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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3주년 1월 호국산행 박진지구전투 현장을 찾아서
6.25전쟁 61주년 당시에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다부동전투 마산 전투산 전투(661고지).영천전투.안강-기계전투.
박진나루터 전투다.
박진지구전투는 1950년 8월 6일부터 10월 4일까지 박진나루가 있는 곳에서 벌어진 전투로, 미군 제2사단과
제24사단이 북한군 제4사단과의 치열한 전투
이곳이 무너지면 밀양과 부산은 물론 나라전체가 순식간에 점령당하는 최후의 보루인셈이다.
북한군의 시체가 낙동강물따라 사단병력이 떠내려간곳 이며 박진전투에 승리함으로써 아군이 낙동강을 건너
반격하게 되었으며 결국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과 함께 합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클로버 고지 전투 클로버 잎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이름)
창아지 나루
창아지 마을 서쪽 앞에 낙동강을 건너는 나루이다. 이 나루는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상촌과 통하는데 예전에 창녕에서
의령쪽으로 갈 때 이리로도 갔다 한다. 지금은 행인이 없어 이름만이 남아 있다.
낙동강을 끼고 좌측은 개비지 길
박진지구 전투지역
인민군은 새벽 0시 시남리 이이목나루를 도하한 다음 시남 수개 고곡 등 산야에 은신하고
있었으므로 고곡을 거쳐 대곡까지 진출하려는 미군에게 맹렬한 사격으로 공격을 가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미군은 많은 사상자만 내고 월하까지의 진출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때 인민군은 창녕을 향해 두 곳에서 낙동강 도하를 시도하였는데 이곳만 성공했던 것이다).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너기도 했으나 대부분 옷과 신발을 벗어 무기와 함께 똘똘 말아 머리위로 높이 이고 어깨까지
차는 강물을 건넜던 것이다. 이때 인민군 제4사단 제 16연대 주력 800여명이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시남리 고개를 넘어 안쪽으로 들어 왔는데 미 34연대 1대대가 시남리 청단고지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몰랐던 것이다.
미군은 이이목지점에 한명의 척후병도 내보내지 않아서 일어난 전투
개비리란:개 한마리 겨우 지나간다고 붙여진 이름
개비리는 남지 용산리에서 창아지까지 이어진 십리쯤 되는 길이며 몇백년전 창아지, 영아지 사람들이 산을 둘러서
남지장에 가려면 멀기 때문에 낙동강 벼랑 끝에 소롯길을 만들었다.
민초들의 발걸음이 만든 삶의 자취며 생존을 위해 만든 고통의 흔적이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개비리를 걸을
때마다 가슴에는 더 나은 삶을 향한 희망을 품었던 길이다.
전쟁 당시 개한마리 겨우 지나갈 많큼의 절벽길이였기에 소.우마차. 같은걸 모두 이곳 .창아지.영아지 인근에 버리고
심지어 나이 많은 부모님이나 갓난아이도 버리고 몸만 겨우 지나갔다고 함.
지금은 창녕군에서 개비리길로 둘레길 만듬
또다른 이름으로는
개:개울 할때 개
비리:절벽을 뜻하는 경상도 말
옛날 영아지마을의 어느 집에서 키우던 개가 남지 용산마을로 팔려가 헤어진 자신의 여자 친구를 만나러 자주
다녀서 길이 나게 됐다고 하며.
그 길을 사람들이 발견해 살짝 넓혀서 쓴 것이 개비리의 시초이다. 개가 처음 낸 길이라 해서 개비리 길이라 불렀다고
한다.
바라산 사모님이 가지고 오신 따뜻한 커피
한잔하고 초입 찾습니다.
창아지 마을
짱아치가 아님.
