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은 다산이 제법을 가르쳐준 보림사 죽로차(竹露茶)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으로 알린 사람이다. 그 자신이 거처에 별도로 다옥(茶屋)을 마련해 놓고 차를 즐겼을만큼 차를 사랑했고, 우리 차와 일본차, 그리고 중국차에 관한 풍부한 기록도 남겼다. 자신의 차생활을 노래한 시도 꽤 많다. 이 글에서는 그의 문집 『가오고략(嘉梧藁略)』과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수록된 차 관련 기록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다옥을 짓고 차를 즐긴 차인
이유원은 46세 때인 1859년, 지금의 남양주시 화도읍 수동면 가곡리 마을에 자리한 가오곡(嘉梧谷)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는 이곳에 장서각(藏書閣)과 다옥(茶屋)을 짓고, 사시향관(四時香館)과 오백간정(五百間亭) 등을 세워 만년 은거의 계획을 세웠다. 그의 「가곡다옥기(嘉谷茶屋記)」에 차 애호의 변과 자신의 다옥에 대한 설명이 보인다.
내 성품이 평소에 차를 좋아한다. 사방의 이름난 차를 얻으면, 문득 산수가 좋은 곳으로 달려가 끓여 마신다. 한강 가에 살 때는 작은 집을 지어 ‘춘풍철명지대(春風啜茗之臺)’라고 하였다. 글씨는 수옹(遂翁) 섭동경(葉東卿)이 써서 주었다. 후에 가오곡(嘉梧谷)으로 이사해서는 퇴사담(退士潭)을 파서 좋은 물을 얻어, 호남의 보림차와 제주의 귤화차(橘花茶)를 끓여 마셨다. 근자에 연경에서 돌아온 주자암(周自菴)이 진짜 용정차와 우전차를 주므로 못물을 길어다가 함께 달였다. 솔 그늘과 대 그림자 사이에 솥과 사발을 늘어놓고 날이 저무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손을 대고서 찻물을 따라도 오히려 티끌이나 모래 등이 날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에 나무를 세워 시렁을 만들고, 위에는 판자로 덮었다. 집 모서리에다 이를 세우니, 간데없이 하나의 집이 되었다. 길이는 다섯 자 남짓 되고, 너비는 두 자가 넘었다. 가운데에는 화로를 고일 틀이 있었다. 구리 줄로 다관(茶罐)에 드리워 고리에 매달았다. 수탄(獸炭)을 화로 구덩이에 넣고 부채로 바람을 일으키면 바람이 스스스 불어 솔가지가 바람에 울부짖는 소리를 낸다. 해안(蟹眼)의 상태가 막 지나고 나면 어안(魚眼)이 또 생겨난다. 듣고 있노라면 정신이 아득해졌다가, 차를 마시면 정신이 깨어나곤 했다. 소동파가 간직해두었다는 밀운룡(密雲龍) 차가 어찌 내가 얻은 용정차나 우전차가 아닌 줄 알겠는가? 다만 네 학사를 후대해 줄 기약이 없음이 안타깝다. 물건의 신품(神品)은 언제나 있지만,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늘상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내 다옥(茶屋)을 나 홀로 좋아할 밖에.
余性素嗜茶. 得四方名茶, 輒走好山水烹飮. 居漢水上, 築小屋曰春風啜茗之臺, 葉遂翁東卿題贈. 後移卜嘉梧谷. 鑿退士潭, 得聖水. 煮湖南之普林茶, 耽羅之橘花茶. 近自燕京還, 周自菴贈龍井雨前眞茶. 汲潭水和煎, 列鐺碗於松陰竹影之間, 不知日之夕. 傳手灌來, 猶不免爲塵霉沙石之侵. 乃支木爲架, 覆之以板, 起於堂隅. 宛是一屋子. 長可五尺, 廣踰二尺. 中排有範尊爐, 以銅索錘罐, 掛之於環. 納獸炭於爐坎, 用扇受風. 風至颼颼, 作松鳴聲. 蟹眼纔過, 魚眼又生. 聽之神往, 啜之神醒. 東坡所藏密雲龍, 安知非余所得龍井雨前. 而但恨四學士無厚待之期, 物之神品恒有. 而人之知心不常有, 以我屋吾自好之.
서울 집에는 봄바람에 차를 마시는 집이란 뜻의 ‘춘풍철명지대(春風啜茗之臺)’란 별도의 공간을 마련했고, 가오곡으로 이사한 후에도 따로 다옥을 지어 차생활을 지속했음을 밝힌 글이다. 차만 얻으면 산수 좋은 곳으로 달려가 차를 달여 마신다고 하여, 차벽(茶癖)이 있음을 말했다. 호남의 보림차와 밀양 황차, 제주 귤화차 등을 즐겨 마셨고, 선물로 받은 중국산 용정차나 우전차도 마셨다.
