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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올린 것이 잘 못 된 부분이 있어 다시 올립니다. 한꺼번에 많은 곳을 돌다 보니 좀 길고 지루할 것 같은 데 부분적으로
봐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 좋은 단풍철 옛사람들의 향기를 맡으며
올해도 예년 하던 대로 이 좋은 단풍철에 이 땅의 풍광과 이 땅에 뿌리를 내리며 살아온 선인들의 삶의 자취를 둘러보는 旅程(여정)을 우리 敬思會는 또 다시 시작했다. 아침 일찍 서울을 벗어나 영동 고속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기분은 우리를 몹시 들뜨게 했고 강원도로 접어들면서 산세가 우람해지고 단풍이 절정에 이른 풍광은 참으로 좋아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횡성과 평창을 거쳐 한반도의 등뼈 백두대간을 넘어서니 좌우의 울긋불긋 단풍이 절경이요, 저 멀리 푸른 동해 바다가 가슴을 탁 트이게 해주고 시원한 바람과 함께 눈을 즐겁게 해주니 우리는 무심결에 “와! 좋다”를 연발했다. 흥분된 기분으로 즐거워하면서 계속 달려 강릉에서 바닷가를 따라 남으로 내려갔다. 오후 한시가 조금 지나 임원 항으로 들어가 펄쩍펄쩍 뛰는 활어를 잡아 안주로 하는 기분 역시 그곳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여행의 즐거움이었다.
얼큰한 매운탕으로 배까지 든든히 채우고는 佛影寺를 찾아갔다. 꼬불꼬불한 불영계곡 길로 들어서자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에 군데군데 섞여 있는 노랗고 붉은 잡목들이 만들어 내는 풍광은 거대한 수채화 같이 아름답고 산뜻한 느낌으로 다가 왔다. 오랜만에 가는 길이라 애를 쓰면서 조심스럽게 찾아 들어가 天竺山佛影寺 현판이 붙은 일주문을 들어섰다. 천축교를 건너가며 바라보는 오른편 계곡 옆으로 송림과 괴암 봉우리가 어우러진 보기 드문 경관은 참으로 좋았다. 솔밭 사이 도로를 따라 들어서니 이 험하고 좁은 계곡에 이렇게 넓고 아담한 분지가 있어 절묘하게 터를 잡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주변 산세가 인도의 천축산과 비슷하다는 천축산 자락에 다소곳이 자리 잡은 비구니 수행도량이 정겹고 아름답게 보였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면서 서편 산 능선의 부처상이 연못에 비친 모습에 신기해 하기도 하고 범상치 않은 神靈스런 느낌에 한동안 조용히 바라 보면서 내 마음에 부처를 담아 보기도 했다. 대웅보전에서 부처 님에게 기도하고는 해도 기울어 가고 갈 길도 바빠 우리는 서둘러 돌아 나와 越松亭으로 향했다.
우리는 안내 표지를 따라 평해 해안가 송림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있는 안내판을 보니 관동 팔경의 하나로 중국 越(월) 나라에서 소나무를 갖다 심었다고 越松亭이라고 하고 또 신라시대 화랑이 심신을 단련하며 달밤에 놀았다 하여 月松亭이라 부른 적도 있다는 설명에 조금은 疑訝(의아)해 했다. 또 고려시대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이 정자에 올라 빼어난 경관을 시로 욾고 글을 쓰면서 풍광을 즐겼다고도 했다. 