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독특한 창법으로 ‘봄비’라는 노래를 불러 큰 인기를 얻었던 가수 박인수씨가 경기 고양시에 있는 노인요양시설 ‘행복의 집’ 앞 산책로에서 자신의 지난날을 이야기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박씨는 현재 기억을 잃어가는 치매증상을 보이고 있다. |김문석기자
박인수(백병종) : 1947년生 범상치 않은 사람들의 집합소인 연예계에서
우리는 왕년의 잘 나가던 스타가 종종 좋지 못한 상태로
추락하는 경우를 본다.
스타를 사랑하던 우리들에게 이런 경험은 인생무상과 인기의 허망함,
또는 변화하는 세월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사의
보편적 가치관을 상기시킨다.
그리하여 과거 그를 사랑했던 애정의 깊이만큼이나 팬들에게도
그 비애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스타의 자질을 떠나 실로 안타까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봄비'라는 곡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국내 '소울'
창법의 대부 박인수는 바로 그런 동질의 슬픔을 전달하는
비운의 뮤지션이다.
이북에서 태어난 그는 6·25전쟁 중에 어머니와 함께 피난
내려와 살다,
일곱 살 때 전북 정읍역 부근에서 길을 잃었다. 졸지에 고아가 된 그는
서울 돈암동의 고아원을 거쳐 춘천 부근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 보이 생활을
전전하게 되었고 영어엔 익숙해졌지만 정규 학교 교육을 받진 못했다.
고아처럼 지내는 그를 한 군인이 춘천의 어느 초등학교에
입학을 시켜주었지만
나이가 많아 1, 2학년은 건너뛰고 바로 3학년으로
입학한 것이 잘못 이였다.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3학년이 된 그는 제대로 공부를 따라갈 수가 없었고
결국 아직까지도 한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영어를 괜찮게 했던
그는 12살 때 미국으로 입양돼 3년여 동안 살기도 했으며
가수가 된 이 후에도 팝송을 카피하는 데는 남다른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
미국에서 놀림과 양부모의 잦은 싸움 등으로 3년만에 국내로 들어온
그는 다시 미8군에서 하우스 보이로 일하며 기약 없는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그의 콧노래를 유심히 들었던 한 미군의 소개로
미8군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를 수 있었으며 가수 이상으로 유명해지자,
직업적인 가수로 미8군 무대에 서, 5∼6개의 클럽에 불려 다니며
'달러박스'란 별명을 얻었다. 그러자 신중현이 그를 찾아왔다.
신중현의 그룹 블루즈 테트(Blooz Tet)에서
싱어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그는
1970년 5월 발표된 신중현이 이끄는 그룹 퀘션스(Questions)의 역사적인 앨범
<퀘션스-유니버샬.KLH15>에서 '봄비'를 부르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이 앨범에는 현재 인기 MC로 높은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는 임성훈이
참여했으며 임희숙, 송만수 등이 싱어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박인수는 이 음반에서 '여보세요', 지금 들어도 신중현의
위대함이 저절로 느껴지는
'기다리겠소(그 사람)'를 비롯해 '봄비'를 불렀다.
특히 덩키스(Donkeys)에서 노래를 불렀던 이정화의 곡을
리메이크한 '봄비'의
메가급 히트는 신중현 음악에 대한 일본의 높은 평가와
관심을 불러왔으며
그를 데려가기 위한 메이저 레코드사의 제의를 빗발치게 했다.
그룹과는 별개로 박인수는 과다한 밤무대 섭외를 견뎌내며 우울하면서도
다이내믹한 목소리를 만천하에 알렸다. 한때 6개월 정도 피닉스라는
그룹에 몸담아 윤항기의 키 브라더스와 경합을 벌이며 '하드록' 가수로
활동했던 그는 1976년까지 가수로서 전성기를 누리다
대마초 파동을 겪으며
활동에 제약을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음악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삶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밤무대와 지방 무대를 떠도는
생활을 해야 했으며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는 10여 년 후
그를 좋아하던 엄인호,
김현식을 비롯한 일군의 음악적 동반자들을 만나면서
다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김현식에게 소울 창법의 영향력을 강하게 미쳤던 그는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블루스 음악을 시도했던 신촌블루스의 1집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1988년에 발매된 이 앨범에는 한영애가 불러 히트시킨 '그대 없는 거리'와
정서용의 '아쉬움'이 들어 있으며 박인수는 히트된 이후
수식어처럼 붙어 다니는 곡
'봄비'와 '나그네의 옛 이야기'를 불렀다. 그리고 다음해에
자신의 절창 실력을
유감없이 뽐낸 베스트 음반 <뭐라고 한마디해야 할텐데>를
프로듀서 김준의
도움으로 발표한다. 특히 초반 3곡인, 과거 자신과 인기 경쟁을 벌이던
연석원의 곡 '뭐라고 해야할텐데'와 '겨울 소나타',
그리고 퀘션스 시절 불렀던
'기다리겠소'의 중후하고 거침없는 목소리는 우리를 경이로 몰고 간다.