초입부터 길좋음
그러나 이후로는 가시밭으로
소나무 숲
소나무 키우기 위해서 벌목을 많이 했죠
눈과 벌목으로 쓰러진 소나무들
가시밭길 지나서 도착한 우실등봉
이제부터 화왕지맥길
여기부터 지맥길이만 등로는 별로
감나무 밭도 지나고
창녕 남지는 단감으로 유명한곳
이글 읽으시면 가까운 과일가게 사셨어 창녕남지 단감 사드시면 좋겠습니다.
성사고개
이제부터 어봉리능선 전투 지역입니다.
이이목으로 건너온 북한군이 어봉리 뒤산인 어봉리능선을 장악한곳이죠
이곳 어봉이 능선은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전술적 요충지
이곳에서는 영산은 물론 저 멀리 수산까지 관측이 용이하기 때문에 미 제2사단 제9연대가 합류 하였으나,..
지금부터 어봉리 능선으로 진행
[참 고]
성사고개 유래
아지 남쪽에서 성사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므로 성사고개, 아지의 고개이므로 앞실고개, 아지고개로도 불렸고
예전부터 혼사 일이 있을 때 이 고개를 넘으면 일이 틀어져서 성사가 잘 되지 않은다는 속설이 있어 아지마을 사람들은
혼사 일로는 이 고개를 넘지 않았다 한다.
이 고개는 예전에는 넘기 힘든 분수령과 같아서 이 고개를 기준으로 하여 흔히 남지 사람들은 고곡지구를 ‘산너메’라
부른다
어봉리능선
8월 15일 제24사단에 도착한 워커장군은"해병 여단을 줄 테니 지체없이 적을 몰아내라"고 했고,
이에 8월17일 07시 35분 공격이 시작되었다. 후일 처치장군은 당시의 상황을"어봉리능선 전체가 불꽃에 싸여
공중으로 떠올라 있는 것 같았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8월 18일 동이 트자 해병 제1대대는 117고지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고, 전우들이 수없이 쓰러지기 시작했지만,
한사코 목표를 탈취하고야 말겠다고 다짐 하면서 해병대원들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결국 해병대가 공격을 개시한지 2일만에 어봉리 능선과 클로버 잎 고지는 아군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유해 발굴을 알리는 무명천
색이 바래어도 곱기만 합니다.
혹시나 화왕지맥길 가시는분들 어봉리능선에 도착하시면 무명천 꼭 찾아 보십시요
앞은 클로버 전투가 일어난곳
여름에 이곳 화왕지맥길은...
고생 좀하겠죠
두곡고개(가람고개)
두곡지구 전투(클로버 전투지역)8월 7일-14일
자정이 지나자 적은 다시 4개 지점에서 일제히 도하를 개시하여 다음날(8월 7일) 새벽에는 최초 도하시와는 달리
<낙동강 돌출지역>내의 요지인 어봉리 능선과 두곡리 서편에서 북으로 뻗은 클로버잎 고지(△165)를 신속히
장악하고 말았다.
고지의 모양이 클로버 잎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으며 남북으로 4km나 뻗은 양지고개는 적이 이를 장악할
경우 9km 동쪽의 영산지역은 물론 하남(영산 동남 20km )에 이르는 미제24사단의 주보급로를 깊숙이 감제 관측할
수 있는 중요지형으로써 <낙동강 돌출지역>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전술적 요충지였다.
8월 7일 아침, 제1대대는 이토록 중요한 양지(兩地) 고개를 탈환하기 위하여 다시 역습을 시도했으나 우세한 적의
병력과 지형적인 불리 그리고 혹심한 더위와 식수 부족 등으로 피해만 증대되어 갈 뿐 아무런 작전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제1대대의 공격이 난관에 봉착되자 처치장군은 창녕에서 재편성중에 있는 제19연대를 투입하여 양개 고지의 탈환을
다시 시도해 보았으나 점차 증강일로에 있는 적을 격퇴할 수는 없었으며 아군의 피해는 증대되어 갔다. 8월 8일
제34연대의 병력은 1,000명선으로 제19연대는 1,700명선으로 감소되었고 사단의 전투력은 40%로 평가되고 있었다.