그런데 나는 이곳에 올 때까지는 이 정자가 동해를 멀리 내려다 보는 명승지에 자리잡고, 또 휘영청 밝은 달 아래 쭉쭉 곧게 뻗은 빼어나게 경관이 좋은 송림 가운데서 절개 곧고 지조 높은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기도 하고 인생과 철학을 논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국충정을 토로했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명소로서의 이미지를 갖는 月松亭으로 생각하고 갔는데 越 나라 소나무와 연관 있다 해서 越松亭이라고 하니 좀 어색하고 머쓱하기도 했다. 또 위치한 곳이 절벽이나 높은 언덕 위에서 멀리 동해 바다와 주위를 내려다 보는 사방이 탁 트인 절경을 기대했는데 나지막한 언덕에다 송림에 싸여 있는 모습은 내 기대와는 조금 달라 땅거미가 지는 저녁 황혼의 서글픔과 맞물려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우리는 정자 2층으로 올라가 소나무 사이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동해 바다를 바라보면서 학덕이 고매한 선비나 재치 넘치는 閑良(한량)이라도 되는 듯 폼을 잡아 보기도 해봤지만 선인들이 남겨 놓은 흔적을 둘러 보니 흘러간 지난 세월 속 人間世事의 희로애락이 주마등 같이 머리를 스쳐가기도 하고 이 명소를 스쳐간 사람들의 흥에 겨웠던 시절도 덧없는 세월에 묻혀 한바탕 꿈이었구나 싶고 그들의 애환이 마음을 무겁게 해 착잡한 심경으로 내려왔다. 우리는 어둠이 서서히 내려 깔리는 바다 물을 말없이 바라보다가는 보드라운 고운 모래 사장을 잠시 걸어 본 후 오늘 밤 잠자리를 찾아 밤길을 달려 백암 온천으로 들어 갔다. 그곳은 창에 맞은 노루를 쫓던 사냥꾼이 발견했다는 전설과 함께 신라시대부터 백암사 승려가 온천 욕을 즐기기 시작했다는 유황천으로 수질이 좋고 수온도 40~52도로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좋다는 곳이었다. 우리는 고려온천 호텔에 자리를 잡고 넓고 따끈한 온천탕에서 오늘 하루의 피곤했던 심신을 모두 씻고는 막걸리 한 사발에 산채 비빔밥으로 늦은 저녁식사를 배불리 하고는 즐거웠던 하루를 마감했다. 자리에 누우니 오늘 하루 지나온 일들이 주마등 같이 스쳐갔다.
이튿날 아침 일찍 채비를 하고는 우리는 영양으로 가는 구실령(九珠領이란 표석이 있으나
우리는 영양읍내로 들어와 오른쪽으로 일월산 방향으로 올라갔다. 조금 올라가자 나지막한 산 자락에 잘 정돈 관리된 전통 한옥 가옥의 기왓장들이 가지런하고 담장이 반듯하게 뻗은 운치 있게 자리잡은 한옥마을이 보였다. 첫눈에도 예사마을이 아님이 흥미와 기대를 부추기기라도 하는 듯 했다. 그런데 이색적인 서양식 교회 건물이 한옥과 함께 한 풍광이 내 눈에는 설게 보였지만 무슨 사연이 있는지도 궁금했다. 또 나는 무엇이 어떤 문화적, 정신적 환경이 이 마을에서 그렇게 훌륭하고 유명한 많은 인물들을 자라게 했는가가 몹시 궁금했는데 실지로 보고 듣고 배우고 깨닫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되어 궁금증을 풀어줄 것 같아 흥미롭기까지 했다. 마을로 들어서면서 지금은 단풍이 들어 잎이 떨어져버려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된 주실 숲의 진면목을 감상하고 미적 감흥을 느끼기에는 좀 안타까운 늦가을이어서 못내 아쉬웠다.
