가르침이 아니라, 부모된 마음에 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바울이 얘기하는 '너희 말이 아니라 너희의 능력을 알아보겠다' 하는 여기서의 능력은 신앙능력입니다. 신앙의 능력이란 외적조건의 차이는 아무 문제가 되지않습니다. 그 조건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견디고 있는가를 보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책임이 있는 것이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넉넉하면 나누셔야되고, 부족하면 깊어지셔야 됩니다. 넉넉하면 잘 깊어지지 않습니다! 넉넉하면 나누는 것이 어렵습니다! 부족하면 얼마든지 나눕니다. 어차피 없으니까, 그게 왜냐하면 마음밖에 나눌 게 없거든요! 직접안해도 되니까, 그런데 정말 나눌만큼 생기면 나누는게 그렇게 어렵습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나누어야되는 입장에 있는 것과 부족한 입장에 있는 것이 차이가 없다는 얘기를 할려고 이 예를 든 것입니다! '넉넉한데 왜 안해?' 이렇게 쳐다볼 것 없습니다! '부족한데 왜 부족해?' 라는 시선, 여러분 받기 싫으실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잘못 믿어서, 내가 게을러서 그 꼴이야' 그건 정답같지는 안됩니다. 그런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적습니다!
부족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조건을 요구하셨을 수 있다고 생각하셔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일차적으로 '내가 게을렀는가, 내가 판단을 잘못했는가?' 라고 물어봐야 되는건 필요한 일이지만, 더 깊게는 이 질문을 해야됩니다! `왜 이렇게 됐느냐?` 에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선 어떻게 해야 되는가?`라고 물어보셔야 정당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억울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아팠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 그게 신앙의 실력이죠. 그 모든 것을 극복한 것이어야 되죠!! 극복했다는 건 해결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흔들리지 않는 인생이고 존재고 그때의 자리이죠! 그걸 해내셔야 됩니다!
그게 가능성이 있던 나이에서는 그렇게 함으로써 더 나은 조건과 지위에 가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따라들어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드니까, 좋은 게 있습니다. 이 마음을 가지는 게 명예입니다! `아 하나님이 이거를 원하셨구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깨우쳐서 더 나은 지위가 되고, 더 뭔가를 해결해내는 능력과 결과를 보기원하는 것말고, 이걸로 감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잘잘못을 하나님이 묻기 보다, 잘못한 것과 잘한 것 모두를 가지고 나를 결과시키고 있다고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지나온 세월이 잘한것이 뭐였고 못한 것이 무엇이었는가가 이제 와서는 평가가 전혀 달라졌습니다! 분노하고 변명하다가 원망하다가 마는 세월을 보냈는데, 그것까지도 써서 한번 그러고 마는 것이 아니라, 긴 세월동안을 자신의 못난 것을 하나님이 묵묵히 받아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서 깊어지고 넓어지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입니다!
`네가 사는 시대에 네가 모든 것을 해결하라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그렇게 얘기하시는 겁니다. 바울이 지금 그렇게 우리에게 이 편지를 쓰고있는 것이며, 여기있는 바와같이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너희의 말이 아니라 너희의 능력을 내가 보고싶다!` 그 말은 `능력을 길러라!` 죠! 무슨 능력? 신앙고백이 여러분 셍활에 가장 큰 무기이고, 보물이고 자신의 감사고, 자신의 자랑이어야하는 것이죠!
어떤 식으로 그것을 발휘한다고요? 여러분들의 억울함! 여러분들의 어떤 책임들! 여러분들의 원망 같은 것들! 을 다 이게 붙잡아서 예수께서 사신 것같이, 하나님이 그렇게 사는 자로 우리 생애를 살아내야죠! 억울하게, 아무것도 아니게,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이 기적을 이루신다는 걸 믿고 사는거죠!! 죽은 다음에 싹이 날지 모르죠!! 예수님이 그랬죠! 죽어서 장례되어서 부활이 일어나죠!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시고! 그 비난 받으시고 죽어버리시고 장사되고 사흘만에 부활하시는거죠!!