남지지구 제일전투의 승리 (1950. 8. 18 - 8. 19)
8월 18일 인민군은 박진나루 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자 포병의 포격과 전술 공군의 폭격으로 처절한 소탕전이
전개되었다.
해병대와 미 24사단 보병은 서쪽으로 진격해 나갔고, 포병은 인민군이 달아나자 도하지점인 박진나루를 엄청난
화력으로 강타했다. 8월 18일 어둡기 전에 해병대 3대대는 311고지(구진산) 제34연대는 240고지(고운봉)
제19연대는 강 전면의 223고지(창아지 뒷산)를 탈환했다.
이튿날(8월 19일) 아침 해병대는 미 34연대 장병들과 함께 대곡과 반포를 완전히 탈환하였다.
저녁이 되었을 때 월상에 까지 인민군의 그림자는 찾을 수가 없었다. 남지지구 제1차 전투는 승리로 끝났다.
이 첫 번째 승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어봉리 능선과 클로버잎고지 후면에서는 북괴군 패잔병들이 낙동강을 향해 서쪽으로 밀려가고 있었으며 북괴군
제4사단의 총퇴각은 누구의 눈에도 뚜렷했다. 다음날 해병대와 제34연대는 강변에서 합류했으나 강 차안에서는
적의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적 제4사단의 도강 인원은 3,000명 미만이었고 강 차안에서 미군들은 1,200여구의 적 시체를 매장했다.
34문의 포와 수 백정의 자동화기 그리고 수천의 소총을 유기 함으로써 서울 사단의 호칭을 받았던 적 제4사단은
사실상 이 날짜로 소멸된 것이었다.
잠시 임도 길도 지나고
잠시 점심식사시간...
화왕지맥길을 버리고 우린 진실재로 갑니다.
절기 울타리도 지나고
이곳 역시 미군들 유해발굴지역 입니다.
크고 작은 발굴지가 많습니다.
호국산행길 가는길에 인근 민가에서 설치한 이중 올가미 모두 5개 제거하고
이중 장치가 되어 제거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림
길은 없고
찾아가는 재미.
진실재
이곳에서 남지와 유어면으로 넘습니다.
지금은 도로 확장 작업중
앞의 봉우리는 낙동강이 감지되는 관측이 용이한 봉입니다.
전쟁 당시 참호 같고 인근으로 유해발굴을 많이 한곳
이곳에서 우측은 190km 호국산행길 유어방향
낙동강 따라 교전이 이루어진곳
우린 구진산으로 가야하기에 좌측으로 진행
유해발굴
유해발굴
강 멀리 보이는곳은 박진대교가 있는곳
그리고 중간부분 이이복 나루
9월 공세가 시작되었을 때, 대곡리 뒷산에는 박진나루를 지키려던 미 제2사단 9연대 D 및 H중화기중대와
박격포중대가 분산되어 150고지에 모여 있었다. 이들은 인민군의 급속한 진출로 이곳에서 고립되어 퇴로를 차단
당하고 말았지만 끝내 인민군의 공격을 견디어 냈던 것이다. 그리고는 혈로를 뚫어 남지철교 쪽으로 귀환하였다고 한다.
이 잔류 부대원들을 지휘한 장교가 H중대장 슈미트중위여서 뒤에 [슈미트부대]라 불리었다.
대곡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미군들이 황씨굴에 은신하며 싸웠는데 미쳐 피란을 못나갔던 사람들이
그들을 숨겨주면서 밥도 해주고 보호했다고 한다.