차를 마실 때는 솔숲과 대밭 사이에 솥과 사발을 늘어놓고 마셨는데, 바람 때문에 먼지나 모래가 자꾸 들어가므로 아예 집 모퉁이의 별도 공간에 다옥을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다옥은 길이가 다섯 자, 너비는 두 자 남짓한 작은 공간인데, 나무로 시렁을 얹고 그 위를 판자로 덮은 허술한 구조였다. 가운데에는 화로를 고일 만한 틀을 만들었다. 다관에는 구리줄로 손잡이를 만들고, 화로에 숯을 넣어 부채로 불어 불을 피웠다. 물이 끓기 전에 생기는 기포의 모양새로 해안(蟹眼)과 어안(魚眼)을 구분하고, 찻물 끓는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졌다가 차를 마신 후에는 정신이 깨어나곤 했다고 한 것을 보면 그의 차에 대한 애호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임하필기』에도 이따금씩 차에 관한 언급이 보인다. 필시 중국 다서를 전재한 것으로 보이나 원전은 미처 확인하지 못하였다.
차는 가는 것을 채취해야 하고, 차는 따뜻하게 보관해야 한다. 차는 뜨겁게 끓여야 한다. 가늘지 않은 것을 채취하면 맛이 쓰다. 따뜻하게 보관하지 않으면 곰팡이가 핀다. 뜨겁게 끓이지 않으면 맛이 줄어든다. 특히 깨끗한 것을 높게 친다. 햇볕을 쬐면 안 되니 맛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採茶欲細, 藏茶欲溫, 烹茶欲熱. 採不細則苦, 藏不溫則霉, 烹不熱則洩. 尤貴其潔, 不可見日, 味奪.
자신의 실제 음다(飮茶) 체험에 비추어 공감 가는 내용이어서 옮겨 적은 듯하다. 또 「옥경고잉기(玉磬觚賸記)」에서는 “차는 빛깔로 고르고, 대나무는 그림자로 택한다. 茶取其色, 竹取其影”고 하여, 빛깔로 차를 가리는 것을 삶의 한 운치로 삼기도 했다.
그는 차와 관련된 시를 여러 수 남겼다. 중국산 햇차를 선물 받고 끓여 마신 후 지은 「시신차(試新茶)」 시 한 수를 먼저 읽는다.
蜀州雀舌名今古 촉주 땅의 작설차는 고금에 유명한데
烏嘴無多麥顆香 오취(烏嘴)는 많지 않고 맥과차(麥顆茶)가 향기롭다.
漆牌金字瀋陽路 심양 길에 사온 차는 칠패(漆牌)에 금박 글씨
一盞聲增二盞良 첫 잔에 소리 치고 둘째 잔은 더 좋아라.
오취(烏嘴)나 맥과(麥顆)는 까마귀 부리나 보리쌀알만큼 하게 돋은 차의 첫 싹을 따서 만든 고급의 우전차다. 심양에서 구입해온 칠패에 금박으로 글씨를 쓴 고급 작설차를 얻어, 서둘러 다관을 앉혀 끓여 내오니, 첫 잔에 환호성이 터지고, 둘째 잔도 흐믓한 마음이 가시지 않더라고 한 것이다. 「정향 나무 아래서 향기를 맡다가 명차를 떠올리며(丁香樹下聽香憶名茶)」란 제목의 시 5수에서도 자신의 차 생활을 노래했다.
篋中藏舊茗 상자 속에 오래도록 간직한 차가
塵土十年昏 티끌 세상 10년을 묻혀 있었지.
洗滌淸流下 맑은 샘물 아래서 깨끗이 씻자
元規莫自尊 원래의 그 모습이 절로 드높네.
茗豈原來斯 좋은 차 애초에 여기 올적엔
頹廊棄寘久 퇴락한 집 오래 버려 둘 줄 몰랐네.
鼠虫跡互成 쥐와 벌레 자취가 서로 이어져
西突又東走 서쪽에 부딪치다 동으로 갔지.
我其憐茗朽 좋은 차 썩어감 내 슬피 여겨
舀蘸藤籭兒 등나무 체 건져내어 차를 끓였네.
一服換形殼 처음 마시니 껍질이 변화할 듯
再烹潤膚肌 두 번을 끓이니 피부에서 윤기 나네.
春風臺榭高 봄바람에 누대는 높기만 한데
茗氣花香雜 차 내음 꽃 향기와 섞이었구나.
灑落人間緣 인간 세상 인연이 깨끗도 하여
聲聲松韻颯 소리마다 솔바람 노래 들리네.
毆陽洗垢硯 구양수는 벼루 때를 씻어내었고
沈約潔癯身 심약은 여윈 몸을 깨끗이 했지.
癖好無今古 벽(癖)을 즐김 고금이 차이 없거늘
茗胡累以塵 차를 어이 먼지 속에 묻어두리오.
오래 전에 구한 떡차를 상자 속에 넣어둔 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10년만에 이를 끓여 마시며, 그 감회를 노래한 내용이다. 좋은 차가 그저 ?어 가는 것을 슬피 여겨서 샘물로 깨끗이 씻어 채반에 헹궈내어 끓였다. 첫잔을 마시니 껍질이 벗어져 신선이 되어 날아갈 듯 하고, 둘째 잔을 마시니 피부에서 윤기가 나는 듯하였다. 구양수는 벼루에 앉은 더캐를 씻는 벽이 있었고, 심약은 목욕 벽이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은 차 즐기는 벽이 있다고 하여, 차에 대한 식지 않는 애정을 말했다.
「한좌(閒坐)」란 작품에서는 또 이렇게 노래했다.
除非茶具無他物 다구(茶具)를 제외하면 다른 물건 없으니
不置花盆少雅容 화분조차 두질 않아 우아한 모습 적네.
