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시작은 다큐멘타리였다. 1895년 프랑스의 산업도시 리용의 대표적인 부르주아 가문 출신 뤼미에르형제가 파리의 그랑카페 지하실에서 대중에게 공개한 최초의 영화상영회의 제목은 ‘씨네마토그라프(cinematographe)'이다. 씨네마토그라프라는 동영상 기록 카메라로 찍고 영사한 이 상영회에서 보여진 이미지들은 아주 짧은 단편들로 리용의 치오타역에 기차가 도착해서 사람들이 내리는 장면을 담아낸 <기차의 도착>을 비롯하여 담을 허무는 장면, 정원에 물을 뿌리다가 호수가 밟혀져 오히려 물벼락을 맞는 정원사의 황당한 모습등이 담겨진 일상의 단편들에 대한 기록, 즉 다큐멘타리의 기원으로서 영화보기의 매혹을 증명해준다.
그러나 영화의 대중성이 곧 산업화를 불러 일으키면서 다큐멘타리는 극영화에 밀려 TV나 비상업적인 영역으로 축소되면서 극장 스크린으로부터 멀어져간다. 그 와중에 ‘몬도가네’스타일의 선정적 다큐도 등장해 상업극장 유통망 속에서 마치 최초의 동영상이 불러 일으겼던 신기한 구경거리를 비루하게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늘 예외가 있듯이 TV나 극영화가 다루지 못하는 혹은 다룰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지점을 진실의 시선으로 건드리는 진실성 회복의 카메라시선을 활용한 다큐들이 드물게 극장 스크린에 등장하곤 한다. 이를테면 촤근 한국 독립영화의 무속에 관한 다큐들 -<사이에서>, <영매>등, 정신대 할머니들의 삶을 성찰적으로 그려내는 <낮은 목소리>시리즈, 축구 다큐 <비상>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마이클 무어의 정치, 대기업 비리폭로성 다큐들-<볼링 퍼 콜럼바인>, <911>이나 <로저와 나>, 그리고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워주는 앨 고어가 등장하는 <불편한 진실>, 햄버거 대기업의 비리를 푹로한 <수퍼 사이즈 미>등 이와 같은 다큐들은 극장 개봉용으로 제작되어 대중성을 획득하면서 극영화가 도달하지 못하는 폭로, 성찰적 관점에서 영화를 통해 현실의 깊숙한 이면으로 우리의 눈을 돌리게 만든다.
그런 문맥에서, 지난 해 말 개봉한 <비상>(임유철감독)은 스포츠 저널리즘이 보여주지 않는 패자의 얼굴을 통해 다큐의 진정성 회복과 묘미를 일깨워주는 역작이다. K리그에서 하위팀에 속하는 인천 유나이티드FC팀(이하 ‘인유’로 표기)의 공동체적 일상을 1년간 따라잡는 이 영화는 일등만 기록하는 역사, 승자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던지는 스포츠 저널리즘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축구와 축구인생, 선수의 몸값 거래를 포함한 한 개인으로서 선수와 감독의 일상을 깊이있게 드러내 보인다.
애국심을 먹고사는 월드컵 열기가 16강, 8강, 4강 진출로 대기업의 대대적인 기업홍보이미지와 몸값비싼 선수들을 모델로 내세우고, 모두 붉은 악마에 동조하는것을 국민통합쯤으로 여기는 월드컵 시즌. 결과가 어찌되었든 그 광풍의 끝 무렵에 이르게 되면 반드시 되풀이 되는 이야기인즉슨, 월드컵의 승자가 되려면 평소에 ‘A 매치’ 같은 국가대항게임보다 K리그에 관심을 보여야 한다는 일상적인 지역축구사랑론이다. 그 무렵에는 그런 축구사랑 열기가 지속될 듯 하지만 실제로 K리그, 그중에서도 후발주자에다가 하위팀에 속하는 인유팀같은 경우는 관심밖이다. 그러나 <비상>은 바로 그런 그들의 비인기, 비승자적인 면모를 깊이 따라잡는 관점에서 이례적이며, 그런 패자의 경기와 일상을 통해 극도로 상업화된 프로스포츠, 그중에서도 월드컵때만 열광적 사랑을 받는 자본주의와 결합한 축구판 속에서 인간의 얼굴을 발견하게 해준다.
사실 대단한 축구광도 아닌 임유철감독은 프로스포츠에서 사람의 몸값을 매겨 사고파는게 합법적이고, 그런 일이 지지를 받는다는 점에 착안해서 프로축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IMF이후 사람가격을 매기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인유처럼 몸값이 높지 않은 선수들이 어떻게 자신의 기량을 극복해 나가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에 소재로 삼았다고 인터뷰에서 토로한 바 있다. 따라서 축구라는 스포츠가 내놓고 경쟁적으로 사람가격을 매기는 극도의 자본주의 판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다큐멘타리라고 제작및 연출의도를 밝히고 있다. (<NEXT plus> '씨네21‘ 별책부록 17호, 06/12/08, 14쪽.)