당시 기록을 보면 인민군은 8월 6일 새벽 0시에 시남리 이이목나루{烏項津}로 도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 인민군은 창녕을 향해 두 곳에서 낙동강 도하를 시도하였는데 이곳만 성공했던 것이다. 인민군 주력부대가
도하하리라 예상했던 유어면 쪽은 경계가 철저하여 유어면 부곡리 마수원 여눕나루로 도하를 시작하자마자
백사장의 지뢰밭에 걸려 100여명이 죽었으며 곧 미군에게 발견되고 말았다. 조명탄이 터지고 미군의 기관총 사격과
포격으로 도하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이목의 도하는 미군에게 발각되지 않고 순조롭게 진행 성공하였던 것이다.
강을 건넌 방법은 근처에 배가 있었을 리 만무했으므로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너기도 했으나 대부분 옷과 신발을
벗어 무기와 함께 똘똘 말아 머리위로 높이 이고 어깨까지 차는 강물을 건넜던 것이다.
이때 인민군 제4사단 제 16연대 주력 800여명이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시남리 고개를 넘어 안쪽으로 들어 왔는데
미 34연대 1대대가 시남리 청단고지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몰랐던 것이다. 아마 미군은 이이목나루나 시남고개에
감시병을 배치하지 않았던 것 같으며, 지형지물을 이용도 못했고, 현지 지형에 관한 지식도 없었던 것 같다.
인민군은 강을 건넌 후 옷을 입고 소대 단위로 정적에 잠긴 수개리 쪽으로 남하하였다. 그들의 목표는 영산이었다.
공용 화기는 없이 개인 화기만 가지고 있어 미군이 지키고 있는 고지를 공격하지 않고 피하면서 3km나 골짜기를
내려와 남곡국민학교에 있던 박격포대를 공격했던 것이다.
북한군이 도강한 이이목나루
처음 도하지점이 시남리 이이목이란 전사의 기록과는 달리 미처 피란을 못나가고 있었던 주민들의 증언을 들으면
이이목 뿐만 아니라 월하리 마을앞 모래사장으로도 많은 병력이 도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낙서면 전화리에서 월하리 조금 북쪽 모래사장 사이에는 그 당시 가물어서 강물이 줄어 그 강폭이 좁아져 있었으며
강물도 그리 깊지 않고 얕았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도를 보면 도하 지점이 두 곳으로 표시되어 있어 주민들의 증언이 사실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또 주민들이 목격하였다는 인민군의 도하는 어쩌면 새벽 0시에 감행된 최초의 도하라기보다 그 후인 새벽의 도하를
본 것이 아닌가 한다.
북쪽에서 흘러오던 낙동강이 이이목에서 서쪽으로 굽어 흐르며 우리 읍을 감싸 돌아 흐르는 지형을 당시
작전 군인들은 [낙동강 돌출지역]이라 하였고 전투 참가 장병들은 [낙동강 시절]이라 불렀다고 한다.
붉고 노란 신호탄이 심야에 공중으로 오르고 인민군 4사단 16연대 병력의 도하가 시작되고서 우리 고장 지역 일대의
전투는 40여 일 간(1950. 8. 6∼9. 15) 지속되어 마을이 불타고 가산은 풍비 박산 되면서 수많은 피란민과 함께 인명
피해가 엄청났던 포격과 폭격이 시작되었다.
길 좋고
이이목 나루터
이이목 나루터 소개
1950년 8월, 고곡리 남곡국민학교에는 미 제3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8월 6일 북한군 800여명이 이이목 나루터를 통하여 도하를 개시함으로써, 낙동강 돌출부 전쟁 막이 오르게 된다.
그들의 목표는 영산이었고, 적의 도하로 피해를 입은 아군은 철수 한 뒤 역습을 감행했다.
그러나 8월 7일에 4개 지점에서 일제히 도하한 국한군에 의해 '낙동강 돌출지역'내의 요지인 어봉리 능선과
두곡리 서편에서 북으로 뻗은 클로버 잎 고지를 장악당하고 말았다.
6일 새벽 1시, 불시에 이들 미군은 인민군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4.2인치 박격포대가 습격을 받아 순식간에
분산되어 버렸다.
