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키는 어떻게 이반 드라고를 쓰러뜨렸는가?
이반 드라고가 과학기자재가 그득 들어 찬 실내 트레이닝장에서 훈련을 할 때, 록키는 설원의 한 오두막에 캠프를 차렸다. 키 2m 가 넘는 거한 이반이 근육질 가슴팍에 온갖 측정기기들을 부착한 채 러닝머신을 달릴 때 록키는 눈 덮인 산길을 헉헉대며 기어 오른다. 이반이 스포츠과학을 이용한 기계들을 이용해 자신의 근력을 극대화시키는 동안 록키는 장작패기에 열중할 뿐이다. 20년도 더 전에 상영된 영화 ‘록키Ⅳ’의 한 장면이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벌이고 있는 대선 각축전의 여러 장면들을 보며 캐캐묵은 옛날 영화가 보여 준 이런 비대칭적인 훈련광경이 겹쳐 떠오른다. 일찌감치 박근혜를 후보로 결정지은 새누리당이 정치공학의 첨단을 가고 있는 반면 민주통합당 각 후보들의 대선행보가 영 미덥지 못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후보가 스포츠 과학자들과 당의 전폭적 지원 아래 질 수 없는 경기를 준비하는 이반처럼 다가 오는데 반해, 상대방의 ‘예비 록키들’은 각자 자기가 링에 올라야겠다는 욕심만이 앞설 뿐 최종적인 승리여부는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는 형국으로 비친다.
최첨단 정치공학으로 단련되는 박근혜
박근혜 후보의 행보가 눈부시다. 그녀의 이미지가 철저히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비밀이 아니다. 일거수 일투족이 충분히 절제됐다.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내용은 공허하되 그 보다는 어느 시점에 어떤 톤으로 얘기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온화하고 안정된 모습의 이미지를 강화할 뿐 아니라 그런 행동과 말이 어떤 반향을 일으킬 것인가까지 계산해서 꾸며지고 있다.
사람을 쓰는 건 또 어떤가. 주변에 70년대 유신과 80년대 5공․6공의 수구 잔당들만 득시글거린다는 비판이 나오자 20대 젊은이들을 골라 옆자리에 앉히는가 하면 김종인, 이상돈 등 평판이 그런대로 괜찮은 보수인사를 불러 들여 요란스럽게 수구들과 싸움을 시킨다. 대법관을 그만 둔 뒤 채 두 달도 되지 않은 안대희를 끌어 들인 건 압권이다.
광폭(廣幅)행보인지, 광폭(狂暴)행보인지, 최근의 이른바 국민대통합 행보는 가히 정치공학의 신기원을 이뤘다. 느닷없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와 이희호 여사를 찾는가 하면 전태일재단 방문에 나서 민주진보진영을 일순간에 아노미 상태에 빠트렸다.
국민대통합이란 개념 자체가 처음부터 가당치 않다느니, 사전통고가 없었던 무례한 행동이었다느니, 사과나 유감 표명은커녕 현안에 대한 일체의 언급조차 없는 걸 보니 진정성이 없는 쇼였다느니 하는 분석은 나중 문제다. 우선 중도층이 그런 돌출행동에 물색없이 호의적이다 보니, 그걸 저지하려는 사람들만 속이 좁거나 자칫 국민대통합을 저해하는 극렬세력으로 비치기 십상일 뿐이니 이런 쇼를 기획하는 저들은 얼마나 치밀하고 교활한가. 그 뿐인가. 정치검찰과 수구신문들, 정권에 장악된 방송들이 입 안의 혀처럼 굴고, 현직 대통령까지 후보를 만나 밀실에서 쑥덕거리는 모습을 거리낌없이 과시하고 있다.