引蔓補墻樊蔽邃 덩굴 끌어 담을 기워 울을 깊이 덮고서
穿池疊石勺流溶 못을 파서 돌을 쌓아 물을 떠서 담았지.
閒中事業誰過此 한가할 때 하는 일로 이만한 것 있으랴
山外炎凉詎識庸 산 밖의 염량세태 어이 알아 쓰리오.
坐臥便身心未掣 앉고 눕고 몸 편하니 마음도 느긋하여
居居端合養衰慵 거처에서 단정히 쇠한 몸을 기르노라.
집안에 다구(茶具) 외에는 변변한 물건 하나 없다 하여, 차와 늘 함께 하는 생활을 말했다. 다른 꾸밈없이 담쟁이 넝쿨로 무너진 담을 가리고, 연못을 파서 물을 길어 한가롭게 차를 마신다. 염량세태를 다 잊고 거처에서 차와 더불어 쇠한 몸을 기르겠노라는 다짐이다. 「철다음(啜茶吟)」 3수에서도 자신의 차에 대한 벽(癖)을 노래했다.
居若僧寮訝有髮 절집 같은 거처라 터럭 있음 의아하고
隱如處子愧無鉛 처녀 같이 숨어 사니 연지 없음 부끄럽다.
閱盡窖壺寒暖味 술병의 차고 더운 맛은 이미 보았거니
衰年何妨喚茶顚 늙은 나이 다전(茶顚)으로 불려도 괜찮으리.
靑山捫虱抱書遲 청산에서 이 잡으며 책 덮음도 더디니
睡裏生涯也自知 잠 속의 생애임을 스스로 아는도다.
水厄此間猶不到 수액(水厄)이 이곳에는 오히려 이르잖아
枯腸縮縮未堪飢 마른 장이 움츠려져 주림을 못 견디네.
老去原來少氣岸 늙어지면 원래부터 기운이 적어져서
尋常家冗並無關 평범한 집안 일도 상관하지 않는다네.
猶有一端專力處 그래도 한 가지 힘 쏟는 곳 있나니
烹茶飼鶴未全閒 차 끓이고 학 기르느라 한가하지 않다네.
술이야 지금껏 실컷 맛보았으니, 이제부터는 차만 즐겨, 다전(茶顚) 즉 차 미치광이로 불려도 괜찮겠다고 했다. 둘 째 수 3구의 수액(水厄) 또한 차를 즐겨 마시는 일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차 미치광이 소리를 들을만큼 차만 마시며 지내고 싶은데, 수액(水厄)이라 할만큼 차가 넉넉지를 않아, 차에 굶주린 장을 적실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셋째 수에서도 온갖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오로지 차 달이고 학 기르는 데만 마음을 쏟으며 지내는 삶을 술회했다.
이밖에도 「화사(花史)」 중 「청상(淸賞)」이란 작품에서는 “명상(茗賞)이 으뜸이고 담상(譚賞)이 다음. 茗賞最優譚賞次”이라 하여 차를 음미하는 일이 좋은 벗과 이야기 나누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했고, 「오팽년차제(吳彭年茶題)」의 “손 따라 차 가늠해 얼마간 마시니, 찻상 머리 은침아(銀針兒)의 향기가 끼쳐오네. 隨手量茶多少啜, 床頭香聞銀針兒”와 같은 구절들은 생활 속에 깊이 뿌리 내린 그의 차 사랑을 잘 보여주는 구절들이다.
우리 차에 대한 애정과 감식안
이유원은 자신의 차 생활을 노래한 것 외에도 우리 차문화사에서 특별히 기억되어야 할 역사적 기록도 적지 않게 남겼다. 특히 다산의 제법에 따라 강진 보림사에서 나는 찻잎으로 만든 국산차에 대해 상세하게 언급한 장시 「죽로차(竹露茶)」는 자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普林寺在康津縣 보림사는 강진 고을 자리 잡고 있으니
縣屬湖南貢楛箭 호남 속한 고을이라 싸릿대가 공물일세.
寺傍有田田有竹 절 옆에는 밭이 있고 밭에는 대가 있어
竹間生草露華濺 대숲 사이 차가 자라 이슬에 젖는다오.
世人眼眵尋常視 세상 사람 안목 없어 심드렁이 보는지라
年年春到任蒨蒨 해마다 봄이 오면 제멋대로 우거지네.
何來博物丁洌水 어쩌다 온 해박한 정열수(丁洌水) 선생께서
敎他寺僧芽針選 절 중에게 가르쳐서 바늘 싹을 골랐다네.
千莖種種交織髮 천 가닥 가지마다 머리카락 엇 짜인듯
一掬團團縈細線 한 줌 쥐면 웅큼마다 가는 줄이 엉켰구나.
蒸九曝九按古法 구증구포 옛 법 따라 안배하여 법제하니
銅甑竹篩替相碾 구리 시루 대소쿠리 번갈아서 방아 찧네.
天竺佛尊肉九淨 천축국 부처님은 아홉 번 정히 몸 씻었고
天台仙姑丹九煉 천태산 마고선녀 아홉 번 단약을 단련했지.
筐之筥之籤紙貼 광주리 소쿠리에 종이 표지 붙이니
雨前標題殊品擅 ‘우전(雨前)’이란 표제에다 품질조차 으뜸이라.