"박격포대와 대대본부가 병력 미상의 기습을 받고 분산되었다."
습격 사실을 제3대대장 진즈 페레즈 중령이 미 34연대장 찰즈 E. 뷰참포 대령에게 새벽 2시에 보고했는데 그때까지도
인민군이 낙동강을 건넜다는 도하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연대장은 습격 사실을 보고 받고는 일선 중대
에 연락했으나 별 이상 없다는 보고를 받고서 적당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이것을 보면 이이목나루의 도하는 칠흑 같
은 한밤중에 일어났으므로 어느 중대에서도 적의 침투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은 이이목 도하를 상당한 시간동안 몰랐던 것 같다.
L중대로부터 "중대 좌익에 적의 공격이 있어 일부가 밀렸다." 하는 보고가 들어오자, 연대장은 박진나루로 인민군이 도
하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월하리 박진나루는 자동차를 건네줄 수 있는 큰 나루로 인민군이 가장 먼저 도하하리라
예상하고서 미군이 굳게 지키고 있었던 곳이었다. 연대장은 아침에 제1대대로 하여금 반격하게 했다. 그러나 인민군은
이이목나루를 도하한 다음 시남 수개 고곡 등 산야에 은신하고 있었으므로 고곡을 거쳐 대곡까지 진출하려는 미군에게
맹렬한 사격으로 공격을 가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미군은 많은 사상자만 내고 월하까지의 진출은 좌절되고 말았다.
다시 가시밭으로 들어가고
자!~ 어서 오시지요
멀리 고운봉 능선
지나온길과 갈림길의 고운봉 능선
목 말라서 눈으로 한움큼
구진산 성터 가야시대 축조
고곡산성과 구진산성 등 2개의 산성과 임진왜란 때 의병의 훈련소라 기록되어 있는 월송정 등 전적지가 있는
역사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낙동강을 통하여 올라오는 왜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의병장 곽재우 장군은 고곡산성과 토성인 구진산성을 수축하고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그 후 이곳의 전투가 과연 치열하여 구진산성의 이름이 구진(九陣)이라 부르게 된 것도
진(陣)을 아홉 번이 쳤다하여 불리어 진 것이다. 이 아홉 번의 싸움을 다 승리로 이끌어 구전구승(九戰九勝)을
거두었다고 전해 오고 있다
성은 흙과 돌을 섞은 성벽이므로 그동안 수축하지 않아 다 허물어졌고, 또 성안의 부지를 마을의 공동묘지로 사용하여
옛 흔적이 사라졌다
앞의 마을은
미군 박격포 진지가 있었는데 이이목으로 몰래 쳐들어온 북한군에 의해 많은 미군 사상자를 낸곳
어봉리능선과 클로버 전투지역이 한눈에 들어 옵니다.
이제 마무리 해야죠
단호박님. 훈아님. 꺼미님.바라산님.임의규 고문님. 설국님.
오늘 찾아 주신분들 감사드리구요
다음달 여항산 전투지역에도 오시면 고맙겠습니다.
현감 고을 선정비
이곳이 날머리 입니다.
날머리 옆
박진지구 기념관에서 한장
아무도 찾지 않은 길이지만
전사자료는 찾아야 하기에 오늘도 인터넷을 찾습니다.
그당시 지명과 산이름 찾기 쉽지않아 몇번을 가서 찾아야하는 호국산행길
다음달 호국산행 여항산전투 지역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첫댓글 설명이 더 멋진 소중한 산행기 잘봤습니다~~ ^^*
부족한 연비 개선을 위해서 평소에 식습관 조금 고치면 좋겠구요
혼자 몰래 드시지 말고 같이 먹읍시다.
다음달 호국산행도 참여 바라구요 함께하니 참 좋습니다.
다음달에 배낭에 달고갈 시그널 한장 드리겠습니다.
혼자 몰래 먹을 거리도 없습니다...