여러분 이`내 말 안들으면 너 죽어! 너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비겁하게 살지 않고 이길 수는 없어! 네가 혼자 잘난 척하고는 아무 보상도 없어!` 라고 말하는 것이 세상이 진실이듯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일하신 것은 그것보다 더 큰 진실입니다! 그 진실에서 사실에서 담지 못했던 어떤 영혼에 속하는, 가장 영광된, 가장 복된 것들을 담을 수 없었던 진실을 넘어가 진정한 진실을 만드신 것이 이겁니다! 그것은 지금 예수 안에서 그리하신 것같이, 오고오는 모든 시대 속에서 모든 기독교 신자들에게 허락되어 있고, 요구되어 있는 것이죠! 그걸 우리가 살아내야 됩니다.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죽고 난 다음에 천국에서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인생이 다른 겁니다! 다르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능력이 이런 고단한 어려움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걸 이런 문제에서 확인합니다. 가장 큰 그 기독교신앙인의 특징이 뭐냐하면, 용서입니다! 세상에는 용서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심는대로 거두는 곳입니다. 세상은 약육강식이고 적자생존입니다! 상대방 경쟁자를 물리치고 그 위에 서서 부르는 노래가 승리입니다.
우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린 용서입니다. 용서하고 보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용서문제는 자기가 용서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용서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우월감을 용서라는 이름으로 포장을 해서 하는 일은 있어도, 용서자체를 할 수 없습니다! 용서는 누가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용서가 필요하다는 걸 아는 행위인 것입니다! 왜 그렇죠? 우리가 용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승리를 행복을 만족을 감사를 맹예를 영광을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 반대로 넘어가야죠! 우린 못났습니다! 그걸 확인시키는 것이 이런 모든 세상에서의 위협입니다. 우리는 공포 아래 놓여 있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핵심된 단어들, 사랑, 믿음,, 사랑의 반대말이 공포라고 한 말 기억하시죠! 사랑은 공포가 없습니다. 사랑에는 공포라는 단어가 들어올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이 공포로 우리를 강요한 것과 다른 사랑으로의 초대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이 신앙을 납득하고 따라오기가 만만치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방법은 시간입니다! 늙으면 저절로 여기에 옵니다. 저절로라는 말은 약간 과장한 건데, 죽을 날이 몇일 안남으면 원망같은 건 다 관둡니다. 예수 안 믿은 사람들의 시체와 예수 믿고 죽은 시체가 다르다는 게 여기서 다릅니다! 원망이 남은 체 죽은 자와 원망을 버리고 죽은 자의 차이가 얼굴에 딱 나옵니다! 그건 염습하는 사람들의 고백이니까요!
이상하게 한국교회에는 그 얼굴을 잊어버렸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솔직하게 써서 헌금함에 다 넣어주십시요. 뭐가 여러분들의 얼굴에서 웃음과 평화와 감사를 뺏아갔습니까? 한국교회가 잘못 가르쳤습니까? 아니면 뭐에서 납득할 수 없는 뭐가 있어서 여러분들이 가진 신앙고백을 누리지 못하십니까? 심각하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의 인생을 반추해 보십시요! 세상이 도대체 여러분을 어떻게 위협과 공포 속에서 흔들어 놔서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었는지! 명예롭게 영광스럽게 살 틈이 없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요! 전철타면 다 질색인게 뭐죠? 물론 휴대폰하는 그 꼴 보기싫겠지만, 일단 다 인상쓰고 있는 게 제일 꼴보기 싫습니다. `건들지 마라!` 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건 현대사의 가장 큰 병입니다! 그것부터 치워야죠! 여러분 조금만 얼굴을 펴시죠! 예수 믿는 사람 아닙니까! 잘 안되십니까? 제가 웃는 사진 하나 드릴까요? ^^ 여러분 스스로를 위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경계와 의심과 긴장과 공포의 표정을 하고 있다는 걸 여러분 스스로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봐도 놀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부모된 마음으로써 예수를 믿고도 그것 하나 넘어가지 못하면, 나머지는 무슨 얘기를 해도 사실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 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는 역사가 유지되는 역사 속에서 기적이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일부러 나서시지 않아도 됩니다. 전도지 돌리고 상담하고,, 안하셔도 됩니다. 표정 하나부터 바꾸셔야 됩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넉넉한 표정이지?` 라고 묻게 하셔야 됩니다. 그렇게 하십시요! 그래서 뒤를 미행해서 `결국 교회가는구나` 라고 확인하게 하셔야 됨니다!
