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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조 전달>
'嘉泉'처럼 도전하는 그녀, 가천대 총장 이길여
"들일 한창이던 여름이었어. 새참을 광주리에 정성스레 담아 머리에 이고 나갔지.
근디 광주리를 내려놓으니 밥하고 반찬은 온데간데 없고
누런 놋숟가락만
가득하지 뭐여. 워메 이게 뭔 조화여. 내 얼마나 기가 차고 놀랐는지 아냐?"
그해 전북 옥구군 대야면 죽산리 이서방네 정미소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아들 없는 설움을 오늘에야 갚으랴 싶었다. 태몽(胎夢)마저 그럴 듯했다.
이번엔 고추가
틀림없으렷다. 그런 집안 공기가 아이 태어난 순간 썰렁해졌다.
"뭔 벼슬했다고 처 자빠져 있능겨!" 시어머니가 둘째딸 낳고 누운 며느리에게 외쳤다.
이길여(李吉女) 가천대총장이 처음들은 세상소리는 이랬다.
어머니는 가여운
젖먹이에게 맹세했다. "오냐, 어느 아들 못지않게 키우고 말 것이여!"
모정(母情)은 기적을 낳는 모양이다. 어린 길여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백점 아닌 성적표를 가져온 적이 없었다.
어른 반대 무릅쓰고 호남명문 6년제 이리여고에 보내니
내리 전교 1등도
모자라 서울대 의대에 떡 하니 합격한 것이다.
처음 세운 24평 병원이 지금 인천·양평·철원에서 몇만평으로 뻗어갔다.
세계적인 연구소를 1000억씩 들여 세우더니 인수한 4개 대학을 하나로 묶어
전국 10대
사학(私學)으로 키우겠다며 하루종일 지도를 들고 희망을 디자인하고 있다.
제 손으로 받은 아이 몇십만, 그의 병원에서 새 삶을 찾은 이가 100만명이 넘고
그가 만든 일터에서 밥 먹는 이가 무려 5000명이다.
놋숟가락 수북한 태몽을 현실로 만들기까지
그가 쓴
폭풍연대기(暴風年代記)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나는 공주다!
"공부든
일이든 목표를 이루려면 하루 4시간 이상 자면 안 됩니다.
나머지 시간엔 최대한 집중하고 몰입해야죠.
자기만의 목표를 설정해야 하는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목표를 다 이룬 다음에는 또 뭘 할 것인가, 그게
인생입니다."
―총장을 '여자 정주영(鄭周永)'이라 비유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퀴리부인처럼 노벨상 타겠다고 다짐한 적은 있어요.
그분과 견주긴 그렇고…, '바람개비'같은 삶이라고
할까."
―바람개비라뇨.
"바람개비는 바람이 거셀수록 더 빨리 돌잖아요.
전
절대 내리막길을 걷지 않을 거예요. 계속 도전할 겁니다, 쓰러질
때까지."
―저서를 보면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남다릅니다.
"그 시절 여자는 초등학교만 보내도 감지덕지했지요.
고교 진학 때 모두 반대했는데 어머니가 어른들과 사생결단을 냈어요.
집에서 학교가 있는 이리(裡里)행 기차가 하루 딱 두 번인데 연착을 밥 먹듯 했어요.
오후 5시 반에 하교해 밤 12시쯤 집에 돌아올 때도 있었으니까요.
그때마다 전 소나무 위에서 공부했어요.
남들 수다 떨 때. 그리했으니 월반(越班)도 한 거고요.
중요한 건 꿈꾸는 것, 도전하는
겁니다."
그녀의 따뜻한
청진기
청진기 따뜻이 데워서 환자들 가슴에 댔습니다
그러자 24평짜리 병원,
인천·양평·철원으로…
그녀에게
나이는 없다
나이 밝히는 것 싫어요 인생은 얼마 살았냐보다
뭘 하느냐가 중요하니까… 전 달릴 거예요,
끝까지
―그건 무슨 소린가요.
"제가 6학년(지금의 고3) 때 6·25가 터졌어요.
경기여고, 이화여고생들이 피란 왔습니다.
제가 전교 1등이란 소릴 들었는지 아이들이 묻더군요.
'어느 대학 가 무슨 전공할 거야.' 전 거침없이 말했어요.
'서울의대 가서 의사 될 거야.' 아이들뿐 아니라
함께 피란 온 서울학교 선생님들이 피식 웃었어요.