몰래 먹어 봐야 카보샷 한봉다리와 쵸코바 두개 그리고 포도당 사탕 뿐이니...
맘은 안그런데 몸은 자꾸 달라고 아우성이라 시기 놓치면 다리 후덜 거려서요..크아~~
그기다 아침까지 굶고 올랐으니. 더한듯 했습니다...
담엔 땟거리좀 가져 가야 겠습니다...ㅎㅎㅎ
그래도 많이도 드셨수..ㅋ
허거덕!!!~
현장을 찾는 것 보다 자료를 찾는게 더 어려울 듯 합니다.
쉽지않은 호국길 수고많이들 하셨습니다.
이번 창녕지구 전투 지역을 답사와 산행 모두 5번에 마치게 됩니다.
다음달 여항산 지역 역시 4번째 길이구요
없는 자료 찾는게 어려움이 많습습니다. 특히 낙동강 전투 마산-왜관지역은 미군들이 담당했던곳이라
전사 자료가 부족합니다.
올한해 잘 부탁드리구요 나중에 시산때 뵙겠습니다.
맘짠한 6.25 격전지 박진지구 전투 현장 다녀오셨네요
자세한 설명과 사진으로
이해폭이 넓어졌구요
방장님! 고생했습니다....
자주 찾다보면 많은걸 생각케 합니다.
능선을 오른면 왜 이곳에서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지
왜 이고지에서 싸웠는지...
이제 조금 알것 같습니다.
정말 산행보다 자료 찾는게 더 어려운
호국길 그래도 이 만한 정보도 대단 합니다.글로 읽고 듣는것도 중요 하지만
그때를 생각하며 그 산길을 걸어 보는것도 큰 의미인것 같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같이 가면 참 좋은데...
이제 산능선에 오르면 왜 이고지에서 싸웠는지 조금 이해가 갑니다.
자주 찾다보니 얻은 결과라 할수 있죠
다음 여항산 전투에서 많은걸 같이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고마워요 ^^
없는 자료를 찾아서 올리시는 그 열정과 6.25 격전지 호국길을 걸으시는 그 마음이 대단하십니다.
앞으로 클럽이 나갈 길이라 생각합니다.
장거리는 어느정도 활성화 되었으니 새로운 길로 가야죠
대간길 조심해서 진행 하십구요 감사합니다.
역전의용사들에 발자취를 찾아 답사하시는 호국산행팀 애국자가 따로 없습니다.
정말 수고하셨고 존경스럽군요, 산행기에 생소한 단어들 부끄럽게 공부잘하고 갑니다. -옹-
글 감사합니다.
자료 찾아 떠나는데 쉬운게 없습니다.
올한해도 열심히 돌아다녀야 될것 같은데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번 산행은 호국산행이라는 의미도 있었거니와 주변의 산들을 돌아볼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언제나 수고하시는 방장님 계속 화이팅하시고요, 담에 또 호국산행 기회가 된다면 따라 붙겠습니다.
이번에 함께해서 좋았구요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호국산행이 정말 의미있는 산행인데 참여인원이 저조하네요.
저도 참여하고 싶었는데 일이있어 연락 안드렸습니다.길찾고 자료찾고 수고하셨습니다./
많은 인원보다 열심히 공부하는 분들만 참여 해야겠죠
감사드리구요 앞으로도 관심 부탁드립니다.
방장님 여러모로 수고가 많았습니다..
신경 써가미 산행를 했더만
적아구분 없는 원혼들의 울부짖음이
산행내내 제머릿속을 맴돌아 뜻깊은
하루 였습니다^^ ㅎ
고마워요
대구에서 같이 가는분들 부터 챙겨야 하는데 친분있다고 늘 뒷전입니다.
마음은 그래도 늘 좋아합니다.
6.25 격전지를 찾아 호국산행하시는분들 대단하십니다 자료도 준비 많이하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