저들은 이처럼 총동원체제에서 철두철미한 계산 아래 철옹성을 쌓아 가고 있는데 민주당은 어떤가? 흥겨운 잔치 분위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전쟁을 앞두고 적에 대한 비장감이 물씬 배어 나와야 할 대선 경선장이 영락없는 이전투구장이다. 뒤쳐진 대선 후보들은 앞 선 후보 헐뜯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당 지도부에 대한 야유가 쏟아지는 가운데 각 후보 지지자들과 당 관계자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기 일쑤다. 각 캠프 관계자와 당 선거관리위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사전 합의한 모바일 투표 방식인데, 결과가 불리하게 나왔다고 모바일을 동원한 국민경선의 의미를 부정하려는가 하면 아무런 증거도 없이 부정선거 개연성마저 서슴없이 외쳐대는 지경이다.
이전투구장 방불케하는 민주당 경선
문재인 후보 외의 다른 세 후보 득표가 지금까지 경선과정에서 얻은 표를 보면 전체 득표율보다 권리당원, 대의원들로부터 얻은 득표율이 월등히 높다. 계파정치, 조직동원의 혐의가 있다면 바로 이들 세 후보에게 더 해당된다는 증거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낮은 지지가 ‘친노 당권파’의 ‘패권·담합·패거리 정치’ 때문이며 ‘편협한 종파주의’로 인해 당심과 민심을 왜곡하는 불공정 경선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투표율 낮은 것이 부정선거 때문인가. 아니다. 민주당에 별 기대도 갖지 않은 시민들을 억지로 동원했기 때문이다. 당심이 실린 표가 자신들에게 그나마 많이 나오는 반면 민심이 실린 표는 문 후보에게 많이 가는 이유가 친노의 종파주의 때문인가. 아니다. 투표를 하는 이들이 그나마 문 후보에게 정권교체의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민주당의 대표선수들이, 그토록 민심이 당심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음을 외면한 채, 당심과 다른 투표결과가 나온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는 바로 그것이 민주당의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문 후보가 지난 주 전북 경선을 앞두고 "(지금까지) 이번 경선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우리 당이 변하지 않고 있다는 슬픈 자화상"이라며 "국민들은 우리 정치의 혁명적 변화를 바라고 있는데 우리는 구태를 반복하고 있다"고 지적한 배경이다.
록키는 훈련같지 않은 훈련을 하고서도 끝내 승리했지만 지금 이 시점의 민주당 실력으로는 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박근혜를 깨트릴 수 없다는 것이 대부분 전문가들의 안타까운 예측이다
강력한 소용돌이로 뜨거운 수증기를 빨아들이면서 다시 엄청난 열을 발생시키고, 더워진 공기는 또 다시 상승기류를 유발시켜 힘을 키우는 태풍의 기세만이 박근혜로 변신하고 새누리당으로 옷을 갈아 입은 수구세력의 재집권을 막아 낼 수 있는 것이다. 태풍은 민심이요, 태풍을 키우는 것은 감동과 믿음일 것이다.
감동과 믿음을 핵으로 태풍의 힘 키워야
경선이 중반전에 접어 든 지금, 민주당 경선 후보들은 더 늦기 전에 이성을 되찾아야 한다. 공멸이 아닌 공생의 길을 찾아야 하고, 최선이 아니면 차선에 만족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민주당을 살리는 것은 나 뿐”이라 외치기 전에 모두가 합심해서 민주당을 살릴 방안 마련에 몰두해야 한다.
사실 박근혜 캠프의 정치공학은 신기루에 불과한 허장성세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박정희의 망령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유신은 수출 100억달러 달성‘을 위한 경제적 조치”라는 홍사덕의 발언을 은근히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면 박 후보는 전혀 미래의 인물이 아니다. 인천을 빚더미에 올려 놓은 안상수에게 가계부채특위 위원장 자리를 제안했다는 것은 웃음거리다.
영화에서 이반 드라고는 결국 근육강화주사까지 맞았다. 스포츠나 정치나 사람이 하는 일에는 과학이 어쩔 도리가 없는 부분이 있다. 반드시 무리가 빚어지고 약점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상황이 아무리 좋지 않아도 올 대선국면에서 왠지 민주진보세력의 열망이 배반당할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다. 그 열쇠는, 다시 한번 감동과 믿음이다. 그리고 그 열쇠는 경선에 나선 네 사람 후보들의 손에 쥐어져 있다. 글 인용: 강기석(전 경향신문 편집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