이건 편지입니다. 이런 따뜻한 마음으로 모두에게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신 그 감격과 그 내용으로의 항복이 묻어나는 편지입니다! 이것은 법조문이 아닙니다! 이건 무서운 경고가 아닙니다! 이건 다 고린도교회에 유익을 바라는, 그들을 위하여 목숨을 건 사랑으로 쓴 편지입니다! 성경을 그렇게 읽으셔야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 또한 그렇게 사셔야 됩니다! 그런 은혜가 여러분과 여러분 생애에 허락되어 있고 요구되어 있고 누릴 수 있다고 꼭 깊이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고, 세상의 폭력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는 반전과 부활과 승리는 하나님의 영광이었고 능력이었고 지혜였으며, 우리의 삶 속에서 요구되고 있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클 것입니다! 깊어질 것입니다! 채위질 것입니다. 손해보는 자리는 없을 것입니다! 힘들다고요? 힘들지 않는 것은 다 가벼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영광의 무게를 담고 깊이고 충만케 하신다는 것 기억하여 우리 인생을 멋지게 살아내는 우리 교우들 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http://lamp.kr/lamp-sermon/?p=10719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수요예배 설교 녹취록 이택자
다시 보는 고린도전서 47 고린도전서 16:1-12 / 2017.03.29 - http://lamp.kr/lamp-sermon/?p=10719
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서 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람이라 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9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11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고린도전서와 후서로 두개의 편지가 우리 성경에 들어있는데, 이 앞선 편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헌금에 관한 얘기가 나오는데,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운 형편을 돕기 위하여 각 교회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헌금을 모으라고 여기 오늘 본문에는 갈라디아교회에도 그렇게 말했고 고린도교회에도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은 로마서 15장 26장 이하에 있습니다.
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사귐으로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예루살렘에 가노니 26 이는마게도냐와아가야사람들이예루살렘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서바나로 가리라 29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이건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여기서도 예루살렘 구제헌금 얘기를 꺼내는데, 예루살렘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하층거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특별히 예루살렘교회의 어려움을 유대민족을 넘어서 로마제국 안으로 들어가 지금의 터키, 소아시아와 여기 등장하는 지금의 그리스인 북쪽 지방인 마게도냐, 남쪽 지방인 아가야,, 옛이름이죠. 그리고 이제 서반아로 갈려고 합니다. 로마를 지나 그리스를 지나 이탈리아를 지나 서반아 (그때 그곳이 땅끝인 스페인)까지 가고싶어 하고 그 일에 로마교회 보고도 자기를 도와달라 그러고, 고린도교회 보고도 자기를 도와달라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이 헌금과 구제문제는 그 교회의 중요한 신앙행위 중 하나이죠! 기본으로 헌금은 여기에 등장하는 것과 달리 본질적인 것은 예배에 자신의 제물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행위가 헌금이고, 지금 여기서 말하는 건 구제헌금입니다! 그 둘을 구분해서 그 이상의 헌금을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당연히 드려야할 예배의 예식과 신앙고백으로써의 헌금과 지금까지 구제를 위하여 더욱 내어놓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얘기하면 결국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이 일, 자기가 고백하는 일에 시간과 돈을 내지 못하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현실생활 속에서 결국 무슨 문제와 싸우게 되냐하면 여러분들이 어디에 돈을 제일 많이 쓰는가를 보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어디에다가 쓰는지 보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여러분을 닥달할려고 그러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다른 것도 못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알고 있어야 됩니다. 