지고 또 지는 패자 인유팀에 수석코치겸 감독 대행으로 장외룡이 부임하는데서 영화는 시작된다. 열패감에 지쳐가는 이들 앞에 나타난 일본유학파 장외룡감독은 칠판에 ‘인내, 열정, 헌신’이라는 자신의 축구철학을 한자로 쓰고 ‘7승 3무 2패’를 K 리그 전반기 목표로 내건다. 스타 플레이어 하나 없는데다, 오히려 이 목표수치를 거꾸로 실천해온 인유팀 선수들로는 황당한 주문이다. 썰렁한 선수들의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장감독은 비디오를 통한 철저한 게임분석과 각 선수의 기량체크에 바탕을 둔 팀전략을 세워 이들을 설득해 나간다. 일본에서 감독생활을 하며 나름대로 축구 공부에 일가를 이룬 그는 선수들을 지쳐빠지게 하는 스파르타식 훈련과 혼내기 같은 방식보다는 과학적 분석과 신사다운 매너로 선수 하나하나를 인간적으로 대한다. 그가 게임에 진 후 락커실에 들어와 선수들에게 모자를 벗고 ‘수고하셨습니다’라고 깍듯하게 인사하는 장면이나, 울산과의 경기에서 5대 0으로 진 전반전 후 , 5대0으로 지는 것과 5대 1이나 5대 2로 지는 것은 다르다고 최후의 순간까지 선수들을 격려하는 장면은 장엄한 패배의 미학을 일깨워주는 뭉클한 대목이다.
장감독이 하루 3시간만 자며 혼자 꼼꼼히 상대팀을 분석해서, 괴로운 패배의 기억을 보지 않으려는 선수들을 포기하지 않고 설득해 자신만의 비디오 분석 화면으로 이들에게 전략을 가르치는 대목은 축구에서 감독의 존재가치, 실제로 미리 세운 계획대로 플레이가 이루어지는 경기의 흐름을 흥미롭게 입증해주기도 한다. 때론 지고 때론 이기지만 결국 끈질기고 차분한 열정과 헌신적인 장감독의 지도로, 그가 애초에 제시한 목표에 근접하는 성과를 달성하면서 인유팀선수들은 과거의 열패감을 벗고 감독과 동료간에 인간적인 신뢰감을 쌓아간다. 그런 모습을 보노라면 에두아르노 갈리아노가 <축구 , 그 빛과 그림자>라는 탁월한 축구에세이집에서 탄식해 마지않는 월드컵 상업주의가 박탈한 축구의 영혼, 즉 축구에 담긴 인간의 얼굴이란, 이런게 아닌가 하는 감회가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 다큐의 주인공은 장감독만이 아니다. 무능한 선수로 찍혀 잘나가던 부산팀에서 방출된 주장 임중용을 비롯한 다른 선수들, 그리고 대우의 몰락으로 부산팀을 떠났던 안종국 구단주와 주치의등이 부산 아이파크와의 대전(플레이 오프경기)에서 보여준 의기투합은 과거의 억울함에 대한 명예회복의 의미를 찡하게 전해준다. 특히 임중용선수가 뜻밖에 이 경기를 앞두고 시력에 치명적 손상을 입어 거의 안보이는 상태가 되지만 설욕전에 반드시 참여하고픈 그의 열정은 감독과 관객 마음 속에 전해져 온다. 이 설욕전에 대한 감독과 구단주, 선수, 주치의등 인유팀의 다양한 멤버들의 인터뷰는 대우의 해체와 대자본 구단주의 몸값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의 서러움을 진하게 잡아낸다. 단순히 그런 억울함에 대한 보상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 치밀한 전략과 혼신을 다한 투혼으로 부산을 이겨낸 인유는 스포츠 저널리즘에서 마침내 ‘공포의 외룡구단’ 이라는 수식어로 포장되어 집중적 조명을 받는다. 그러나 집중 인터뷰에 신이 난 선수들은 기사가 나오자 실망한다. 자신들을 마치 과거 쓰레기같은 존재들로 폄하하면서 개천에서 용 난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서술하는 것도 자존심 상하지만, 같이 대결하는데도 스포츠지 전면사진에서는 그들보다 유력한 팀만 등장하는 것도 공정보도에 어긋나기에 소외감을 느낀다. 이런 솔직한 감정을 토로하는 모습을 담아내는 인터뷰는 승자중심적인 저널리즘의 한계를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이렇듯 카메라는 경기장과 락커룸, 숙소를 드나들며 인유팀 구성원들의 사적인 내밀한 감정을 따라잡는다. 아빠노릇을 전혀 못하기에 딸에게 놀러오라는 인사를 받는 고독한 선수의 삶, 게임에 진후 서로의 잘못을 추궁하다 감정싸움에 치닫는 모습, 상대적으로 스타대접을 받는 용병 라돈 치치가 무거운 골대 운반에서 엄살을 피우며 힘든 일을 안하다가 주장에게 팀정신이 없다고 혼이 나도 여전히 뺀질거리는 모습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웃음을 주기도 한다. 