그걸 보고 오기가 솟았습니다. '오냐 두고 봐라, 내가 가나 못
가나'라고요."
―'오냐 두고 봐라'라며 이를 가는 게 모녀의
버릇 같습니다.
"그게 바로 꿈이고
도전입니다."
―총장이 제일 싫어하는 질문이 두 가지라더군요.
하나가 신문에 나이 쓰는 거라는데.
"저 아직 처녀잖아요. 그런데 왜 그리들 나이 밝히는 걸
좋아하는지.
나이가 뭐 중요해요?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영어에도 '하우 올드 아 유(How old are you?· 너 몇살이니)'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그거 한국식 영어예요. 미국에선 거의 안 써요.
이번에도 쓰지 마세요."
―얘기 나온 김에 또 싫어한다는
질문하겠습니다.
여지껏 결혼 안 한 게 딸이라고 구박한 아버지
때문입니까.
"아버진 한량(閑良)이었어요. 맨날 밖으로 돌고 아들
낳겠다고 첩도 뒀고요.
세 살 위 언니(이귀례·규방다례 무형문화재)는
아버지가 좋다던데 전 재미있는 기억이 없어요.
그렇다고 아버질 싫어한 건 아니에요.
대학생 때 미팅도 꽤 했고 절 선망하는 남자도 많았대요.
전 잊고 있었는데 친구들이
그러더군요."
―미국 유학시절 청혼을 받기도
했죠.
"링컨컨티넨탈 몰 정도의 재력에 얼굴 하얀 미남이었어요.
저보다 두살 위였는데 어느 날 새벽 2시쯤
제 기숙사 근처 벤치에서 청혼하더니 무릎을 베고 눕는 거예요.
이상한 게, 조금 전까지 함께 춤추던 사람 얼굴이
플라타너스 잎에 비친 달빛 때문인지 시체(屍體)처럼 보였어요.
어떻게 그 좋던 남자가 이리 보일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나…, 그날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결혼 안 할 팔자(八字)라는 게 있는
모양입니다.
"TV에서 성악가 조수미를 본 적이 있어요.
나이 오십 다되도록 결혼 안 한 걸 자랑스레 얘기하더군요.
'어, 저 아이 나 어릴 때랑 똑같네'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병원에도 그런 여의사가 있어요.
왜 결혼 안 하느냐고 물으니
'선생님, 전 마음먹으면 내일이라도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더군요.
조수미나 그 의사나 다 공주과(科)인데 난 '원조 공주(公主)'거든.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공주한테
무슨 남자가 필요해요, 전부들
날 사랑하는데."
―주변에 남자만 있는 걸 보면 공주가 맞는 것
같습니다.
여비서는 한명뿐이고 외출하면 보통 4~5명의 남자들이 병풍처럼
호위하잖아요.
"어? 그런가. 나 남녀차별 안
하는데."
◇따뜻한 청진기
"내가
인터뷰 꽤 많이 했는데 기자들 표현력이 모자란 거 같아요.
저랑 18년 동안 일한 간호부장이 있어요.
독일에 갔다가 광부(鑛夫)랑 결혼한 인데, 그러더군요.
'선생님 의사할 때를 쓴 부분들이 꼭 버선 위를 긁는 것
같다'고요."
―언제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나요.
"소녀적 길에서 개나 고양이가 피 흘리는 걸 보면
그렇게 불쌍했어요.
그때마다 데려와 치료해줬어요.
우리 시절엔 아프면 무당이 됫박에 쌀 넣고
흰 광목으로 싸 살살 문질러줬는데 나도 그 흉내 많이
냈지요."
―그건 장난
같은데.
"몇 가지 사연이 있어요. 어릴 적 친한 친구 순이가
장질부사로 사망했는데
아이들은 애장이란 걸 합니다.
그애 아버지가 광목에 둘둘만 시체를 지게에 지고 가는 게 어찌나 슬프던지.
제 아버지도 서른넷에 폐렴으로 돌아가셨는데 지
금 생각해보면 신종 플루같은 거였어요.
갑자기 고열이 나더니 닷새 만에….
그런 일들을 겪으며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을 굳혔어요.
초등학교 때 교의(敎醫) 이영춘 박사님에게 받은 영향도
있었고요."
―부친의 사망이 중 2때쯤인데 공부에 지장은
없었나요.