우리는 지훈 문학관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918번 도로를 따라 봉화 쪽으로 차를 몰았다. 외진 곳 지방도로지만 잘 관리되고 노면도 좋아 편하게 달려 얼마 전에 뚫은 것 같은 턴널도 지나 淸凉山으로 들어갔다. 20 여 년 만에 와보니 많이 변했다. 주차장도 넓고 전에는 본당인 유리보전과 산신각 등 초라할 정도로 규모가 작았는데 그 동안 큰 불사를 일으켜 많은 건물과 시설이 들어선 걸 보니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헷갈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사찰이 번창해지면 우리 마음도 넉넉하고 편해야 하는데…… . 이 곳은 신라 때부터 대학자 김생과
紹修書院(소수서원)은 풍기 군수 주세붕이 고려 시대 유학자인 회헌 安珦(안향)선생을 제사하고 후학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세조의 집현전 폐지와 연산군에 의한 성균관의 황폐화로 관학이 쇠퇴하자 우리나라 선현을 모시고 祭享과 講學으로 사림의 사상과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사교육기관이 이를 대신하는 시대적 배경으로 탄생 했다고 한다. 그래서 관학과는 달리 출세주의나 功利主義가 아닌 학문의 자율성이 존중되어 浩然之氣를 기르고 인격도야에 중심을 둔 민족교육기관으로 유교적인 덕목과 이념을 갖춘 인재양성의 산실이 되었다고 한다. 한 시대의 획을 긋는 의미 있는 곳이라 입구부터 범상치 않구나 싶게 쭉쭉 곧게 뻗은 學者樹 적송림 속 길을 따라 들어가니 그 옆을 흐르는 맑은 죽계수와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다는 취한대와 경자바위의 예사롭지 않은 운치와 분위기에다 숙수사지 당간지주가 남아 있는 유불의 문화와 사상이 교차되었던 역사의 현장이라 생각하니 숙연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志道門을 지나 서원 경내로 들어서니 바로 講學堂(강학당)에서 조선 사회의 사상과 이념의 근본인 유학을 학습하고 인격도야에 매진하던 선비들의 글 읽는 목소리가 낭랑하게 들여오는 듯 했다. 조용히 숨을 죽이며 발길을 옮겨 오른 쪽 뒤로 돌아 독서를 통한 즐거움을 느낀다는 至樂齋, 성현을 따라 학문의 길을 가는 學求齋, 그 왼쪽 옆으로 날마다 새롭게 임한다는 日新齋와 깨어있는 마음을 곧게 한다는 直方齋를 지나 藏書閣까지 둘러 보았다. 걸으면서 그 옛날 선비들이 드나들던 문지방이나 축담의 디딤돌에서 오랜 세월에 닳고 달은 자국을 보니 이곳에서 야망과 열정으로 꿈 많은 내일을 그려보던 유생들의 인간적인 哀歡과 학문적 성취의 즐거움이 배여 있는 것 같아 萬感이 교차하기도 했다. 그 서쪽에 있는 文成公廟는 문이 닫혀 있어 그 뒤에 있는 영정각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설명서나 안내문을 자세히 읽고 더 많은 관심과 이해를 가질 시간적 여유가 없어 안타깝지만 건성으로 지나가며 경내를 돌아 나왔으나 다음 기회엔 좀 더 우리 문화의 자취를 곰 씹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음 목적지 浮石寺로 향했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 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신라 화엄도량으로 삼았다고 한다. 입구의 연못 분수는 철이 지났는지 이미 멎었고 늦가을 해질녘이라 파장 같은 스산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급히 사찰로 오르는 길로 들어서자 길 옆 사과 밭엔 빨간 사과가 무게를 못이기는 듯 조랑조랑 가지가 축 늘어지게 매달려 바라보기만 해도 상큼하면서도 달고 달게 침이 돌게 하는 맛이 연상되어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으니 말이다. 샛노란 은행나무 단풍 길 속을 걸어 올라 太白山 浮石寺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들어서자 僧과 俗의 갈림 길을 넘어 온 것 같았다. 게다가 땅에 깔린 노란 은행잎과 울긋불긋 단풍나무의 아름다운 풍치는 이곳이 극락으로 오르는 길이구나 싶을 만큼 절경이었고 “정말로 극락 가는 길도 이럴까?” 싶었다. 계속 걸어 천왕문을 지나 백 팔 계단을 오르며 번뇌와 망상을 잊고 극락세계로 간다는 안양문을 들어서면서도 머리는 텅 비고 마음은 온통 욕심 덩어리로 뭉친 것 같았다. 