하지만 앨범 발표 후 완벽한 활동에 대한 의욕은
갑자기 가사를 잊어버리는 등
올라선 무대에서 제대로 노래를 소화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그 빛을 상실했으며
'90년 말부터는 완전히 활동을 정지한 채 서울 근교에서
떠돌이처럼 지내야 했다.
그리고 다음해엔 급기야 저혈당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게다가 '95년에는
대마초 사건으로 다시 '70년대의 악몽을 재현했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그는 가수 출신인 윤항기 목사가 운영하던 선교원과 하사와 병장의
이경우가 운영하는 카페 등에서 잠시 기거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주민등록조차 말소된 채
정봉인 목사가 인도하는 일산의 '행복의 집'에서 살고 있다.
'그가 죽었다'라는 소문 아닌 소문을 듣고 있던 선·후배들은 뒤늦게 알려진
그의 소식에 2002년 7월 <리멤버 박인수 사랑의 콘서트>를 열고 과거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 가수의 불행을 안타까워했다. 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위원장 김광진)의 주최로 열린 이 콘서트에는
남궁옥분, 박강성, 박미경,
박상민, 박완규, 박진영, 최성수, 유열, 박씨는 아침 6시에 기상한다.
이후 예배를 마치고 가벼운 운동을 한 뒤 함께 지내는 20여명의
노인과 요양원에서
짜여진 프로그램에 따라 생활한다. 아직까지는 거동에
큰 어려움이 없는 데다 요양원
20여명의 노인 중에 박씨가 막내다. 이 때문에 그들 중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박씨가 먼저 나서서 돕기도 한다. 누군가 생일을 맞으면
축가를 불러주기도 한다.
그의 목에는 은색 목걸이가 걸려 있다. 목걸이에는
그의 이름과 ‘행복의 집’
전화번호가 새겨져 있다. 박씨가 치매증상으로 집을 나섰다가
길을 잃은 적이 몇번 있어 요양원 측이 궁여지책으로 걸어준
일종의 이름표다.
성 원장은 “예전에는 우리가 요양원이라기보다는 교회에서 생활이 어려운
노인 몇 분을 모시고 있는 정도의 조촐한 시설이었는데
그때 가끔 혼자 외출했다가 박씨가 길을 잃어 우리가 찾아다니곤 했다.
언젠가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은목걸이를 해줬고, 그 목걸이 덕으로
쉽게 집에 돌아온 적이 있는데 이후부터는 목욕을 할 때도 목걸이는
항상 걸고 있다”고 말했다. 박씨의 건강상태는 최근 주변
사람들도 놀랄 정도로 호전됐다.
‘행복의 집’ 총무 이재상씨는 “처음 만났을 때에는
무서워서 말도 제대로 걸지 못할 정도로
대인기피증이 있었는데 파킨슨병 수술를 받은 뒤 심했던
손떨림 현상도 없어졌고
2~3년 전부터는 성격이 완전히 변해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게 됐다”고 말했다.
소망을 묻자 그는 “노래…”라고만 짤막하게 답했다. 2002년
그의 투병생활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몇몇 후배들이 모 방송사 가요프로그램에
초청해 함께 무대에 오른 적이 있다. 이 무대가 현재로선
그의 마지막 무대다.
그는 당시 휠체어에 앉아 후배들이 부르는 그의 히트곡을 듣는 것이
예정된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한 후배가 건넨 마이크를
잡고 그가 정확한 가사로
노래를 부르자 객석에서는 박수가 이어졌다.
그는 이때의 기억을 인터뷰 중에 몇번이나 반복해 말했다.
“그땐 나도 울고 내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도 울고 그랬거든요….
” 그는 어쩌면 그때가 자신의 마지막 무대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부탁했다. 그는
“건강하세요”라고 말한 뒤
메모지에 이렇게 적었다. “my fans always be happy bright.”
그러나 그는 끝내 이날 날짜는 메모지에 적지 못했다.
<이상호기자 shlee@kyunghyang.com>
♬박인수 - 봄비
이슬비 나리는 길을 걸으며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며
나 혼자 쓸쓸히 빗방울 소리에
마음을 달래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봄비 -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나리려나
마음마저 울려주네
오, 봄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봄비 -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나리려나
마음마저 울려주네 오, 봄비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이슬비 나리는 길을 걸으며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며 나혼자 쓸쓸히 마음을 달래도
마음을 달래며 봄비 -
봄비 봄비 오 -
봄비가 나리네 -
봄비가 나리네 -
오 - 봄비가 나리네
- 나한테 나리네
- 봄비~ 내곁에 나리네 -
- 봄비가 나리네 -
박인수 / 봄비
쏘울가수 박인수가 레코드로 처음 취입한 노래이다. 강한 쏘울 풍의 호소력 짙은 박인수의 목소리가 인상적인 노래이다. 신중현이 덩키스 그룹을 해체하고 퀘션스 그룹을 결성하였는데, 그 퀘션스의 음반에 수록되었다. 그리고 이 노래는 이 보다 먼저 덩키스의 싸이키 델릭을 표방한 연주로 부산 출신의 가수 이정화씨에 의해 먼저 취입되었다. 70년 5월 유니버샬 레코드제작- KLH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