將軍戟門王孫家 장군의 창 세운 문, 왕손의 집안에서
異香繽紛凝寢讌 기이한 향 어지러이 잔치 자리 엉긴 듯 해.
誰說丁翁洗其髓 뉘 말했나 정옹(丁翁)이 골수를 씻어냄을
但見竹露山寺薦 산사에서 죽로차를 바치는 것 다만 보네.
湖南希寶稱四種 호남 땅 귀한 보물 네 종류를 일컫나니
阮髥識鑑當世彦 완당 노인 감식안은 당세에 으뜸일세.
海橽耽䔉檳樃葉 해남 생달(栍橽), 제주 수선(水仙), 빈랑(檳榔) 잎 황차(黃茶)러니
與之相埓無貴賤 더불어 서로 겨뤄 귀천(貴賤)을 못 가르리.
草衣上人齎以送 초의 스님 가져와서 선물로 드리니
山房緘字尊養硯 산방에서 봉한 편지 양연(養硯) 댁에 놓였었지.
我曾眇少從老長 내 일찍이 어려서 어른들을 좇을 적에
波分一椀意眷眷 은혜로이 한잔 마셔 마음이 애틋했네.
後遊完山求不得 훗날 전주 놀러가서 구해도 얻지 못해
幾載林下留餘戀 여러 해를 임하(林下)에서 남은 미련 있었다네.
鏡釋忽投一包裹 고경(古鏡) 스님 홀연히 차 한 봉지 던져주니
圓非蔗餹餠非茜 둥글지만 엿 아니요, 떡인데도 붉지 않네.
貫之以索疊而疊 끈에다 이를 꿰어 꾸러미로 포개니
纍纍薄薄百十片 주렁주렁 달린 것이 일백 열 조각일세.
岸幘褰袖快開函 두건 벗고 소매 걷어 서둘러 함을 열자
床前散落曾所眄 상 앞에 흩어진 것 예전 본 그것이라.
石鼎撑煮新汲水 돌솥에 끓이려고 새로 물을 길어오고
立命童竪促火扇 더벅머리 아이 시켜 불 부채를 재촉했지.
百沸千沸蟹眼湧 백 번 천 번 끊고 나자 해안(蟹眼)이 솟구치고
一點二點雀舌揀 한 점 두 점 작설(雀舌)이 풀어져 보이누나.
胸膈淸爽齒根甘 막힌 가슴 뻥 뚫리고 잇뿌리가 달콤하니
知心友人恨不遍 마음 아는 벗님네가 많지 않음 안타깝다.
山谷詩送坡老歸 황산곡(黃山谷)은 차시(茶詩) 지어 동파 노인 전송하니
未聞普茶一盞餞 보림사 한잔 차로 전별했단 말 못 들었네.
鴻漸經爲瓷人沽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은 도공(陶公)이 팔았으나
未聞普茶參入撰 보림사 차를 넣어 시 지었단 말 못 들었네.
瀋肆普茶價最高 심양 시장 보이차(普洱茶)는 그 값이 가장 비싸
一封換取一疋絹 한 봉지에 비단 한 필 맞바꿔야 산다 하지.
薊北酪漿魚汁腴 계주(薊州) 북쪽 낙장(酪漿)과 기름진 어즙(魚汁)은
呼茗爲奴俱供膳 차를 일러 종을 삼고 함께 차려 권한다네.
最是海左普林寺 가장 좋긴 우리나라 전라도의 보림사니
雲脚不憂聚乳面 운각(雲脚)에 유면(乳面)이 모여듦 걱정 없네.
除煩去膩世固不可無 번열(煩熱)과 기름기 없애 세상에 꼭 필요하니
我産自足彼不羨 우리 차면 충분하여 보이차가 안 부럽다.
이 시는 여러 면에서 우리에게 뜻 깊은 정보를 제공한다. 첫째, 보림사의 죽로차가 다산 정약용이 절의 승려들에게 가르쳐준 방법에 따라 구증구포의 방식으로 법제된 차임을 언급했다. 차계에서 다산의 구증구포법을 두고 오랜 논란이 계속되어 온 것을 감안하면 대단히 중요한 기록이다. 둘째, 아침(芽針) 즉 바늘 같은 첫 싹만을 골라 따서 머리카락이 엇짜인 듯 찻잎의 결을 살려 만든 떡차의 구체적 제법을 설명했다. 셋째, 대오리로 얽어 짠 용기로 공기가 통하게 포장하고, 종이 표지에 우전(雨前)이란 상표를 붙인 상품의 포장상태를 정확하게 묘사했다. 넷째, 그가 마신 보림사 죽로차가 엽전 모양으로 끈에다 꿰어 꾸러미로 포개 110조각이 담긴 소형의 떡차였음을 밝혔다. 다섯째, 당시의 차 끓이는 과정과 절차를 설명하고, 막힌 가슴이 뻥 뚫리고 잇뿌리가 달콤하다 하여 구체적인 효과와 맛을 제시했다. 여섯째, 비싸기만 한 중국차 못지 않은 우리차의 우수성과 번열과 기름기를 없애주는 차의 효능에 대해 칭찬했다. 이 한편의 시로 말미암아, 다산 이래로 초의를 거쳐 이어온 보림사 죽로차의 구체적인 실체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는 보림사 죽로차를 젊은 시절 자하 신위의 집에서 처음 맛보았다. 초의가 스승인 완호대사의 삼여탑(三如塔)을 건립하면서 비문을 받기 위해 폐백으로 드린 선물이었다. 이후로는 다시는 그 차 맛을 볼 수 없어 그리워했는데, 1872년 대보름날 자신의 사시향관에서 고경선사(古鏡禪師)가 가져온 보림사 죽로차를 맛보고, 예전의 그 차인 줄을 알았다고 했다.