안양루를 지나니 통일 신라 시대 전형적인 석등으로 비례와 조화가 잘 일우어져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풍긴다고 하는 국보17호 석등과 마주했다. 그리고는 부석사의 중심 건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오래된 목조건물인 국보 제 18호인 無量壽殿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순간 아무 생각 없이 와! 정말 아름답고 날렵하고 운치 있는 건물이구나 싶었다. 처마 끝이 중앙보다 더 튀어 나오게 하는 안허리곡 기법, 기둥 위쪽을 안으로 쏠리게 하고 건물 귀 부분을 높게 하여 끝 부분이 아래로 처져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막아 주는 귀솟음 기법, 기둥 머리가 굵어 뵈는 착시 현상을 막아주는 배흘림 기법 등 요즈음도 잘 하기 힘든 기술로 참으로 아름답게 지었구나 싶었다. 양쪽 끝 추녀가 길고 하늘로 솟았으니 산뜻하게 나르는 듯한 우리 건축미의 표본이구나 싶었고 뒤편을 에워싼 고목 단풍 숲과 어우러진 풍광은 정말 멋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우리는 해도 저물어 갈 길이 바빠 오래 머무를 수 없어 가까이 다가가 極樂淨土를 상징한다는 아미타여래 불상 앞에 합장 기도하고는 왼쪽으로 돌아갔다. 그 곳에서 이 절의 유래가 되는 浮石과 義湘을 도왔다는 선묘낭자의 전설적인 헌신적 사랑이야기에 잠시 마음이 훈훈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애틋한 그 사연이 마음에 걸려 멀리 서쪽 하늘을 멍하니 바라 보니 막 사라지기 전 불타는 석양은 마지막을 장식하는 듯 아름답지만 뭔가 아쉬움이 남는 것이 꼭 우리 마음을 알아 주는 것 같았다. 선묘당 앞을 지나 내려 오면서 이 사찰에 있는 많은 국보와 보물을 이번에도 다 못 보고 감상도 못 하겠지만 다음 기회는 이 아쉬움을 남기지 말자고 다짐을 하면서 일주문을 나와 속세로 돌아왔다.
우리는 그 길로 풍기 읍으로 나와 지도에 나와 있는 풍기온천호텔로 찾아 갔다. 숙박 보다는 대중 온천탕 같은 곳이라 한바탕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다시 읍내로 들어가 모텔에 숙소를 정하고 유명하다는 풍기인삼돼지갈비 집을 찾아 갔다. 가는 길에 또 한번 웃지 못할 실수를 하면서 다시 찾아간 그 곳은 엉터리의 표본 같은 음식점이었다. 이렇게 풍기의 숙식은 우리를 실망시켰으니 씁쓸한 기분으로 하루 밤을 지내고 아침 일찍 죽령고개로 향했다. 멀리서 바라본 단풍은 참 좋았다. 고개 왼편의 도솔봉 중턱까지는 아침 햇살을 받아 울긋불긋 산뜻하고 노랗게 선명하고 빼어난 절경이다. 오른쪽 연화봉 자락도 그늘과 양지에 따라 선명도는 달라도 역시 천하절경이다. 어제 저녁 우리에게 불편했던 풍기읍 사람들 보다는 이 아침의 이 좋은 풍광을 보러 왔으니 모두 歡呼雀躍하며 눈이 즐거워졌고, 희방 폭포를 지나 희방사에 잠깐 들러 계곡의 물소리와 산사의 아침 염불소리로 귀마저 시원하게 하고 나니 반 신선은 된 기분이었다. 약간 고조된 기분으로 올라와 죽령 고개마루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바라보는 탁 트인 경치는 더 더욱 좋았다. 차량도 거의 없어 한가롭게 꼬불꼬불 고개 길을 내려가자 여기 저기 산비탈 고냉지 사과 밭에 발갛게 익은 사과가 산기슭을 불게 물들일 정도로 대단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이제 사과는 밤낮 일교차가 심한 곳이라야 제 맛을 낸다”는 말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는 고개 길을 다 내려와 안내 표지 판을 보고 잠시 대강 쪽으로 예정에 없던 단양 팔경의 하나인 舍人巖을 보러 갔다. 조금 들어 가자 개천 변에 수직암벽이 하늘 높이 서 있었다. 마치 여러 가지 색의 무늬로 짠 듯한 독특한 색깔과 모양을 한 거대한 비단을 걸어 놓은 듯한 모양의 垂直壁(수직벽)이라 특이하면서도, 개천과 위 쪽 송림과 어우러진 풍경이 아주 아름답고 참 좋았다. “이런 곳도 있었나?” 할 만큼 보기 드문 위엄과 절묘한 경관을 이루고 있어 와 보기를 잘 했구나 싶었다. 생성 과정과 원인 등 지구 과학적인 궁금증이 발동했으나 별 다른 설명도 찾을 수 없어 예정된 일정에 따라 다음 목적지 수안보 彌勒寺址(미륵사지)로 향해 갈 길을 재촉했다.