실제로 이어지는 경기들 중에서 가장 골을 많이 넣은 라돈은 자신이 그럴 자격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귀여운 측면도 보여준다. 한때 날렸던 선수가 무능해지자 방출되어 구단주와 몸값흥정을 하는 적나라한 거래판도 등장해서 축구 자본주의의 실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경기장 이면의 모든 것을 전방위적으로 드러내는 이 다큐에서 이 장면만 유일하게 그 문제의 선수 에이전트 얼굴에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있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이들이 만년 패자의 딱지를 떼며 점차 경기에서 승리해 가면서 인천시민의 열화같은 지지를 얻기도 하고, 엉뚱하지만 서울의 서문여고 써포터즈 팬클럽도 생겨 소수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보다 가난한 인천구단의 형편은 선수들에게 전용 연습장조차 마련해줄 형편이 못된다. 기대 이상의 실적을 올리며 챔피언쉽의 유력주자로 뜬 인유팀은 촌각을 다투는 시점에 1시간 30분 짜리 연습을 위해 어렵게 섭외해서 멀리 떨어진 임대구장에 가기 위해 3시간 이상 걸려 이동하느라 거리에 시간을 뿌리기도 한다.
차범근감독에 국가선수들이 스타 플레이어로 포진한 수원과의 경기에서의 승리에 이어 이천수 스타를 내세운 울산과의 결정에서 인유팀은 깨지고 또 깨져나가면서 상처투성이 경기를 벌인다. 결국 이들은 울산에 대패하여 준우승을 거두지만 이들의 패배는 장엄하다. 물론 과거 하위팀 시절과 비교하면 엄청난 성공이지만, 이들은 패배를 통한 팀 코뮤니티의 승리가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드러내보인다. 그것은 바로 역사는 일등만 기록하지만, 그래서 스포츠 저널리즘도 골많이 넣는 스타선수와 승자에게만 스포트 라이트를 돌리지만, 예술은 위대한 패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비상>은 자본주의와 봉합된 프로축구의 위대한 패배를 인간 몸을 통한 예술로 승화시킨다. 그것은 다큐의 속성인 실제의 삶의 파동을 전해 주는 진정성을 가진 시선의 힘이기도 하다.
첫댓글 휴~드뎌 새해 첫 영화글 썼네요. 이걸 일주일간 손이 안풀려 이제야 완성하네요. <토목학회>용이죠. 찡하니 보시길!
가물거리며 써서 오자와 비문 꽤 있을듯...이후 고칠께요. 일단 올려고요. 안그럼 자꾸 잊으니까요.
율리우슨 이 영화 꼭 찾아보시길...야구광이시니 좋아할듯 해서요.
'역사는 일등만 기록하지만, 그래서 스포츠 저널리즘도 골많이 넣는 스타선수와 승자에게만 스포트 라이트를 돌리지만, 예술은 위대한 패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특히 와 닿네요. 잘 읽었습니다. 저도 꼭 찾아봐야겠어요.
와 훌륭하고 감동적인 글입니다. 율리우스, 스포츠광팬이지만 승자에게만 갈채를 보내지는 않습니다. 비근한 예로 프로야구 꼴찌팀 롯데와 메이저리그 만년하위팀으로 전전하다 작년 월드시리즈에 올라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같은 팀을 좋아합니다. 뭐랄까? 감동이 있다고나 할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메이저리그 최고의 구단인 뉴욕 양키스에 항상 관심과 애정이 가는 것은 어쩔수 없네요. ㅋㅋ 왜냐하면 잘하는 팀과 잘하는 선수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니까요. ㅋㅋ
지나레인의 영화 충고 감사합니다. 인천 유나이티드라는 팀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하하 GS의 협찬사가 FC서울이라 그쪽에만 관심이 있었는데. ㅋㅋ
새벽에 피곤한 몸 각성시켜 쓰고 나 맨정신으로 보니 오자, 비문투성이. 언어와 무의식의 중간지점에서 자동기록법처럼 마구 쓴 셈이랄까요? 해서 더 많이 보시기 전에 눈에 뜨이는 것 일단 고쳤어요.
율리우스 양키스팬에 스포츠광이시니 좋아하실줄 알았어요. 스포츠의 심리학이란 대단한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