이유원은 『임하필기』중 「호남사종(湖南四種)」이란 항목에서 “강진 보림사의 죽전차는 열수 정약용 선생이 이를 얻어, 구증구포(九蒸九曝)의 방법으로 절의 승려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 품질이 중국의 보이차만 못하지 않다. 곡우 이전에 딴 것을 더욱 귀하게 치니, 이를 우전차라 해도 괜찮다. 康津普林寺竹田茶, 丁洌水若鏞得之, 敎寺僧以九蒸九曝之法. 其品不下普洱茶. 而穀雨前所採尤貴, 謂之以雨前茶可也.”고 하여, 위 시의 언급을 재확인하고 있다. 또 「삼여탑(三如塔)」 항목에서는 “내가 임신년(1872) 대보름날 사시향관(四時香館)에 고경선사(古鏡禪師)와 함께 보림차를 마셨다. 대화가 초의에게 미치자 탑명 서문을 적어 서로 보았다. 초의는 박금령(朴錦齡)과 가장 마음이 맞았다. 보림차는 강진의 대밭에서 나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으뜸가는 차다. 余於壬申上元, 在四時香館, 與古鏡禪, 啜寶林茶. 話及草衣, 錄塔銘序相視. 草衣最有契於朴錦齡. 寶林茶産康津竹田, 爲東國第一品.”라고 하여, 보림사 죽로차에 대한 언급을 다시 남겼다.
이유원의 「걸차신판추(乞茶申判樞)」란 작품에서도 초의차에 대해 구체적 설명이 보인다. 신판추(申判樞)는 초의와 가까웠던 신헌(申櫶, 1811-1884)이니, 그에게 초의차를 나눠 달라고 청하면서 보낸 시다.
草衣老釋揀名茶 연로하신 초의 스님 이름난 차 가려내니
自足殊邦移種芽 중국에서 옮겨 심은 차싹 절로 넉넉하다.
風末孤雲子玉譜 바람 끝 외론 구름 자옥보(子玉譜)가 이것이요
雨前靑雪毗陵家 곡우 전의 푸른 눈은 비릉(毗陵)의 집일래라.
竹皮套緊知新製 대껍질로 꽁꽁 싼 것 새 제품임 알겠고
書面毛生感不遐 글씨 위로 터럭 돋아 얼마 안 된 줄을 아네.
病暍三庚回白首 삼복에 더위 먹어 흰 머리로 변했나니
淸香應貯將軍衙 맑은 향기 장군 관아 저장되어 있으리라.
초의가 연로함에도 불구하고 이름난 차를 만들었다. 3구의 자옥보(子玉譜)는 옥천자(玉川子)가 엮었다는 『다보(茶譜)』를 말한 듯 하나, 4구의 비릉가(毗陵家)는 출전을 확인하지 못하겠다. 5,6구를 보면 초의차가 대껍질로 아주 야무지게 단단히 포장을 하고, 그 위에 글씨로 차 이름을 써놓았음을 알 수 있다. 삼복에 더위를 먹어 견딜 수가 없으니, 장군의 관아에 응당 보관되어 있을 초의 스님의 햇차를 좀 나눠달라고 부탁한 내용이다. 앞서 본 「죽로차」의 내용과 함께 초의스님이 만든 차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증언하는 아주 귀한 기록이다.
이밖에도 『임하필기』의 「죽전차(竹田茶)」 항목에서는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와서 옛 기록에 신라 때 차 씨앗을 당나라에서 구해와 지리산에 뿌렸다는 기록을 보고, 부로에게 물어 엄천사(嚴川寺) 북쪽 대숲 속에서 차 몇 그루를 얻어 이를 배양해서 크게 번식 시킨 일을 적었다.
또 이유원은 밀양 황차(黃茶)에 대한 귀한 기록을 시로 남겼다. 「정은(貞隱) 강로(姜㳣) 상공께서 밀양 황차를 주신데 감사하며(謝貞隱相公贈密陽黃茶)」란 작품이 그것이다.
幽竹窓陰待我歸 창 그늘 대 그림자 내가 오길 기다리니
洛城春夢轉依微 서울의 봄날 꿈이 외려 더욱 설핏하다.
何來一葉淸凉味 어데서 온 한 잎 차의 청량한 맛이라니
滌了胸襟悟昨非 흉금을 씻어주어 지난 잘못 일깨우네.
短童奔走汲名泉 어린 동자 분주히 이름난 샘물 길어
竪罐橫鐺錯前後 솥과 물통 가로 세로 앞뒤로 늘어놓네.
瀋肆川箱猶退步 심양(瀋陽) 저자 사온 차도 외려 이만 못하거니
從知貞老以延年 정은(貞隱) 상공 이것으로 장수하심 알겠구나.