이렇게 집지않고 넘어가면 나중에 아무 감각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내서 남성성가대에도 들어오시고,, 음악성을 요구하지도 않고,, 얼마나 좋은가 생각해 보십시요. 가끔 이렇게 공연도 하고,,여러분들이 어디서든지 봉사를 하고 시간을 내어서 신앙행위를 교회에 와서 하시지않아도 좋으니까, 부디 일년에 몇번이라도 생각을 하셔셔 참여하시는 일을 꼭 하십시요. 구제하는 일은 우리에게는 바울이 고린도교회나 갈리디아교회나 로마교회에 예루살렘교회를 도우라고 한 것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복음이 이방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역사적 현실적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어떤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 마음에 들지않는,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속에서 일을하고 계시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한창 시끄러운데 틀을 바꾸는 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 아니라, 틀은 세상이 하게 놔두고 그 속으로 집어넣어십니다! 예수께서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는 유대에 예수를 보내어 목수의 아들로, 그 직업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기대하지 않는 신분과 모양으로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지금 어떻게 되어야 되느냐? 그것은 정치적 문제이고 또 국민으로써의 책임이지만, 기독교인으로써는 이 문제를 갖고 언성을 높이시면 안됩니다. 여러분들의 개인 주장을 어떻게 하셔도 좋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보는 바와같이 폭력이 되고 증오가 되는 건 우리 딱 질색입니다. 무책임 해지고 도망간다는 말도 하시면 안됩니다. 그건 마음에 갖고 계시고, 기독교인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 여러분이 선교사라는 걸 잊지마십시요! 아프리카에 가야 선교사이고, 이슬람권에 가야 헌신이 아니라, 이 세상에 하나님이 하나님 모르는 세상에 여러분을 보내서 하나님이 일을 하신다! 라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여기 오늘 본문에서 얘기하는 예루살렘교회에 보내는 구제헌금 이야기입니다!. 생각할 것 많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우리가 지금 전서를 주욱 1장부터 15장까지 해오고 지금 16장 편지말미에 마루리 인사와 마루리로 사사로운 자기 소식들을 전하고 있는데, 이 전에는 고린도전서가 이렇게 긴 이유가 거기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일단 분파가 있었고 그리고 바울에 대한 적대적 오해 내지는 시험이 있었고, 또 음식 먹는 문제에 있어서 제사음식을 먹어도 되냐 먹으면 안되냐, 는 문제도 있었고, 결혼을 하는 게 낫냐 안해야 되느냐도 나왔고, 여러가지 문제가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교회에 일치, 한마음을 주시는 것은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정도입니다! 교회는 다 다릅니다! 그러나 그걸로 묶여있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 오늘 분문에 의하면 이렇게 말하는 것, 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서 마게도냐는 북부지방이고 고린도는 남쪽 아가야에 있습니다. 마게도냐를 지나서 이제 너희에게 가겠답니다. 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아까도 그 얘기가 있었죠. `로마교회에도 서반아까지 가야겠는데, 나를 너희가 보내줬으면 좋겠다, 지원을 해다오` 그런 뜻입니다. 그런 다만 재정적 지원의 의미를 넘어서서 교회가 가져야하는 선교적 사명에 관한 것입니다! 선교적 사명이란 우리가 이 큰 틀을 바꾸는 권력과 무슨 체제의 이념의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데에 있어서 예수를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짧은 생애 속에서, 그리고 제한된 국지적 지리적 속에서 전세계를 구원하는 역사를 이루어내고, 그것을차츰 이렇게 키워서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렇게 그 약속이 역사 속에서 진행되어 온 걸 우리가 보고있는 겁니다!! 우리가 그 열매 아닙니까? 그 약속의 이 내용에 속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신다는 걸 알고 있어야되는 그 문제에 대한 결론을 다시한번 강조하는 셈입니다!