"정미소하며 꽤 넓은 땅에 농사까지 지었으니
부농(富農)이었지요.
저 공부시키느라 판 전답이 꽤
됩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한창 전쟁
중이었습니다.
"공부다운 공부를 할 수 없는 분위기였어요.
필사적으로 유학을 떠나려 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전쟁은 제게 큰 빚을 남겼어요.
또래 남자들이 그때 거의 의용군으로 나갔습니다.
나가면 곧 죽는 시대잖아요. 전 여자라 피했지만
그 빚을 꼭 갚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애국(愛國)을 강조하는 건 그런
이윱니다."
―졸업하고 바로
개원(開院)했습니까.
"1년간 군산도립병원에서 무료봉사했어요.
거기서 만난 퀘이커 의료봉사단의 골든이란 영국인 의사를 잊을 수 없어요.
입과 코에서 피고름이 흐르던 환자가 왔는데
석션(Suction·흡입관)을 못 찾자 입으로 빨아내는 겁니다.
'진정한 봉사'가 뭔지를 처음 본거지요.
그 후 적십자병원에서 수련의로 있다가 친구 따라 인천에 가 개업한
거죠."
―그게 지금 길병원의 원조가 된
자성(慈聖)병원이죠.
"그 친구가 병원을 차렸는데 진짜 목표는
빨리 시집가는 거였어요.
6개월 만에 결혼해 결국 저 혼자 하게
됐지요."
―어떻게 했기에 환자가 물밀듯 밀려든
겁니까.
"정성을 다하는 것, 환자를 사랑하는 것 외에 뭐가
있겠어요.
전에는 마취하면 죽었다 살아나는 걸로 알았잖아요.
전 사시나무처럼 떠는 환자를 껴안고 토닥이면서
'연애할 때 생각하라' '지금 남편 말고 숨겨둔 애인 없냐'고 흰소리를 했어요.
그럼 긴장이 확 풀리잖아요."
―환자가 진료 기다리는 시간만큼 짜증 날 때가 없습니다.
"전 계단을 세 개씩 뛰어다녔어요. 항상 온수(溫水)로 손을 덥히고
장갑, 청진기도 따뜻하게 해놓았죠.
전 가천의대 학생들에게 졸업선물로 꼭 청진기를 줍니다.
제가 그걸 따뜻하게 만들어 썼듯 아이들도
그러라고요."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치료한 일화도
유명합니다.
"눈보라 치는 겨울었는데 병원 안이 굉장히
춥더라고요.
살펴보니 한 환자가 문을 열고 몸을 반쯤 안으로 들여놓은 거예요.
진료 못 받을까 봐 그랬다는 소리 듣고 시간을 줄여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오기는 나의
힘
딸 낳고 구박당한 어머니 "오냐, 두고봐라 아들보다 더 잘 키울거여"
1등 놓친 적이 없는 딸, 서울의대 꿈 조롱받자 "오냐,
가나 못가나 봐라"
의술은 나의 길
섬에 배 타고 왕진 갔더니 한 젊은 여인 애 낳다가 남편도 없이 저 세상으로…
붉은
노을 보며 다짐했죠 "평생 병원 한번 못 가보는 가난한 이에 仁術 펼치자"
돈은 나의 길, 아니다
재벌 되려고 했으면 영종도
평당 10원 할 때 섬 전체를 샀을 겁니다
정치권 유혹도 많았지만 교육·의료 외엔 관심 없어…
내 꿈은 세계적 인재 키워 愛國하는
것, 그것입니다
―그게 바퀴와
무슨?
"예전 여자들이 옷을 많이 입었잖아요. 그거 벗으려면 한참
걸려요.
전 침대를 세 개 놓고 저쪽 옷 벗을 동안 이쪽보고
옷 다 벗으면 의자를 바퀴로 쑥 밀고 다음 환자 보는 식으로 시간을
줄였습니다."
―그렇게 일하면서 체력은 어떻게
유지했습니까.
"제 산부인과의 미역국이 유명한데 다 제 언니
작품입니다.
퇴원한 환자 남편이 주전자 들고 많이 왔는데 정작 전 맛볼 시간이 없었어요.
언니가 미군부대에서 나온 전지분유에 계란 노른자 하나 올려
링거 줄 꽂은 컵을 줬는데 그걸 마실 시간도
부족했어요."
첫댓글 이길녀 총장님 관한 글
감명깊게 .정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