강로(姜㳣, 1809-1887)가 보내준 밀양 황차를 받고서 답례로 쓴 시다. 서울의 벼슬길에 매여서도 생각은 늘 전원으로 돌아갈 마음뿐이다. 답답한 서울 생활에 찌들어 지내던 터에 청량한 황차를 받았다. 절로 입에 군침이 돌아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다. 다동(茶童)은 좋은 샘물을 길어오랴, 먼지 앉은 다구(茶具)를 꺼내오랴 갑자기 부산스럽다. 숯불로 물을 끓여 차를 우려낸다. 한잔을 마시자 흉금이 환하게 트여온다. 밀양 황차의 맛을 보고서, 중국 심양에서 사온 상자에 든 차도 이 황차만은 못하리라고 칭찬했다. 밀양 황차에 대한 것은 따로 알려진 기록이 없는데, 이 시에 의해 조선 후기에 밀양 지역에서 발효 떡차인 황차가 만들어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즐긴 차 중에 제주 귤화차(橘花茶)가 또 있다. 「사혜귤차(謝惠橘茶)」시를 보자.
橘老橘茶滿竈堆 귤로가 귤차를 부엌 가득 쌓아두니
天樞光散楚江隈 천추(天樞)의 빛 초강(楚江)의 물굽이로 흩어진다.
玉川舊譜添新品 옥천자(玉川子)의 구보(舊譜)에다 신품(新品)을 첨가하니
千里奇香咫尺來 천리의 기이한 향 지척까지 왔도다.
귤차는 「가곡다옥기」에서 제주의 귤화차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귤꽃을 따서 말려 만든 차인 듯하다. 그 구체적 제법은 알 수 없다. 귤꽃만 말려 차로 만든 것인지, 여기에 찻잎을 함께 넣어 우려 마시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이렇듯 이유원은 자신의 문집 속에 보림사 죽로차와 함양의 죽전차, 그리고 밀양 황차와 제주의 귤화차 등 우리 차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을 많이 남겼다. 이를 통해 초의차의 구체적인 제법과 모양새, 그리고 포장 방법까지 알 수 있게 되었고, 또한 밀양 황차의 존재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차문화사에서 매우 소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중국차와 일본차에 관한 기록
한편 이유원은 드물게도 중국차와 일본차에 관한 기록도 적지 않게 남겼다. 특히 일본차를 직접 맛보고서 지은 12수의 연작시는 우리나라 문인이 지은 최초의 일본차에 관한 기록이다. 먼저 중국차에 관한 언급이다.
연경 시장에서 파는 차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반드시 우전차를 귀하게 치는데 곡우 이전에 채취한 것이다. 차 시장 중 가장 큰 것은 심양에 있다. 심양 근처의 북비(北鄙) 의 부락은 명나라 말엽의 각다시(榷茶市)인데, 군수 비용으로 보충해 썼다. 이때는 호인(胡人)이 강성한지라 차에 드는 비용이 대단히 컸다. 명유(明儒)가 말하기를, 호인은 늘 양젖을 마시는 까닭에 차탕(茶湯)을 잘 마신다. 차는 대개 강남에서 난다. 무역으로 옮겨오면 오로지 오랑캐 땅에 내다판다. 이 풍토가 여태도 그치지 않아, 여태껏 뒷골목과 깊은 골짜기에도 대개 차 가게가 있다.
燕市茶品不一. 必以雨前茶爲貴, 穀雨前所採也. 茶市最大者, 惟瀋陽. 而瀋近北鄙部落, 明末榷茶市, 補用於軍需. 其時胡人强盛, 茶費甚鉅. 明儒之言, 胡人常喫羶酪, 故善飮茶湯. 盖産於江南, 而貿遷則專靠於胡地. 此風未已, 今亦衖衕深谷, 擧有茶肆.
연경 시장에서 우전차가 가장 비싼 값에 팔리는 것을 말하고 나서, 가장 큰 규모의 차시장은 심양에 있고, 이곳은 명말의 각다시(榷茶市) 즉 국가에서 차를 전매하던 시장이 있던 곳이라고 했다. 이곳의 시장은 당시 강남에서 생산된 차를 가져와, 육식 때문에 차 없이는 배열병(背熱病)이 나서 견디지 못하는 북쪽 변방 민족에게 비싼 값에 내다 팔던 데서 비롯되었다. 지금까지도 곳곳에 차 가게가 즐비하다고 하여, 당시 심양 일원의 차 마시는 풍속에 대해 기록하였다.
이유원은 보이차(普洱茶)에 대해서도 아주 상세한 언급을 남겼다.