그러면서 7절에, 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람이라 여기에 함께 머물기를 바라는 내용 속에는 고린도교회와 이렇게 편지로만 얘기해서는 안되는, 더 해야할 얘기들이 있는겁니다. 가장 중요하게 분파문제나 사도직에 대한 오해, 사도직에 관한 오해는 고리도후서에 가면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어서 나올텐제, 고린도교회가 고린도라는 이 그리스라는 지역이 우리 잘아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그 생산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들은 신이 당연히 초월자이고 신의 사자면 신과 인간의 중간쯤에 어떤 지위와 형체를 가져야되는데, 사도바울은 전혀 또 우리 기독교는 전혀 그런 권력을 갖고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이제 시비거리가 됐죠. 모든 진짜 신의 사자라 그러는데 왜 어줍잖은 신의 사자만도 못하냐! 이거죠!
그 계룡산에 가서 용하다는데 들어가면요 다 맞추어요! 이름도 맞추고 어디에 살다가 무슨 문제로 왔는지, 그런데 교회에 오면 목사들은 모르더라고요. ^^ 이런걸 우린 아주 심각한 문제이죠. 그런데 그들이 우리를 놀래키고 나서 그 다음으로 인도할 길이 없다는 걸 알아야 돼요. 그들을 공포 속에 묶어놓죠! 그래서 다 벌벌 떨죠. 날짜 받아야 되고, 뭐 언제나 그것 봐야되잖아요! 결혼할 때 이빨 수 세어오라 그러고,, ^^ 우린 그렇게는 아니죠. 우린 시작은 정말 어떡하다 시작했는지 알 수 없는데, 들어오면 넓고 크고 깊고 행복스럽고 변화되고 얼마든지 열려있죠.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문제에 있어서 사도바울이 이런 문제에 `너희 그러면 안된다, 그러면 안된다,,` 분파문제도 왜 자꾸 강조를 하게되느냐하면, 고린도전서 3장,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육의사람이 아니리요 5 그런즉아볼로는 무엇이며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바울이 하고싶은 얘기는 분파의 약점은 그 보이는 수준 하나에 매여있게 된다는 거죠! 누구를 선호하고 그 뒤에 가서 줄을 섬으로써 기독교신앙이 한 인간에게서 맺은 열매에 국한 된다는 거죠!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누가 도움을 주는 거죠.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의 동역자였다는 거죠. 그가 물을 주고 심고 했을지 모르지만,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입니다! 바울과 아볼로의 잡혀있지 마라! 더 커라!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 그 도움 그걸 받아야지, 그 도움을 받지않고 줄을 서서 누가 더 낫냐, 는 어떤 주도권, 어떤 허여심 때문에 싸움으로써, 신앙이 정말 자라나야할 곳에서 자라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번에 가면 지나가는 듯이 들러지않고, 이번엔 좀 앉아서 너희들을 제대로 이번엔 한번 깊이 이야기를 나누고, 기독교 신앙이 뭔지, 내가 뭘 전했는지, 너희가 어디까지 왔는지, 서로 좀 얘기를 좀 하자! 이렇게 된 겁니다! 좋죠? 이게 옳고, 저게 옳고, 법조문 같고, 다그치듯이 누구를 심판하고 벌주기 위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자식을 기르는 목회심정의 서신인 겁니다!
서신! 어떤 법령, 무슨 교훈, 정답,, 이 아니고, 여러분 각각이 자신을 위해서 이 성경을 읽어야되는데, 우린 신앙을 자기를 위해서 이렇게 따뜻한 사랑과 격려와 그런 진심들로의 은혜가 없으니까, 어떤 정답들을 나열하는 정도로 멈추어 버려서 제가 종종 화를 냈던 기억이 납니다. 자기를 키우는 일에 성경이 쓰여지지않고, 심사하는 일에 쓰이는 일들은 하지 마십시요! 그건 만일 그런 일이 생기면 그건 하나님께 맡기십시요! 거기에 매달려서 여러분이 자라나지 못하는 것이 제일 안타깝습니다! 자라십시요! 시험 잘 봐서 일등하지 마시고, 개구장이라도 좋으니까 자라십시요! 커십시요! 그것이 성경이 어디서나 하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시간이고 현실입니다! 현실은 우리를 괴롭히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한 정황입니다!! 그러니 겁을 내지 마십시요!