충주 호반의 아기자기한 풍치와 월악산을 끼고 도는 아름다운 단풍으로 장식한 드라이브 길을 달려 덕주사와 송계계곡을 지나 미륵사지에 도착했다. 나는 이 곳 미륵사지에 올 때 마다 늘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하고 애잔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황량하게 느껴지는 폐허 같은 절터의 분위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고, 아마도 미륵의 도래를 바라는 애절한 민중의 고달픈 삶이 聯想(연상)되기도 하고, 난세에 간절한 염원을 담은 마의태자가 덕주사에 있는 누이 덕주공주를 위해서 이 절을 세워, 그 받아 들이기 힘든 망국의 한을 미륵의 도래로 풀어지기를 바라는 애틋한 심정에 연민의 정을 느끼기 때문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또 이 절을 누가 세웠는지는 분명한 기록이 없어 설사 다른 누가 창건했더라도 그 심경과 소원은 별로 다를 바 없었을 것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었으니 마의태자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본래 彌勒信仰(미륵신앙)은 도솔천 에 있던 미륵이 석가모니 入滅 후 56억 여 년이 지난 후 세상에 태어나서 풍요롭고 평화로운 지상천국인 龍華世界(용화세계)에 3회에 걸쳐 설법하여 중생을 제도한다고 해서, 중생들은 이런 미륵의 도래를 앞당기기 위하여 일정한 공덕을 쌓으며 간절히 염원하는 것이라고 한다. 난세를 겪을수록 민초들은 미륵의 도래를 간절히 바랬고, 이런 현세에 미륵불을 구하던 미륵신앙은 민중반란이나 새 왕조를 개창하는 혁명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신라 말 궁예가 미륵을 자처하며 나라를 세웠다가 폭정으로 망했던 것은 중생의 이런 간절한 소망을 악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우리는 절터로 들어 가면서 縱軸(종축)왼편에 있는 비신은 사라지고 그 하단만 남은 거북 돌을 보면서 올라갔다. 몇 차례 발굴 작업에도 찾지 못했다는 그 비석이 있었더라면 그 들의 심경과 삶의 편린을 주웠을 수도 있을 텐데 아쉽기만 하구나. 그 위쪽 종축선 상에 있는 5층 석탑, 석등, 그리고 맨 위에 보살 입상을 보고 올라가면서 무슨 깊은 의미가 있을 텐데 우리는 아직도 못 깨닫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북향 일직선 상에 놓여 있어 석등 창 사이로 보살상의 묘하고 의미심장한 표정이 보이는 것도 참 신기했고 유난히 얼굴 부분이 희고 마모가 안된 것도 참으로 괴이했다. (안내판에 보완설치 내용 없음) 또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그 일직선 상에서 북향으로 바라 보면 덕주사 쪽과 월악산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봉우리들이 아주 잘 보였다. 그 많은 수수께끼 같은 의문은 우리를 더 궁금하게 했지만 오늘도 혼탁한 세상을 보면서 이곳에 왔거나 어디에 있거나 중생들은 공덕을 쌓으며 미륵의 도래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는 것 만은 이제나 그 때나 분명한 것 같았다. 우리는 한 바퀴 돌아 나와 그 옆에 있는 경상도와 충청도 사이 하늘재를 넘나들던 사람들의 옛날 驛과 숙소인 미륵대원터로 가봤다. 그곳은 고려시대 驛院制度의 정비에 따라 설립되었다가 조선시대 關防施設(관방시설)을 조령에 설치하자 기능을 상실하면서 쇠퇴해졌다고 한다. 우리는 가지런히 남아있는 주춧돌에서 역사의 가르침과 세월의 무서움을 동시에 보면서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우리는 3일 간 참으로 많은 명승지와 역사적 유적지를 돌아 보았다. 처음 떠날 때 생각 보다 아주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즐기고 배웠다. 참 좋은 여행이었고 삶의 질을 풍성하게 해 준 것 같았다. 단풍이 아름다운 풍광도 좋았지만 옛 사람들의 사상과 문화, 사회와 종교, 이념에 따른 다양한 역사적 유적에서 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가를 짚어 보는 옛 사람들의 향기를 느껴보는 참 좋은 기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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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천 여행기 부럽습니다. 그런데 사이 사이 사진이 끼어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