보이차는 전남(滇南), 즉 운남성에서 난다. 목방(木邦)이니 보이(普耳)니 하는 몇 종류가 있다. 목방은 덩이차로 만든다. 위보(胃普)란 이름으로 파는데, 지역이 서로 가깝다. 보이차의 진품(珍品)으로는 모첨(毛尖)․아차(芽茶)․여아(女兒) 등의 이름이 있다. 모첨은 곡우 이전에 채취한 것으로 덩이차로 만들지 않는다. 아차는 조금 자란 뒤에 채취하여 덩이차로 만든다. 2냥 또는 4냥을 단위로 한다. 운남 사람들이 아낀다. 여아차 또한 아차의 종류다. 곡우 이후에 딴 것이다. 1근에서 10근까지 하나의 덩어리로 만든다. 운남 여자들이 은화와 맞바꿔 이를 모아 화장품 사는 비용으로 삼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나머지는 조보(粗普)라 하는데 잎이 모두 흐트러졌다. 운남에서 판다. 거친 것을 가져다 찐득찐득하게 졸여 떡을 만든다. 도장을 찍어 쌓아두고 대접하는데 또한 예주차(蕊珠茶)라고도 한다. 능히 열병을 다스린다. 항주의 용정차(龍井茶)와 다름없다. 다만 향이 너무 강하고, 성질이 또 너무 차며, 쓴 맛에 가까워 용정차의 중화(中和)한 기운이 없다. 그 나머지 홰나무나 버드나무에 기생하는 것을 채취하여 대신하기도 한다. 내가 두 번 연경에 들어가 차 가게 사람에게 자세히 들었다. 상품(上品)은 용정차이고, 그 다음이 덩이차로 만들지 않은 보이차다. 그 다음은 2냥 4냥 단위로 된 덩이차다. 이밖에 근 단위의 덩이차나 고약처럼 졸인 것은 모두 족히 논할 것이 없다.
普洱茶滇南産, 有數種. 曰木邦, 曰普耳. 木邦作團. 胃普名以販, 其地相近也. 普茶珍品, 有毛尖, 有芽茶, 有女兒等號. 毛尖卽雨前所採者, 不作團. 芽茶稍長採成團, 以二兩四兩爲率. 滇人重之. 女兒茶亦芽類. 取於穀雨後, 以一觔至十觔, 爲一團. 夷女換銀貨, 以積爲奩資故名. 餘曰粗普, 葉皆散. 賣滇中. 取粗者, 熬膏成餠. 摹印儲饋遺. 亦曰蘂珠茶, 能治熱疾, 不殊杭之龍井. 惟香過烈, 性又極寒, 味近苦. 無龍井中和之氣. 其餘採槐柳之寄生以代之. 余再入燕京, 詳聞於茶肆人. 上品龍井, 其次普茶之不作團, 其次二四兩作團. 外他觔團熬膏, 皆無足論.
보이차의 여러 종류와 제조법 및 효능에 대해 상세하게 적고 있다. 직접 연경에 갔을 때 차 가게 사람에게 들은 내용이라 하였다. 하지만 앞의 내용은 18세기 중국의 장홍(張泓)이 지은 『전남신어(滇南新語)』의 내용을 그래도 옮겨 적은 것이다. 어쨌거나 보이차에 관한 최초의 상세한 기록을 이유원이 남긴 것은 주목할만 하다.
일본차에 관한 이유원의 기록을 볼 차례다. 다음은 『임하필기』의 기록이다.
차 이름은 한 가지가 아니다. 일본차 또한 아치(雅致) 있는 것이 있다. 그 가운데 능삼(綾森)․응조(鷹爪)․유로(柳露)․매로(梅露)․국로(菊露)․초적백(初摘白)․문명석(文明昔)․명월(明月)․청풍(淸風)․박홍엽(薄紅葉)․노락(老樂)․우백발(友白髮)․남산수(南山壽) 등의 이름이 가장 좋다.
茶名不一. 日本茶亦有雅致者. 其中綾森․鷹爪․柳露․梅露․菊露․初摘白․文明昔․明月․淸風․薄紅葉․老樂․友白髮․南山壽等名最佳.
일본차의 구체적인 이름을 무려 13가지나 들고 있다. 문집에는 다시 「영산본원차종(詠山本園茶種)」시가 실려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차 가운데 ‘문명석(文明昔)’이란 품종을 뺀 나머지 12 품종에 대해 각각 한 수씩 노래했다. 병서를 보면, “일본 동경에는 산본원(山本園)이 있는데, 차가 나는 곳이다. 그 상품이 하나 뿐이 아니고 이름 또한 많다. 내가 어떤 것은 보았고 어떤 것은 보지 못했다. 그 중 좋은 것을 가려 상품마다 시를 짓는다. 日本東京有山本園, 産茶處也. 其品不一, 其名亦多. 余或見或不見, 取其佳者品題.”고 적고 있다.
이유원이 어떤 경로로 일본 동경의 산본원 차를 종류별로 구해 맛보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동경의 산본원은 산본(山本) 가문에서 대대로 운영해온 다원(茶園)으로, 에도(江戶)에서 차를 만들어 팔아 당시 영주들에게 천상천하에 으뜸가는 차란 평판을 얻어, 우치제(宇治製)란 이름을 얻었던 차원이다. 열 여덟 곳에 따로 다원을 운영하여, 각기 다른 상품을 출시했다. 이 산본씨의 다원에서 생산되는 차를 이유원이 직접 맛보고서 감상 평을 단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제 자료 제시를 겸하여 12수의 시를 번역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능삼(綾森)
鮫人杼柚曬淸霜 교인(鮫人)이 베틀에다 맑은 서리 말려서
夜夜瑤池襯玉牀 밤마다 요지에서 옥 평상에 잔치하네.
一帶流雲歸斂迹 한 떼의 구름이 자취 거둬 가더니만
去尋春雨野丁筐 야정(野丁)의 광주리에 봄 비가 내리누나.
응조(鷹爪)
龍團揀綠雀生舌 용단차 초록빛 작설을 가려내어
獸炭吹紅蟹吐涎 수탄(獸炭)을 붉게 불자 게가 침을 토한다.