우리 모두에게 이 세상이 겁을 주는 것밖에 없고, 이 세상엔 해답이 없고, 만족을 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뿐입니다. 그럼 그런 고통과 불안한 현실이 왜 필요하냐? 거기서 하나님이 우리를 중요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게 뭐죠? 우리의 소원 보다 큰 하나님의 개입과 의도와 실제적인 변화가 있다! 회복이 있고, 나아감이 있다! 그런 것이 없다면, 기독교가 이천년을 이어올 수 없습니다! 어느 한시대 잠깐 그때의 어떤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거짓말하다가 속고 속이다가 없어지고 말죠! 모든 이단은 대를 잇지못합니다. 이건 이천년의 시간동안, 아니 사천년의 시간동안 구약까지 합쳐서 인류 모든 인생의 그 시대의 시험과 의혹과 도전 앞에 답이 되어와서, 우리에게 까지 아직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라고 고백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굉장하죠! 그러니 여러분도 그 이름에 여러분이 끝에 붙도록 그 나열에 들어가도록 하여야 됩니다! 그래서 이 일은 고린도전서 4장에 와서는, 이렇게 얘기했었죠.
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사도바울이 많은 스승이 있을지라도 아비가 아비역을 맡은 자는 흔치않다, 나는 너희에게는 아버지같은 사람이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작은 아버지입니다.^^ 목사의 정당안 결말은 그렇습니다! 시작은 진리와 또 분명한 어떤 진전과 그런 것으로 시작했을지라도, 마지막에 우리의 본질적 명예는 가르침이 아니라, 부모된 마음에 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바울이 얘기하는 '너희 말이 아니라 너희의 능력을 알아보겠다' 하는 여기서의 능력은 신앙능력입니다. 신앙의 능력이란 외적조건의 차이는 아무 문제가 되지않습니다. 그 조건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견디고 있는가를 보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책임이 있는 것이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넉넉하면 나누셔야되고, 부족하면 깊어지셔야 됩니다. 넉넉하면 잘 깊어지지 않습니다! 넉넉하면 나누는 것이 어렵습니다! 부족하면 얼마든지 나눕니다. 어차피 없으니까, 그게 왜냐하면 마음밖에 나눌 게 없거든요! 직접안해도 되니까, 그런데 정말 나눌만큼 생기면 나누는게 그렇게 어렵습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나누어야되는 입장에 있는 것과 부족한 입장에 있는 것이 차이가 없다는 얘기를 할려고 이 예를 든 것입니다! '넉넉한데 왜 안해?' 이렇게 쳐다볼 것 없습니다! '부족한데 왜 부족해?' 라는 시선, 여러분 받기 싫으실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잘못 믿어서, 내가 게을러서 그 꼴이야' 그건 정답같지는 안됩니다. 그런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적습니다!
부족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조건을 요구하셨을 수 있다고 생각하셔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일차적으로 '내가 게을렀는가, 내가 판단을 잘못했는가?' 라고 물어봐야 되는건 필요한 일이지만, 더 깊게는 이 질문을 해야됩니다! `왜 이렇게 됐느냐?` 에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선 어떻게 해야 되는가?`라고 물어보셔야 정당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억울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아팠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 그게 신앙의 실력이죠. 그 모든 것을 극복한 것이어야 되죠!! 극복했다는 건 해결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흔들리지 않는 인생이고 존재고 그때의 자리이죠! 그걸 해내셔야 됩니다!
그게 가능성이 있던 나이에서는 그렇게 함으로써 더 나은 조건과 지위에 가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따라들어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드니까, 좋은 게 있습니다. 이 마음을 가지는 게 명예입니다! `아 하나님이 이거를 원하셨구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깨우쳐서 더 나은 지위가 되고, 더 뭔가를 해결해내는 능력과 결과를 보기원하는 것말고, 이걸로 감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잘잘못을 하나님이 묻기 보다, 잘못한 것과 잘한 것 모두를 가지고 나를 결과시키고 있다고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지나온 세월이 잘한것이 뭐였고 못한 것이 무엇이었는가가 이제 와서는 평가가 전혀 달라졌습니다! 분노하고 변명하다가 원망하다가 마는 세월을 보냈는데, 그것까지도 써서 한번 그러고 마는 것이 아니라, 긴 세월동안을 자신의 못난 것을 하나님이 묵묵히 받아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서 깊어지고 넓어지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입니다!
`네가 사는 시대에 네가 모든 것을 해결하라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그렇게 얘기하시는 겁니다. 바울이 지금 그렇게 우리에게 이 편지를 쓰고있는 것이며, 여기있는 바와같이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너희의 말이 아니라 너희의 능력을 내가 보고싶다!` 그 말은 `능력을 길러라!` 죠! 무슨 능력? 신앙고백이 여러분 셍활에 가장 큰 무기이고, 보물이고 자신의 감사고, 자신의 자랑이어야하는 것이죠!
어떤 식으로 그것을 발휘한다고요? 여러분들의 억울함! 여러분들의 어떤 책임들! 여러분들의 원망 같은 것들! 을 다 이게 붙잡아서 예수께서 사신 것같이, 하나님이 그렇게 사는 자로 우리 생애를 살아내야죠! 억울하게, 아무것도 아니게,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이 기적을 이루신다는 걸 믿고 사는거죠!! 죽은 다음에 싹이 날지 모르죠!! 예수님이 그랬죠! 죽어서 장례되어서 부활이 일어나죠!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시고! 그 비난 받으시고 죽어버리시고 장사되고 사흘만에 부활하시는거죠!!
여러분 이`내 말 안들으면 너 죽어! 너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비겁하게 살지 않고 이길 수는 없어! 네가 혼자 잘난 척하고는 아무 보상도 없어!` 라고 말하는 것이 세상이 진실이듯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일하신 것은 그것보다 더 큰 진실입니다! 그 진실에서 사실에서 담지 못했던 어떤 영혼에 속하는, 가장 영광된, 가장 복된 것들을 담을 수 없었던 진실을 넘어가 진정한 진실을 만드신 것이 이겁니다! 그것은 지금 예수 안에서 그리하신 것같이, 오고오는 모든 시대 속에서 모든 기독교 신자들에게 허락되어 있고, 요구되어 있는 것이죠! 그걸 우리가 살아내야 됩니다.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죽고 난 다음에 천국에서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인생이 다른 겁니다! 다르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능력이 이런 고단한 어려움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걸 이런 문제에서 확인합니다. 가장 큰 그 기독교신앙인의 특징이 뭐냐하면, 용서입니다! 세상에는 용서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심는대로 거두는 곳입니다. 세상은 약육강식이고 적자생존입니다! 상대방 경쟁자를 물리치고 그 위에 서서 부르는 노래가 승리입니다.