臂上秋鞲鷹爪健 팔뚝 위 깍지 위에 매 발톱이 건장터니
幻他之乙採中田 이게 변해 저게 되어 밭에 가서 채취하네.
유로(柳露)
賽線賽金梭曉風 줄을 넣고 금을 넣어 새벽 바람 비단 짜니
若輕若重枕南宮 가벼운 듯 무거웁게 남궁(南宮)에서 누었구나.
繁華且置前身事 번화했던 전생의 일 가만히 놓아두고
却向深山綠茁叢 깊은 산 문득 향해 초록 싹을 틔웠다네.
매로(梅露)
美人高士共爭先 미인과 고사가 함께 앞을 다투는 듯
濃湛明珠雨雪天 눈 비 오는 날씨에 짙고 맑은 밝은 구슬.
生涯澹泊貧家事 사는 일도 담박한 가난한 집 일이라
擧白何須辨聖賢 온통 흰데 성현을 구분해 무엇 하리.
국로(菊露)
楚辭影落三閭村 초사(楚辭)는 삼려촌(三閭村)에 그림자로 떨어지고
晉史淸傳五柳門 진사(晉史)는 오류문(五柳門)에 맑은 풍도 전하네.
一掬誰分泉水積 한 웅큼 길은 샘물 그 누가 분간하리
千年靈壽問眞源 천년의 영수(靈壽)가 참 근원을 묻는구나.
초적백(初摘白)
尖尖白白向新陽 뾰족뾰족 흰 싹이 새 볕을 향해 나니
穀雨之前不滿箱 곡우가 오기 전엔 상자조차 못 채우리.
若箇銀針千萬縷 은침(銀針) 같이 가는 잎이 천만 가닥이라면
往來九轉煉金光 앞뒤로 구전(九轉)하여 금빛으로 정련하리.
명월(明月)
中天月上見虛明 중천에 달이 떠서 텅빈 밝음 드러나니
燃點金爐氣益淸 쇠 화로에 살라서 기운 더욱 해맑은 듯.
一錢不費買如許 돈 한푼 들이잖코 사는 것이 어떠하리
十二樓高白玉京 백옥경엔 열 두 누대 높이 솟아 있나니.
청풍(淸風)
誰道三庚天氣炎 삼복 더위 날씨가 무덥다고 뉘 말했나
輕淸受用近莊嚴 경쾌하고 맑기가 장엄함에 가깝구나.
響送玎璫人不見 쟁글쟁글 소리 나도 사람은 뵈잖으니
姮娥手捲水晶簾 항아 아씨 수정 발을 손수 걷고 계시는 듯.
박홍엽(薄紅葉)
石上仙薑紫吐芽 바위 위 선강(仙薑)이 자줏빛 싹 토해내니
輕霜初過野人家 풋서리 야인(野人) 집에 처음으로 지나누나.
春葉爭如秋葉染 봄 잎이 앞 다투어 가을 잎인양 물이 드니
較來厚薄孰多嘉 후박(厚薄)을 견줄진대 누가 더 고울런지.
노락(老樂)
樂事殘年睡與食 늙마에 즐거운 일 자는 일과 먹는 일
睡餘味在食餘留 잠깬 뒤 마시는 맛 밥 먹은 뒤 남았구나.
矮箱弊篚藏香久 작은 상자 낡은 합에 오래 향을 간직타가
供給時時却忘憂 이따금 마셔보면 문득 근심 잊는다오.
우백발(友白髮)
星星我髮黑無餘 성성한 내 머리털 검은 머리 하나 없고
天下親朋少尺書 천하의 친한 벗들 짧은 편지 한통 없네.
一烹二啜三宜漱 한번 끓여 두 번 마셔 세 번째는 양치하니
知己於今固莫如 지금에 날 아는 벗 너 만한이 없구나.
남산수(南山壽)
酌斗南山祝聖人 남산의 술을 따라 성인에게 축수하니
奚徒以酒陋誠伸 어이 한갓 술 가지고 못난 정성 펼쳐보리.
征稅關門斯亦一 관문(關門)의 구실 세금 여기도 한가지라
搖搖船泊洛城津 흔들흔들 낙성진(洛城津)에 배가 정박 하누나.
시를 보면 각각의 차종을 직접 맛보고서 나름의 특성을 파악한 뒤에 쓴 시임을 알 수가 있다. 그의 차에 대한 애호벽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알려주는 자료일 뿐 아니라, 19세기에 일본차에 대한 유일한 본격 품평의 내용을 담은 시여서 일본 쪽에서 볼 때도 매우 귀한 자료라 할 수 있다. 한일 차문화 교류의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이상 이유원의 차관련 시와 그의 차생활을 알려주는 각종 기록들을 차례로 검토해 보았다. 그는 차를 너무도 사랑한 차인이었다. 집에 다옥(茶屋)까지 짓고, 각종 다구를 구비해 놓고서, 귀한 샘물을 길어다가 차맛을 시험해 보기도 했다. 이글에서 미처 다루지 못했지만 샘물에 대한 감식안도 남달랐다. 특히 보림사 죽로차와 함양 죽전차, 그리고 밀양 황차 제주 귤화차 등 우리 차에 대한 귀한 기록을 남겨 차문화사 정리에 소중한 자료를 제공했다. 중국차와 일본차에 대해서도 해박하고 정심한 기록을 남겨, 차문화 교류의 실상을 정리한 업적도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