우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린 용서입니다. 용서하고 보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용서문제는 자기가 용서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용서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우월감을 용서라는 이름으로 포장을 해서 하는 일은 있어도, 용서자체를 할 수 없습니다! 용서는 누가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용서가 필요하다는 걸 아는 행위인 것입니다! 왜 그렇죠? 우리가 용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승리를 행복을 만족을 감사를 맹예를 영광을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 반대로 넘어가야죠! 우린 못났습니다! 그걸 확인시키는 것이 이런 모든 세상에서의 위협입니다. 우리는 공포 아래 놓여 있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핵심된 단어들, 사랑, 믿음,, 사랑의 반대말이 공포라고 한 말 기억하시죠! 사랑은 공포가 없습니다. 사랑에는 공포라는 단어가 들어올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이 공포로 우리를 강요한 것과 다른 사랑으로의 초대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이 신앙을 납득하고 따라오기가 만만치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방법은 시간입니다! 늙으면 저절로 여기에 옵니다. 저절로라는 말은 약간 과장한 건데, 죽을 날이 몇일 안남으면 원망같은 건 다 관둡니다. 예수 안 믿은 사람들의 시체와 예수 믿고 죽은 시체가 다르다는 게 여기서 다릅니다! 원망이 남은 체 죽은 자와 원망을 버리고 죽은 자의 차이가 얼굴에 딱 나옵니다! 그건 염습하는 사람들의 고백이니까요!
이상하게 한국교회에는 그 얼굴을 잊어버렸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솔직하게 써서 헌금함에 다 넣어주십시요. 뭐가 여러분들의 얼굴에서 웃음과 평화와 감사를 뺏아갔습니까? 한국교회가 잘못 가르쳤습니까? 아니면 뭐에서 납득할 수 없는 뭐가 있어서 여러분들이 가진 신앙고백을 누리지 못하십니까? 심각하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의 인생을 반추해 보십시요! 세상이 도대체 여러분을 어떻게 위협과 공포 속에서 흔들어 놔서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었는지! 명예롭게 영광스럽게 살 틈이 없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요! 전철타면 다 질색인게 뭐죠? 물론 휴대폰하는 그 꼴 보기싫겠지만, 일단 다 인상쓰고 있는 게 제일 꼴보기 싫습니다. `건들지 마라!` 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건 현대사의 가장 큰 병입니다! 그것부터 치워야죠! 여러분 조금만 얼굴을 펴시죠! 예수 믿는 사람 아닙니까! 잘 안되십니까? 제가 웃는 사진 하나 드릴까요? ^^ 여러분 스스로를 위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경계와 의심과 긴장과 공포의 표정을 하고 있다는 걸 여러분 스스로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봐도 놀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부모된 마음으로써 예수를 믿고도 그것 하나 넘어가지 못하면, 나머지는 무슨 얘기를 해도 사실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 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는 역사가 유지되는 역사 속에서 기적이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일부러 나서시지 않아도 됩니다. 전도지 돌리고 상담하고,, 안하셔도 됩니다. 표정 하나부터 바꾸셔야 됩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넉넉한 표정이지?` 라고 묻게 하셔야 됩니다. 그렇게 하십시요! 그래서 뒤를 미행해서 `결국 교회가는구나` 라고 확인하게 하셔야 됨니다!
이건 편지입니다. 이런 따뜻한 마음으로 모두에게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신 그 감격과 그 내용으로의 항복이 묻어나는 편지입니다! 이것은 법조문이 아닙니다! 이건 무서운 경고가 아닙니다! 이건 다 고린도교회에 유익을 바라는, 그들을 위하여 목숨을 건 사랑으로 쓴 편지입니다! 성경을 그렇게 읽으셔야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 또한 그렇게 사셔야 됩니다! 그런 은혜가 여러분과 여러분 생애에 허락되어 있고 요구되어 있고 누릴 수 있다고 꼭 깊이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고, 세상의 폭력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는 반전과 부활과 승리는 하나님의 영광이었고 능력이었고 지혜였으며, 우리의 삶 속에서 요구되고 있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클 것입니다! 깊어질 것입니다! 채위질 것입니다. 손해보는 자리는 없을 것입니다! 힘들다고요? 힘들지 않는 것은 다 가벼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영광의 무게를 담고 깊이고 충만케 하신다는 것 기억하여 우리 인생을 멋지게 살아내는 우리 교우들 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http://lamp.kr/lamp-sermon/?p=10719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수요예배 설교 녹취록 이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